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는 많은 폴리스로 이루어진 사회로
수많은 전쟁을 겪었고, 폴리스 중 특히 아테네는
현재의 학문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찬란한 철학을 꽃피웠다.
초기의 아테네의 정치는 왕정에서 시작하여
귀족정,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이행해갔다.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수많은 폴리스 중 아테네에만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일까?
이 보고서를 통해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발전한
요인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폴리스의 형성
기원전 9세기 내지 8세기에 들어오자 그리스 사회는 점진적으로
안정되는 한편 철기의 사용에 따른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그 해결책으로서 이웃한 촌락의 토지를 정복하려는 위협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인근 촌락들은 결합하여
그 지역 내의 방어하기 좋은 구릉형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도시가 되었다.
또한 산맥들이 그리스 본토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된 도시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고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2. 민주정의 산실, 아 테 네
1)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 ①민주주의 발생 이전의 아테네 정치
아테네(Athens)에서는 기원전 7세기 초에 왕권을
제한하는 귀족제도가 수립되었다. 왕(basileus)은 세습제에서
선거제로 선출되다가 기원전 7세기 초에 그 통치 기간마저
10년으로부터 1년으로 줄어들어, 왕정은 실제로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638년경에는 집정관(archon)을 비롯한 9명의
최고행정관들이 행정, 사법, 군사 등의 주권을 장악하였고
이들은 모두 귀족 중에서 선출 되었으며
귀족회(areopagos)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귀족 과두제는 토지재산이 소수 귀족들에게 집중 소유되어
초래된 결과이며, 또한 이러한 체제는 토지소유를 더욱 더 집중시켰다.
많은 농민들은 부채에 허덕이게 되고 유랑하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초에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솔론의 개혁이다.
그는 법을 새롭게 재정하여 시민의 재산정도에 따라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②민주주의의 시작
그 뒤에 귀족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는
평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위임받았다(508 BC).
그는 첫 번째로 500인회를 조직하였다.
500인회의 구성원들은 30세 이상의 시민 후보자 명단에서
추첨을 통해 선발되었으며 법령 제정 및 행정 최고 감독을 맡았다.
두 번째로 그는 종래의 유명무실했던 민회조직을 개혁했다.
그리하여 민회는 500인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심의를 맡는 등 그 권한이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도편
추방법을 제정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키비아데스가 정적인 휘페르볼로스를 제거하는데
이 법을 악용한 이후로, 아테네인들도 이 법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더 이상 시행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Pericles, 461∼429 BC)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민회가 법령 인준권 이외에
입법권도 갖게 되었고, 민회에서 선출된 10명의 군사위원회가
대체로 행정집행의 최고책임을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송사건을 다루는 일반법원에선 매년 추첨을 통해
선출된 6000명의 배심원들이 배심원단을 구성하여 이들이 판결을 내렸다.
여기까지 아테네의 정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왜, 수많은 폴리스들도, 더 길게 보자면
근대 이전의 수많은 국가들도 시행하지 않았던 민주주의가
기원전 아테네에서는 시행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2)아테네의 경제상황
①해상무역과 산업의 발달
고대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 때문에 여름에는 건조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이러한 기후는 올리브나 포도 등 과일의 재배에는 적합하였으나
일반 곡식의 경작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테네는 산지는 많고 평야가 적은데다 토양도 메마르고 척박했다.
이로 인해 곡물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에게 해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고, 맑게 갠 날에는
시야가 멀리까지 트여서 항해하기에 적합했다.
등대도 없고 항해술도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산재한 섬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본토에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항해하기는 것을 도왔다.
위와 같은 기후, 지형조건으로 인해 그리스에는 일찍이 해상무역이 발달한다.
폴리스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바다로 뻗어나가 이탈리아, 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등지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연결하는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다.
산이 많아 식량이 부족하였던 폴리스들은 지중해나 흑해 연안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 도자기, 무기 등을 수출하고 밀과 노예를 수입했다.
특히 아테네는 3단 노선을 이용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뿐만 아니라 산업을 강조하여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들도 산업에 종사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일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였고
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불운한 시민의 재판사례도 있다.
아테네의 평민들은 이처럼 무역과 산업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했다.
부유한 평민들은 전쟁 장비를 구입하여 전쟁에 나갈 수 있었고
전쟁의 주축은 점차 귀족에서 평민으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평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상응하는 정치적 권한을 요구하게 된다.
