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노래
강 문 석
끝물단풍이 마지막 정염을 불사르듯 더욱 고혹적인 때깔로 그 자태를 뽐내기 시작하던 11월초. 이미 인생 황혼에 접어든지 오래인 백수곤은 소설가협회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문학제 행사에서 펼치는 ‘그 시절 그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회날짜까진 보름 여유가 있었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편인데다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흘러간 노래라니 수곤은 마음이 달뜨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줄곧 흘러간 노래라고 불러왔는데 메시지는 마치 방송 카피처럼 세련되게 ‘그 시절 그 노래’로 적고 있어서 소설가들은 역시 언어 조탁능력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곤은 고향인 추풍령 밑 소도시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들의 가요를 자주 따라 부르며 성장한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 1학년 때 6.25동란 피란길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살던 집마저 잿더미로 변해 힘든 삶을 극복코자 노래로라도 발산을 했던 것이다.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던 피란민 중에 빨갱이가 섞였다며 유엔군 폭격기들이 몰려와 백사장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던 피란민들을 기총소사로 공격해 수백 명이나 희생시킨 참극이었다.
충북 황간 경부선 철길 쌍굴다리 부근에서 미군의 공중 폭격과 총격으로 선량한 피란민 수백 명이 숨진 노근리 사건과 판박이이지만 안타깝게도 수곤 아버지를 비롯한 낙동강변 희생자들은 어디에서도 참상기록을 찾아볼 수 없도록 묻히고 말았다. 동란 전까진 두 딸 사이의 아들이라며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했던 수곤이었다. 하지만 동란을 지난 후 지독한 가난 속 수곤의 소년기는 형극이나 다름없었다.
수곤이 6.25의 상흔이 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노랫말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렇게라도 소릴 지르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전선야곡’이나 ‘삼팔선의 봄’, '전우야 잘 자라' 같은 노래는 지금 듣더라도 금세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소설가협회로부터 노래자랑 메시지를 받기 전만 해도 수곤은 조석으로 냉기를 머금은 싸늘한 바람에 또 한 해가 이렇게 속절없이 저물기 시작하는구나 싶어 울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학제 행사에서 벌이는 노래자랑 연락을 받았으니 우선은 기운이 솟는 듯했다. 하지만 노래자랑 출전도 의욕뿐이지 나이 탓인지 이제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수곤은 스마트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몇 번이나 열어보면서 노래자랑 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이번 문학제 노래자랑에 참가한다면 동란 때 전국에서 부산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생활상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얘기도 듣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수곤은 문학제 행사 주최 측에서 어떻게 자신을 알고서 그런 메시지를 보내왔을까가 궁금했다. 부산소설가협회에서 서로 단체를 달리하는 부산문인협회 회원수첩을 뒤져서 소설분과 사람들에게만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닐까 싶다가도 다른 회원들에게서 자신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닐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이틀을 고심하다가 수곤은 무릎을 탁 쳤다. 10년 전 그가 맞닥뜨린 ‘밀다원 시대’ 행사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밀다원 시대가 떠오르자 수곤은 이번 문학제도 소설가협회가 이름을 내걸었지만 행사는 관할 구청이 주관할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문인단체는 전체 회원이 참가하는 정기총회를 제외하곤 큰돈을 들여 외부행사를 펼칠 만큼 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메시지에서 문학제 행사는 올해로 아홉 번째라 했지만 실제론 동란 때 김동리 선생이 쓴 소설 ‘밀다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도 생각났다. 