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올리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 그냥 표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필하십시오.
(이 글은 좀 더 보강될지도 모르니 아직 퍼가지는 마시라. 오자 탈자도 봐서 꼬리글에 달아 주시라)
경남 도지사님께 건의 (남해 양아리 고각본 비밀 해독)
수신1 : 경남도지사. 수신2 : 남해군수 경유 : 경남도청, 남해군청 문화재 담당관. 제목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고각본 해독과 문화재 및 민족성지(관광지) 지정 건의서 발신 : 구 길 수 서울 원효3가 171-6 (017-327-5665)
바쁜 도정, 군정에 수고 하시는 경남 도지사님 및 남해 군수님 그리고 문화재 담당 관계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 머리말 저는 전부터 고문자 연구를 하던 자로 우리 역사서나 역사적으로도 아직까지 해독 하지 못했던 경상남도 기념물 제 6 호 양아리(역사서에는 낭하리) 고각본(古刻本)의 비밀을 수차의 답사 끝에 해독하고 그 부근 환웅상 바위, 또 그 위 단군성전 뒤의 성모상(웅녀상)과 현 보리암 아래 쌍홍문을 연결하는 도로를 잘 정비하여 사각점을 만들고 국가지정 문화재 및 우리 민족의 성지로 만들며 아울러 보리암과 천연기념물이 될 노송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잔잔한 상주해수욕장까지 포함하는 관광 명소로 개발해 주실 것을 건의 하는 바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집트 등에서는 4 천년 이상 된 피라밋등 인류의 문화유산이 있으나 우리 민족, 우리 한반도에는 삼국을 넘어가는 문화유산이 강화도 마니산의 돌무더기 몇 개 빼고는 없습니다만, 그것도 후세인이 보강한 것이며, 또 혹 울산 반구대 선인들의 그림 유적이 있다하나 이는 단순한 그림 유적이지 인류 문명을 전환시키는 어떤 문화유산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란 노래를 부르고 또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한 증거는 실증할 수 없는 몇 몇 역사서 뿐입니다. 양아리 석각 본은 최소한 4 ~ 천 년 전의 우리 하느님과 그 아드님 환웅과 웅녀의 만남과 그분들이 만나서 아드님인 밝달임금(단군)을 낳고 우리 첫 국가와 민족이 세워지는 과정이 새겨져 있어 이것이 당시는 물론 후세인에게도 알리는 일종의 타임캡슐임이 그 해독결과 나타납니다.
특히 이 석각본 속에는 그림이 글자로 발달하는 과정과 또 우리의 개천절을 환상적 하늘의 편지로 밝히고 있으므로 이는 우리 국보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보고하여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영구 보전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고각 본을 연구하러 일본, 중국인까지 온다 하는데 만약 우리 역사를 아는 외국 학자가 있어 그들이 이 석각본의 비밀을 우리 보다 먼저 밝혀 낸다면 우리는 참으로 후세에 부끄러운 일이니 이 글을 이 분야 학자들의 검정을 거쳐 하루빨리 우리 문화재는 물론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도 등록해야 할 것을 건의 합니다. 이 글은 될 수있는 한 짧게 쓰려 했으나 제 3 자가 이해가 되려면 초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래도 미심적은 면이 있으면 저의 카페에 들어와 게시판중 한겨레산하에서 남해 양아리 석각본 2차 탐사기(석각본과 정확히 맞았다) 1,2 를 보시면 확실하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이 글은 이미 저의 카페 10 만 독자에게는 전해졌으나 귀 도청, 군청 홈피에는 장문이라 올라가지도 않고 사진 등이 깨져 별도로 인쇄 하여 각각 우송합니다.
글 순서 1.머리말 2.하느님의 역사 3.환웅이란? (가) 씨름의 뜻. 4.웅녀란? (가) 환웅과 웅녀의 환상적 궁합 5. 단군이란? (가) 천부인으로 만든 우리말과 글자 6. 현재 금산의 원 이름은 성모 산이었다. 7. 낭하리 라는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8.양아리 고각본 해독 (가) 양아리 고각본 그림과 사진 (나)고각 본을 아직까지 해독 할 수 없었던 이유. (다) 고각 본을 찾아가는 고각본 속의 지도 (라 )고각본속의 환웅 그림과 환웅이 웅녀를 찾아가는 환웅상 바위들 사진 (마)쌍홍문 그림과 현지 사진 (바)개천절을 알리는 환상적 하늘의 편지 (사) 고각본의 트레이드마크인 천지인 9.맺는 말
2. 하느님의 역사 이 석각본의 비밀을 풀려면 우선 우리 역사부터 밝혀야 한다. 지금 우리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지금으로 부터 대략 5~6 천년 전 신석기 문명이 끝이 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될 무렵 지금 밝할호수(바이칼호) 부근에는 북방계 몽골리언 일족이 살고 있었다는 유물이 나오고 그들과 우리가 유전학상 88.5 % 가 맞아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들의 유전자를 직통으로 받은 그 지방 부라이트족 나나이족 울치족과의 유전자가 100% 같지 않은 것은 환숫(환웅)과 같이 온 3 천의 무리가 지나인들이 남만(南蠻) 이라고 부르는 중국 남부 곰네(웅녀)족과 혼혈이 되어 밝달임금(檀君)을 낳고 우리 민족을 세웠기 때문인 것도 유전학상 밝혀졌다.
그들은 환한 빛을 숭상하여 환한 부족, 즉 환족(桓族) 이라 했는데 이 환족의 지도자가 바로 환한님 이이었고 이 환한님은 화나님 >하나님, 또는 하느님 이 되었으며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속에 있고 이것은 또한 환님 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자의 기록으로는 환인(桓因)이 된다. 우리가 천손 민족이라 할 때의 하늘은 실은 하늘의 주인인 환한 해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해를 숭상 했었다는 말은 다음 사서를 인용한다. 환국본기-조대기에 말하되 옛 풍습은 빛을 숭상하여 해로서 神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으니 만방의 백성들이 믿고 의심치 않아 환나라(환한무리) 방식으로 조석으로 경배하였다. ( 桓國本紀 - 朝代紀曰古俗崇尙光明以日爲神以天爲組萬方之民信之不相疑朝夕敬拜以爲桓式 )
이 하느님은 그 정신세계가 하늘의 섭리와 같으니 神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 우리 하느님의 정신세계가 하늘의 섭리와 같은가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해독해 보면 알 수 있고 특히 그 속에 있는 홍익인간 정신은 흔히들 한자 뜻대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하여 교육법 제 1 조에 까지 쓰여 있지만 그 정도의 뜻만이 아니라 생물의 진화과정 까지 말하는, 즉 자연섭리인 신의 의지까지 말하니 신이 아닐 수 없다.(필자 카페 신지녹도전자 해독 참조) 또 인간이 神임을 말하면 예수나 부처와 같다. 즉 예수도 그 정신세계가 하늘과 같으니 神이라 하는 것과 같고 부처 역시 그 정신세계가 빛이니 大日光如來와 같은 분이다. 그러니 우리 하느님을 天神이라 해도 이는 결코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고대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어떤 유물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강력한 유물중의 하나는 바로 양아리 고각(古刻)이고 또 하나는 우리 뿌리말이니 이 고각과 뿌리말을 가지고 아래 양아리 고각본 해독 글을 쓴다. ( 자세한 우리 뿌리말의 설명은 필자의 졸저 ' 천부경과 천부인의 비밀'에 )
3.환웅(桓雄)이란? 양아리 고각본의 주인공은 환웅(桓雄)과 웅녀(熊女)인데 환웅의 우리말은 '환숫' 이다. 즉 환한 무리의 '숫' 이란 말인데 지금 우리 상식으로는 환웅이 수컷 이라면 매우 불경스러운 것 같지만 우리 어원에는 숫은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즉 이 '숫' 에서 숫응 >스승, 숫님 >슷님 >스님 등의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환숫(桓雄)이 서자(庶子) 라는 것은 첩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결혼풍습이 생기기 전이니 본처고 첩이고 있지도 않았을 때 이다. 당시는 사람도 짐승처럼, 즉 사자나 고릴라등 동물들은 숫컷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근친상간을 막기 위해서 무리 밖으로 내어 쫓듯이 사람도 아들이 어느 정도 크면 사내들 마을로 보내 외적으로 부터 여자들 보호 등 훈련을 시키고 또 씨 놀음 연습도 하는데 이 사내들 마을을 '사내들 무리마을'이라 하였고 이는 한자로는 서자부(庶子部)라 했다. 그래서 환웅을 서자(庶子)라 하는 것이다. 당시 종족 번식 행위는 씨 놀음을 해서 이긴자가 그 강인한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게 했다. 이 씨놀음이 지금 씨름이 되었다.
