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란 명상이다.
나는 누구인가?
심성을 구명(究明)해 나를 만나고 자아(自我)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평범 속에 비범' 친구들 중에는 걷고 나면 시를 쓰는 심조 교장님 같은 벗도 있지만 소생은 문장으로 말한다.
어찌 시와 문장을 비교할 수 있으리~~
그건 집중력과 사유의 밀도와 질량이 차이 아니겠는가?
가히 격조가 다를 터이다.
그저께(금요일)는 행주대교에서 천호대교까지 강변남로 42Km를 걸었다.
오늘은 이어서 북한산 언저리를 걸었고.
'겨울 속에서 봄이 태어나'니 어쩐지 길바닥에서 바쁘다.
오늘 길이야 물론 40년 동안 매일 출퇴근하던 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옛친구들과 오랜만에 희희락낙락 걸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세검정에 백사실 마을을 지나쳤다.
일명 동천이라는 동네다. 임진왜난 때 백사 이항복이 정자 지어 놓고 술도 묵고 풍류하던 곳 아닌가.
그러나 어찌 백사가 부러우랴.
풍류객이 따로 없다. 요 며칠 생활은 길이 좀 멀다면 그야말로 와유강산(臥遊江山)이겠다.
어제는 옛 조선초에 한명회가 강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 지어놓고 놀던 강남에 현대 아파트를 지나쳤는데 오늘은 이렇게 동천을 지난다.
그것도 하동 촌놈이 어릴 때 '부산깍쟁이' 친구들과 함께~~~
동천(洞天)이란 말은 영어로 지상천국 즉,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인데, 원래 그 어원 유토피아는 '이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라는 뜻이다.
중국에 티벳 산 속에는 아직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하늘을 보지 않고 동굴에 사는 족속들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평생 그리 행복하단다.
지상 천국은 동천이지만 월궁항아(月宮姮娥)가 사는 하늘나라는 파라다이스(paradise) 아닌가?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역호아(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我)라.
친구들과 산을 타니 문자 그대로 지상천국이 따로 없다.
열한 명의 노인들이 경복궁역 ③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버스를 탔다. 그리고 효자동에 칠궁과 청와대 담을 지나 자하문 고개 마루에서 하차했다.
자하문에 자하(紫霞)라는 말은 어느 맑디 맑은 날 해질 무렵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저녁 붉은 노을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검정은 연산군이 궁녀들 거느리고 술 먹던 정자 아닌가.
원래 이 동네는 한양에 과수원 동네였다.
능금과 앵두와 자두가 유명했다.
대학 다니러 서울에 올라와서 보니 서울내기들은 주말이면 과일 따먹으러 다디던 동네다.
서울예고, 저 아래 골자기를 걸어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40년 풍상을 걸어다닌 곳 아닌가.
걷기를 좋아해서 출근길 퇴근길 가릴것 없이 지하철 경복궁역까지 그리 걸어다녔다.
가까이 삼청각 풍악 소리를 뒤로 하고 내려와 돼지 불백에 점심을 먹고 나서니 얼마 안가 명륜동에 회화역이다.
벗들은 뿔뿔이 지하철 구멍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뒤에 처진 우리는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낙원동에「먹고갈래 지고 갈래」요."
그곳에서 있었던 화기애매한 일은 친애하는 벗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 이상 오프더레코드로 해야겠다.
단지 거기서도 마냥 즐거웠다.
시작 동네도 낙원(樂園)이었고 끝난 동네도 낙원이었다.
죄송하게도 문장이 확 변하지만 걷기 이야기를 좀 하련다.
실은 그저께 스페인에 순례길을 도전하고픈 몇몇 나그네들 부탁으로 그들과 함께 한강변을 걸었는데, 그 후기입니다.
42Km, 하루에 100리 길이 누구집 애 이름인가?
완주에 10시간 30분이 걸렸다.
과연 먼 길을 거뜬히 걸어냈다.
이하의 이야기는 불초의 유럽 동서횡단기(10)「"절대로 걷지 마세요"」의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다.
푸른 여름 저녁에 오솔길 가리니
보리 향기에 취하여 풀을 밟으면
마음은 꿈꾸듯 발걸음 가볍고
맨 머리 바람에 시원하리라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슴엔 한없는 사랑만 안고서
멀리 멀리 방랑객처럼 나는 가리니
연인과 함께 가듯 자연 속을 기꺼이 가리라.
