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기상과 동시에 짐 정리하고
화산산성 풍차전망대를 찾아 이동합니다.(05:40i)
화산산성 풍차전망대에 도착합니다.(06:22i)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라선지 풍차마져 을씨년 스럽게 보이네여.
일출인데 태양이 왼쪽에서 떴으면 하는 바람입니다.ㅎ
군위호
날이 밝으니 풍차가 예쁘게 보입니다.
풍차전망대를 둘러보고
이번엔 화산산성을 찾아갔는데 가까이(1km) 있네여.(07:00i)
(쉬어가라고 사각정까지 만들어 놨네여.)
화산산성(華山山城)
이 산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朝鮮)숙종(肅宗) 35년(1709)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윤숙(尹淑)이
병영을 건설코자 4 문의 기초공사를 시작하고.,성벽축조를 위한 석재를 모으며,
수구문(水口門)을 축조하던 중 때마침 거듭되는 흉년과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중지하였다고 전해진다.
라고 써놨네여.
화산산성을 둘러보고
사각정으로 돌아와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아침을 해결하고
화산산성 전망대라는 이정표가 보이기에 무작정 찾아갑니다.
주변에서 제일 높은곳이네여.
전망대에서 본 주변 풍경
예전엔 풍력발전기가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이젠 가는곳마다 풍력발전기가 보이니...뭐라 말해얄지??
"군위호"와 우측으로 "풍차전망대"도 보입니다.
전망대에서 한바퀴 둘러보고
부계면 대율리 돌담마을을 찾아 이동합니다.(08:30i)
(풍차전망대에서 대율리 돌담마을까지 50分(26km)이 소요되네여.)
대율리 돌담마을에 도착했으니 마을을 둘러봐야지여.(09:20i)
한밤마을 안내도
돌담이 예쁘네여.
동천정(東川亭)
와송
남천고택
마당으로 들어갈수 없게 막아놨기에 담넘어로 담아봅니다.
남천고택 전경을 담너머로 담기엔 무리가 있네여,
대율리 대청(大栗里 大廳)
대율리 대청은 조선 전기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졌다.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학교처럼 사용되었다.
효종 2년(1651)과 숙종32년(1705)에 각각 손보고 고쳤으며, 현재는 마을의 경로당으로 사용한다.
대청은 돌담에 둘러싸인 고욕들이 산재한 중심부에 위치해서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모여드는 그런 장소이기도 하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이며, 기둥은 둥근 다락집의 형태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며, 천장은 서꺼래가 그대로 다 드러나지만 장식은 요란스럽지 않다.
건물의 모습이나 꾸민 수법은 일반 민가 건물에서는 그 예를 찾기가 힘든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라고 써놨네여,
부추꽃
부추
대율사
대웅전이 뒤쪽으로 가려져 있고
앞의 능인전에 있는 불상이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8호)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스마트폰을 철문안으로 넣어서 찍은 사진이라 해상력이 많이 떨어지네여.)
여기까지 구경을 마치고
팔공산 석굴암(아미타여래삼존석굴)을 찾아 이동합니다.( 10:40i)
팔공산 석굴암(아미타여래삼존석굴)까지는 5분(2.3km)정도가 소요되네여.
목적지에 도착해서 주차시키려는데 양산서원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양산서원
양산서원(陽山書院)
이 서원(書院)은 1786년 정조(正祖) 10년에
설립된 지방교육기관(地方敎育機關)이며 성현(聖賢)을 존숭(尊崇)하던 곳이다.