차츰 인구가 늘자 용감한 환숫님은 영토를 넓히려고 여러 군데를 답사하시다가 마치 짐승과 같은 곰족(雄女族)과 호족(虎族)이 사는 앗선(고조선) 개국지를 발견하고 여기에 새 나라를 세우려고 환한님께 청한다. 이에 하느님은 쾌히 승낙하시며 새 나라를 세우는데 근간이 될 수 있는 천지인의 표상 원방각(圓方角-ㅇ ㅁ △ ) 보물 세 개를 내리시는데 이것이 바로 청동으로 만든 천부인(天符印) 이다. 환숫은 이것으로 신하 신지를 시켜 후에 우리의 모자라는 말과 글자의 원형을 만드는데 그 기록은 유기에 신획으로 남아 있다. *.....유기(留記)에 이르되 신획(神劃)이 일찌기 태백산에 있는 푸른 바위의 벽에 있는데 그 모양이 ‘ㄱ’ 과 같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지선인이 전한 바 라하며 혹자는 ‘이것이 글자 만듦의 시초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의 형상이며 그 뜻은 관리, 통제 하에 형상대로 지었고, 그 형상과 그 소리 또한 자연의 뜻이 계산 된데서 나온 것이다." - (소도경전) (...留記云神劃曾在太白山靑岩之壁其形如 ㄱ世稱神誌仙人所傳也或者以是爲造字之始則其劃直一曲二之形其義有管制之象其形其聲又似出於計意然者也...蘇塗經典)
(가) 씨름의 뜻 이 석각본의 주체가 되는 환숫과 곰네의 만남과 당시 성생활을 알려면 우선 우리말 씨름의 어원 부터 알아야 한다. 씨름은 '씨놀음' 이 단축된 말이다. 그렇다면 '씨' 는 무엇인가? 지금 씨름은 황소 한 마리를 걸고 한다. 즉 이긴 자가 황소를 타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황소 놀음이지 씨놀음은 아니다. 따라서 씨놀음 이란 씨를 다투는 ...즉 씨를 누가 뿌릴 것인가를 경기화 한 것이고 여기서 이긴 사내의 강인한 유전자를 전승시킬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씨놀음의 승자는 후방위 교접을 했으며, 또 은밀히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판정관 앞에서 당당히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래 사진은 보스턴 박물관의 유물로써 고조선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이며 풀치마를 입은 왕 앞에 엎드린 겨집(원래는 겨집 이하 같음) 들과 그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사내들이다. 즉 후방위 교접을 하려는 것이다. 이 아래 사진 말고도 장터에서 씨름이 열린다는 금문으로 써진 광고판 글씨도 있다.
이외 우리 조상들은 신라 때까지만 해도 후방위 교접을 했다는 토우(土偶 )의 증거가 나온다. 신라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토우(土偶 경주 박물관 소장 )
즉 우리 선조들은 씨놀음이란 오직 생식을 위한 것이니 동물처럼 후방위 교섭을 했다는 것이 이들 유물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 씨놀음을 통하여 생식하는 것은 동물의 각축전 같이 기형아나 무지랭이 들의 씨는 전수 시키지 못하게 했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우리도 건강한 건 아닌지? 하여간 5.000 여년 전 선조들의 성생활에 대하여 현재 우리는 이조 500년의 타성에 젖은 현재의 예의와 도덕이라는 잣대로 비도덕적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같은 몽골 반점을 가진 티베트나 에스키모들은 현대 문명이 들어가기 얼마 전까지도 손님이 오면 자기 아내부터 내주었다. 즉 에스키모인들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백야가 6 개월 쯤 계속되기 때문에 심심한 사내는 옆 동네 자기네 친족, 친구네 어름움막(이글루)을 찾아간다. 그러면 손님을 맞이한 주인은 제일 먼저 대접하는 것이 자기 아내이고 이 손님이 만약 이것을 거절하면 자기를 무시했다며 큰 싸움이 벌어진다. 이때 이글루란 방 한간인 얼름 움막이므로 이 성교장면을 남편을 물론 아이들까지 모두 구경한다. 그리고 계집이 임신을 하여 태어난 아기는 같은 씨 이므로 그 애비를 따지지 않고 자기 자식으로 기른다. 이는 그들이 없는 풍속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도 그랬다는 말이고 이 말의 증거는 지금 우리도 부인네들이 자기 남편한테만 서방님이라 해야 할 것을 남편의 형제한테 큰 서방님, 작은 서방님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웅녀와 호녀가 환웅께 결혼해 줄 것을 바란 것이 아니라 아이 낳기만을 바랬다는 말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4. 웅녀란? 환웅은 3000명의 무리와 함께 고조선의 발상지인 중원 대륙에 내려와 당시 짐승과 같았던 토착민인 곰족을(虎 족 설명은 생략) 미국인이 인디언들을 몰살하고 나라를 세운 것 처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요즘 싸스와 같은 풍토병을 마늘과 쑥으로 말끔히 치료하고 사람의 道 를 가르친 다음 그들과 동화하여 단군을 낳고 우리 민족을 세운다. 이때 그들은 이 지독한 마늘과 쑥을 먹지 않으려 하므로 풍토병, 피부병으로 마치 짐승 같던 곰족 추장의 딸을 시범으로 굴 속에서 마늘과 쑥으로 말끔히 치료하여 아름다운 처녀가 되게 하니 그때서야 곰족들도 모두 마늘과 쑥을 먹고 풍토병이 치료되어 환웅과 같이 왔던 3 천명의 무리와 피를 섞어 우리 민족을 세웠으니 이는 하느님의 교훈인 홍익인간이 이 지상에 처음으로 펼쳐 진 위대한 사건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88 올림픽때 외치던 세계는 하나 즉 We are the world 가 되어 이 지구상 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길 이었다. 따라서 그 지독한 맛의 쑥과 마늘을 먹는 민족은 오직 우리 뿐이다.