- 랭 보 - '감 각'
농담 하나를 했다.
세계최저출산국이 어느 나라지요?
정답은 한국이 아니다. 로마교황청, 바티칸 시티가 답이다. 국민은 다 신부님과 수녀님들 아닌가?.
문화인류학에서 보면 애초에 인류사회가 모계사회가 된 연유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하다.
사냥은 근육질 남성 몫이고, 여성은 야생 과일 나물 곡류 등 그날 그날 우선 당장 급한 가족의 먹거리를 해결하면서 여자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솥뚜껑 운전수가 왕이라는 현실적인 레토릭이겠다.
아울러 남성들의 새벽 이불속 텐트 역시 얄궂은 운명적 페이소스가 있을 때, 기약 없는 혹여 불귀의 사냥을 서둘러 떠나면서 종족보존의 의무를 다 하라는 엘레지였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총, 균, 쇠》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수렵 채집민의 어머니가 야영지를 옮길 때는 몇 가지 소지품과 함께 단 한 명의 아이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태어난 아이가 뒤처지지 않고 부족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걸음이 빨라질 때까지는 다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유랑 생활을 하는 수렵 채집민들은 수유기의 무월경, 금욕, 유아 살해, 낙태 등을 통하여 4년 정도의 터울을 유지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정주형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제대로 먹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 해서 농경 민족의 산아 간격은 약 2년으로, 수렵 채집민의 절반에 불과하다.'
허나 애초에 포유동물인 인간은 왜 두 발로 걷게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 산하엔 등산객이 많을까 보행자가 많을까?
걷기 붐이 과히 폭발적인지라 자기 신념에 따른다기보다 남 따라하기 좋아 하는 한국인 답게 각 지자체도 합세해서 저마다 길을 열고 너도 나도 염려(艶麗)한 우리 산천엔 등산객과 보행자로 넘쳐 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직립보행은 원시 인류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선택 한 것이라 한다.
즉 네 발로 걸어서 빠른 이동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유스러워 진 두 팔로 주위를 경계하거나 나무 막대기나 돌맹이 등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두 발로 걷는 직립 보행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보자(初步者)라는 말은 단순히 신참자 혹은 비기너란 말보다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초보자란 컴퓨터인터넷 용어사전에 따르면 나와 같은 컴퓨터 신출내기 즉 인터넷의 신참자를 말한다. 보통 러커(Lurker)족들을 가리키는 이 말은 미국 대학에서 2학년이 1학년 신입생을 'newbie(신출내기, 미숙자)'라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초보자의 원래 유래는 좀 더 다르다.
다른 동물 특히 사슴이나 말 등은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로 뛰기도 한다. 그러나 유독 인간은 그게 불가능해서 꼬박 열달이 지나야 겨우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돌배기가 가족들로부터 경탄과 축하까지 받는 첫 발자국, 그 '첫걸음'이 바로 초보자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인간의 발걸음은 여타 동물과는 달리 시작부터 긴 내공에서 비롯 된 행동철학이다.
우리나라에서 걷다가 뛰다가 하는 죠깅이라는 레저스포츠가 처음 소개 된 때는 197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때 죠깅을 좋아 하다가 얼마 후 바로 뛰기를 시작했다. 평지보다 주로 크로스컨트리를 했다. 물론 마라톤 완주도 예사였다. 우연히 주한 외국인 죠깅 클럽의 동호인 멤버가 되어서 그들과 함께 15년 이상을 뛴 셈이다. 해서 3~40대에는 크로스컨트리에 빠져서 수도권 일원에 산이라는 산은 다 뛰어서 넘었다.
내 잡기 이력서에서 그 또한 걷기 이상으로 독특한 기록이다.
그러다가 나이 50대에 들어서니 주변에서 무리하지 말라며 하도 말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걷기로 돌아서서 지금에 이르렀다.
걷기가 어떤 운동보다도 건강에 가장 좋다는 인식은 이젠 불문가지의 상식이다.
그러나 걷기란 사람의 오욕칠정 중에 그리움과 외로움의 자극에 따라 인간의 이동 본능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걷기란 낯선 발품을 팔아가면서 여러 고장의 신기한 풍정(風情)을 만나면서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사유의 심연을 천착(穿鑿)하면서 우리 자신의 내면 일주 즉 나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뿐만아니라 걷는 행위는 보행자의 복합적인 정서와 심리상태를 표출하는 몸짓이요, 무대 위에 무용가처럼 영혼의 몸짓으로 나의 내면 풍경을 묘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해서 걷기란 피지컬보다도 멘탈 건강에 더 이로운 스포츠다.