이 고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고려말(高麗末)의 충신 문하사인 경재 홍노(門下舍人 敬齊 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을 역임한 시호 문광공 허백 홍귀달(諡號 文匡公 虛白 洪貴達)선생,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우암 홍언충(大學者 寓庵 洪彦忠) 선생의
충절(忠節)과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한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儒生 講學)을 위한 홍교당(洪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 구인재,읍청루 반무당(立懦齋, 求仁齋 挹淸樓 半畝塘)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고종(高宗)5년 조정(朝廷)의 서원 철폐령(徹廢令)으로
묘우(廟宇)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悲運)을 겪었다;
그 후 1897년 광무원년(光武元年)에 현 규모의 강당(講堂)을 중건(重建)한 후
1989년에 중수(重修)를 하고 강당 후정(後庭)에는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경재(敬齋)선생 실기(實記)목판과 조선조 후기 사학자(史學者)의 대가(大家)인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선생이 수찬(修撰)한 휘찬려사 (고려사) [彙纂麗史 (高麗史)] 목판(경상북도유형문호재251호)을
보존(保存)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라고 써있네여.
문을 닫아서 읍청루란 현판만 찍고 돌아섭니다.
다시 팔공산 석굴암(아미타여래삼존석굴)으로 걸어갑니다.
전통문화교육원
현판이(?)鐘樓라 표기되어 있는데 왜 안내도엔 범종각이라 써있는가?
2층으로 되어있으면 범종루, 1층짜리 건물이면 범종각이라 부른다고 하네여.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군위 삼존 석굴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삼존 석불이 모셔진 이후인 9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당시에 유행하던 신라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상의 변천과 신앙 추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통견*식의 법의를 이비고 있다.
양쪽 어깨에 법의가 조금씩 걸쳐져 있어 앞가슴이 넓게 드러니 있다.
두 팔을 차고 내려온 옷 주름은 두 무릎에서 다시 물결무늬를 만들고 있다.
수인(手印*은 지권인이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두 뺨은 풍만하며 귀가 길개ㅔ 늘어져 있고, 머리는 소라 껍데기처럼 말린 모양이며, 유계*는 편평하다.
원래는 파괴된 대좌*와 함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0m 북쪽에 있었으나,
1990년 대웅전을 늘려 지으며 대좌와 불탄을 새로 만들고 옮겼다.
결가부좌: 부처님이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통견:가사를 입는 방법의 하나로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형태.
수인: 불상이나 보살의 서원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
육계: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 오른 혹과 같은 모양.
대좌: 불상을 안치하는 대
라고 써있네여.
팔공산 석굴암(八公山 石窟庵)
팔공산 석굴암에는
북쪽 천연절벽의 자연석굴에 모셔져 있는 군위 아미타여래섬존석굴(국보 제109호),
석조비로자나불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을 비롯해 석탑재, 건축용 석재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 비로전, 산신각, 요사채, 선원 등의 건물들로 있다.
경내 중심 법당인 비로전은 1991년 동쪽을 향하게 건립되었고, 그 앞에 모전석탑이 있다.
모전석탑은 본래 삼층이었으나
탑 위에 자라던 소나무가 태풍으로 탑과 함께 무너져 1947년 지금과 같이 복원하였다.
라고 써있네여.
비로전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軍威 三尊石窟 模塼石塔)
이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써 작자와 유래는 알 수 없다.
본래 3층이었으나,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도 같이 무너졌다고 한다.
1949년에 당시 창건주(홍태기)가 주선하여 군위군 우보면 신도들의 힘을 모아 현재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는 400Cm, 기단의 높이는45Cm, 기단의 한 변은 390Cm이며,
우주*와 탱주*는 약 16Cm, 옥개석*에서 정상부까지는 약 165Cm이다.
모서리 기둥과 각 면 3개의 안 기둥 및 기단 덮개돌이 있으며,
1층 탑신부에는 약 20여 단의 일정하지 않은 직사각형 판석을 쌓았다.
1층 비붕돌의 층급은 3단이며 지붕돌 상면에도 다시 여러 단의 층급을 놓아 점차 체감되게 하였고
다시 그 상부 중앙에 노반* 및 보주*를 배치하였다.