②경제노동을 책임졌던 노예들
아테네의 정치, 경제적 번영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노예제도이다. 아테네의 전체인구는
30~40만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4만 명 정도가
시민이었으며, 나머지는 여자와 노예, 외국인이었다.
노예의 비율은 전체인구의 30~35%정도였는데, 이 노예들이
경제노동을 담당해줬기에 아테네의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민회는 1년에 약 40차례, 9일에 한번 꼴로
빈번하게 열렸는데, 시민들은 민회뿐만이 아니라
재판에도 참여해야 했고, 500인 협의회의 일원으로
추첨이라도 되면 1년의 10분의 1정도는 행정을 담당해야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은 주로 집회, 법정, 군대 등에서 소일하였다.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려면 경제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던 것이다.
3)왜 스파르타에는 민주주의가 꽃피지 못 했나- 아테네와 스파르타
①아테네와 스파르타 특성비교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폴리스는 그 정치적 경제적
체제에 있어서, 아티카(Attica)형과 라코니아(Laconia)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티카형 폴리스는 대체로 이오니아인들이 건설한
국가로서 상공업을 주로 영위하며 민주적 개방사회로 발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도리아인 계통의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농업에 의존한 보수적·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아티카형 폴리스는 아테네에서,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스파르타에서 각각 가장 대표적인 사회체제의
발전과정을 나타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②토착민족을 억압해야 했던 도리아인들
스파르타(Sparta)는 순수한 도리아인(Dorians)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다.
그들은 라코니아 지방에 무력으로 침입한 이래 소수민족으로서
오랜 세기동안 절대다수의 토착민족을 지배해야 했다.
스파르타는 주로 3종류의 신분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도리아인들, 즉 스파르타시민이고
노예인 헤일로타이 또 하나는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다.
여기서 페리오코이는 납세의 의무를 지닌
상공업자로 이들 또한 군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스파르타시민의 권리인 참정권은 없었다.
스파르타시민은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코이의 20분의 1밖에 안 되는
인구였으므로, 자연히 피지배층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런 두려움은 무시무시한 군국주의를 낳았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위험사상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였다.
스파르타는 보수성·폐쇄성·군국주의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지방의 주요 도시로서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고 북동쪽과 서쪽이 산악으로 막혀있었으며
무역을 할 항구가 없었으므로 외부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또한 부족한 식량을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던
아테네와 달리 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있었던
스파르타는 외부와 접촉할 필요성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이유로 스파르타는 군국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4)아테네의 철학자들-철학자들의 사상이 아테네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
그리스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살아 숨 쉬었고
이들에 대한 연구와 해석, 그리고 깊은 이해가 수반되어야하므로
아마 이를 다루려면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철학부분에서는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주로
그들의 철학관, 정차사상, 국가론 정도를 볼 것이다.
①플라톤
플라톤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이 세 부분은 이성, 용기, 욕망 즉. 신적인 이성, 지각 세계에 속하는
고상한 부분인 용기, 수동적이기 때문에 열등한 부분인 욕망이다.
이 세 부분을 플라톤은 "마차 끌기"에 비유한다.
이성은 마부에, 용기는 온순한 말에, 욕망은 완강한 말에 상응한다.
플라톤은 세 부분 각각에 덕을 한 가지씩 할당한다.
인간의 영혼에서 이성적인 것의 임무이며 그 덕목은 지혜이다.
이성에 활기 있게 복종하는 것은 용기의 임무이며
그 덕목은 불굴의 의지이다.
욕망도 이성의 요구에 굴복하며 그 덕목은 절제이다.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진 것에 네 번째 덕목으로 정의이다.
플라톤의 국가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의 국가관은 인간은 혼자서는 특정한
활동에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플라톤의 국가관이 분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듯이
국가도 세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배자 계급은 시민의 올바른 생활방식을 염려할 수 있는
현자의 계급으로 영혼의 지적 부분, 이성에 해당한다.
방어자 계급은 국가의 방어를 염려하며
영혼의 감각적 부분, 즉 용기에 해당한다.
