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여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의 단결로 그리스 평화를 이뤄낸 '리시스트라테'
“헬라스 전체의 구원이 여자들 손에 달렸을 정도지요.”
《리시스트라테》 29~30행
고대 그리스 여인들은 그저 남편의 성적 대상이자 아이를 낳아주는 존재일 뿐이다. 간혹 이런 가부장제 사회에 반기를 든 여인들은 대부분 왕족 출신으로 사회의 최상층이었고, 개인적으로 투쟁하다가 악녀로 낙인찍혀 목숨을 잃거나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BC445?~385?)의 《리시스트라테》에 등장하는 여성은 집단으로 행동하여 남성들이 주도하던 정치로 인하여 그리스를 쇠퇴의 길로 이끄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수립한다. 희곡의 주인공 리시스트라테(‘군대를 해산하는 여인’이란 뜻)와 여인들은 씨앗 장수, 계란 장수, 마늘과 빵을 파는 가게 안주인 등으로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의 일반 시민들이다.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던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급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BC 431년에 시작된 전쟁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기를 반복하며 27년 동안 이어졌다. 그 와중에 아테네는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원정을 떠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병이나 부상으로 죽은 자의 시체가 같은 장소에 첩첩이 쌓였으며 그 악취와 기아와 갈증 때 문에 그야말로 생지옥이 7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들에게는 하루 한 잔의 물과 한 줌의 밀 만이 주어졌다. 다른 포로들은 노예로 팔렸으나 아테네인들은 6개월이나 더 방치되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정치적 혼란은 가속되었다. 그리스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전쟁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들어갔지만 전쟁은 지리멸렬하게 계속되었다.
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리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의 힘으로 유혈이 낭자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뤄 그리스를 구원하겠다고 일어선다. 그녀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여성들을 소집하고 대책 회의를 열어 기상천외한 두 가지 묘책을 내놓는다.
하나는 젊은 기혼 여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여성의 매력을 발휘하여 남편을 성적으로 유혹하되 전쟁이 계속되는 한 잠자리를 함께 하지 말자고 한다. 성 파업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나이 든 여자들이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는 것이다. 신전에 비축해 둔 전쟁 기금을 사용하지 못하면 전쟁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리시스트라테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도대체 여인들이 그렇게 민감하고 거창한 일을 해 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여자란 남편 시중을 들어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먹여야 하기 때문에 외출하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또한 여자는 집 안에 들어앉아 꽃으로 장식하고, 속이 비치는 긴 속옷에 샤프란 색 가운을 걸치고, 화장을 하고 비단 구두나 신고 있어야 어울린다고 사설을 늘어놓는다.
리시스트라테는 “나라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렸다. 여자들이 힘을 모으면 그리스를 구할 수 있다.”라고 확신에 찬 말로 그들을 달래 마침내 파업에 돌입한다.
그리스 여자들은 남자들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남자들은 전쟁하면서도 휴전하는 동안에는 집으로 돌아가 부인과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잠자리를 거부하자 성적 욕망을 충족할 수 없어 전쟁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포주에게 의뢰하여 성매매 여성을 구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워 부인에게 사랑을 애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도 성적 욕구가 있었지만 남자들이 전쟁을 끝내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약속된 금욕을 지켰다.
아테네의 늙은 여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에 예배를 들이는 척 모여들어 그곳에 보관된 금고를 장악해 군자금을 봉쇄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여 성문을 굳게 닫아 남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자들의 분노가 오죽할까. “실이나 자아, 머리를 얻어맞아 크게 비명 지르고 싶지 않거든. 전쟁은 남자들의 소관이야.”라며 남자들은 성 문 밖에 나뭇단을 쌓아 불을 질렀다.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여자들이 성문 밖으로 나오자 관리자들이 그녀들을 힘으로 제압했다. 급기야 그리스 아줌마 부대가 물동이를 가져오고, 그녀들을 포박하는 남자들을 때리고 쥐어뜯었다.
남성들은 저 짐승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제우스 신에게 하소연한다.
우리가 먹여 기른 여자들이
집안의 명백한 악惡인 여자들이
신성한 여인상을 차지하고
우리의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빗장과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갔다니 《리시스트라테》 260~265행
남자들은 여자를, 자신의 부인을 하찮은 아녀자 정도가 아닌 ‘악’으로 규정한다. 하찮은 존재는 무시하면 되지만 악은 공존할 수 없기에 대적해서 무너뜨려야 하는 것인가.