*우주(隅柱): 기단석 면석 모서리에 있는 기둥 모양의 양각
*탱주(撑柱): 기단석의 면석 중심부에 양각한 기둥 모양
*옥개석(屋蓋石): 지붕돌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보주(寶柱): 탑의 상륜부에 구슬 형태의 부재
라고 써있습니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
석굴 사원은 자연 동굴이나 암벽에 굴을 파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거나 벽면에 불상을 새겨서 만든 절이다.
인도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정하여졌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은 거대한 천연절벽 자연동굴안에 삼존불을 모셨는데
석굴 입구는 둥근 모양이고, 내부 바닥은 네모지게 반듯한 모양으로 평평하다.
천장은 활동이나 반달처럼 굽은 모양이다.
석굴 안에는 중앙에 아미타불,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르쪽에 대세지보살*을 벽면에 붙여서 모셔 놓았다.
아미타불은 사각형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두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하게 앉은 모습이다.
양쪽 귀는 길고, 짧고 곧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 대신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뒤쪽 바위 면에는 부처의 정수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화한 광배***가 장식 무늬 없이 새겨져 있다.
관세음보살의 머리 뒤에 있는 광배에는 넝쿨무늬와 불꽃무늬가 있어 새로 수용된 당나라의 형식이 보인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은
삼국 시대 조각이 통일 신라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그리고 자연동굴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 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때 경주석굴암에 이은 두 번째 석굴암이라는 의미로 제2석굴암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문화재 명칭에 따라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 석굴로 불린다.
*대세지보살: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
그 형상은 정수리에 보병(寶瓶)을 이고 (天冠)을 썼으며,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
**항마촉지인: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킨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손 모양.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내리어 당을 가리키는 손 모양의 하나.
***광배(光背):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의 뒤로부터 내비치는 빛.
라고 써있네여.
삼존불
팔공산 석굴암 주변의 송림
마지막으로 송림을 한컷 더 담고,
경주 흥덕왕릉을 향해 출발합니다.(11:35i)
경주 흥덕왕릉을 찾아가는데 점심시간인지 배꼽시계가 자꾸 앙탈을 부립니다.
그래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눈에 띄는 시골어탕집으로 들어갑니다.(12:45i)
어탕국수(9처넌)
경주에 다시 오게 되면 들러야 할 곳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잉~
서울에서는 그냥 어탕국수겠지만
경상도에서의 어탕국수라는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먹을만 합니다.ㅎㅎ
식사를 마치고 길을 재촉하노라니 흥덕왕릉까지 10여분이 소요되네여.
[군위 아미타여래삼족석굴 ~ 경주 흥덕왕릉까지는 60분(65km)]
경주 흥덕왕릉 앞 송림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
문인석
경주 흥덕왕릉(慶州 興德王陵)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826~836)을 모신 곳이다.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憲德王)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상대등(上大等)으로 국정을 주도 하였고 헌덕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에 골품*에 따라 복식(服飾)착용에 제한을 두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였다.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임명하였다.
흥덕왕이 죽은 후 먼저 세상을 뜬 장화부인(章和婦人)의 능에 하장 하였다고 하며, 발견된 능의 비석 조각에 '흥걱(興德)'이라는 글자가 있어 흥덕왕를으로 확인하였다.
이 능은 안강 어래산의 동쪽 자락에 있다.
신라 왕릉 가운데 경지 시가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원성왕릉과 함께 능묘 조각을 잘 갖춘 사례에 해당한다.
둘레돌의 버팀돌(撑石)에는 갑옷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그 주위를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고 문인상, 무인상, 돌사자를 두었는데,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西域人)의 모습을 하였다.
능 앞에는 비석을 받쳤던 거북 모양의 받침돌(龜趺)이 남아 있다.
*골품(骨品): 신라의 신분 편제 방식.
골과 두품이 있었는데, 이 중 상위 신분에는 6두품 . 5두품 . 4두품이 있었고 하위에는 3두품 . 2두품 . 1두품이 있었다.
라고 써있네여.
