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5-1)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5-1. 한양릉(漢陽陵)
어젯밤에 서안 시내로 들어오면서 버스로 서안 성벽을 관람하였다.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겉모습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지금 보고 있는 서안 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말기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唐)나라의 장안성(長安城)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서안부를 두었고, 1374년(홍무 7)에 서안장벽의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서안시 연호구 서안성문>
장벽을 중건할 때 서·남 양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 벽과 북쪽벽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공사는 1378년(홍무 11)까지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다. 그 후 1568년(융경 2)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 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명나라 말인 1636년(숭정 9)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을 막기 위해 사대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안성벽 중화제일영빈예의광장장>
이자성의 반란군은 1643년(숭정 16) 서안을 공격했고, 다음 해 1644년 이자성은 칭제(稱帝)를 하며 국호를 대순이라 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두 차례에 걸친 중수(重修)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1781년(건륭제 46)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대적인 방어 능력을 향상(向上)시켰다고 한다. 서안 성벽을 밤에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돌아봐서 글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얕은 지식과 부족한 점은 독자분들의 양해 바란다.
<서안시 환성남로의 성문>
서안에서의 5일은 바쁘기만 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서안국제공항 가는 길목 부근인 서북쪽 건현(乾縣)에 있는 한양릉을 둘러본다. 서안(西安) 시내와 국제공항 사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다가 고분을 발견하였다는데, 중국 국무원은 한나라 제4대 황제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라고 발표했다. 너른 마당의 입구에는 일찍 찾아온 인파로 북적거린다.
<한양릉 전경>
한양릉의 정식명칭은 ‘한양릉박물관’으로 능을 발견한 장소에 박물관을 건립하여 대부분이 지하로 되어 있다. 입구에서 긴 통로를 따라 지하로 들어서면 벽에는 한나라 황제들의 프로필이 병풍처럼 걸려있다. 내부 입구에서는 먼저 온 사람들이 신발에 비닐 덧신을 신고 있어서 우리도 상자에 있는 비닐을 집어 신발을 포장한다. 아마 신발에 묻은 먼지를 걱정하는 것 같다.
<한나라 역대 황제 프로필>
내부에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것이 한경제(漢景帝)의 현실(玄室) 같은 것이 유리벽 안으로 보이고, 뒷면으로는 한경제를 소개하는 죽간(竹簡)이 한문(漢文)이 아닌 간체자(簡體字)로 걸려있다. 만약에 한자(漢字)가 ‘한나라 문자라면 한나라 황제(皇帝)릉에서 만이라도 한문으로 안내’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한양릉 지하입구-비닐 덧신을 신는 장면>
<한경제(漢景帝)의 현실(玄室)>
한경제(漢景帝 재위 BC 157∼BC 141)는 문제(文帝)의 아들로 이름은 유계(劉啓)다. ‘조착(晁錯)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후왕(諸侯王)들의 봉지(封地)를 삭감했다. 자주 법령을 바꾸고 제후왕의 세력을 억압했기 때문에 기원전 154년 ‘오(吳)와 초(楚) 등 7국의 난(七國之亂)’이 일어났다. 그러나 태위(太尉) 주아부(周亞夫)의 힘으로 난은 평정되고, 관리를 파견해 제후국의 행정을 통솔하면서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유품고(遺品庫)>
16년 동안 재위하면서 제후(諸侯)들의 실권이 크게 약화 되어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생 안정 정책을 계승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면서 전부(田賦)에 부과하는 세금도 정리했다. 관기(官紀)의 숙정(肅正)에 노력하고 화폐를 사사롭게 주조하는 일을 금해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사가들은 이때의 정치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부른다.
<한양릉 부장품 묻힌 곳>
유리로 된 통로를 따라가면 발굴 당시 그대로 보존된 부장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무사(武士), 시녀(侍女), 환관(宦官), 각종 동물 등 다양한 도용이 그 시대의 특색 있는 매장(埋葬) 풍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진시황릉의 도용(陶俑)과 다른 점은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실제보다 큰 비율로 만들어져 토용 하나의 크기가 187㎝ 정도가 되지만 한양릉의 토용 크기는 60㎝ 정도다. 도용을 구경하며 한참을 가다 보니 ‘능동 제17호갱’안내판이 나온다.