수곤은 10년 전 밀다원 시대 문학제를 만들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을 찾은 이들을 직접 만났던 것이다. 문학제로 승화된 ‘밀다원 시대’ 소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부산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차는 바다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하여 몸을 뒤로 뻗대었다. 초량역에서 본역까지는 거의 한 걸음을 재듯 늑장을 부렸다. 이중구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이십 분. 어저께 세시 십오 분 전에 탔으니까 꼭 스물일곱 시간하고 삼십오 분이 걸린 셈이다. 스물일곱 시간하고 삼십오 분. 그렇다. 그동안 중구의 머릿속은 줄곧 어떤 땅끝이라는 상념으로만 차있는 듯했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것에 중구의 의식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10년 전 여름 끝자락 어느 날 오후, 수곤이 옛 미화당백화점 앞 삼거리를 거쳐 중앙동을 향해 광복로를 지나는데 보도 경계에다 서너 개 테이블을 붙여놓고 그 위에 쌓인 책들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 순간 수곤은 며칠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올라 ‘아무리 책이 읽히지 않는 세상이라지만 저렇게까지 마구 뿌려 대서야 원…쯧쯧쯧’ 했었다. 책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수곤과 비슷한 노인들이라 한마디 해줄 요량으로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 자리는 6.25 때 밀다원 다방 바로 앞이었고 그들은 옛 서라벌예술대학의 김동리 선생 제자들이었다. 밀다원 다방은 동란 때 전국에서 부산으로 몰려던 예술가들의 유일한 아지트였다. 소설가와 화가 만화가 음악가들이 다방에 모여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점점 포성이 가까워지는 전황을 걱정하면서 불안과 울분을 달래던 위안처요, 기도처였던 것이다. 책을 나눠주던 광복로 그 현장을 수곤이 맞닥뜨린 지도 어느덧 강산이 변한다는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수곤은 그때 8백 명 넘는 직장 은퇴자단체를 맡아 그 사무실이 남포동 끝자락에 붙어 있어 광복로를 자주 오갔다. 그 사무실이 든 건물은 동란 끝난 10년 뒤인 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세 차례나 그가 몸담았던 직장이기도 했다. 수곤은 그곳에 근무하면서 업무 특성 상 자연스레 남포동은 물론 광복로와 국제시장 그리고 부평동과 대청동, 심지어 동광동 일대까지 부산 원도심 지리를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광복로 옛 밀다원 다방 앞에서 김동리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고인의 작품집을 부산 시민들에게 나눠주던 선생의 제자들은 그 당시 중앙의 한국문단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수곤도 그날 그들이 친필 사인까지 넣어 건네주는 소설집을 3권이나 받았다. 광복로 노상에서 그렇게 작품집을 나눠준 후 그들은 가까운 중구청으로 몰려가 대강당에서 ‘김동리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날 수곤도 마침 구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학교 후배를 만나 행사장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심포지엄엔 김동리 선생 10여명 제자 중 셋이 토론에 나섰고 부산 평론가도 둘이나 합류하여 김동리 선생의 작품세계를 조명했었다.
작품집 끝에 작가의 연보가 상세하게 나와 있어 객석에서도 선생의 작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불교와 개신교를 넘나드는 종교 작품을 다수 발표한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사건에 대해서도 토론자들은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식적인 심포지엄이 끝나고 잠시 환담 시간에 객석에 앉았던 한 제자는 스승과 있었던 웃지 못 할 추억담도 전했다. 설 명절 때면 제자들이 모여 선생 댁으로 인사를 가곤 했는데 새해에 다시 모이면 선생은 여럿이 둘러앉은 좌중에서도 꼭 어느 학생을 불러 세워서는 “자네, 작년 설엔 정종을 들고 왔는데, 왜 이번엔 그냥 왔나?”하면서 까발리더라는 거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한국문협과 중구청 간 간담회 시간. 문협 이사장은 옛 밀다원 다방 자리 건물을 구청에서 구입하여 문협에 넘겨준다면 피란시절 분위기를 재현한 중구의 멋진 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기념관을 꾸미겠다고 했다. 평생 공기업에서 일한 수곤은 그 말을 듣자 무슨 명분으로 구청이 그 건물을 사들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구청에서 어떤 답변이 나올는지 귀를 쫑긋했다.