흥덕왕릉 송림을 마지막으로 한컷 더 담고
경주 양동마을을 찾아 이동합니다.(13:55i)
양동마을까지는9km정도이고(14分정도)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
이 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전통마을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少433~1484)가 풍덕류씨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이씨는 찬성공 이번(贊成公 李番,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1463~1529)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등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설창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 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집들은 대개 'ㅁ'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다양한 가옥의 조화는 우리나라 전통역사마을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주변의 산, 들판, 강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는 마을의 고택(星羅古宅),은 진풍경이다.
양동마을은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1984), 세계문화유산(2010), 형산강팔경(2016)으로 선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라고 써있네여.
1인=4처넌
양동마을 전경
이향정 고택(二香亭 古宅)
이향정은 조선 숙종21년(1695)에 지었다고 하며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二香亭 李範中,708~1783)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같이 뒤뜰에 큰 향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안채 두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이 인상적인데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안마당이 넓고 방아갓채가 따로 있으며 곳간이 매우 많은 점으로 보아 집주인이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라고 써있네여.
(문이 굳게 닫혀서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음이 아쉽....)
강학당(講學堂)
이 집은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으로
지족당 이연상(知足堂 李淵祥,1788~1846)이 먼저 터를 정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후 문중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고종 4년(1867)에
학당을 세워 큰 아들 경암 이재목(敬庵穆,1817~1879)이 많은 후학들을 길렀다.
또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요 터전으로 활용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석채(李錫埰,1892~1984)는 이연상의 4대손이며 이 집에서 태어나 활약하였다.
공부하는 곳이니 만큼 대문과 담장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었으며 앞마당에서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당은 명리재(明理齋)이며 장판각(藏板閣)이라는편액이 걸린 방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는 서당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이다.
여주이씨 집안은 이 서당 이외에도 규모가 좀 더 큰 양좌서당이 있었고 경산서당도 있다.
라고 써있네여.
심수정(心水亭)
심수정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조선 중기 학자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명종 15년(1560)경에 지은 정자이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님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대신 노모를 모신 분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 듯 살아가라'는 뜻의 농재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정자는 철종 때에 행랑채만 빼고 화재로 모두 타버려 1917년 원래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며,
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자로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다.
라고 써있네여.
무첨당(無添堂)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祭廳)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添堂 李宜潤,1564~15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두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와 문중회의(門會)를 했던 큰 사랑채다.
대청 오른쪽 벽에 걸린'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현판은
'영남에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집권 전 이곳을 방문한 흥선대원군이 죽필(竹筆)로 직접 쓴 것이다.
라고 써있네여.
대성헌(對聖軒)
이 집은 조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해 좌찬독(左贊讀)과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지낸
물와 이재직(勿窩 李在直,1805~1837)의 셋째 아들 이능단(李能亶,1833~1912)이
철종 원년(1850)에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앞쪽의 빼어난 산봉우리 성주봉(聖主峰)을 바라보고 지어졌는데
집의 이름도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성헌'이라 하였다.
집의 구성은 ㄱ자형의 안채에 ㅡ자형의 사랑채와 ㅡ자형의 행랑채가 모여 ㅁ자형을 이루는 형식으로
19세기 양동마을에서 유행하던 주거형식이다.
사랑채의 두 칸 대청 앞쪽에 여덟 짝의 문을 달아 네 찍씩 저어 올린 점이 특이하다.
라고 써있네여.
(못들어가게 막아놔서....)
멀리서 찍은 대성헌(원)
설천정사
영귀정의 솟을대문
영귀정
언덕에에서 내려다 본 영귀정
관가정(觀稼亭)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1463~1529)의 살림집으로 중종9년(1514)에 지은 집이다.
'관가정(觀稼亭)'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지바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라고 써있네여.
손소의 위패를 모신 사당
(영당)
관가정의 향나무
향단(香壇)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38년(1543)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님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1494~1553)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香壇 李宜澍,1567~163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라고 써있네여.
