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사도행전 4:10-22
제목 :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용기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귀한 날 이 복된 날 저희들을 주의 전에 모아 주시고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또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님, 부활의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떤 모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번 부활절에는 예수님처럼 지내려고 합니다.'
어머니기 묻습니다.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아들이 답하기를,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이 땅에서 사라지셨다가 주일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셨으니,
저도 금요일에 사라졌다가 주일이 지나고 나타나겠습니다.'
어머니가 답합니다. '그래? 그럼 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처럼 너를 맞이할 거야.'
아들이 묻습니다. '아이, 어머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마리아는 무덤에서 놀라서 도망갔으니 난 너를 보면 도망갈 거야.'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합니다.
'난 앞으로 베드로처럼 우리 가족을 대하겠소. 둘 다 절대로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오. 그것도 세 번이나..
앞으로 아는 척 하지 마시오'
▣ 들어가는 말 : 부활주일의 외침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참으로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고백이 초대교회 때 교인들이 했던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활 주일 때면, 모여서 예배 드릴 때면 늘 인사했던 게 바로 이 인사였어요.
우리 오늘 다 함께 다시 한번 외쳐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초대교회 문헌에 남아있는 초대교회 인사입니다.
우리는 지난 2월 25일 주일에,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담대함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당시에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렇게도 담대하게, 적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교 지도자들을 공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님의 충만하심 때문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4장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그러면서 외쳤어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의 전문가들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그들의 용기의 근원에 대해서 또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용기
베드로와 요한의 그 담대함, 그 용기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나?
본래 종교 지도자들이 말한대로
이 제자들은 율법을 정식으로 배우거나 혹은 학교 교육을 받은 바가 없는, 학문 없는 범인이라 그랬어요.
그 학문 없는 범인은, 그냥 직역을 하면 '일자무식한 사람들이다' 그런 말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렇게 담대하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변론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그들의 능력과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13절)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예수와 함께 있음] - 이것이 바로 저들의 용기의 또 하나의 원천이었던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제자들은 과거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배우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생활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쳤어요.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기에, 그렇게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 하면서 배웠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다 도망갔어요.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고요. 부활 신앙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을 가 보면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차이 나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故 김활란 박사는 자신이 죽거든 장례식 때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를 불러 달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여러분 이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부활을 믿는 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그를 두렵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자의 복이지요. 이렇게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또 그로 인한 나의 부활을 믿기에,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의 담대함과 용기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항상 저들과 함께하는 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저들은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저들의 용기의 뿌리가 있는 거예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믿는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에, 40년을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지금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공회 앞에 서 있는 바로 그가 부활의 산 증인이요 증거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뭐라고 말합니까?
14절에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제자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그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켰어요.
아니, 베드로의 증언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일으켰어요.
(사도행전 4장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된 그가 지금 공의회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자들과 함께 공회원들 앞에 서 있음으로 인해서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할 말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랬어요.
자기들도 잘 알고 있는 그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 40년 동안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그가
지금 부활하신 나세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어 자신들 앞에 서 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과 함께 서 있는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의 산 증인이요 증거였던 것이지요.
여러분, 혹시 22절에 보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병이 나은 사람은 40여 세나 되었더라"라고 왜 나이를 밝히고 있는 줄 아세요?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다고 그랬어요. 분명한 것은, 그는 걷기가 불편한 정도의 장애가 아니라
완전히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라는 겁니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
건강한 사람도 다리를 잘 쓰지 않고 오래 버려두면 잘 걷지 못하게 됩니다.
다리를 펴지도 못하게 돼요. 그러니, 40년 동안 앉아 있었다면 이건 두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일어나 걷는 정도가 아니라 뛰기까지 했다 그랬지요.
(8절)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리고 그가 제자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백배 했을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요? -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 바로 그가 옆에 함께 서 있으므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공의회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말 것을 위협했을 때, 이렇게 외쳤던 겁니다.
(19절)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나님 앞에서]
지난날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확실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때로는 비겁했습니다.
때로는 주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다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걸 알기에,
그리고 내가 주님 앞에 있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코람데오" - 하나님 앞에 있다는 그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이제는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뭡니까?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잖아요..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닙니다. 교과서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경험입니다. 분명한 체험입니다.
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간적으로 불가능의 상징이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가 일어나 자신들과 지금 함께 있으니,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제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외칠 수 있게 된 것이었지요.
이렇게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이 주는 용기가 있었기에,
이후에 모두가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기까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올리브나무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에 매 맞아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했어요.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하나같이 죽음을 불사하고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을 어느 것도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 변화된 성도의 모습(삶)이 부활의 증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하지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용기를 잃지 아니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이 나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데...
바라기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이 귀한 부활의 믿음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 변화된 성도의 모습(삶)이 부활의 증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부활신앙과 관련된 너무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변화된 성도의 모습 자체가 부활의 증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병 고침 받은 미문 앞에 걸인의 모습을 통해 발견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받고,
지금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고침 받은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에 직접 소환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가 치유받은 후에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이렇게 낫게 했다고 설교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였어요. 그리고 옥에 가뒀지요.
그리고, 이튿날 제자들을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워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라고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소환되지 않았던 그 치유받은 걸인이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섰어요.
(14절)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당시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이 모인 두렵고 떨리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대제사장 문중이 다 참여한 산헤드린 공회로서
그 산헤드린 공회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죽이도록 결정을 했던 종교 권력집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했다고 해서 지금 사도들을 잡아들인 겁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소환을 당하였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함을 받은 그도 함께 해를 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요.. 위험한 상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벌써 멀리 도망쳤어야 되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걷게 되었으니, 이제 걸인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빨리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지요. 그게 상식이지요.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쩌면 자신도 해를 당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나타나 제자들 옆에 부활의 증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누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권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그가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본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활의 증거요 증인으로 사도들과 함께 서 있는데,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들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 심지어는 정치까지도 쥐고 흔들던
최대 권력 집단이었던 이 산헤드린 공회조차도 어쩔 수 없이 제자들에게
"이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만 하고 그들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보게 됩니다.
그게 뭡니까?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성도는 그 존재 자체로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의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서 있는 그 모습 자체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산 증거였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성도의 모습과 삶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우리 마음의 질병과 강팍하고 완고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또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 완전한 새 사람이 되는 모습은, 주님께서 살아계심의 분명한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는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될까요?
많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의 스타일인데, 한마디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죽는 것, 죄에 대하여 죽는 것,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하여 죽는 것, 세상을 더 사랑하는 가치관에 대해서 죽는 것,
돈과 재물을 향한 욕망에 대해서 죽는 것, 성공을 향한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는 것,
미움과 시기와 갈등의 삶에 대하여 죽는 것, 교만과 편견의 죽음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 주님의 마음을 품고 겸손으로 섬기는 것,
주님의 자기 희생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나도 본받아 나누고 베풀고 양보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6창 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인 부활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정 바라기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은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런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변화된 삶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나가는 말 :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
아직도 죄와 사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합시다.
증거하되, 우리가 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삶의 모습이어야 돼요. 더 이상 말로는 안 돼요.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돼야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던 내 옛 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까?
그리고 이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모습,
그래서 완전히 변화된 나의 모습을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인정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가장 참된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활의 능력으로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