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시인이자 관료였던 이안눌(李安訥) 선생이 청계천 수표교에서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에 열중하다가 본의 아니게 또 한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안눌(李安訥) 선생은 4379수의 시를 남긴 대시인이자 청렴함 관료였다. 그가 두 명의 아내와 살게 된 사연이다. 조선시대 풍속에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는 큰 축제였다. 이것을 답교(踏橋)라고 하는데, 건강과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다. 조선 선조 때에도 서울 청계천 수표교에 이런 다리밟기가 있었다. 이안눌이 장가를 든 지 사흘, 바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이 좋은 밤에 이제 신부 재미는 그만 보고 대보름 다리밟기를 해볼까? 다리밟기에 나온 사람들도 구경하고, 하하하.”
그 날 밤 신랑 옷을 입고 청계천에 나간 이안눌은 기분이 도도해져 한 잔, 두 잔, 석 잔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셨다. 너무 많은 술을 마신 그는 취기가 들자 어디서 좀 쉬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리 밑에서 잠깐 잠을 청했다. 한참 후,
“어 잘 잤다”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난 안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에서 깬 안눌은 자기가 다른 집 신부의 방에서 밤을 보낸 것임을 알게 됐다.
“청계천 수표교 밑이 이렇게 따뜻하고 좋을 수가 어디 있나. 아이구, 여기가 어디야? 진짜 방이네. 그러면 우리 신방인가, 누가 나를 우리 집에 데려왔나? 어디 우리 신부를 보자. 아이구 이거, 이거... 아니네. 우리 신부, 내 각시가 아니네!”
화들짝 놀라 일어나 보니, 웃통도 벗고 바지도 벗고 낯선 여인과 자고 있었던 것이다. 같이 자던 여인도 깜짝 놀랐다.
“아이구, 에그머니나, 누, 누, 누구세요? 당신 누구 누누 누우구우...”하고는 까무러쳤다. 안 그럴 것인가? 밤새 같이 잔 남자가 생판 모르는 남자, 안눌도 그렇다, 밤새 잔 여자가 남의 여자. 이 일을 어찌하란 말인가?
하는 수가 있는가? 안눌은 놀라 자빠진 그 여인을 흔들어 깨웠다. 이윽고 그 여인은 숨을 돌려 살아났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신부도 시집온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신랑하고 변변히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였는데, 그 날 밤 그 집 신랑도 다리밟기 구경을 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으니까 신부집 하인이 새신랑을 찾아 나서고 신랑 복색을 한 신랑이 수표교 다리 옆에서 자고 있으니까 업고 와서 신방에 넣었던 것이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신부는 신랑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해 따뜻한 아랫목에 뉘였다. 진정한 첫날밤이었다.
이 안눌은 무릎을 꿇고 남의 신부에게 빌었다.
“잘못 했소이다. 본의 아니게 어쩌다가... 실수를 저질렀소이다. 어쩌면 좋을꼬? 나도, 색시도 없던 일로 하고... 비밀만 지키면 될 것 같소이다. 자, 그럼 저는 뒷문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빨리 나가겠소이다.”
그러나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안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저를 죽이고 가든가, 스스로 제가 죽는 꼴을 보시고 가셔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저를 데려가십시오.”
“저는 장가를 가서 각시가 있는데...”
“이것도 저의 팔자소관입니다. 엊그제 혼인한 신랑을 모른 척하고 평생 살수는 없고.... 댁은 이미 장가를 가셨으니 저를 소실로 맞아주소서.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나 역시 고의로 저지른 것이 아니고, 새댁도 화냥끼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는 수 없이 내가 댁을 소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엄친 슬하에 본 각시가 있고 벼슬도 살지 못한 처지에 어찌 두 아내를 거느리리요?”
“어떻게든 저는 당신을 따라가렵니다.”