다른 방향에서 본 향단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 旌忠碑閣)
이 비각은 손종로(孫宗老,1508~1636)와
그의 노비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정조 7년(1783)에 세웠다.
인조 때 남포현감을 지낸 손종로는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억부와 같이 전쟁에 나아가 경기도 이천의 쌍령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가지만으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왼쪽의 정충비각(旌忠碑閣)은 손종로를 기리는 것이고, 오른쪽의 충노각(忠奴閣)은 노비 억부를 기리는 것이다.
비문은 우승지 이정규(李鼎揆,1735~1810)가 짓고 정충필(鄭忠弼,1725~1789)이 글씨를 썼다.
라고 써있네
두곡 고택(杜谷 古宅)
두곡 고택은조선 영조 9년(1733)에
이언적 선생의 6대손 이식중(李湜中,1711~1777)이 세운 집이다.
훗날 이언괄의 14세손인 두곡 이조원(杜谷 李祖源,1864~1934)이 살게 되면서
후손들이 이조원의 호를 따라 '두곡 고택'이라 불렀다.
'ㅁ'자 모양을 하고 있는 살림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대문채가 있고
북쪽으로는 곳간채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을에서 규모가 매운 큰 주택에 속한다.
대문을 들어서 왼쪽(서쪽)으로 있는 마구간은 지형상 서쪽이 낮고 허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터를 골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안채 바로 뒤의 작은 별채는 집안의 딸이 사용하던 방인데 출가 후에도 친정에 오면 이 방을 사용하도록 했다.
라고 써있네여.
(두곡 고택도 문이 굳게 닫혀서 입구만 담았습니다.)
담장따라 돌다가 억지로 담은 모습
수졸당 고택(守拙堂 古宅)
이 집은 회재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1576~1635)이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지은 것으로 그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의잠의 9대손인 이능수(李能洙,1807~1884)가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를 다시 지었는데
사랑채에 비해 대문채의 기단과 지붕을 낮게 지어 두 건물의 격식을 고려하였다.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꾼 '안골동산'이라 부르는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어 높은 곳에 있어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라고 써있네여.
경산서당(景山書堂)
경산서당은 양동마을에 있는 세 곳의 서당 중 하나로
무첨당 이의윤(無添堂 李宜潤,1564~1597)을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유림(儒林)에서 건립하였다.
이의윤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으로 본관은 여주이다.
서당의 이름인 경산은 『시경(詩經)』에서 유래하여쓴데 오랜 세월 동안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헌종 1 년(1835) 강동면 오금리에 창건되었다가
철종 8년(1857)에 강동면 안계리로 옮겨졌으며,
안계댐 공사로 인하여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강당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재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안계리에 세워졌던 건물의 목재와 기와 등을 가져와 지었으며, 정원의 나무도 그대로 옮겨 심었다.
라고 써있네여.
낙선당 고택(樂善堂 告宅)
이 집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이
분가할 때인 중종 35년(1540)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한때 여강 이씨가 살기도 했으나,
그후 다시 병자호란(1636~1637)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樂善堂 孫宗老,1598~1636)의 후손이
이 집을 매입하였으며 그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양반가의 큰 집들은 기단을 높게 쌓은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은 기단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유난히 많은 곳간과 곡식을 찧었던 디딜방아채가 남아 있다.
비교적 기능과 실용을 강조하는 간소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라고 썽있네여.
송첨 종택(松簷 宗宅)
경주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으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관(地官)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손소의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운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라고 써있네여.
'(忍)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서백당
사당
양동의 향나무(良洞의 香나무)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동해안을 비롯하여
울릉도와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로도 불린다.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공적으로 심은 것이다.
향이 강해서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와 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양동의 향아무는 송첨 종택의 사당 앞에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초기 문관이며 양동의 경주손씨 임향조*인 손소(孫昭,1433~1484)선생이
세조 5년(1459)에 집을 새로 짓고 그 기면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원줄기가 지상 90Cm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에
그 윗부분이 꾸불꾸불 위로 자라서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다.