(가) 환웅과 웅녀의 환상적 궁합 위에서 웅녀가 곰(熊)족 추장의 딸 이라 했지만 이는 곰을 토템으로 삼았을 망정 짐승인 곰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 환웅과 웅녀의 환상적 궁합을 우리 뿌릿말에서 찾아보자.
* 환숫(환=한) * 곰네 (곰) 한. 크다 곰 - 작다 (고마>꼬마, 작은댁. 고마첩妾(訓蒙字會), 곰방대 하늘, 감 - 땅, 토대 ( 신랑감, 장군감등) 희다 검 - 검다. 숫(男根) 솟았다. 굼 - 구무(女陰, 구멍, 굴)
그리고 웅녀인 감, 검, 곰, 굼은 원래가 한 뜻이었기에 상통하는 점이 있다. 감 - 검의 동일성 색깔 : 감둥이 - 검둥이 곰 - 굼의 동일성 형태 : 곰보. 곰 파다 - 굼 (구무. 女陰) 구멍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곰 할머니는 작고(곰) 검고(검) 여음(굼)인 땅족 이란 말인데 이상 어원으로 보면 곰족은 중국인들이 남만(南蠻)으로 부르는 지금 중국의 남쪽 마카오나 월남인 처럼 작고 검으시레한 종족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한민족의 혈관에는 월남등 동남 아세아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음도 유전학 상으로 밝혀졌다. 이것을 두고 후세 사가들은 환웅족을 천신족(天神族) 이라하며 웅녀족을 지신족(地神族)이라 한 것이다. 위와 같이 하늘족인 환숫족과 땅 족인 곰족이 피를 섞어 사람의 대표인 밝달임금을 낳았으니 이도 하늘과 땅과 사람(天地人)인 하느님의 선물 천부인(天符印, ㅇ ㅁ △) 이 지상에 실현된 것이다.
5. 단군이란? 단군(檀君)이란 말은 삼국 이후에 만들어 진 말이다. 즉 하늘의 환한 빛인 天神 환웅이 地神이며 땅인 곰네에게 내렸으니 땅은 밝은 땅이 되고 따라서 거기서 낳은 소생은 밝달임금이 된다. (天上之光謂之桓 地上之光謂之檀- 소도경전 본훈) 여기서 밝 이란 물론 밝은 지상의 빛을 말하고 달 이란 지금도 우리가 쓰는 양달 음달 하는 땅이니 밝달임금 은 밝은땅의 임금이다. 그러나 그후 우리 선비들은 원시한글을 다 죽여 놓고 애초 우리 조상이 당시 모자라는 말과 글자를 보충하려고 그림을 그려썼던 그림글자 금문(金文)을 아직 글자가 없었던 지나족(차이나족)들이 원시 우리글자보다 더 배우기나 이해하기가 쉬웠음으로 들여다가 자기네 말에 맞추어 은허 갑골문(甲骨文)을 거쳐 진시황때 대전 (大篆) 소전 (小篆)그리고 그 후 예서(隸書), 해서(楷書)를 거쳐 삼국초에나 지금 쓰는 한자로 그들 말에 맞게 정착 시키자 그 한자를 빌려 우리 말을 적자니 제대로 적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이두문 이라는 절름발이 문법을 만들어 적은 것이 바로 檀君 이다. 즉 밝달은 박달나무 檀자의 뜻을 따고 임금은 임금君자인 음을 따서 檀君이 된 것이다. 따라서 밝달임금은 단군이 어느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 밝달임금의 첫 도읍지는 아사달(阿斯達) 인데 여기서 아사 는 우리말 처음 을 뜻하는, 그래서 아시빨래, 아시갈이 하는 아시= 아사 이고 달은 음달 양달 하는 땅이니 아사달 이라 한 모양인데 우리 말은 붙여 발음하는 수가 많으므로 이사금(신라왕)을 임금이라 하고 사이길을 샛길 이라 말을 붙이듯이 아사달을 붙이면 앗달 이 된다. 또 나라 이름도 처음 도읍지인 아사달 처럼 처음 세운, 처음 선(立)이니 나라는 당연히 앗선(阿斯鮮) 이 되어야 하는데 朝鮮이란 하루의 처음도 아침이므로 朝를 쓴 모양이니 그 뜻을 취한 것은 이두문이고 鮮 역시 음을 취한 이두문이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첫 도읍지 阿斯達 처럼 첫 나라는 阿斯鮮 이라고 했으면 더 좋을 뻔 했다.
(가) 천부인으로 만든 우리말과 글자 아래 양아리 고각을 해독 하려면 우리 말과 글자의 생성 과정부터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선물 天地人의 대표가 바로 환숫, 곰네,밝달임금이니 하느님이 환숫께 주셨다는 천부인( 天符印)도 天地人이며 이 천부인 설명서인 천부경(天符經)은 하나 둘 셋 ...열 인데 이는 하느님이 우리 민족...아니 세계 전 인류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이 천부경은 밝달임금 전후만 하더라도 숫자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금문상 나타나며 그 후 이 하느님 경문을 자주 외우다보니 밝달임금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숫자로 쓰인다.( 필자 카페 하나 둘 셋...열은 숫자기 아니었다 - 필자카페 금문해독 참조) 여기서 천부경 이론은 생략하고 앞으로 고각본에서 글자를 해독 해야 할 천부인 이론만을 말하면 이 천부인 증표는 ㅇ ㅁ △(ㅅ) 으로 나타나며 이것으로 우리 원시 한글 신지신획과 기림토를 만들었고 이 글자가 수천 년간 죽었었으나 이것을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옛 글자를 모방하여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은 이 ㅇ ㅁ △(ㅅ) 이 다 들어있는데 ㅇ 에서는 ᅌ,ᅙ, 그리고 ㅎ 을 만들었지만 우리말에서 어느 글자가 되었든 첫 자음의 뜻은 하늘과 하늘처럼 원융무애한 말에만 씌여 지고 땅 천부인 ㅁ 과 ㅁ 을 분해하여 만들어진 ㄱㅋ ㄴㄷㅌ ㄹ ㅂ ㅍ 은 어느 글자를 쓰건 그 어근을 추적해보면 모두 땅에 관한 말들 뿐이며 다음 사람천부인 △ 로는 ㅅ ㅈ ㅊ 을 만들었는데 이는 어느 글자가 첫 마디에 들어가든 그 어근은 사람, 또는 사람처럼 서다 솟다 등에만 씌여 진다. 즉 순수한 우리말은 아무리 많은 것 같아야 그 어근은 하늘과 땅과 사람뿐이고 우리 한글 자음 ㄱㄴㄷ...ㅎ 은 그저 발음기호 노릇밖에 못하는 알파벳과는 달리 각자 그 뜻이 들어있고 그 어군에만 통하는 소리글 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헷갈리게는 눈(目)과 눈(雪)등10 여 가지 눈과, 또 하늘의 달과 음달 양달 하는 달등 10여가지 달의 뜻이 다 다른것 같지만(同音異意) 그 어근을 캐 보면 모두 같은 말 이었다(同音同意), 즉 ㄴ 속에는 눕는 뜻이 있으니 사람의 눈은 서있는 코 와는 달리 누워 있으며 하늘에서 오는 눈은 비와는 달리 그대고 누어있고 ㄷ 은 음(陰)인 땅의 뜻이 있으니 하늘의 달은 해 에 비해 음이며 음달 양달 하는 땅인 달은 하늘에 비해 음이며... 이외 이 ㄱㄴㄷ...ㅎ 속의 뜻만 알면 왜 우리의 신체기관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와 그 외 천지만물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 지금 잘못된 맞춤법등으로 사생아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말을 바로 잡을 수 있고 따라서 희미한 상고사나 지금 해독하려는 양아리 석각본도 알 수 있다. (이 자세한 이론은 필자의 졸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에 상세히 적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
6. 현재 금산의 원 이름은 성모산 이었다. 현재 단군 성전이 있으며 보리암이 있고 그 아래 이 양아리 고각본이 있는 산 이름은 현재 단군성전에서 수도를 하시는 분들에 의하면 원래는 성모산 이었다 한다. 그 이유는 현재 단군성전 뒤에는 오래전부터 성모상이 있었고 우리 선조들은 그 성모님께 아기의 임신과 출산을 빌었다 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성모는 누구인가? 바로 웅녀(熊女) 할머니다. 따라서 성모산이나 성모상은 웅녀산, 웅녀상이 될것이다. 이 웅녀의 우리 말은 곰네 이며 삶신 할매다. 즉 三神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임신 시키고 태어나서 살게 하는, 즉 삶의 삶신할매다. 그러나 지금 이 산 이름이 금산(錦山)이 된 것은 이조를 세운 이성계가 어떤 굴에서 기도 하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는다고 서약했으나 막상 왕이 되니 그 넓은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어 그 대신 비단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 고친 것 이라한다.