<도용(陶俑)>
능동 제17호갱(陵東 第17号坑)은 능 동쪽의 17번째 갱이라는 뜻 같다. 안내판에는 구덩이의 길이 9.4m, 너비 2.8m, 깊이 2.3m이며 서쪽 끝에 경사진 통로가 있다. 구덩이의 배치는 나무수레와 목마가 발견된 서쪽의 목마차(木馬車) 구역, 중앙에서 발견된 착의식도용(着衣式陶俑) 구역, 동쪽에서 발견된 생활기구(生活器具) 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목마차와 착의식 도용 10점(남자용 7점, 환관용 3점), 도자기 항아리와 대야, 철제 농기구 등이 발견되었다고 안내한다.
<도우(陶牛)>
<도우(陶牛)와 도용(陶俑)>
다음은 능동 제15호갱(陵東 第15号坑)이다. 길이 21m로 나무 칸막이로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동쪽 부분은 주로 보리, 수수, 기장 등 작물이 있었으며, 세계 최초의 찻잎 흔적이 발견되었다. 곡물(穀物) 표면에서도 6개의 봉니(封泥)가 발견되었고, 봉니 옆에는 도관령인(道官令印)이라고 찍힌 썩은 죽간이 일부 있었다. 이곳에서는 도저(陶猪), 도구(陶狗), 도우(陶牛) 등이 발견되었으며 함께 출토된 것에는 옷을 착용한 도용(陶俑) 23건 등이 있다.
<도용(陶俑)>
<도양(陶羊)>
능동 제13호갱(陵東 第13号坑)은 길이 94m, 너비 3m, 깊이2.4∼2.8m이며 동·서 두 구역으로 나뉜다. 동쪽에서는 어미돼지와 새끼돼지, 양, 염소, 개, 늑대 등이 채색된 도자기가 나왔는데, 새끼 돼지만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나머지 동물들은 황제의 능을 향해 배치되었다. 발굴된 동물 도용들은 산양 235건, 면양 189건, 개 458건, 큰 돼지 455건, 새끼 돼지 54건 등 총 1,391건이 출토되어 마치 가축의 세계가 아니었나 한다.
<마차>
동릉에 갱이 10개 이상 있는 것 같은데 개방한 것이 3개뿐인지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몰라서 못 보았는지도 모른다. 지하 관람로를 돌아 나오기 직전에는 서한(西漢) 시대의 중앙 관직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벽에 진열돼 있다. 중앙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삼공구경을 골격으로 “삼공·구경, 이십칠대부, 팔십일원사(三公九卿二十七大夫八十一元士)”를 두었다. 삼공은 여러 행정을 통괄하는 승상(丞相 또는 相國이라고도 함)·군사를 관장하는 태위(太尉)·부승상에 해당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하였다.
<도저(陶猪)>
구경은 제사의례(祭祀儀禮)를 담당하는 태상(太常), 궁중의 관료를 선발을 담당하는 광록훈(光祿勳), 궁문경비를 담당하는 위위(衛尉), 차마 관리를 담당하는 태복(太僕), 사법을 담당하는 정위(廷尉), 내조자 응대 및 접대를 담당하는 대홍려(大鴻臚), 황족 처우를 담당하는 종정(宗正),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대사농(大司農), 궁중재정을 담당하는 소부(少府) 등이 있었다. 또한 구경의 수는 아홉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며, 그 용어는 이념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한다. 삼공구경 진한(秦漢)시대의 행정관직의 총칭이다.
<마차>
한양릉의 도용들은 모두가 자상하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나체(裸體) 도용이라 남녀 구분이 확연하나, 팔이 안 보인다. 본래는 도용들에 실크로 만든 옷을 입혔으나 그동안 삭아 없어졌고 나무로 만든 팔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 분해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양릉을 본 후 우리 고대사와 중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조선 이전부터 삼국 시대까지 말, 소, 개, 돼지, 양, 닭 등 가축을 표상으로한 6가 제도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以六畜名官, 有馬加. 牛加. 狗加 其邑落皆主屬諸加(여섯 가지 가축으로 벼슬 이름을 지어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어 고을과 촌락은 모두 육가에 속한다) - 後漢書 東夷列傳 夫餘篇(후한서 동이열전 부여편)]에서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주곡(主穀)]하고, 마가(馬加)는 명을 주관[주명(主命)]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주형(主刑)]하고,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주병(主病)]하고, 양가(羊加) 일명 계가(鷄加)는 선악을 주관[주선악(主善惡)]’하는 것을 말한다. <신시오사(神市五事)에서>
<한나라 생활용구>
<한나라 도용>
※ 중국 서안 기행기는 이상으로 마무리합니다.
졸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waya555/223433516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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