경주 최 부자집 가훈
경주 교동의 최 부자로 이름난 최 씨 가문은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 씨 종가인 최 씨 고택은 170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전형이었습니다. 워낙 넓어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고 부지 2천여 평에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으로 후원도 1만여 평이나 되었습니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냈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이었던 거부였습니다. 삼대부자라는 옛말이 무색한 이 기록은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집에 사는 노비만도 100여 명이 되었습니다. 최 씨 가문의 가주(家酒)인 법주(法酒)는 지금도 경주를 대표하는 술로 유명합니다.
최 부잣집에서는 대대로 부를 지켜 온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첫째, 과거시험을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즉 당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한 번 권력이나 높은 지위에 맛을 드리면 권력 다툼에 끼어들게 되고 오래 못가서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고 정치적으로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예 권세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을 가훈으로 정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실제로 최 씨는 만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작료를 낮추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주위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재산을 모으지 않기 위해 최 씨 집안의 땅이 많을수록 소작료를 낮추었습니다. 소작인들도 최 씨가 땅을 더 많이 모으는 데 불만이 없는 윈-윈 방식이었습니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 씨 집안이 과객 접대용으로 소비한 쌀이 한 해 일천 석이나 되었으며, 많을 때는 과객의 수가 일백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주인은 온갖 일을 하는 과객들과 접촉하며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여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과객 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했고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동학란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서 부잣집을 터는 활빈당이 최부자 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흉년에 땅을 판 이웃들이 원한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 여성들의 절약 정신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창고열쇠는 안방마님이 보관했습니다. 재산관리의 상당한 권한이 여자에게 있었습을 뜻합니다. 그만큼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했습니다.
여섯째, 사방 일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교동에서 사방 일백 리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 서로는 영천, 남으로는 울산, 북으로는 포항까지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이웃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만 석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작 수입 가운데 일천 석을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입니다.
최 씨 집안의 마지막 부자 최준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최 부잣집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재산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살았습니다. 고려대와 동아일보를 세운 호남의 거부 인촌 김성수도 일 년에 한 번은 최 씨 집에 들를 만큼 왕래가 빈번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와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최준은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했습니다. 인촌이 고려대를 세웠다면, 최준은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민족문화유산 보호에 관심이 많아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2대를 내려온 만석꾼의 재산은 대학 설립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경주 최 부자의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 둔차(鈍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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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충의당의 사당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대문과 행랑채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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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 (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愚山)'이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 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 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최 부잣집안채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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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 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교동법주 안채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자형이 국내 항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固軒)박상진 (朴尙鎭)이다. 그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대인 대한 광복회를 조직, 총사령관으로써 주권회복 및 광복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전개 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그의 휘하인 부사령에 있기도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박상진은 결국 3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3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교동 최 부잣집을 다녀온 며칠 후 이른 아침에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묘소는 경주 내남면에서 외동읍 사이를 잇는 도로를 약 2km 따라가다가 우측에 서 있는"울산청년회" 에서 세운 안내간판을 따라 농로와 산길을 500m쯤오르면 참나무와 소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있다.
박상진의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최 부잣집 구성원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과 인연이 된 사람들도 사회 지도층으로서 지켜나갈 도덕적,사회적 책임을 다 했음은 물론 구국의 영웅으로서의 역활도 높이 평가받고 추앙되어야 함에 인색함이 없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널리 알려진 최 부잣집의 금언(金言)을 되 뇌어 본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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