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훈의 멋·맛·쉼] 9세기 경주는 요즘의 뉴욕? 육상·해상 실크로드 종점
헤럴드경제 2023.05.24
[헤럴드경제=함영훈 선임기자] 사학자 일연의 삼국유사엔 ‘신라 전성기엔 서라벌에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金入宅:황금을 입힌 집) 35채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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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신선암의 일출[경주시청 제공, 박영희 작가, 5회 사진전 금상 작품] |
지금은 3인가구가 일반적이지만 1960년대만 해도 7~8인가구(당시 합계출산율 ‘5~6’)가 대세였다. 1964년 1차 산아제한 때 ‘3자녀’가 출산권고 숫자였고, 1973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새로 나왔으니, 1980년대초~1990년말까지도 4인가구가 주류였다.
다시 일연의 8~9세기 경주 묘사로 돌아가 보면, 당시 자녀수가 경제력이자 권력이었으므로 경주 내 17만 8936호를 6인 가족으로만 잡아도 107만 3616명이고, 어르신 한 명을 모시고 살아 7인 가족으로 잡으면 125만2552명이라는 인구수가 나온다.
옛날 참 많았던 두 자릿 수 대가족, 귀족들의 1가구 2주택 등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도, 9세기 서라벌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었다는데에 이견이 없다. 경주 남산과 서라벌 중심가 까지 20리는 되는데, 9세기 남산에 놀러갔던 행락객들이 갑자기 폭우에 직면해도, 산 아래 첫 기와집에 들어서는 순간 집에 갈 때 까지 빼곡이 들어선 집들 처마 밑을 통해 비를 맞지 않고 귀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인구의 수도권 집중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방어선이자 불로동 고분군이 있을 정도로 중요 거점이던 달구벌(대구-달성), 무역의 거점이던 우시산국(울산), 수산자원의 보고인 실직국(삼척-동해-태백-울진-영덕), 경치놓은 농업지역 문경-의성에도 인구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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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통한 서역 카페트 제품이 국내에 범람하자 잠시나마 금수조치를 취했던 흥덕왕의 묘는 서역인 무인 석상이 지킨다. |
경주가 많은 인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실크로드의 종점, 그것도 육상 실크로드, ‘V’자형 해상 실크로드 두 개 모두의 종점 혹은 기점 역할을 하는 거점도시였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가야,신라의 영향권에 있었던 나가사키, 가고시마, 우리나라 왕조문화를 처음 이식받았던 미야자키는 메인 종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경주는 그리스 아테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사라센제국의 수도 바그다드, 당의 장안(지금의 시안)와 함께, 문물과 풍요가 넘치는 세계 5대도시 중 하나였다고 많은 사학자들은 전한다. ▶헤럴드경제 2014년 2월 11일자 ‘황룡사거리는 ‘강남스타일’…세계 5대도시 서라벌의 추억’ 참조
당시 베니스와 북경은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란의 이스파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가 G7 반열에 들 만 했다.
한국문화재재단과 우즈베키스탄 고고학연구소가 사마르칸트 ‘크즈라르테파 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조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의 공적 원조 차원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앞으로 현지에서 문화유산 보존·관리 센터 구축, 크즈라르테파 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조사를 통한 현지전문가들의 역량강화, 사마르칸트의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 및 인벤토리 구축, 사마르칸트 문화유산 연계 관광자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한다.
이곳에 살던 소그드(Sogd)인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스키타이계열의 유목민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우리나라 까지 오가며 실크로드를 누비던 중앙아시아 유목민과 나라를 잃고 동진한 페르시아인들이 정착한 ‘소그드’는 우리말로 ‘호(胡)’라고 표현한다.
경주 용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물토용 28점은 하나같이 개구쟁이 스머프 모자를 닮은 호모(胡帽), 즉 앞으로 약간 휜,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다. 한때 신라 등 삼한에선 이 ‘호(胡)’라는 접두어를 붙이는게 유행이었다. 선진,첨단이라는 뜻이다. 궁중음악은 호곡, 귀족의 식단은 호식, 유행에 앞서나가는 귀부인의 패션은 호복, 절세미녀는 호희라고 부르는 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영어를 차용해 ‘히트상품’, ‘히트곡’의 용법과 비슷하다. 지금이 한류라면 당시는 호류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실크로드를 누비며, 대릉원에서 발굴된 로마의 유리제품과 ‘V’자 해양 실크로드의 변곡점인 인도네시아 자바섬 구슬, 흥덕왕이 한때 사치품 범람을 억제하고자 금수조치를 취하기도 했던 투르크(서진한 돌궐) 양탄자를 수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경주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출토된 장식 보검은 사마르칸트 일대 사산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우리와 공유하는 문화유산이다.
851년 아랍 사학자 술라이만은 신라의 풍요로운 삶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고, 966년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당시 고려)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다”고 묘사했다. 1154년 모로코 출신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신라(당시 고려)를 포함하는 세계지도를 그려넣은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저서에서 “그곳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다. 그 가운데서 금은 너무나 흔해, 심지어 개나 원숭이의 목을 묶는 줄도 금으로 만든다”고 기록했다.
실크로드의 종착점으로 아름다운 나라였기에 육상, 해상 국제 통상에 종사하던 많은 외국인들이 신라(후엔 고려)에 눌러앉았다는 얘기다. 1100년전 서라벌은 요즘으로 치면 뉴욕 같은 모습이었다는 얘기다. 처용은 헌강왕이 울산에서 자욱한 안개속에 길을 잃어 힘겨워할 때 탈춤으로 위로하다 발탁된 중견관리이다. 신라의 귀족과 왕실은 신체 건장한 아라비아, 페르시아 무역상-외교관들을 대거 귀화시켜 무관을 시키거나 생활문화 아키텍쳐를 개선하는 컨설턴트로 기용했다.
황룡사, 호원사 등지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눈 맞은 사람들끼리 국제결혼도 빈번했다. 그리고 서역인들은 괘릉, 흥덕왕릉 등 왕실 무덤의 무인석상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몇 해 전부터, 중국이 일대일로 루트를 임의로 만들어 실크로드라고 주장하며 약소국에게 옛 인연 운운하며 ‘투자할테니 이권을 달라’며 유혹하고 있다.
실크로드에서 한국을 빼고 자기 입맛 대로 왜곡한 중국의 제국주의적 전술은 마음의 출발이 나빠서였는지, 속속 반기를 드는 나라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때, 우리도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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