생산자 계급은 수공업, 상업, 농업에 종사하며 공동체의
의식주를 담당하며, 영혼의 또 다른 감각적 부분, 욕망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세 신분이 각자의 본분에 맞고 조화로울 경우
그 국가를 정의로운 국가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 국가의 통치자로 철학자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인(哲人)왕이 현실적으로는 나오기 힘들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차선책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 영혼의 본성과 습관에 대한 지식을 갖춘
'입법가'에 의해 비인격화된 합리적 권력인 '법'을 제정하고
이러한 법에 의하여 운영되는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국가가 전체국가(l'Etat totalitaire)이며
이런 국가의 헌법적 정체는 귀족정(Aristocratie)이다
②아리스토텔레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무엇일까?
아레스토텔레스의 대답은 바로 행복의 추구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행복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을 탐구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인 이성 활동을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이러한 이성적 활동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덕을 실천해야 한다.
덕에는 도덕적인 덕(절제, 관용, 인내, 용기, 정의)과 지적인
덕(학문적 인식, 기술,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이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덕을 무조건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아낸 것이 바로 덕의 중용, 즉
‘가장 적절하게 덕을 실현하는 중간 상태’이다.
그런데 중용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일은
원의 중심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중용은
‘마땅한 때에, 마땅한 것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목적을 위하여, 마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용의 덕은 옳은 행동이 습관이 될 때까지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므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책임을 가지고 올바르게 교육하고 배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사회에서 개인과 개인이 서로
‘마땅한 때에, 마땅한 것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목적을 위하여, 마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중용을 지킬 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행복해질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윤리학의 진정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관은 어떠했을까?
그의 정치철학은 중용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와 지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자유는 공동체 속에서의 자유를, 지배는
스스로 자기를 지배하는 자기지배를 의미한다.
그는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또한 시민들이 모든
공적 활동에 참여할 수는 없으므로 자발적인
복종의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생각한 최선의 정치형태는 군주제나 귀족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환경아래서는
큰 부자도 빈자도 없고 중간 계급이 권력의
균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최선임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플라톤이 제시한 차선책, 즉 '법치 국가'를
최선의 국가라고 여겼으며 정치적 중용체제를 최선의 정체로 여겼다.
이런 중용의 태도는 "중산층을 기반으로 존립하는
국가 공동체가 최선의 형태이고……(중략) 중산층의 역할은
저울처럼 조절하는 것이며, 극단의 반대가
과잉 출현하는 것을 막는다."고 말했다.
3.페르시아전쟁이 아테네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
1)페르시아 전쟁의 경과
페르시아는 BC 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 513년부터
발칸 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다리우스왕은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 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던 아테네 군 사령관
밀티아데스(Miltiades)가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리를
불태웠으며, 이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샀다.
이것이 후에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
①제1차 원정
BC 499년에는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페르시아의 식민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정치가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를 중심으로
여러 소도시들이 연합하여 이오니아 반란(BC 499∼BC 494)을 일으키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했으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그는 트리키아까지 점령하려 했지만 폭풍을 만나
함대가 난파되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②제2차 원정
BC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2원정에 들어갔다.
다리우스 1세의 형제 아르타페네스(Artaphernes)와
장군 다티스(Datis)는 실리시아(Cilicia) 군을 주력부대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Attica)와 에레트리아(Eretria)시를
공격했는데 그 명분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고대 로마 역사가
코넬리우스 네포스(Cornelius Nepos)는 보병 20만 명,
기병 1만 명으로, 플루타르코스(Plutarch) 등의 학자는
30만 명으로, 심지어 플라톤 등은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20만 명 가령이 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 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중장병 밀집대전술로 페르시아에 기적적으로 크게 이겼다.
이 중장병은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이행한 이유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③제3차 원정
전쟁에서 패한 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면적인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BC 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지속되어 원정이 연기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 I)가 그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진격했으나, 유례없이 큰 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졌으므로, 그리스군은 그 동안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다.
해전(海戰)에서는 양측 모두 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 전면(前面)의 살라미스(Salamis) 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이렇게 하여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2)페르시아 전쟁이 아테네에 남긴 것들- 중장보병과 수군, 델로스 동맹
①중장보병은 누구인가?
기원전 7세기 이전에는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귀족,
즉 기마병을 중심으로 전쟁이 수행되었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전쟁 장비를 국가에서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비싼 장비를 사서 국가에 봉사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7세기 중엽 즈음,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업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중장보병이 되어 군대의 주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술도 귀족으로 이루어진 기마병 중심에서
평민들로 이루어진 중장보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특히 앞서 살펴보았듯 페르시아전쟁에서 이들은 엄청난 활약을 했다.