이리하여 안눌은 서둘러 신부와 같이 그 집을 몰래 빠져 나와서 그 길로 이모 집을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과거에 합격하기까지는 서로 만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한편 이튿날아침 신부집에는 난리가 났다. 밤새 안녕이라고 신부는 안녕은커녕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온데간데없는 외동딸, 새 신부, 행복에 겨울 새댁이 첫날밤에 없어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어쩐단 말인가? 그래서 어찌 어찌 알아보니 하인이 다리밟기에서 엉뚱한 신랑을 진짜 신랑으로 알고 신방에 집어넣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 말을 어이 밝히랴. 그 업혀온 신랑은 진정 누구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신부집은 새신부가 갑자기 죽은 것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신부가 간밤에 급사하였다.”
그러고서 빈 관을 챙겨 진짜 관으로 삼고 가짜 울음을 진짜 울음으로 삼고, 이렇게 해서 주위 이목을 피하였다. 하지만 사라진 딸을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허허, 수심이로다. 재난이로다. 이유 없이 말도 없이 사라진 딸아, 너는 살았느냐, 죽었느냐?
그런 중에도 세월이 흘렀다. 이안눌은 스물아홉 살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출세도 출세지만 이제 그 소실을 만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이날 이때까지 안눌은 그 소실 이야기를 아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고 난 안눌은, 몇 해 전 우연히, 정말 이상스럽게 하룻저녁 꿈속같이 연분을 맺은 그 소실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으니 오죽 좋을까? 그 만남을 이루 필설(筆舌)로다 표현할 수 있을까?
소실도 그렇다. 하룻밤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몇 년간 만리장성을 쌓고 있으면서도 언제 만날 지 기약할 수 없는 처지, 남편 얼굴도 모르면서 남편 이모집에 몇 년을 살고 있으니 그 정황이 오죽할 것인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도 무남독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세월을 보낼 부모를 찾아가서 부둥켜안고 그 동안 사연을 다 쏟아놓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오죽 안타까우랴?
한번은 장옷을 뒤집어쓰고 자기집 문 앞을 지나다가 먼발치에서 시름겨워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기는 하였지만 달려갈 수가 없는 심정이 오죽할까? 첫날밤도 제대로 못 치르고 팔자에 없는 상배(喪配) 팔자가 되어서 어떻게든 장가를 들었지만 아직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살아 온 남편 신세는 오죽할 것인가?
허허 참, 이런 여인에게 이제 만남이 생기고 행복이 생기고 개구지상복(開口之上福)이 터졌으니 오죽 좋을까? 실로 몇 해 만인가! 기다리면 복이 오누나. 안눌은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앞으로 해결할 일이 두려웠다. 우선 부모님과 소실의 부모에게 어떻게 사실을 말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있다. 본처에게 숨겨둔 또 하나 아내가 있다는 말을 어이 다해야 하는지...
지혜로운 안눌은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였다. 아버지도 용서하고 어머니도 받아들이고 본처도 양해하고, 처부모도 수용하였다. 원래 소실 집은 대대로 역관(譯官)을 해온 집안으로 장안에서도 잘 알려진 부자집안이었다. 이 소실 또한 본처 못지않게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다. 본처와 소실은 시앗싸움이라고 해서 싸우게 마련인데 이 안눌 집안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구순하게 잘 지냈다. 남자로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두 계집 데리고 사는 남자치고 속이 시커멓게 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속담도 있는데 말이다.
이안눌 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꾸렸던 「동악시단」은 지금 서울 중구 남산 아래 동국대학교에 있었다. 이안눌의 현손(玄孫) 이주진(李周鎭)은 조상의 집터를 기념하려고 암벽에 “東岳先生詩壇”이라는 여섯 글자를 새겨두었는데, 1985년 동국대학교가 기숙사를 지으려고 할 때 암반을 그대로 떴으나 그만 깨져버렸다고 한다.
이안눌은 노후에‘동악시단’을 꾸미고 당대의 문장인 권필, 윤근수, 이호민 등과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신선같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말년의 이런 유유자적한 생활은 당시 장안에서도 내로라하는 부잣집 무남독녀였던 색시(수표교 답교놀이의 주인공인 남의 새색시를 말함) 물심양면에 걸친 뒷바라지 덕택이었다.