단언컨대 걷기는 다리 근육 보강 이전에 진리 탐구요 정신 수양인 것이다.
해서 근자에 호구지책이 일단 해결된 한국에서 웰빙이니 힐링이니 경향 각지에서 걷기 열풍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는 현상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터이다. 다만 수많은 걷기 동호인들이 무리를 지어 희희 낙낙 산천을 걷는 일이 과연 걷기 철학의 본질에 얼마나 다가가는 일인지는 별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들에게 영육간에 안식과 영혼의 자유를 찾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역시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겠다.
우선 강호유람 고수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주명리학자인 조용헌 선생은 길과 걷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길과 걷기에서 Walking, 즉 걷다의 도보에서 보(步)라는 글자는 지(止)와 소( 少)의 조합이다.
걷기는 그러니까 '멈춘다'와 '젊어진다'라는 뜻이다. 뭠춰야 젊어진다는 말이다. 멈출 줄 알게 되면 족함을 알고, 분수를 알게 된다.
걷기는 인생의 실수를 줄일 수 있는 행위이며 종교의례다운 성스러움에 다가서는 길이다.
걷기는 삼지(三 知)를 깨닫는 상태 즉 도(道)를 깨닫을 상태이다.
첫째, 지족(知足)은 족함을 아는 것이다.
둘째 지분(知分)은 자기 분수를 알고, 셋째 지지(知止)는 그칠 줄 아는 것이다.
이 삼지는 도를 깨닫는 지( 知)의 세 단계에 이르는 길이다.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 애써서 아는 곤지(困知)의 단계가 그것이다.'
하여 대개의 보행자들이 걷기의 동반자를 찾는 일은 과연 어떤 공과가 있을까?
특히 스페인의 순례길인 까미노를 걷는 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던져버리러 가는 길이다.
그러나 동반자가 있다면 그게 가능할까?
그를 위해서 정으로 사랑으로 우리는 상대에 집착을 갖게 마련인 터에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상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우리 영혼은 갇혀 살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닌 터에....
플라톤은 〈국가〉에서 '파이돈'으로 다음과 같은 철학을 갈파했다.
이것이 바로 중세 유럽의 기독교 순례자들이 신앙 이전에 육체적 고행으로 순례를 떠난 원초적 이유다.
실은 서양에선 기독교 훨씬 이전에 Walking이 있었다.
마치 동양에서 하안거 동안거로 참선을 통해서 진리를 갈파하듯 서양은 걷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육체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온갖 욕구와 탐욕으로 순수한 영혼의 참된 인식작용을 방해한다. 참된 인식이란 사유(Thinking)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사유는 고통이나 쾌락이 정신을 괴롭히지 않을 때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지고지선의 '이테아'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가능한 멀리 해야 한다.
육체의 쇠사슬에서 영혼이 해탈되어야 참된 정화(淨化)가 이루어 진다.'
먼길을 혼자 걷는 것은 자아(自我)를 계몽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계몽이란 말은 서양 근세에 들어와서 계몽사상(철학)도 있었지만 그 뜻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계몽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를 발견하는 행위이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사춘기 상태에서 성인으로 성숙되는 상태가 계몽인 것이다.
먼 길을 걸으면 누구나 그리 되어지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습관적으로 먼 길을 걷는 사람들'은 옛날 소요학파,Peripatetics에 그리스 철학자들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산천을 떠도는 이들이 있었다.
풍수지리 연마 중인 지관(地官)이거나 수행 중의 행려승이다.
R. L. 스티븐슨은 〈당나귀와 함께한 세벤 산맥 여행〉에서,
'나는 갈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서 여행한다. 여행하기 위해서 여행한다. 이동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라 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말했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 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걷기란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라 했다.
그리고 니체는 말했다.
'나는 손만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발도 항상 한 목하고 싶어 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연금술사〉에서 충고한다.
'떠나라!
그리고 고향의 아가씨들이 가장 예쁘며 고향 산천의 풍치가 가장 아름다우며 그대의 집 안방이 가장 따뜻하다 는 것을 배우게 되면, 그 때 돌아오라!'