약사 출신 여성 구청장은 그 요청을 정면으로 거절하지 못해 난감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던지 잠시 굳었던 표정을 수습한 후 “여러분께서 익히 잘 아시겠습니다만, 저는 사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키는 의장님이 전적으로 쥐고 있습니다.” 구청장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미소작전으로 나오자 마이크는 곧바로 구의회 의장에게로 넘어갔다. 구청에서 가까운 보수동에서만 몇 대째 산다는 의장은 “의당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서울에서 이렇게 멀리 찾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밀다원 다방 구입은 가급적 빠르게 추진하여 일이 꼭 성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제법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었지만 서울에서 온 이들은 마치 일이 성사라도 된 것처럼 박수를 치며 우우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건물은 구의회 의장의 호언장담처럼 사들이질 못하면서 매년 말 구청에서 소설가 협회와 김동리기념사업회에 일정액을 지원하여 두 단체가 행사를 공동으로 펼칠 수 있게 배려한지가 9년째였던 것이다. 지자체나 기초단체가 거금을 쏟아 부어 펼치는 규모가 큰 행사가 넘쳐나다 보니 예산의 제약을 받는 ‘밀다원 시대 문학제’는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면서 초라할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밀다원 다방 자리에 기념관을 꾸미겠다는 문인협회 구상을 잊고 지낸지 10년이나 지난 터라 수곤은 올해 행사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릴까도 궁금했다. 그 중에서도 서울 김동리기념사업회에선 선생의 제자들이 과연 몇이나 행사장을 찾을지가 사실은 더 궁금했다. 그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나서서 만든 행사이니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다면 문학제도 존속하긴 어려울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수곤은 경주 불국사 옆 동리목월 문학관도 글 쓰는 사람들과 자주 찾는 편이지만 그때마다 책이 읽히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듯 그곳에서도 관람객을 만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세계에서 출산율 꼴찌인 나라이다 보니 생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문학관들도 언제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는지 걱정되었다. 수곤이 행사 주최 측에 메시지로 노래자랑 참가를 신청하자 접수번호가 2번이란 답장이 바로 날아들었다. 20명도 아닌 달랑 2명뿐이라니 그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렸다.
밀다원시대 문학제 장소는 ‘한성1918’로 나와 있었다. 수곤은 그 명칭이 낯설었고 부산이 아닌 한성이란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혹시 행사 당일 찾다가 시간이 늦어 낭패를 당할까봐 하루 전날 현장을 찾아 나섰다. 용두산공원에서 중앙동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선 지점에서 쉽게 찾은 한성1918 건물은 외벽이 붉은 벽돌이었다. 1897년 문을 연 한성은행은 1918년 부산지점을 개설하는 바람에 이런 명칭이 건물에 붙었단다. 1층이었던 은행건물을 3층으로 증축하면서 1층엔 청자다방이 들어섰는데 밀다원 다방처럼 6.25를 거치면서 동광동 일대도 다방거리로 유명했었다. 그 중에서도 청자다방은 임시수도 3년 동안의 밀다원 다방처럼 예술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였다. 이 건물은 8년 전 부산시가 매입해서 생활문화센터로 리모델링했고 부산문화재단이 위탁운영을 맡고 있었다. 다목적 문화예술 공간으로 강당과 카페 커뮤니티룸과 공방까지 들어있었다.
수곤이 이번 문학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겠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일흔 중반인 아내는 또 무슨 노래자랑이냐는 듯 남편을 향해 눈을 똥그랗게 떴다. 노부부만 사는 집에서 할멈이 이렇게 나오니 영감은 머쓱하면서도 노래자랑 때문에 서로 반목하게 될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불과 달포 전에도 남편이 노래자랑 나간다고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근 열흘이나 매달리더니 결국 예선만 거치고 돌아온 걸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때도 아내는 이제 노래자랑에 대한 미련일랑 제발 좀 접을 때라며 고개를 돌렸었다. 노래보다 남편이 그렇게 무리를 해서 병을 얻을까봐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수곤은 그날 혼자서 대회장인 예술회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 40만이 채 안 되는 기초단체에서 지역 가을축제 실버노래자랑 예심 출연자는 80명을 넘고 있었다. 수곤은 싸늘하게 나오는 아내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무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 출전을 위해 근 열흘이나 저녁마다 사는 아파트 인근 공원을 찾아 스마트폰에 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는 혼자만의 연습인데도 저음이 끝까지 따라 나오지 않았고 고음에선 목소리가 갈라지기도 했다. 자신의 고향 노래라고 출전 곡으로 정한 ‘추풍령’이지만 노래는 노인을 깔보는지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수곤은 첫술 밥에 배부르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며 포기하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어느 젊은이는 같은 곡을 천 번씩이나 따라 부르며 연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면서 수곤은 매달렸다.