동악 선생은 택당 이식의 숙부로서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를 산 분이다. 시인으로, 정치가로 살았는데 사후(死後)에는 청백리(淸白吏)로 추증되었다. 선생은 무려 4379수의 한시를 남겼다고 한다.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이른바 문치주의를 꽃피웠다는 선조의 시대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 동악시단은 식자(識者)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필사본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고적조를 보면,
“동악시단이 남산 기슭 먹적골에 있다. 옛날 동악 이안눌이 집 동산 기슭에 단을 쌓고 여려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었는데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이 단을 입에 올리는데. 단 옆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홑꽃잎의 홍매나무(紅梅樹)가 있다.(東岳詩壇在南山下墨洞 昔李東岳安訥築壇于家園麓 與諸文士賦詩甚盛 至今遺墟人皆稱道之此壇 傍有單瓣紅梅樹自中國淂種者也).”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도 어김없이 동악시단을 언급하고 있다. 제택조(第宅)에는 “비파정 위에 시단이 있다”고 하였다. 이제는 비파정(조선 후기 최대 군영인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무예를 훈련하는 곳)도 시단(詩壇)도 시루(詩樓)도 홍매(紅梅)도 없다.
말 나온 김에 석주 권필과 동악을 알아보자.
당대 사람들이 석주 권필(참고로 석주 권필은 부안 기생 이매창과도 시문을 나눈 시인이다)은 이백에 비견하고, 동악 이안눌은 두보에 비견할 만큼 빼어났다고 한 동악은 어떤 시를 썼던 것일까. 정조의 저서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정조가 평한 동악과 석주의 시평이 전해진다. 동악을 평한 것을 보면,
동악의 시는 갑자기 보면 무미한데 다시 보면 오히려 좋아진다 / 東岳詩, 驟看無味, 再看却好
비유하면 근원이 샘물이 콸콸 솟아 일시에 천리까지 쏟아져 / 譬如源泉渾渾, 一瀉千里,
횡으로나 종으로나 스스로 문장을 이루네 / 橫看竪看, 自能成章.
또 정조는 석주를 어떻게 평했을까?
석주의 시는 비록 웅혼함은 모자라지만 매끈하고 아름다워 일미(一味)이며 / 石洲雖欠雄渾, 一味裊娜,
이따금 놀라게 하여 깨우쳐주는 곳이 있다 / 往往有警絶處.
‘성당(盛唐)의 수준이다’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지만 / 謂之盛唐則未也,
‘당풍(唐風)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크게 폄하한 것이다 / 而謂之非唐則太貶也.
시문(詩文)이라면 한가닥 하는 정조의 평이니 두 분 다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동악의 시 두 편만 읽어 보자. 먼저, 사월 십오일(四月 十五日)이라는 시 한편이다. 시는 동악이 임진왜란 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을 쓴 것이다.
사월이라 보름날 / 四月十五日
이른 아침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 平明家家哭
천지는 변하여 쓸쓸해지고 / 天地變蕭瑟
싸늘한 바람은 숲을 흔든다 / 凄風振林木
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어보았네 / 驚怪問老吏
곡소리 어찌 이리 구슬픈가 / 哭聲何慘怛
임진년에 바다 도적 몰려와서는 / 壬辰海賊至
바로 오늘 성이 함락되었답니다 / 是日城陷沒
이때 다만 송 사또께서 / 惟時宋使君
성벽을 굳게 하여 충절지켰지요 / 堅壁守忠節
백성들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 闔境驅入城
한꺼번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 同時化爲血
쌓인 시체 밑에다 몸을 던져서 / 投身積屍底
천백 명에 한둘만이 살아남았네 / 千百遺一二
그래서 해마다 이날만 되면 / 所以逢是日
상을 차려 죽은 이를 위해 곡을 한다 / 設奠哭其死
아비가 제 자식을 곡을 하구요 / 父或哭其子
아들이 제 아비를 곡을 하지요 / 子或哭其父
할아비가 손주를 곡을 하구요 / 祖或哭其孫
손주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 孫或哭其祖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 亦有母哭女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 亦有女哭母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 亦有婦哭夫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 亦有夫哭婦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 兄弟與姉妹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합지요 / 有生皆哭之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 蹇頞聽未終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네 / 涕泗忽交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 吏乃前致詞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 有哭猶未悲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 幾多白刃下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데요. / 擧族無哭者
4월 15일날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늙은 아전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이날이 바로 동래성이 함락되어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고 거의 모든 백성은 도륙당한 날이었다. 그날이 다가오니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두보를 좋아한 동악은 두보의 시풍을 따라 이른바 시로 쓴 역사(詩史)를 쓴 것이다. 목민관으로서 아픈 백성들과 마음을 함께 한 것이다. 절창(絶唱)이다. 또한 금정산 범어사에 가면 대웅전 옆 바위에 동악의 시들이 쓰여 있다. 동악이 동래부사 시절 범어사에 가서 남긴 흔적이다.