환숫님과 밝달임금님은 모두 하느님께 천제를 올리고 정치도 하는 제정일체(祭政一切)를 하시었는데 그 뒤 사회가 복잡해지자 천제는 삼시랑(三侍郞)한테 맞겨 상시랑 들은 삼시랑당(서낭당)에서 하느님 환숫, 밝달임금을 모시고 그들의 도를 수행했으니 이 남해지방 삼시랑들은 당시로써는 땅 끝이고 또한 풍광이 뛰어난 이 산에 웅녀상을 세워 놓고 아기들 임신과 출산을 빌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 말에 삼시랭이가 아기를 점지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래전 장수만세 프로에서 전라도에서 올라오신 할머니가 있었다. 사회자- 할머니 자녀가 몇이나 되십니까? 할머니 - 아홉이지. 왜? 사회자 - 아이구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으셨던 모양이네요. 할머니 - 금슬은 무슨놈의 금슬? 삼시랭이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지.
따라서 곰네님을 삶신 할미로 모시던 삼시랑 들은 자연 곰네 할머니 대신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삼시랭이가 되었고 그들도 전통대로 아기 엉덩이의 푸른점을 이 삶신할미가 빨리 나가라고 때린 흔적이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삶신할매상 한테 기도드리러 다니던 당시 백성들은 그 아래 곰네를 찾아가는 듯한 바위를 환숫 바위라 했을 것이고 그곳 바위 옆 어떤 병풍처럼 세워진 바위에 당시 그림 글자를 새겨놓고 그 앞에서 천제를 지냈을 것인데 이 바위가 바로 현재 양아리 고각본 거북바위로 이다. 그러나 그간 5 천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 바위는 지진이나 지반 침하로 뒤로 넘어졌을 것 이라는 것이 양아리 석각본이 말해 준다. 그러나 삼국중엽 불교가 들어오자 전국의 삼시랑 당집에 모셨던 환웅(桓雄)의 雄 보다 부처가 더 크다는 뜻의 대웅전(大雄殿)을 만들고 삼시랑 당의 당집을 빼앗겼으며(소도졍전 본훈) 그래서 대웅전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특히 이조에 들어와서는 오직 그 원론적 이론부터 모순에 빠지는 중국의 성리학에 미처 왈리 왈기(曰理曰氣) 하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한테 먹혔으니 그 고구려 고총에서도 그림으로도 나타나는 조의선인(皁衣仙人)즉 검은 옷을 입고 환웅, 단군의 도를 수행하던 사람들의 조의 소리만 나와도 삭탈관직 당했다는 말이 연산군때 찬수관이었던 이맥의 소도경전 본훈에도 나온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우리 선비들은 우리 것은 멸시하고 오직 외국 것만 명품인줄 알았으니 위 환숫, 밝달임금을 뜻하던 화랭이가 지금은 화랭이 라면 천한 박수무당이 되었다.( 화랭이 - 男巫, 국어사전) 즉 환숫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족이 뭉쳤으니 이는 마치 송판의 결이 뭉친것을 옹이, 앙이 라 하는것 같이 옹이, 앙이가 되고 이 앙이 에 우리말에 흔히 붙는 접미사 이 가 붙으면 앵이가 되므로 환앵이는 화랑(花朗)도 되었으나 지금은 박수무당인 화랭이가 되어 천시를 받는다. 또 환숫의 숫의 상, 즉 환숫의 남근 음모는 우리와 달리 신성한 것이니 오색실 이나 천을 둘러 솟터(蘇塗)나 삼시랑 당인 서낭당 환숫상(남근상)에 둘렀던 것이며 그래서 지금 서낭 나무의 오색천이 되었으니 당시 삼시랑도 이 오색천의 갈기진 옷을, 우리와 사촌인 인디언 갈기진 옷 처럼 입었을 것이고 ( 몽굴 문화촌 무당춤 참조) 이것은 후에 거지들이 찢어진 옷을 입으니 거지 삼시랭이 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 거지 삼시랭이가 된 이 삼시랑들은 낯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환웅, 단군의 도를 하루 아침에 끊을 수도 없으니 그 아내나 며느리에게 전수 시킨 것이 바로 단골네> 당골레가 된 것이고 이 당골레는 1960년대까지 진도에서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즉 당시 사람들은 아이들 임신과 출산은 물론 아기가 어디가 좀 아프거나 자녀들 혼사, 하다못해 굴뚝 하나를 고치려 해도 이 단골네를 다녔고 그래서 지금 단골이란 말은 이 단군의 단골(檀骨) 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위 웅녀상을 삶신할미로 모시던 당골네들은 모두 삶신할미 대행이 되어 삼신할미가 되고 그 뒤로 이 삼신할미들은 계속 이 산을 웅녀산, 또는 성모산 이라고 신성시 했을 것인데 위에서 말했드시 이성계가 이름을 금산 이라 바꾼 것이다.
여기 단군성전 뒤에 있다는 성모상을 필자가 찾은 것은 필자가 우선 양아리 석각본을 해독해 보고 그 속에 그린 그림중 하나는 환웅이 곰네를 찾아가는 그림같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석각본 옆에 정말로 그림에 있는것과 같은 환웅 바위가 있었다.
양아리 석각그림 전체그림
수레에 탄 분이 환웅
위 그림을 증명하는 바위가 고각본 바로 옆에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 사진과 똑같은 또하나의 바위가 보리암 뒤에도 있었다.
보리암뒤 바위
그리고 그 바위들의 방향은 한군데로 집중 되어있고 그 만나는 꼭지점이 바로 지금 단군성전 이었기 때문에 단군 성전을 찾아가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단군성전 뒤에는 놀랍게도, 또는 예측했던 대로 성모상(웅녀상) 이 있었던 것이다.