수곤이 그날 예심무대에 올라 그런대로 노래를 무사히 마쳤을 때, 곱게 무대의상으로 치장한 중년여성 사회자가 가까이 다가와 마이크를 넘겨받으면서 어쩜 그렇게도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하세요, 라는 말로 수곤을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그날 그는 15명 뽑는 1차 예선 합격자 명단에 든 것만 확인하고 서둘러 경연장을 빠져나왔다. 바로 이어 7명으로 압축해서 ‘삽량예술제’ 무대에 올린다는데 그는 도저히 그 안에 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수곤은 15년 전, 신도시로 이사한 다음해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노래자랑대회에도 출전했었다. 그땐 노랫말이 길면서 고음부도 적지 않은 ‘향수’를 들고나가 동상을 차지했었다. 읍사무소에선 참가자가 나타나지 않자 아파트별로 의무적으로 출전자를 할당했고 성당 교우인 아파트 이장이 본인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성당 성가대원인 수곤 이름을 덜렁 올렸던 것이다. 그날 그는 부상으로 고가의 최신형 전기밥솥까지 타서 아파트 주민들과 교우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세월이 흐르지 않았던가. 아내는 왜 그 흐른 세월을 인정하지 못하느냐며 수곤에게 지청구를 해댄다. 그러나 수곤의 생각만은 달랐다. 활동을 접고 가만히 앉아 노년을 보내면 건강한 삶도 그만큼 빨리 무너진다는 걸 믿는 편이다. 그는 아내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를 들이밀고 싶었지만 인내하고 있었다. 사람은 꿈을 잃어버리는 순간 늙기 시작한다는 교훈적인 시였다.
드디어 제9회 밀다원 시대 문학제 행사 날. 행사장에 도착한 수곤이 노래자랑을 펼칠 2층을 올랐더니 지역신문이나 TV를 통해 가끔씩 얼굴이 눈에 익은 중년의 여류소설가들이 행사요원으로 나서서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봉사하고 있었다. 노래자랑 무대만 확인한 후 수곤은 바로 메인 행사장인 지하 강당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30여 명이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맞추어 구청 관계자들이 도착하자 곧 문학제 막이 올랐다.
서울 김동리기념사업 이사장의 축사에선 스승의 실명소설「마음 건너기」일부를 인용했는데 끝 대목이 ‘뒤통수는 잘 맞아야 한다. 잘 못 맞으면 눈알이 뽑히고 사랑도 뽑히니까.’였다. 중구청장 축사에선 ‘6.25동란 이후 부산 중구는 거리마다 피란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넘쳐나던 곳이며,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밀다원 다방이 있었던 광복로는 가난하고 핍박한 시대 속에서도 예술인들의 숨결이 가득 찼던 피란시절 대표적인 문화예술 공간이었다’고 술회했다. 구의회 의장도 축사에 나서서 ‘이번 문학제에 준비된 피란시절 글과 사진 그리고 노래자랑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당시 피란민의 애환과 김동리 선생을 비롯한 그 시절 문인들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소설가협회장은 6.25 당시 1023일 동안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특히 광복동은 한국 문화의 중심지나 다름없었다며,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온 김동리 선생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지식인의 고뇌를 ‘밀다원 시대’로 그려냈기에 오늘과 같은 행사를 가질 수 있다고 작가를 추억했다. 마지막으로 밀다원시대 문학제 위원장은 ‘따지고 보면 그땐 국가도 위기였지만 문학도 벼랑 끝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피란지 부산의 단 몇 평의 좁은 다방에서도 우리 문학은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을 기념하고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는 문학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지하 강당에서 기념식을 마친 주최 측 인사들과 내빈들은 한쪽 벽면을 검정색 커튼으로 꾸민 2층으로 장소를 옮겼고 바로 ‘그 시절 그 노래’ 경연 막이 올랐다. 노래자랑에 나선 사람은 달랑 3명으로 수곤은 행사를 펼친 쪽이 부끄러워해야할 숫자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념잔치에 노래가 빠질 수 없어 뜻을 내긴 했으나 예산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제대로 출연자를 모집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죽 이렇게 해왔는지 문학제 식전행사에서 부채춤 등 고전무용과 타악기 공연을 맡았던 예술단 여성 8명을 노래자랑에 합류시키면서 출연자는 겨우 10명을 넘겼다.