다른 시 한 편 더 읽어 보자. 동악도 석주처럼 동대문을 통해 유배길에 오른 때가 있었나 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던 때 동악은 관망했다고 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인조실록을 보면 1624년(인조 2년) 3월 기사에 위기에 처한 동악 관련 기사가 나온다.
“헌부가 아뢰기를: 행 부호군 이안눌은 이괄의 변란 때에 몰래 관망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여러 가지 패역스런 말을 공회석상에서 함부로 하였으니, 그의 임금을 잊어버리고 적에게 뜻을 가진 죄에 대해서 하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憲府啓曰: “行副護軍李安訥, 當适變之日, 潛懷觀望之心, 敢以許多悖逆之言, 肆發於衆會之中, 其忘君向賊之罪, 不可一日容貸)”
그렇게 해서 동대문을 지나며 석주를 그리는 애도시 한 편을 쓴다.
미천한 신하 죄가 커서 죽어 마땅하건만 / 微臣罪大死猶宜
먼 곳으로 내치시니 성대임을 알겠네 / 竄逐遐荒識盛時
동대문 밖 꽃 떨어진 곳을 지나면서 / 行過郭東花落處
고인 시재(詩才) 생각에 지금도 슬퍼지네 / 故人詩骨至今悲
동악이 친구이자 같은 문인인 석주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는 한두 편이 아니다. 그런 두 사람도 이제는 옛 책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모두 시간 속으로 떠나갔다.
내친김에 석주의 시를 읽어 보고 갑시다.
궁류시(宮柳詩)란 제목으로,
宮柳靑靑花亂飛(궁류청청화난비) / 궁궐의 버들은 푸르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滿城冠蓋媚春暉(만성관개미춘휘) / 온 성안의 벼슬아치들은 봄빛을 받아 아양을 떠는구나.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 조정에서는 태평성대의 즐거움을 함께 축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 누가 위태로운 말을 한갓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는가?
궁류(宮柳)는 광해군의 외척으로 강하게 세력을 부리던 류씨(柳氏)들을 가리키고 포의(布衣)는 무도하게 정치를 풍자한 임숙영(任叔英)을 지적한 것으로 권필(權韠)이 다시 조정을 풍자한 시입니다.
권필이 부안기생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를 보자.
1610년 6월 초, 매창은 민가를 돌아다니다 부안의 어느 작은 초가집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허균은 그해 시험 감독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갇혔다가 함열로 귀양까지 간다. 권필은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며 친구의 애인이었던 매창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그 중 한편이다.
天香女伴 / 천향여반에게 주다
仙姿不合在風塵 / 풍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신선의 자태
獨抱瑤琴怨暮春 / 홀로 요금을 안고 저무는 봄을 원망하누나
絃到斷時腸亦斷 / 현이 끊어질 때 간장 또한 끊어지나니
世間難得賞音人 / 세간에 음률을 아는 이 만나기 어려워라
-권필의 두편의 시는 우리 카페 2019.10.09.에 올린 글입니다.
권필 죽음의 원인은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시(詩)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의 시가 발견되어 친국(親鞫) 받은 뒤 혹독한 고문 끝에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그의 죽음은 이후 인조반정의 한 구실이 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위경천전》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