이 성모상(웅녀상)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 돌은 그 부근에 있던 자연석을 오래 전 그 돌 보다 더 강한돌로 다듬고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보여졌다. 그렇다면 양아리 석각을 새긴 선조들은 석각본 옆 바위와 보리암 위 바위가 양쪽에서 어떤 점을 찾아 가는곳을 찾아 마침 그 부근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위 웅녀상을 만들고 그 바위들을 환웅께서 웅녀를 찾아가는 바위라 했을 것이며 그 웅녀상에게 아이들 임신과 출산을 빌었을 것이고 그 기도하러 다니시던 분들은 그 환웅상 바위옆에, 아직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림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 현재 양아리 석각본인데 당시는 이 거북바위가 지금처럼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병풍처럼 세워져 있었을 것이고 그 머리에 석각본을 새긴 다음 그 거북바위를 병풍삼아 개천절, 천제를 그 앞에서 지냈을 것으로 보는데 그 내용은 아래 석각본 해독 내용에 자세히 나온다.
그렇다면 보리암 뒤에 있는 환웅상 앞에도 뭔가 새겨져 있어야 말이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양아리 석각본 해독을 위하여 처음 금산을 찾았을때 먼저 가 본곳이 바로 보리암 앞 삼층석탑 있는곳 이었다.
왜 이곳을 먼저 갔느냐 하면 필자의 오래전 기억으로는 이 삼층 석탑 옆 너부적한 바위 위에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어떤 석각을 본 기억 때문인데 1차 답사인 작년(2007년)음 개천절때도 그 석각본은 찾을 수 없었고 금년 음 개천절에 도 역시 없었지만 그 이유는 알았다. 즉 거기서 오랬동안 안내를 하셨다는 朴在根옹(77세)과 전화 전화 통화내용에 의하면 그 석각본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탁본까지 있었는데 오래전 고려대 교수라는 분과 어떤 외국인이 와서 달래기에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석각본에 대해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사진찍던 사진사도 잘 알것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석각본이 없어진 이유는 보리암 측에서 위 관음상을 세우며 절하는 자리를 넓히다 보니 그 석각이 새겨진 바위도 덮어 버렸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 하다.
7. 낭하리 라는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이다. 그렇다면 왜 낭하리가 양아리로 됐을까? 이것을 몰라가지고는 양아리 석각본의 비밀을 풀 수 없다. 즉 한자로 보나 어음으로 보나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가 정립된 것은 삼국 초 이니 낭하리(郎河里) 그 전 이름은 우리말로는 뭐라고 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본다.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로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大田이 된 것이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阿峴洞 이 됬으며 필자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 것이며 市는 틀못에 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 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 곳에 市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 오기 전 분명 우리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고 이 앵 은 지금 우리말에서 송판등의 결이 뭉친것을 앙이, 옹이, 앵이라 하니 환숫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족이 뭉친것을 환앵이 > 앵이 가 되고 이 앵은 삼시랑(三侍郞)이 전수 받았으니 앵이는 자연 낭(郎)이가 되고 따라서 낭하리가 되는데 여기서 하는 물 河자이니 웅녀산 앞 바다가 물이기 때문이다. 이 낭하리가 지금 그 발음이 비슷한 양아리가 된것이다.
또 한편 단군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 산이 원래 성모산 이라 하는데 이 성모님이 우리에게는 웅녀산 일테니 웅녀 산 이라고 했을 것이고 이 삶신할미에게 양아리 석각본을 새겨 놓았던 선조들도 임신과 출산을 빌러 다니며 웅녀상이라 했을것인데 이 단군성전 자리 움막을 1985 년 당시 큰 돈인 2500 백만원으로 매입하여 지금 단군성전을 건립한 一門 선사(80세)에 의하면 지금 단군성전 옆에 아래 양아리 석각본이 있는곳과 통 하는 길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곳은 옛적부터 엄청 큰 능구렁이가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일문선사 자신도 보았다 하지만 단군성전을 짓자 자연 없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는 성모상 바로 앞에 근래에 세운 이순신 복장을 한 환숫님과 단군성전 때문이다. 좀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말이지만 현재 과학으로는 形以上 에 속하는 氣에 대하여 아직 밝히지 못하니 미신 같은 소리라 할지 모르나 꼭 氣라는것을 무시 할 수도 없다.
즉 지신인 웅녀는 여자의 대표이고 그래서 이곳은 여자 음부의 음기가 너무 강하니 환웅을 뜻하는, 환숫을 상징하는 업뱀, 즉 우리말에 아기가 보채면 " 어비온다. 울지마" 또는 " 어비야 만지지 마" 하는데 그 어비란 바로 에비, 아비와 같은 말이고 이 아비란 지아비(夫) 인데 농부(農夫) 어부(漁夫) 광부(鑛夫)등에도 夫 가 다 들어가므로 사실 일 할 수 있는 젊은 사내를 말하며( 장丁- 사내정 訓) 젊은 사내란 그 남근을 뜻한다. 따라서 " 어비야 만지지 마 " 는 아버지를 만지지 말란 말이 아니고 아버지 남근의 상징물이 어비뱀> 업뱀, 즉 작은 뱀이 아니라 거대한 업능구렁이 이다.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업뱀이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고 업뱀을 잘 보호 했는데 이는 결혼제도가 정착하기 전 업뱀 처럼 거대한 남근을 가진 사내가 그 집단에 들어오면 그 집단이 흥하고 나가면 망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지금 父인 아버지는 이 어비, 에비, 아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사내중의 대표가 천신인 환웅 이었고 솟터(蘇塗)에 모셨던 환웅상도 남근상 이었으며 또 서낭당 나무도 빛을 받아 땅인 여음에 전하는 남근이었으며 그래서 그 나무둥치에 오색천을 둘렀는데 이는 신성한 환웅의 음모(陰毛)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일연선사가 세운 환웅상이 세워지기 전에는 웅녀의 음기가 너무 강해 이 업뱀들이 달려 들었을 것이며, 그러던 것이 환웅의 동상이 세워지자 음기가 중화되었을 것이고 또 단군 성전이 세워짐으로써 이것이 정착 되었을 것이다. 즉 원자에는 양전자 음전자가있어 중성을 이루지만 중성자가 있어 이것을 안정시키어 원자를 유지하고 이 우주가 존재 하는데 만약 중성자가 없다면 백만 분의 일초 사이에 원자는 소멸하고 따라서 이 우주도 소멸한다. 그래서 양이며 아비인 환웅과 음이며 어미인 웅녀는 그 아들인 단군으로 그들 사이가 정착되며 이 단군이 중성자 역할을 하므로 웅녀상만 있을때의 음기가 사라져 업뱀들이 물러난 것이리라. 따라서 가정이란 반드시 아기가 있어야 가정이 안정되는것은 아닌지?
8.양아리 고각본 해독 (가) 양아리 고각본 그림과 사진 아래 그림은 흔히 인터넷 상에 뜨는 그림인데 맨 왼쪽 것이 양아리 고각이고 다음은 평양 법수교 아래 있다는 신지녹도전자로 써진 기천문(祈天文)이며 다음 것은 지금 중국 섬서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 조적서 비문으로 같은 신지녹도전자이고 맨 우측은 5~6 천 년 전 토기에 써진 원시 글자이며 그 아랫것은 갑골문이다,. 이들 글 내용의 해독은 필자카페 가림토, 금문, 갑골문,그리고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있다.
역시 인터넷에 뜨는 양아리 석각본
여기서 맨 좌측 아래 天자는 그 예리하게 파진 모양으로 보아 쇠 징인 쇠붙이가 생긴 후대인의 낙서가 분명 하므로 무시 한다.