역시 비용 때문인지 심사위원과 사회자도 밖에서 전문가를 부르지 않고 소설가들이 직접 맡았다. 외부 인사라곤 큼지막한 카메라가방을 메고 부산하게 무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지역 일간지 기자가 유일했다. 노래자랑 순번과 출연자 명단 그리고 곡목이 든 팸플릿도 없었다.
노래자랑엔 검정색 중절모자에 밝은 색 계통 잠바를 걸친 초로의 사내가 첫 출연자였다. 그는 원도심 A문학회장이라 자신을 소개했고 소설가들과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다. A회장은 마이크를 잡고도 노래를 바로 시작하지 않고 노래자랑과 관련 없는 문학 얘길 길게 늘어놓더니 마이크는 도로 사회자에게 넘겼다. 당황한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그에게 들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러곤 육성으로 낭송하듯 자신의 출전 곡 첫 소절을 느릿느릿하게 내질렀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까지 무언극 시대의 변사처럼 읊으면서 양팔을 들어 교통순경처럼 몇 번 흔든 후 절을 꾸벅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첫 출연자의 기행은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예술단 중장년 여성들 순서였다. 복장은 모두 앞서 펼친 공연 때 걸친 그대로 무대의상이었다. 이들은 무대에 자주 오르다보니 긴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홀로 아리랑’에 이어 ‘사랑의 미로’가 울려 퍼졌지만 너무 밋밋한 탓인지 좌중은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소설가들 앞에서 다른 행사 때도 같은 노래를 자주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찰랑 찰랑’과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허공’, ‘신사동 그 사람’, ‘자갈치 아지매’가 선율을 탔다. 사회자도 예술단원들 소개는 이름만 부르면서 빠르게 넘어갔다. 8명 중 마지막 곡은 ‘소양강 처녀’로 그녀의 노래에 드디어 박수가 나왔다. 가창력이 우수한 단원을 뒤에 배치한 것 같았다. 네댓씩 단체로 무대에 올라 부채춤과 북을 치면서 고전무용 기량을 한껏 발휘한 예술단원들이지만 개별로 마이크를 잡으니 전공이 아니어서 그런지 노래는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열 번째는 수곤 차례였다. 사회자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후 노래를 시작하라면서 노래는 2절까지 부른다고 했다. 수곤은 예술단원들이 1절만으로 끝낸 노래를 자신에게 2절까지 하라는 게 좀 뜨악했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수곤이 가장 혐오하는 정치권 인사들이 자주 "소설 쓰고 있네!"라며 비아냥대는 게 싫어 소설 쓴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본업인 전기기술자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객석에선 의외란 듯 수군거렸다. 수곤은 그런 분위기를 의식해서 10년 전 밀다원 시대 행사를 처음 추진한 이들을 만난 얘길 두서없이 늘어놓으며 자기소개를 끝냈다. 곡목을 입력하는 청년 사회자에게 수곤은 ‘추풍령’을 ‘봄날은 간다’로 바꾸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시절 그 노래라면 동란 무렵 나온 노래가 행사 취지와 더 어울릴 거라는 판단에서였지만 이 노래엔 그만의 사연과 추억도 있었다.