또한 아테네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를 ‘우리’의 공간, 즉 남성만의 공간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곳에 모셔 놓은 여인상은 아테나 여신이 아닌가. 남성 신인 포세이돈과 겨뤄 이긴 아테나 여신. 해양 국가 아테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닌 학문과 지혜를 상징하는 아테나 여신을 수호신으로 받든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남자들은 아테나 여신을 성스럽게 모신 파르테논 신전을 남성만의 것으로 독점하고, 여성을 악으로 규정하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리시스트라테는 여성들이 이렇게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남성들에게 토로한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대상이 아니라 여성도 성적 능력의 주체이다. 여성이 받아주지 않으면 남성은 거세 콤플렉스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성은 불태워 죽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는 인간이다.
여성이 성 파업하는 것은 여자가 성적 주체가 되어 남성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를 위한 공적 목적 때문이다. 물론 이 공적 목적에는 사적 염원, 남편과 여인이 낳은 아들이 전쟁에서 영구적으로 귀환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전쟁으로 남편이 떠나면 아내는 독수공방으로 지내야 하고, 처녀는 나이가 많아져 결혼할 수 없게 된다. 남자는 싸움터에서 백발이 되어 돌아와도 젊은 색시를 얻을 수 있지만, 젊은 여자는 때를 놓치면 홀로 늙어가야 한다.
여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 그동안 오래 참고 견디었지만 전황은 계속 나빠져 먹을 것이 없는 자가 속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아내, 어머니, 연인이 아닌 시민으로서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여 전쟁 중지, 평화 수립이라는 공적 행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정 위원이 도시의 재정을 장악한 여인들에게 불만을 터뜨리자 리시스트라테는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집안에서도 우리가 늘 그대들을 위해 금고를 도맡아 왔잖아요.”라며 응수한다. 여자가 집안을 운영해온 사적 경험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시 방어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그치자 그녀는 “그것도 우리 여성들이 맡아야지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방어가 무슨 걱정인가.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해요.”라며 전쟁을 멈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리시스트라테는 실을 잣고 옷감 짜는 일을 정치에 비유한다. 그리스 사회는 왕비도, 귀족 여인도, 서민의 아내도, 여성이라면 종일 실을 잣고 옷감을 짠다. 이 옷감 짜는 원리를 이용하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실타래가 헝클어지면 이렇게 잡아 가지고 물레로 실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이쪽저쪽으로 가르듯이,
우리는 이 전쟁도 그대들이 허락해 준다면
이쪽저쪽으로 사절을 보내 해결해 볼까 해요. 《리시스트라테》 567~570행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중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이 그른 것이 아니다. 하여 한쪽만의 주장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쪽저쪽의 목소리를 모두 들어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면 화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리시스트라테는 칼과 창이 아닌 말과 이성으로서 전쟁 중인 도시 국가들의 남자 행정관을 설득시킨다. 남성적 정치 담론이 무너지고 여성적 정치 담론이 승리하는, 남녀의 권력관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윽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끝내는 평화 협정 조약을 맺는다.
리시스트라테는 여자들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구별을 넘어선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녀는 구상하고, 기획하고, 조직하고, 의논하고, 실행하는 여성 능력자였다. 그런데 《리시스트라테》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성의 행동을 나약하고, 민망스러울 정도로 유치하게 표현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더욱 여자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을 비웃고 꼬집는다. 아테네의 리시스트라테와 스파르타의 람피도를 제외한 대부분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능밖에 가진 것이 없기에 성을 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조롱하며 웃음을 유도한다. 게다가 라케다이몬 사람들과 협상하는 도중에 의도적으로 리시스트라테를 ‘리시스트라토스’ 라는 남성형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리시스트라테》에서 리시스트라테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여 최초로 승리를 거둔 여성으로 그려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리시스트라테와 여성들을 비하하는 편견과 천박한 야유로 작품을 채색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자였던 여성들이 단결하여 전쟁과 경쟁에 몰두했던 남성의 권력에 대항하여 평화를 이끌어낸 여성의 사회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