우선 옛 기록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알아본다. * ...亦嘗聞南海道 郎河里 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夫烏蘇里以外巖壁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 非神誌氏之所作古字 ...太白逸史神市本記 ( 또한 소문을 듣건대,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 大辨說註曰 南海縣 郎河里 之溪谷巖上有神誌古刻 其文曰 桓雄出獵致祭三神 又曰 大始傳古只憑口舌久而 後乃形以爲畵 又復畵變而爲之字盖文字之原...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되어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아래 사진은 필자가 현지답사하여 역사서에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에 뜨는 사진대로 찍은 것인데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아직 해독이 되지 않았던 이유도 알았다.
즉 위 사진은 이 양아리 고각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대로 찍은 것인데 이 바위는 애초에는 병풍처럼 세워져 있었을 것이나 그간 5 천년 동안 지진이나 지반 침하로 옆으로 쓰러졌기 때문에 그 위에 새겨진 글자가 거꾸로 보인다.
(나)고각본을 아직까지 해독 할 수 없었던 이유.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그러니까 고각이 새겨진 바위를 병풍처럼 세워졌다 하고 그 고각을 보면 이 그림은 그 세워진 병풍바위 머리 부분이 되고 따라서 조상님들은 그 병풍 앞에서 개천절 날 천제를 지냈을 것이라 추리 할 수 있고 후세인이 이 개천절을 잊지 말라고 그림글자를 새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다) 고각본을 찾아가는 고각본 속의 지도 위 그림을 우측으로 부터 설명한다.
이 Y 자같은 것이 위아래 양쪽으로 붙어있는것은 일종의 지형이이며 또 천제를 지내던 제사터라 해도 좋고 이 고각본의 위치 표시와 또는 후세인들이 이 고각본을 찾아 가는 지도라고 해도 좋다. 즉 고각본 아래에는 지금 국도가 있으나 길이란 전연 없는 곳에 새로 내기도 하지만 보통은 전부터 있던 작은 길을 확장해서 만드는 수가 많으니 그렇다면 전에는 이 국도 자리에 작은 길이나마 있었을 것이고 이 고각본 올라가는 길은 능선에 있으니 그 입구는 지금과는 달리 약간 높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 길로 올라가는 길이 Y 형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올라가 고각본 입구에는 이 고각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과 위 곰네(웅녀) 상이 있는 길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데 그 표시인 또하나의 Y 자와 연결된 것이 위 그림일 것이다.
(라 )고각본속의 환웅 그림과 환웅이 웅녀를 찾아가는 환웅상 바위들 사진 이 그림은 전체적 그림에 비해서 수레를 탄 사람은 과장되게 크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인가? 또 위 곰네상을 생각한다면 곰네를 찾아가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이는 분명 환웅이다. 그런데 여기서 환웅의 수레를 미는 天자를 주목하자. 아무리 환웅이 위대하다 해도 하늘이 환웅의 수레나 밀고 있을까? 지금 한자 天자가 하늘이라는 것은 중국인들이 우리 그림 글자를 보고 잘못 만든 글자라는 것이 이 天자로 증명된다. 즉 우리 선조들은 사람이 네 활개를 펴고 있는 그림을 大자로 그려 놓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늘의 섭리를 따라야 하는데 제 맘대로 날뛰니 위에 ㅡ 을 붙여 날뛰지 못하게 제지했다. 즉 사람 머리가 ㅡ 로 변한 것은 하늘이 아니라 이는 하늘 천정이다. 즉 원시 조상 육안으로 보이던 아득한 하늘은 방안의 천정처럼 하늘에도 천정이 있을 것이고 그 천정 아래에 해 달 별 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은 함부로 날뛸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즉 하늘의 섭리가 머리위에 덮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려진 글자가 바로 天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문이란 지금 미 하버대 어느 박사나 중국 어느 금문학자도 금문을 제대로 해독 할 수 없다. 반듯이 우리 상식을 가지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우리 선조들이 만든 금문을 제대로 해독 할 수 있단 말이다. 따라서 위 글자 天은 하늘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다. 즉 일반 백성이 환웅의 수레를 밀고 곰네가 있는 곳을 찾아간다. 이는 절대 환웅이 사냥을 하는 그림이 아니다. 만약 사냥을 한다면 수레를 타고 할 것인가?
이 그림을 증명하는 바위가 바로 이 고각본 옆에 있다.
다음 환웅 그림 뒤에 있는 나무나 앞에 있는 나무가 모두 가지가 두개씩인데 이것도 신지녹도 전자나 쐐기문자의 어머니 수메르 우르 문자를 보더라도 이는 환웅나무 이다. 우리 조상이 만든 금문에서 나뭇가지가 두개가 아닌것은 절대 환웅을 뜻하지 않는다.( 자세한 설명은 필자 카페에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 우리와 동족인 수메르 우르문자의 나무들 (EBS 방영에서 촬영한것) 역시 가지가 꼭 두개씩인데 이도 환웅을 뜻하는 신단수 밑에서 천제를 드리는 그림이다. 이 역시 필자 카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 참조.
(마)쌍홍문 그림과 현지 사진 위 양아리 석각본 원 그림에서 맨 좌측 맨 위 그림이다.
우선 맨 위 휘어진 기둥이 있고 그 아래 口 간은 구멍이 있다. 이것을 현재 쌍홍문 사진과 비교해 보자.
위 양아리 석각본 같은 암벽이지만 이는 쌍홍문 뒤에서, 즉 보리암에서 쌍홍문을 향해 작년에찍은 사진으로 위 석각본 그림을 설명 하기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어 금년에 다시 온 것이다.
아래 사진은 쌍홍문 앞, 그러니까 쌍홍문으로 올라가는 방향에서 찍은 사진인데 여기서 나무 뒤 좌측에 있는 바위가 석각본 그림 좌측 바위인데 정말로 그 끝은 석각본 그림처럼 밑으로 휘어져 있고 다음 작은 구멍이 석각본 그림처럼 口 자이며 우측 나무뒤가 석각본 그림 우측 바위인데 그것도 꼭 석각본 그림처럼 생겼다.
그런데 다른것은 위 석각본 그림은 석주 사이가 좁은데 실제사진은 좀 넓다. 그러나 환웅상은 거대하게 그렸고 그 뒤 수레를 미는 天 자 백성은 너무 작게 그렸듯이 석각본을 그 요점만 따 추상화로 그리던 우리 조상은 석각본 그림도 그 요점만 그렸을 것이며 또 그때 사람들이 줄자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며 양쪽 암벽과 굴 구멍이 몇 미터인지 재 가며 그렸었겠는가? 그냥 적당히 페러디해서 그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필자도 적당히 페러디 하면 다음 그림이 된다.
그런데 가장큰 문제는 실제로는 굴 구멍이 아래 사진같이 두개란 말이다.. 꼭 괴물 같다. 그러나 석각본 그림은 구멍이 하나다.
그래서 다시 위로 와서 조사해 보니 그러면 그렇지 구멍 하나는 이래 사진같이 천정이 펑크가 났다.
그리고 아직도 천정에서 돌이 떨어져 바닥에 있다.
그리고 이번 탐사에는 필자 카페 회원들과 동행 했었는데 회원들을 시켜 이 근처에 틀림없이 여음 형상의 굴이 있을 테니 찾아 보라고 했었고 그들은 다음 사진을 찍어왔다.