다비드 르 부르통도〈걷기예찬〉에서 순례길을 이렇게 정의했다.
'순례길은 자기 집과 자기 마을이 제공하는 안전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신이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헤아릴 길이 없는 신의뜻을 믿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살고자 하므로, 그 대가로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을 믿고 가는 길이다'
그런가 하면 죤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걷기는 여행인지 기도인지 순례자의 인신 공양이다.
한편 옛날 중국 선비들의 만년의 꿈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였다.
책 만 권을 읽으면 만리 길을 여행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일만 권의 책을 읽고 일만리 길을 가보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지l난 겨울에 그 한파를 무릅쓰고 걷기를 계속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음은 세계일보 김신성 기자의 보도 내용이다.
「쌀쌀한 겨울 날씨에 몸과 마음이 위축되는 시기다. 하지만 춥다고 무작정 실내에만 있다 보면 피로가 쌓이고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 등 각종 질환에 걸리기 쉬우므로 겨울철에도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겨울철 운동으로는 부상 위험이 적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파워워킹이 제격이다.
기온이 낮으면 관절과 근육이 경직되기 때문에 달리기 등 과격한 운동은 자칫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걷기운동도 잘못된 방법으로 걸으면 오히려 퇴행성관절염을 부추기는 등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건강한 파워워킹을 위해서는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깨를 뒤로 해 가슴을 펴고 아랫배와 엉덩이에 힘을 준다. 시선은 15m 정도 앞을 보고 턱을 몸쪽으로 가볍게 당겨준다. 걸을 때 팔은 자연스럽게 흔들고 발은 진행하는 방향의 중앙에서 양발 엄지발가락과 뒤꿈치 안쪽이 스칠 정도로 옮겨 ‘11자 걸음’을 유지하도록 한다.
팔자걸음은 다리가 바깥쪽을 향하게 해 고관절과 바깥쪽 무릎관절에 무리를 주어 퇴행성관절염을 유발시킬 수 있다. 반대로 발을 안쪽으로 10∼15도 정도 모아 걷는 안짱걸음도 문제다. 안짱다리는 선천적인 원인도 있지만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를 자주 하거나 좌식생활을 많이 하는 경우 나타나기 쉽다. 안짱걸음으로 걸으면 무릎 안쪽 연골에 무리를 줘 무릎 통증의 원인이 되며 아킬레스건을 위축시켜 하지에 피로를 가중시킨다. 안짱걸음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걷는 노력이 필요하다.
추운 날씨에 운동할 때는 준비운동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겨울엔 근육과 관절이 경직되고 땅도 다른 계절보다 딱딱하기 때문에 부상 위험이 높아진다. 따라서 평소보다 1.5배 이상 준비운동을 오래 해서 굳어진 근육과 관절을 풀어줘야 한다..........」
위에 '감각'에서 프랑스의 천재 시인이며 원조 나그네였던 아르튀르 랭보의 별명은 '바람구두'였다.
그의 친구이자 동성애 애인인 P.베를렌이 지어준 이름이다.
천하의 방랑객이었던 그는 커피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아비시니아 지방의 하라르, Harar라는 곳에서 홍해를 오가는 커피와 무기 수출상을 하다가, 조국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돌아와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후 생을 마쳤다.
'한갓 보행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를' 꿈꾸었던 그가, 그의 시편들만 보고서는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견딜 수 없이 많이 걸어다닌 끝에 한쪽 다리를 잃고 만 것이다.
사람이 땀을 흘려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란 없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라 하지 않던가.
해서 죤 포카치 같은 사람은 말했다.
'지금까지 자기가 흘린 땀에 빠져 죽은 사람은 단한 명도 없다'
땀을 흘리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사람이 같은 자세를 반복하는 움직임 중에 가장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동작은 바로 걷는 것이다.
그러니 쾌적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도 나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꿈은 머리로 꾸고 그 실현은 대개 발품으로 몸으로 한다. 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을 끊임없이 다가가게 하는 추진력의 뿌리는 우리의 가슴 안에 있다.
꿈은 머리에서 온 생각의 산물이고 그 성취는 가슴에서 온 집념과 노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달에 일곱 번째로 다녀온 챨스 데이크는 기자회견에서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을 다녀왔군요?"
"아닙니다, 가장 먼 여행이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
한편 걷기는 참으로 편한 운동이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걷는 자는 시간의 부자다.