‘봄날은 간다’는 휴전 다음해에 세상에 나와 불리면서 몸서리치는 참극에 치를 떨었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을 거란 생각을 줄곧 해온 수곤이었다. 노랫말 어디에도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는 대목은 없지만 애절한 사연과 곡조가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것 같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수곤은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가 된 고향인 소도시 변방에 살고 있었다. 불탄 자리에 딱히 판잣집은 아니지만 그보다 나을 것도 없는 외국에서 원조물자로 들여온 부족한 목재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 같은 집이었다. 바로 옆집은 찐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붙어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수곤 눈엔 그 빵집 둘째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곤보다 대여섯 살이나 위였으니 수곤 혼자서만 가슴 졸인 사랑의 감정이었을 터이다.
고향은 당시 인구 5만을 겨우 넘겼을 정도였고 도시의 이름을 붙인 극장이 시내에 딱 하나 있었다. 그 극장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빵집 둘째딸이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봄날은 간다’였다. 수곤은 그때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으니 노래자랑에 나선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자리를 함께 했었다. 아마도 옆집 누나가 출전한다는 소식에 기를 쓰고 찾아간 것이리라. 그러고 그때부터 수곤은 이 노래를 익히기 시작했다. 오래 전 중앙지에도 한국의 100대 시인이 뽑은 애창곡이 실렸는데 설문에 응한 시인 40퍼센트 가까이가 ‘봄날은 간다’를 애창한다고 했다. 그 이유로 노랫말이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온다고 했었다.
노래를 부르며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을 수곤은 부러워했지만 자신은 그게 힘들었다. 그는 그 원인을 히로시마에서의 공습대피훈련이 아닐까 의심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가 생후 1년 3개월에 맞닥뜨린 원자탄이지만 일본 정부는 수곤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주민들에게 대피훈련을 시켰고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들에겐 더욱 심했다는 얘길 들으면서 자란 때문이다.
수곤은 가급적 감정을 억제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무대 왼편 작은 테이블 안에 반주기가 들었고 그 위에 모니터가 얹혀 있었지만 정면을 향한 출연자 시선은 모니터를 직시하기 힘든 구조였다. 가급적 원곡을 노래한 백설희나 훗날 리메이크한 장사익을 비롯한 남자가수들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자신만의 색깔로 부르기로 수곤은 작정했던 것이다. 노래가 둘째 소절로 접어들었을 때 '봄날은 간다'에 향수가 있는 사람들인지 객석 여기저기서 박자를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1절은 연습한 대로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 없이 소화한 것 같았다.
수곤은 1절이 끝나고 간주 없이 바로 2절이 시작되었을 때에야 이 노래는 3절까지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미리 사회자에게 3절까지 부르겠다는 말을 못했으니 순간 갈등이 일었다. 노래를 중간에 그만둔다면 그만큼 감점을 당할 것도 같았다. 사회자 주문대로라면 2절에서 끝내야 하는데 수곤은 결국 3절까지 다 부르고 말았다. 노래를 하면서도 그런 갈등 때문인지 3절에서 음정이 두 군데나 불안정했고 박자도 놓친 곳이 있었다. 그는 짧은 3분 45초가 몇 배나 길게 느껴졌고 등짝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출연자 차례였다. 감색 슈트를 걸치고 무대에 오른 장년의 남자는 얼굴이 스마을이었고 첫 번째 출연자보단 약간 젊어보였다. 검은 테 안경을 코 위에 걸었지만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가 들고 나온 노래는 ‘잊혀진 계절’. 그는 성량도 풍부하여 고음처리에 전혀 무리가 없었고 중저음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3분이 약간 넘는 그의 열창은 객석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노래자랑 결과를 발표하는 심사위원장이 예술단원 8명은 심사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발표했지만 지금까지 매번 그렇게 해왔는지 노래를 부른 이들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예상대로 마지막 출연자가 1등을 차지했고 수곤은 2등을, 기행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도 그 뒤를 이었다.