천신인 환숫이 사내의 대표이니 남근도 거대하다면 웅녀는 지신이니 웅녀의 여음도 거대 할것이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다 여기서 나올만 하다.ㅎㅎ. 혹자는 이 사진이 너무 음난하다고 할지 모르니 먼저 말한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노자 도덕경 6 장의 말이다. 미물로부터 인간을 물론 어느 성자도 이 구멍에서 나오지 않은자가 없으니 그래서 노자는 이 구멍을 神 의 경지로 올려 놓은것이다. 그러니 만약 이구멍을 음난하다거나 또는 비천시 하는자가 있다면 이는 자신의 존재 조차도 부정하는 가증스런 자가 될것이다.
또 이 굴에도 업구렁이가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나 단군성전 건립으로 여음기가 가득찼던 웅녀산이 중화가 되니 업뱀이 보따리를 싸 도망갔을 수도 있다. ㅎㅎ
(바)개천절을 알리는 환상적 하늘의 편지 다음 가장 중요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다. 위 전체 그림중 위 암석문 아래에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초승달과 샛별이 늦가을 초사흘에 만나 랑데뷰 하는 장면이 바닷물에 비친 그림으로 하늘이 개천절을 알리는 환상적 편지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왜 초승달과 샛별이 바닷 물에 비친 그림이라 하는가? 1. 우선 바다 물결같은 ㅡ 들 사이에 초승달과 샛별을 뜻하는 점을 그린 모양인데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는 아직 철이 나오기 전이라면 동(구리) 징이나 또는 돌로 쪼아서 그렸을 것이니 물결이나 초승달, 또는 샛별 모양이 무척 무딜것이라는 것을 감안하자.
2. 바로 아래 사진이 물에비친 그림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래 사진은 야후에 올라있는 사진작가 허세욱(許世旭)씨가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돌아왔을 때의 시각이 오후 6시였다한다. 그때 서남쪽 하늘에 초승달이 뜬 것을 찍은 것이라 하는데 황금비율이 참 잘도 맞아 아름다운 사진이다. 이 초승달은 새색씨 눈섭처럼 가장 예뿌다 하며 지구인만이 볼 수 있다는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이 달 사진은 위 패인 부분이 좌측을 향하고 있는듯 하고 위 석각본 그림은 우측을 향하고 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위 달을 물에 비친 것같이 뒤집으면 아래 사진 같이 되어 석각본 그림 같아지므로 석각본 그림은 물에 비친 달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쌍홍문이나 그 아래에서 보아 늦가을 이 쌍홍문앞 수면에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면 그 날이 개천절 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쌍홍문 바로 아래가 바로 바다였다는 것은 김수로왕비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 석탑을 싣고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지금 김해 평야이니 전에는 남해안 일대 저지대가 모두 바다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상주해수욕장도 물론 바다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 성모산 바로 아래까지 바다였을 테니 지금 이 쌍홍문에서 보는 달 그림자는 상주해수욕장이 아니라 바로 아래 바다 였을 것이다.
4. 그러나 지금 상주해수욕장에서 사진을 찍는다 해도 위 그림같은 사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평지에서 수면을 찍으면 다음 사진같이 가로등 불빛도 길게 늘어진다.
5.지금 서울하늘에서 별이 보이지 않는것은 전등 불빛이 너무 밝기 때문인데 상주해수욕장 부근도 너무 불빛이 밝아 별 들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불빛 하나 없는 남해안 어디선가에서, 그것도 파도가 잔잔한 바다 위를 그 앞 산에서 찍어야 하는데 그런 장소가 과연 지금 있을까?
6. 다음 상주해슈욕장 일대가 물이 잔잔한 이유는 아래 사진과 같이 자연 방파제가 있기 때문이며 상주해수욕장이 물에 덮혔던, 그래서 쌍홍문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찼다 하더라도 이 자연 방파제는 암초 같이라도 남아 그 물을 잔잔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 석각본 그림같은 사진은 지금은 남해 어디에도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달력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때 그저 싹이 나면 봄이고 더우면 여름이며 낙엽이 지면 가을, 눈이 오면 겨울인 줄 알던 선조들이 하늘을 연 개천절을 하늘의 힌트로 이렇게 표시해 두었을 것이니 이는 환상적 하늘의 편지라는 것이다.
이 말에 혹자는 환단고기를 인용하여 환웅, 단군때 정확한 달력이 있었다고 반박할지 모르니 먼저 말한다. *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상) - 옛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 년을 만드시고....) 이것은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이 아니라 계연수의 가필로 보인다. 아니 환웅시대 그러니까 5-6천년전 세계도 없던 시절에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 라니....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소리로 본다. 우리에게 자축 인묘..등도 중국 문왕, 공자때 음양설이 만들어진 이후이며 그것도 어림짐작이었기에 세종은 장영실에게 물시계를 만들게 했고 또 우리말에는 새벽 아침, 점심과 저녁 밤 이라는 말 만 있으며 그것도 정확한 시간이 아니니 아침나절 점심나절 이라는 나절을 썼다. 따라서 양아리 석각에 쌍홍문 그림이 있는 것은 이 쌍홍문에서 보아 그 코 앞 바닷물에 달, 그리고 샛별의 그림자가 비추면 그 날이 개천절 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이고 이것은 그들뿐 아니라 후세인에게도 전하는 멧세지 같다. 즉 우리가 조상의 제삿날을 달력에 표시해 두는데 당시는 그 달력이 바로 이 양아리 석각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환상적 하늘의 편지의 천문학 이론이다. 우리말에 초승달은 약삭빠른 며느리가 아니면 볼수 없다한다, 즉 초승달은 떳다 하면 지니까 해가 환한 낮에는 볼 수 없고 저녁이 되면 벌써 지평선 너머로 지니 저녁을 일찍 해먹은 며느리가 아니면 볼수 없다 한다. 그렇다면 이 초승달과 샛별이 천문학상 으로는 과연 개천절때 만나고 있을까? 2000 년 부터 2006 년까지 컴퓨터 시물레이션을 해 본 결과는 5 번은 금성과 만났고 한번만 수성과 만났으며 금년인 2007 년 개천절에는 전갈자리 별중 태양보다 그 질량이 수십배나 큰 일등성 안타레스와 만났다. 그렇다면 지금 샛별이 금성 이라는것은 요즘 이야기였지 4 천년전 조상들은 금성이던 아타레스건 그져 새벽 하늘에 밝게 떠 있으면 이것이 샛별이지 뭐 그외 어떤 이름을 붙였겠는가?
여기 천체도에서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부분만 확대, 복사한 것을 보자. 우선 이번 샛별은 전갈자리의 일등성인 안타레스이니 그 전갈자리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부터 보자.
전갈자리의 가장 밝은 별
* 이름 : Antares * 거리 : 600 ± 190 * 등성 : 1.06
초승달과 전갈자리 샛별 그 부분만 확대. 2007년11월11일17시30분_상주
여기서 분홍으로 표시된 부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 아래이고 그 위 둥그런 선은 달 궤도여.
초승달과 샛별 그 부분만 확대 2007년11월11일18시30분_상주
따라서 위 석각본 그림은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는 것을 입증한다.
(사) 고각본의 트레이드마크인 천지인 다음 고각본 위에서 우측 그림이다. 이것도 바로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을 말한다.