시간에 무심하면 공간에도 무심해 진다' 라 했다. 걸을 시간이 있는 만큼만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별도의 복장도 필요 없다.
「달리는 시간보다 1.5배에서 2배 더 오래 걸으면 운동 효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활을 감안한 가장 적합한 건강 교본(敎本)은 걷기라는 것이 하버드대의 의견이기도 하다. 하루 10분씩 세 번 걸으면 30분 효과에 버금간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 모여 누적 효과를 내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미러 뉴론(mirror neuron·거울신경계)'이라는 것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는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따라서 한다. 술자리에서 옆 사람이 맥주잔을 들면 나도 모르게 잔을 들게 되는 배경이다. 당신이 걸으면 자녀도 걷고, 배우자도 걷는다. 심지어 애완견도 걷는다. 걷고, 시간이 나면 뛰어라. 당신의 신발이 유전자보다 당신의 수명을 결정하는 더 강력한 지표다.」
걷기를 논하면서 어찌 발과 신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있을까?
우선 우리의 발은 신체와의 사이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전달하면서 몸의 하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발의 구조는 뼈가 52개에 그중 매우 중요한 것만 26개에 관절이 60개에 중요한 것이 33개이고, 근육 또한 38개에 중요 근육이 20개에 인대 100여 개로 구성되어 있다. 족저근은 이를 돕는 발바닥 근육이다.
경험 없이 새 신발을 신고 먼 길을 걷는 보행자의 질병은 주로 이 족저근에 염증이 생기거나 발에 생기는 물집 같은 질병이다. 1Km 보행에 족저근에 가해지는 힘은 16톤이나 되고 나이 60세까지 256만 톤에 항공모함 25척 무게만큼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달리기는 달리기 족저근에 가해지는 힘은 체중의 1.3~2.9 배에 이른다. 그러니 보행자에게 있어서 발과 다리의 관리는 각별해야 함은 물론이다.
환갑 기념 국토종단 때 내 주치의 고교 동창 정형외과의 김수길 박사는 다리 사진을 찍어보고는 하는 말이 '당신 다리는 특수한 구조다. 마치 걷기 위해서 태어난 다리 같다'고 했다.
암튼 이력서의 이(履)는 신발 질질 끄는 소리, 예리성의 그 이자이다.
이때 발바닥과 지면 사이를 뗘받치는 신발이 매우 중요한데, 발이 제2의 심장인 이상 신발은 충격 흡수와 운동성이 좋아야 하고 발에 적절한 압력을 주어야 전신에 혈액 순환이 원활해진다.
보행자에게 신발은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그러나 새 신발로 먼 길을 나서서는 안된다. 어떤 이는 신발에 깔창도 넣고 별 궁리를 다 하지만 일단 발이 신발에 익숙해져야지만 큰 고생을 면한다. 해서 걷기를 즐기는 이들, 특히 먼 길을 나서는 보행자는 신발에다가 가장 많은 투자를 해야함은 당연지사다.
그게 중(中)등산화에 비브람창으로 된 신발이다.
무거운 배낭에 보름 이상을 매일 걷는 보행자의 신발은 트레킹화가 아니라, 무게가 약간 있어야 하고 밑창은 길바닥의 돌, 자갈과 요철상태를 흡수하는 딱딱한 비브람 창이 제격이다. 참고로 나는 독일제 로바,Lowa 브랜드를 애용하고 있다.
로바 신발은 환갑기념 국토종단 때, 우리나라 산의 기인이라는 기인은 다 모이는 동대문 '청산 산방'에「다나산업」의, 내 존경하는 벗 우석훈 회장이 세계 최고 브랜드라며 종단 축하 겸 응원 차 준 신발로 인연이 되었다. 벌써 일만 킬로미터 이상을 걷고 퇴역시킨 로바가 세 켤레 째다.
어쨋거나 신발은 떠도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와 걸어다니는 자 페이리토스의 모든 것이다
걷기 복장 이야기도 좀 해보자.
그런데 스페인의 까미노를 걸으면서 서양인들로 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한국인은 멀리서 봐도 금방 눈에 뜨인다는 이야기였다.
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한결 같은 복장, 아웃도어 코디 때문이다.
'하나같이 긴 바지에 넓다란 모자 창에 한여름에 장갑까지 끼고 다니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호기심으로 부러움인 줄 알았는데 듣다보니 찬사는 고사하고 까칠한 흉보기였다. 이를테면 몰 개성에 상당히 촌스럽다는 이야기다.
