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사람, 나사렛의 예수, 죽음 목전의 유대땅, 그분의 마지막 1주일
- 예수 예루살렘 입성에서 죽음과 부활까지
존 도미닉 크로산, 마커스 보그 지음/다산초당 펴냄/2012.3.27
■마커스와 크로산, 두 신학자들에게 비평및 질문을 하고 싶은 보수 가치를 가지신 분의 글
https://m.blog.naver.com/ruras/220829643413
▪︎예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 <마지막 일주일> 곧, 고난주간의 언행만으로 그의 진짜 모습을 다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주 중요한 기간인 것은 맞다. 그리고 이때 베푸신 수많은 비유와 말씀과 이적 등은 모두 예수의 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특히 본질을 간파하기는 어렵다.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의 무화과나무가 받은 저주, 성전에서의 논쟁(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최후의 만찬, 가룟 유다의 배신 등을 어느 정도 그대로 옮겨놓았지만, 두 교수의 촛점은,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신념과 열심, 열정에 따른 자기 만족적인 예수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예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청년 예수를 죽음으로 몬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의 패션(passion: 열정 혹은 수난으로 번역)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욕심과 질투, 곧 세상의 죄가 그를 죽였다" 그러므로, 저자는 틀렸다. 성경의 진정한 관점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관점, 죄를 대속한 하나님의 희생양의 관점을 알지 못한다.
▪︎아들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알지 못하고, 어찌하면 아들 예수, 청년 예수, 젊은이가 왜 저런 죽음을 당했을까 하는 말그대로 '역사적 예수'로만 예수를 본다. 그러므로 틀렸다.
▪︎예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예수 자신인가? 세상 죄인가?
▪︎이 책은 예수 당시의 사회를 여전히 폭압적인 로마폭정의 시대로 묘사한다. <역사적 예수>에서 그랬다. 이해는 한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그리고 아시아는 더한 폭압과 폭력의 시대였다.
▪︎굳이 예수를 미화 혹은 각색하기 위해 그런 시대적 배경을 sitz im leben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스라엘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착취했을 것이고, 이때 로마 정부와 권력자들고과 결탁했을 것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했을 것이고... 등등... 불쌍한 세월호 사건이나 백남기 사건처럼...
▪︎그런데 저자는 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정치적 퍼포먼스"로 표현했을까? 정말 정치적 퍼포먼스인가? 그건 그렇게 해석하면 학문적 권위나 지적인 한 번 비틈현상으로 그들의 연구적 성과를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정치적 퍼포먼스로 보면 역시 또 틀리고 만다. 예수는 황제에 대한 풍자나,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어떤 은유적 비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예수는 황제도, 세상도,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이 맞다.
▪︎사실 엄연히 보면(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없다!. 예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 것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어떠한 욕심도 없었지만 충분하고도 당연한 행위, 곧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을 해야만 했다.
▪︎위험한 행동으로 보이는 이 일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이라 담담하면서도 초연하게 이 일을 진행할 뿐이다. 새끼나귀를 타고서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찌보면 그냥 그것, 그대로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정말 예수가 원하셨던 그것.... 헌데 하나님의 나라가 로마제국인가? vs. 유대종교적 권력인가?
아니면 ....
▪︎사도행전 1장은 예수가 부활하신 후에 그가 정말로 이 땅에 남기고 갈 것, 유언과도 같은 절대 금언이 잘 나와있다. 물론 마태복음 28장 후반부의 최대명령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역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압축 요약한 부분이 사도행전 1장인데, 여기에는 세 핵심어가 나온다. 1. 부활 2. 하나님의 나라 3. 성령. 이 셋이다.
▪︎부활은 그가 이미 부활하셨으니,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겠으나, 그러나 너희들도 나(예수)처럼 부활할 것이니 부활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인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존이나 마커스 보그가 말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기대하고 앙망하는 자에게, 그리고 예수의 말을 핏소리처럼 듣고 새기는 자에게 각인되어 있다.
▪︎예수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에 대항하거나, 유대교 대제사장에게 저항하거나 하는 이 세상의 수준이 아니다. 곧 예수가 이 땅에 관심을 두셨고, 이 땅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함으로써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기를 원하는, 사회개혁적 마인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럴 것이었더면 그가 하늘나라로 가실 필요도 없었고, 부활하실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저자들은 틀렸다. 그것도 많이 틀렸다.
■예수는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같은 연장선에서 예수가 강조하려 했던 것은 '정의'가 아니다. 또한 간디처럼 '비폭력'도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역사적 예수를 넘어, 온전한 예수, 진정한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 수 있다.
▪︎정의에 매몰되면 모든 관점을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닌, 구약의 율법적 관점, 옳고 그름을 따지는 평가의 관점에 빠진다. 예수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비폭력의 나라, 정의의 나라가 결코 아니다.
▪︎그는 부의 집중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사두개인의 관점과도 거리가 멀다. 종교적 권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유대 제사장들의 관점과도 거리가 멀다. 예수는 공평한 분배에도 관심이 없었고, 자아의 실현이나 마음의 평정에도 관심이 없었다.
▪︎또한 떡과 물고기를 나눠어 주신 것도, '나눔' 자체에 포인트를 두신 것이 아니다. 과부의 두 렙돈에 있어서도 저자들은 잘못 생각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부자를 비판하려는 것이 주 예수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왜 저자들은, 그리고 적잖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 그 자체에 권위를 두거나 확신을 두지 않고 계속 변죽만 울려대는지 참 답답하다).