수곤은 지금까지 매년 문학제를 펼쳐오면서 대회를 주관한 소설가들도 자축하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번엔 무대 근처에 얼씬도 않았다. 그 대신 소설가들은 피란시절 추억이 밴 노래들을 추억하는 글로 문고본 책자를 만들었다. 그 첫 번째가 「유성기 속의 난쟁이」였다. 유성기 시대를 체험한 세대는 왜 난쟁이가 등장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3년 넘게 이어진 동란이다 보니 전쟁 중이지만 농촌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이는 행사가 벌어졌다. 마을회관에 모인 아이들이 노랫소리가 나오는 유성기가 신기해서 다가가자 유성기를 그곳에 갖다놓은 어른이 “어라, 가까이 가지 마라. 그 통 속에 난쟁이 가수가 들어 있다. 시끄럽게 하면 놀라서 노래를 못 부른다.” 했었다.
「삼팔선을 탄한다」는 배꼽을 잡게 하면서도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90년대 초,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하와이를 찾은 소설가와 동료들. 이들은 낮엔 가이드를 따라 명소를 둘러보았고 저녁식사에선 술도 한잔씩 걸치고 노래방을 찾았겠다. 한국과 달리 이국 노래방의 너무나 고즈넉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처량하고 한탄스런 소리.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이나요….”
그 소리는 얼마나 구슬프고 청승맞던지, 고국에서 7천 킬로나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 낭만의 섬 하와이의 어두운 허공에 느닷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삼팔선 노래는 뭔가 잘 맞지 않는 퍼즐조각 같은 느낌을 소설가에게 주었다.
“아아…아아아…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어떤 감정의 격앙이나 흥분됨이 없이 노래는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가는 바삐 노래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빤득빤득 빛나는 양주병들로 가득 찬 바에 앉아 소리 없는 농담을 즐기고 있는 필리핀계 두 여자 앞에서 한 사내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희멀쑥한 사내. 예순쯤 되었을까, 아니면 일흔이나… 몸에 착 달라붙는 회색 바지와 흰색 구두, 푸른 줄무늬가 그려진 긴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한 노인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선 어떤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으나 일행의 가슴을 단숨에 후려잡은 그 청승맞은 노랫가락은 그의 손에 쥐어진 검정색 마이크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다아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마안…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낄….”
노인의 노랫소리는 굽이굽이 이어진 고개를 넘어가듯 아스라이 잦아들었다. “저 노인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하와이까지 와서 원한 천릿길이 뭐야, 원한 천릿길이. 김 팍 새버렸잖아 이거.”
침을 내뱉는 듯한 소설가 동료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와이키키 비치의 감미로운 풍광과 물결이 이는 듯한 훌라춤 율동에 흠뻑 젖어 있던 이들에게 노인의 때아니게 한 서린 노래는 짙은 이질감을 주었다.
“꿈마아다… 너를 찾아아….”
이들이 하와이를 돌면서 공들여 쌓아놓은 것들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불쾌하고 거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머쓱한 감정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서 떨어져 나온 수많은 검불처럼 가슴속으로 가라앉았다. 소설가는 문득 낮에 여행 가이드로부터 들은 한국 이민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젊고 잘생긴 사나이의 사진 한 장을 들고 긴 항해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18세의 꽃다운 처녀. 정작 그녀를 맞이한 이는 사탕수수밭의 가혹한 노동 끝에 환갑노인의 몰골이 된, 푹 삭은 사내였다는 이야기. 일행은 맥주를 가져온 바텐더에게 노인의 정체를 물었다.
“여기 교포이신데, 고향이 황해도 어디신가 봐요. 6.25때 서울로 피란 내려와 어찌어찌 하와이까지 오시게 되었다는데, 심심하면 찾아와 저 노래를 부르시네요. 어떤 땐 눈물을 줄줄 흘리시기까지 해서, 저희는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 기분 상하실까봐 은근 걱정이지요. 그렇다고 오시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날이 선 검정색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20대 한국 청년은 그들 탁자에 잔을 늘어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말을 잊은 그들은 모두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단숨에 마셔버렸다. 노인의 청승맞은 노래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서언을 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