다소 딴 길로 빠지지만 최근에 한국은 아웃도어 비지니스는 3대 미스터리가 있다고 한다.
'나이 안 따지고, 날씨 안 가리고, 불황에도 안 꺾기는 한국은 가히 아웃도어 천국으로 미스터리 시장이다' 라는 평판이다.
하지만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자!
나그네의 옷은 일단 보호색 개념인 게다.
외진 길에서 낮선 사람의 눈에 띄이는 복장은 자기 방어와는 먼 이야기다. 독특한 복장은 나를 숨기기보다 '여기 다소 화려한 내가 가고 있소!'라는 선언 같은 효과에 이를 것이다.
까미노에서 한국인 중에 간혹 신변안전을 염려하는 분들이 있지 않은가?
해서 지나는 길초에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복장과 행동에 주목하고 아울러 그들을 존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옷차림이 친근해 보이면 여행자는 처음부터 유리한 입지에 선 것이고 어느 정도 신변 보호도 따를 수 있다.
부디 모두들 알아두자!
'여행자의 겉모습은 말하지 않는 대화의 일부이다.'
하지만 반론도 있겠다.
나라마다 고유한 풍성(風聲)과 습벽(習癖)이 있는 바 차림새를 꼭 문제 삼아야 할까?
하기야
'남이 보면 우습고 내가 보면 대견한 차림새'로 집을 나서는 나그네가, 애써 한껏 멋을 부려보는 그 흥분도 십분 이해해야겠지만....
그러나 걷기는 복장만큼 걸음걸이 자세 또한 일종의 패션이란 걸 잊지 말자.
스페인에 까미노에서 벨로라도를 지나서 비야프랑카 몬떼스 데 오카로 들어서는 날, 순례자 셋이 홤금빛 찬란한 보리밭 넘어로 내 앞 500미터 전방에 걸어가는데 그들의 하체는 안 보이고 허리춤 이상의 배낭과 모자만 보이는 데, 느릿느릿 가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홤금 물결 바다 위에 조각배가 고요히 떠 가는 모습이었다. 그날따라 비야프랑카의 황혼에 까미노 풍광과 오버랩되면서 한없이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멋지게 걷자!
하면 어떤 자세로 걸어야 멋 있어 보일까?
자연 스러운 게 가장 이름다운 것이다.
예술이란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자연을 닮으려고 하는 치열한 노력 아니겠는가.
불세출의 마에스트로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예술'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우미와 전아함의 표상인 예술가, 서른일곱에 요절한 라파엘의 로마 판테온의 무덤에도, 당시 그의 친구인 추기경 벰포가 지어 준 묘비명도 예술과 자연을 강조한다.
여기는 라파엘로의 무덤이니
생전에 그는 그의 어머니인 자연을
혹시 그에게 정복되지나 않을까 하여
무서워 떨게 만들었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자연 또한 죽을까 두러워하노라.
무기의 무(武)자는 용사가 창을 겨누고 돌격하는 자세를 나타낸 것처럼 걷기의 보(步)자 또한 사람이 양팔을 적당히 흔들면서 활발하게 걷고 있는 자세를 나타내지 않는가.
'봄은 항상 겨울 속에서 태어난다.'는 이때에 즈음하여, 고작 동네 뒷동산엘 가면서도 히말라야 정복자처럼 아웃도어 복장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보행자여!
내멋에 이른바 파워워킹인가?
병원에서 단위 시간에 신체 특정 부위를 측정할 때 쓰는 자세로,
로마 병정인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양팔을 머리위까지 피스톤 운동처럼 힘껏 흔들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한강 나들길을 활기차게 걷는 순진파 보행자여!
부디 그대의 발걸음도 달빛 호수에 조각배 떠가듯이 산들바람에 물결인듯 리드미컬 자연스럽게 걷자!
첫댓글 '당신 다리는 특수한 구조다. 마치 걷기 위해서 태어난 다리 같다'고 한 김수길 박사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게 걷지는 마세요. 재미있는 글 잘 앍었습니가,
대단한 의지와 기가 넘친 수필 장문입니다.
북악산 둘래길에서 같이 산행하면서 주자의 10장부가에 나오는 줄호고대 기상을 견지한 해탈 도사님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속편 수필을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