수관**폭이 12m에 달할 정도로 수세가 매우 왕성하여 멀리서 보면 분재(盆栽)처럼 꾸민 듯 보인다.
라고 써있네여.
사호당 고택(沙湖堂 古宅)
이 집은 진사(進士)를 지낸
이재로(李在老,1803~1879)가 조서 헌종 6년(1840)에 지어 살던 곳으로,
아들인 사호당 이능승(沙湖堂 李能升,1827~1881)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주로 'ㅁ'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의 다른 집들에 비해, 'ㄱ'자형의 안채에 'ㄱ'자형의 사랭채가 잇대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아 있는 부분에 곳간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문으로 뻐져나올 수 없는 커다란 항아리가 들어 있다.
독을 먼저 넣고 집을 지은 것인데, 곡식이 돈과도 같았던 시기이 안주인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라고 써있네여.
사호당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초가들이 감나무와 어우러져 정겨워 보이네여.
양동마을 구경을 끝으로 우리의 숙영지를 찾아 이동합니다.(18:10i)
목적지인 팔각정에 도착합니다.(19:10i)
차박 준비 완료하고
우리들만의 조촐한 파리~를 시작합니다.ㅎ
10월 19일
가볍게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열암곡 석불좌상을 찾아 이동합니다.(07:35i)
경주 국립공원 새갓골지킴터에 도착합니다.(09:20i)
'열암곡 석불좌상'까지 0.8km
걸어서 산행아닌 800m짜리 산행을 시작합니다.ㅎ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넉넉함)
안내도 찍은것임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慶州 列岩谷 石佛坐像)
이 불상은 남산 열암곡의 절터에서 발견된 석불좌상이다.
열암곡은 남산 남쪽에서 가장 큰 계곡인 백운계의 한 지류로 새갓곡이라고도 한다.
불상은 파손되어 머리부분이 없는 상태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05년에 머리가 발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 정비하였다.
얼굴 아래쪽이 심하게 파손되었고,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의 중간받침돌도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다.
양쪽 어깨를 덮은 옷은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게 표현하였으며,
얕은 양각으로 새긴 옷 주름도 풍부한 부피감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조각 기법이 석굴암 불상과 비슷하여 이 불상도 통일 신라 시대인 8~9세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좌선할 때의 손 모양 중 하나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하였음을 상징한다.
라고 써있네여.
무너져 내린 열암곡 마애불상
(안내도 찍은것임)
3D인지 4D인진 모르지만 복원하면 이런 불상이라고
(안내도 찍은것임)
마애석불의 크기가 약 250 -190 - 620, 무게 약80톤으로
넘 큰탓에 세울수가 없어서 이처럼 지붕을 만들어서 보존하기로 했다고 하네여.
엎어져 있는 마애불상
줌으로 당겨서 한번 더!~
열암곡 마애불상 구경을 마치고 돌아내려갑니다.
내려올땐 20여분을 걸으니 새갓골지킴터 앞이네여.
색다르게 인증샷!ㅎ
경주국립공원 새갓골지킴터에서 올룡암으로 이동합니다.(10:40i)
(옥룡암까지는 16.5km 약25분 소요)
옥룡암 입구인 배반동 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니 정 입구에도 주차장이 있네여.흐미~~
옥룡암에 왔으니 함 둘러봐야지여.
대웅전
일로향각(日爐香閣)
'화로에 향을 피우고 마음을 모아 부처님께 향을 공양하는곳'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여.
삼성각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은 높이 10m, 둘레 30m에 달하는 큰 바위의네 면에 새겨진 34점의 조각들이다.
불상, 보살상, 천인상(天人像), 공양상(供養像), 사자상(獅子像), 마애탑 등이 바위의 각 면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 계곡은 이구에서 마애탑 두 개가 먼저 보이기 때문에 이 골짜기를 탑곡 혹은 탑골로 부른다.