▪︎과부의 두 렙돈 사건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가진 것 모든 것을 드린... 곧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드리는 그것이 최고의 헌신, 가장 많이 드린 헌신'이라는 것이다. 곧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 나라는 가장 큰 금액을 낸 성도가 가장 칭송을 받고 대우를 받고, 목사에게 기억이 되고, 교회의 발전과 성전의 건축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가 커지고 넓어지고 왕성해지는 것은 부자의 큰 액수 헌금이 아니라, 빈자라도 다 드리는 그것, 남기는 것이 없는 그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연장선이 닿는 부분이 어디냐 하면, 주님의 죽으심에 있다. 주님 역시도 이 땅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내시고, 쏟아내신 그 표현을 피와 땀과 물을 다 쏟아내신 십자가의 그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5. 대속물로의 예수가 과연 아닌가? 예수를 죽인게 겨우 예수의 열정 때문이었다고?
저자들은 분명히 못을 박는다. 확정해버린다. "예수는 우리 죄의 대속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자신의 패션(passion, 열정)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세상의 죄가 그를 죽였다"는 말도 하지만, 그것이 대속(ransom)은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가장 틀렸다. 본질에서 먼저 확실하게 틀려버린 것이다. 어찌보면 그들이 쓴 책이 학문적으로만 남고, 신앙적으로는 폐기하거나 방어하며 남는 찌꺼기마냥 남는 이유도 이 본질에서 틀렸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것을 분명히 한다. 죄는 인간인 우리가 지었고, 그 벌은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임을!
6. 시민불복종 운동,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나?
뭐 이런 질문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시대적 문제와 현실적 이슈를 통해 예수가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려고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답은 1.~5.와 같다. 저자들은 예수와 종교의 벽을 허무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고민하고 좀 더 하나님의 나라를 상고하기를 원한다. 어쨌든 책은 시민불복종 운동과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책의 목적적 향방을 보자면, 많은 학생이 죽은 세월호 사건이나 선동꾼 백남기 사건에 대해서도 진보적 태도를 취한다. 좋다. 그게 다다.
7. 예수는 저항가이다?
예수는 기존 유대교를 부정하거나, 기존 로마질서체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예수가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대인의 목소리를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었다. 주님은 유대교의 입장을 말할 필요도, 또한 그 반대에 있다고 보여지는 헬라의 입장을, 또 마카비나 요한파나 독립파의 입장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그 이전의 수많은 철학들이 꽃이 피우는 직전의 시대, 곧 철학의 융성시기에 맞춰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역사적 흐름이나 시대적 배경에 맞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를 저항가로만 보는 것은 틀린 것.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제사장들과 충돌한 것이나 동물 제사에 분분한 의견이 보이는 것이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일견 '저항(resistance)'로 보이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이 저항, 그 자체는 아니요, 또한 예수를 '저항가'로 보는 것도 역시 아닌 것이다. 예수는 저항가가 아니라, (저자들은 싫어하겠지만) 섬기는 자, 대속을 하심으로 인류를 섬기는 자로 오셨다.
8. 최후의 만찬을 사회적 통합을 위한 장치로 본다?
당시 사회는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였다. 로마가 그랬고, 유대인 사회가 또한 그랬다. 특히 종교적 신분의 구별로 인해,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두개인들은 파(派)를 이룰 만큼 서로를 구별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 창기, 세리 등과 구별했다. 또한 사마리아인, 갈릴리인 등으로 예루살렘 사람이 아니면 모든 사람을 구별했다. 그런 입장이니 함께 음식을 먹고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은 사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을 책은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길로, 제자들을 초청하는 마지막 시도... 또한 이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이라고 말한다. 책의 이 부분을 처음 한 번 읽으면, 일견 저자들의 의견에 동조가 된다. 그러나 책은 사실 예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최후의 만찬이 의미하는 진정한 종교적 의미를 퇴색시키고, 세상을 위한 사회 개혁적 해석을 시도한다. 불의를 강조하며 이에 반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또 억압을 강조하며 이에 반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죽어야만 새로운 삶(새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꼬집어 정리해준다. 그러므로 또 틀렸다.(정말? 왜 나는 틀렸다를 이렇게 강조하지?) 책을 통해 저자는 확실히 화려한 로마의 길을 가지 말고, 초라해보여도 주 예수의 죽음의 행렬에 동참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겉은 맞으나 속은 틀렸다. 같은 방향일지라도 가는 목적이 다르다. 가는 사람의 머리 속에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며 동참하고 행렬로 나아간다. 최후의 만찬은 사회적 통합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냥 성경의 그것 그대로를 읽으면 된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신의 삶을 포기하고 인간의 죄를 위해 궁극적인 희생을 치른 것을 다시금 기억케 하는 의미로 읽으면 딱 100점이다. 곧 구약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가 모든 애굽의 유대인들을 구원하게 했듯이,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람들의 죄의 속죄, 곧 대속과 구원을 위한 죽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절대로 예수가 대속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본질적인 부분에서 틀렸으니 전부가 틀린 꼴이 되는 것이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고 강의를 해도 성경과 배치되는 면에서는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으로 부각될지라도, 실상은 틀린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시요, 대속자라는 결론을, 저자들은 가장 싫어한다. 우습지? 우습다!
1. 이 모든것이,
갈릴리 동포의 비참한 생활속의 고통에 대한,
'예수의 분노'에서 시작되었고,
유대땅으로 건너가
예루살렘 헤롯성전의 종교권력에 대항하는
소위 성전정화 사건으로 폭팔하게 되었다고
필자는 본다.
2. 그래서 부활하여 세상에 나타나기를 바랬던 예수를
메시아로 받들고, 그리하여 신의 아들에서,
로마의 인신(人神, Human god)인 황제,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강력한 신(神: 하느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 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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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예수도 없고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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