우선 우리 선조들이 모자라는 말이나 글자를 보충하느라고 그림을 그려썻던 금문에서 하늘 이라는 天자와 땅 이라는 地 자를 찾아보자,
여기서 중국인들이 그린 그림이나 해석은 잘못된 것이 많으니 무시 하고 金文1,2,3 만보시라. 금문 ㅣ,2 에서는 사람 머리이다. 그러나 먼저 말했듯이 사람 머리가 ㅡ 로 변한 것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 천정이며 사람은 하늘의 섭리가 눌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地자는 아무리 금문 갑골문 대사전을 찾아봐도 없다. 그 이유는 地는바로 흙이라는 土자 옆에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이끼也 자를 붙여놨기때문에 원시 금문에는 없고 금문으로 땅을 보려면 土자를 봐야 한다.
또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를 보면 세종은 모음이 모호하여 감둥이 검둥이가 분별 되지 않던 우리말에서 모음을 확실히 정리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모음을 삼재(三才)로 썻다하니 이 삼재란 바로 삼극(三極)이고 삼극은 바로 天地人 이다. 그런데 이 세종의 모음 천지인 에서는 하늘은 점(·)이고 땅은 ㅡ 이며 사람은 ㅣ 이된다.
또 다음 그림도 보자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
위 녹각글자는 모음이 없었던 원시한글 가림토의 어머니 신지 신획(신劃)인데 여기서 맨 우측 T 자는 바로 하늘아래 사람이다. (이 글자들 전 해독은 필지 게시판 ' 신지녹도전자 천부경해독' 87 번에...)
따라서 이 그림중 가운데 T 자는 하늘 천정아래 사림이다.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 둘 셋...열 중 하나의 나
이 그림은 누리(대지) 위에 햇빛이 내리는 그림이다. 여기서 빛은 이 그림뿐 아니고 고조선 유적지에서 수도 없이 많이 발견되는 빗살무니 토기에도 있다. 즉 빛만을 숭상하던 선조들은 그 토기에 꽃이나 짐승등 다른 그림을 그려 놓으면 부정이 타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초기 토기에는 꼭 빛살 무늬 뿐이다.
또 다음 녹각본 중 경사진 가운에 글자도 역시 빛을 받는 누리 이다.
그러니까 누리란 꼭 ㄴ 처럼 높고 낮은데기 있었던 그림이 글자화 되면서 그냥 위 그림 같은 경사진 누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마크 우측에 있는 구름같은것은 구름이 아니라 각도가 좀 다르지만 분명 누리인 땅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나중에 ㄴ 이 되니 그림이 글자로 변한다 한것이다. 또 먼저 눈(目), 눈(雪)뿐 아니라 이 누리 도 누워 있으니 누리이고 심지어 눈아> 누나, 눈임> 누님도 그 성기가 사내와 달리 누워 있으니 ㄴ 속에는 누워 있는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양아리 고가본의 이 그림은 天地人, 즉 환숫과 곰네와 밝달임금을 말하는 요즘말로 하면 天地人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9.맺는말 이상 양아리(낭하리) 고각본 해독을 마치면서 좀 더 자세히 말하고 더 많은 증거를 대려면 큰 책 한권이 되니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아래 필자 카페를 봐야 한다. 이 해독은 100% 옳다는 것은 자만이지만 우리 역사서를 보다 과학적이며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우리 상고사를 연구 하시는 학자, 그리고 고대문자, 특히 금문해독을 우리 상식으로 해독하는 학자, 그리고 우리 뿌리말을 깊이 연구하신 학자가 읽어 보시면 달라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석각본을 해독하고 다음 사항을 건의 한다. 1. 이 석각본 있는 일대를 민족 성지로 지정하고 이 일대를 관광 명소를 만들어야 한다.즉 양아리 석각본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을 세우고 석각본을 국보로 지정하며 그 석각본이 있는 옆에 있는 환웅바위는 기념물로 만들고 그리고 그 위로 단군성전 올라가는, 지금은 없어 졌다는 길을 다시 복원하고 거기 성모상을 또한 국보로 지정하며 거기서 보리암 가는 길은 이미 뚫렸으니 뭐 별로 손 댈 것도 없는데 다만 그 보리암 아래 삼층 석탑 옆 석각본은 몇 십년 전부터 있었다는 사진사를 찾아 한번 더 확인후 보리암 측의 양해를 받고 석각본을 파 낸 다음 복원해 주며, 이 역시 국보로 지정하고 그 아래 쌍홍문과 웅녀굴도 기념물로 지정하면 이 길은 ㅁ 자 연결도로 성지가 되며 또 그 아래 상주 해수욕장 까지 가는 길은 이미 잘 뚫려 있으니 뭐 별로 손 댈 것도 없고 보리암과 상주해수욕장도 관광 명소로 지정하면 큰 돈 들이지 않고 관광 명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 지금 각 지방에서는 희미한 흔적이나마 찾아 그 동네를 관광 명소로 만드려고 열들을 올리고 있다. 즉 각 지방에서는 사극을 찍고 그 궁궐등을 포함하는 그 일대를 관광지로 만드는데 열을 올리고 있으며 또 심청이의 고향이 황해도 황주군 청룡면 소곤리라 하던 것을 지금은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어 기념관을 세울 계획을 하고 현재는 매년 10월마다 섬진강변에서 심청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렇게 각 지방마다 고증 하기도 힘들고 정력의 대가 이 외엔 별 볼일없는 사람을 근거로 기념물을 세우고 관광지로 유치하려고 열을 올리는 판에 양아리 석각본 같이 4 천년 이상이 되었고 아직도 단군신화라 하는데 이를 실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실증이 필요하고 그 실증으로 드러나는 유물이 바로 이 양아리 석각본이며 또 그림이 글자로 발달하는 과정과 특히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가 새겨져 있는 이 양아리 석각본 일대를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이는 후세에 부끄러운 것이고 또 이것을 알게 된 현지 주민들 한테도 지탄을 받을 것이다.
3 작년에는 그 고각본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철망으로 막아 놨는데 지금은 그것을 찾을 수도 없고 아마 출입 금지 간판을 써 붙인 모양인데 이 입구에 안내판을 세워 누구나 쉽게 찾아 들어가게 해야 한다.
4.보리암뒤 정상까지 가신다던 등산객 부인들이 등산을 포기하고 필자에게 석각본 현장을 일부러 안내해주시느라고 고생하신 숙녀들의 손가락
5. 현재의 현장 안내판
이상 긴 글을 읽어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저자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가. 우리 뿌리말 연구가. 금문등 고대문자 연구가. 각 대학, 각 구청, 각 사회단체 민족정신 강사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카페 http://cafe.daum.net/chunbuinnet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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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검색 창에서도 걸렀는데 통 보이지 않던 오탈자가 이렇게 많네요. 검색창도 전에와 지금이 다르지만 일단 관청에 올리는 건의문 이라면 현대 맞춤법을 써야지요. 여기서 님이 지적하신것을 따르지 않은것 두 가지는 하나는 其形其聲又似出於計意然者 의 번역문인데 원문 내용이 그 형상과 소리를 분리하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하기 때문에 님이 지적하신" 그 형상과 그 소리 또한 ..." 은 形과 聲을 분리 하지 않은것으로 보기 쉬워 따르지 않았고,
또 하나는 하나 의 설명에서 햇빛이 내리다. 를 나리다로 표현한것은 하나의 뜻을 좀더 설명하는 고의 였습니다. 그래서 햇빛이 나리는(하나의 나 의 뜻) 그림이다.라고 보강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