바위의 면적이 가장 넓은 북쪽 면에는 9층탑과 7층답이 있다.
두 탑 사이에는 불좌상이 있고, 각 탑의 아래쪽에는 사자상이 한 구씩 있다.
동쪽 면에는 불상을 중심으로 보살, 천인, 승려, 금강역사 등을 주변에 배치했다.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처럼 파서 그 안에 삼존불을 새겼고, 삼존불 옆에는 별도로 만들어 세운 입체적인 보살입상이 있다.
보살입상의 반재편에는 상체만 새겨진 나한상이 있다.
이곳에는 목조 구조물의 흔적과 복원된 3층 석탑이 있다.
바위의 서쪽 면에는 버드나무와 대나부 사이에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군은 불상의 부드러운 형태,
미소를 머금은 얼굴 조각 등으로 미루어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각에 나타난 기법이 다양하여 조성 시기에 대한 이견이 많다.
한편, 바위의 네 면에 불상이 새겨저 있어 이것을 사방불*로 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神印(신인)' 이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을 신인사의 터로 추정하고 있다.
*사방불(四方佛):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부처.
라고 써있네여.
1번
2번
A
B
C
삼층석탑
ㄱ
ㄴ
ㄷ
ㄹ
측면에서 본 불상
옥룡암을 둘러보고 나와 주민에게 물을 목욕탕으로 이동합니다.(12:10i)
'종합자원화단지 웰빙센타'라는
목욕탕을 찾아가 샤워하고 나왔는데 댓글이 아주 나쁘게 써 있는것과 달리 시설이 아주 잘 돼있네여..
씻고나니 뱃속에서 밥달라고 지롤을 떨기에
식당을 검색해보고 '우일식당'을 찾아 이동합니다.(8.5km 10분거리)
우일식당에 도착합니다.(13:20i)
(식당 주차장이 없어서 눈치껏!~)
※테두리가 없는 사진은 폰카로 찍은겁니다.
식당유리창에 이런표시가 떠억하니...
주인의 따님인듯한데 친절합니다.
갈치조림 아니 갈치찌개를 시켜서 먹었답니다.
(근데 주민들은 돼지찌개를 시켜먹네여.)
정신없이 먹고나서야 아차~하고 핸혼으로 찰칵! (근디 갈치찌개는 어디갔노?)
점심을 해결하고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농협하나로마트가 있기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곡차와 라면)을 사갖고 출발합니다.(14:00i)
한참을 달려 기장 오랑대 주차장에 도착합니다.((15:10i)
(주차장 주변에서 차박을 하긴 어렵겠고...
차박지를 찼아 여기저기 둘러보노라니1시간이 훌쩍 지나가네여.)
오랑대를 찾아갔는데 바로 앞에 해광사가 손짓을 하기에 둘러봅니다.
현판에 '연화산 해광사'라고 써있네여.
범종각
대웅전
포대화상
석조미륵불 입상
해광사 다보탑
삼성각
명부전
해광사 용왕단
여기까지 해광사를 둘러보고
해가 지기전에 봐뒀던 박지로 이동해서우리들만의조촐한 파리를...
10월 20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곧장 오랑대 일출을 찍으러 이동합니다.
오랑대 일출
해국
오랑대 일출을 보고 나니
다시 차박했던곳으로 이동해서 라면으로 아침 해결하고 나니
달리 갈곳이 없기에 검색해보고 죽성리 해송을 찾아갑니다.
기장 죽성리 해송(機張 竹城里 海松)
본 해송은 5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마치 한 그루의 큰 나무처럼 보이는 노거수로서 수령은 약 250~300년으로 추정된다.
해송(곰솔) 종류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빼어난 수형을 가지고 있으며,
황학대라 불리는 죽성항 배후의 언덕 위에 위치 하고 있어 조망이
매우 뛰어나 주변에서 보면 그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웇장하다.
라고 써있네여.
여기까지 졸업여행을 마칩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