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보르스카를 읽는 밤 / 홍우식
한번 만나보고 싶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나는 쉼보르스카가 된다 쉼보르스카가 바라보았던 사물들이 보이고
내가 바라보는 사물들은 죽죽 내리는 빗소리가 섞여 찌그러지거나 뭉개져 버리거나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
납작해져서
그의 곁에 있는 것처럼 그가 바라보는 사물들이 보이고
동그라미 속의 노란 도시 키 큰 나무들이 두 줄로 서 있는 거리에 가 있다. 그 길은 걸어가고 있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내 중심은 낮아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빙글빙글 돌던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다가 기어 다니다가 날아다니다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는 동그라미 속을 드나들다가
글자들은 벌레처럼 기어 다니다가
내 눈에만 보이는 그림들이 된다.
계절과 계절 사이
지금은 밤, 머릿속은 텅 빈 항아리가 되어 봄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성하였다는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고 있다.
ㅡ웹진 《시산맥》 (2024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