이에 따라 평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상응하는 정치적 요구를 하게 된다.
목숨을 걸고 조국에 봉사한 그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정당한 요구였다.
폴리스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성립된 군사 방위가 가장 우선시되는 공동체였으므로, 군사 방위를
담당하는 이들의 권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평민의
발언권은 점차 강해졌고 이것이 페리클레스의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②아테네 해군의 다리, 노잡이 하층민들
아테네는 3단노선을 이용하여 페르시아전쟁에서 해군의 지휘를 수행했다.
아테네 해군력의 성장은 그간 자비로 무장할 수 없어
그리스의 방위에서 소외되어 왔던 하층시민들까지
군사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들은 이렇다 할 무장이
필요치 않은 노잡이 수병으로 함대에 복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함대의 기동력은 그리스 전력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다수의 수병(노수)들이 함선의 갑판 위에 배치되는
소수의 중갑보병들 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층민들의 정치화, 다시 말하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신장을 의미했다.
③델로스동맹이 없었다면?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시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민회에 출석하거나 배심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수당이 지급됐다.
이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페르시아 전쟁 때 결성된 델로스동맹의
동맹국들로부터 받은 공납금이었다. 처음에 이 공납금은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요구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론 대부분 아테네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아테네는 2만 명 이상의
시민을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파르테논신전 건축 등의
사업을 벌여 수백 명의 노동자들에게 20여 년간 일자리를 공급했다고 지적했다.
<결론>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했다.
다시 한 번 그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1)산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평민들이 부유해졌다.
2)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노예들이 시민들을 대신하여 경제노동을 담당해 주었다.
3)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걸출한 철학자들의 영향
4)부유해진 평민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공로를 세움으로써 평민계층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5)델로스동맹의 동맹국들로부터 공납금을 받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탱할 자금을 얻었다.
아테네 민주정치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여성과 노예들은 정치참여에서 배제되었고
제국주의적 행위로 민주주의를 유지했으며
추첨제도 등으로 인해 중우정치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이나 유럽, 우리나라 등의
나라에서도 왕과 귀족들의 특권에 의한 정치는 있었지만
평등한 권리를 가진 민중들에 의한 정치는 아테네 이후
근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에 의한 정치라는 체제가 낯설었을 그 시대에
민주주의가 발아했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이념과 역사 / 나종석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여러모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영역이다. 유대, 기독교 문화와 더불어
서구의 역사를 가장 강하게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인 헤겔은 그리스를 서구인의
고향으로 묘사함으로써 서구 문화에서 고대 그리스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 예술, 철학 등의 각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가 이룩한 업적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호머의 2대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비극은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상적, 문학적,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현대 예술의 새로운 장르인 영화에서도 고대 그리스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질서로 널리 인정받게 된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고대 그리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 민주주의는 분명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 만개한 민주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루소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 열광했던 근대인들 중의 하나였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의 역사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역사는 현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아테네 민주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현대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므로, 현대 민주주의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려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대화의 상대자이기도 하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
기원전 750년과 450년 사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정은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다수에 의한 지배가 더 좋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신념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소수의 귀족이나 왕,
참주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통치의 특권을 부여했던 정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남자 성인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의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새로운 정치 생활과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는 인민을 뜻하는 ‘demos’와 힘이나 지배를 의미하는
‘kratia’의 합성어로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새로운 정치적 신념과 이를 실현할 제도적 장치들에 대한
모색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솔론의 개혁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민주주의의 이상과 제도가 전면적으로 발전하여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던 시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제
개혁이 시작되었던 기원전 508년에서부터 페리클레스가
시민권에 대한 그의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던
기원전 451년을 거치는 대략 한 세기 동안이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절정에 이르게 했던 페리클레스가 행한
민주적 개혁 조치들로는 배심원 제도, 500인 평의회 제도
추첨으로 임명한 공직자 등에게 국가 수입으로 공무수당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등이 있다. 공무수당 지급으로 가난한
시민들도 공공의 정치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주어졌다.
페리클레스
기원전 445년부터 429년까지 15회에 걸쳐 최고 권좌인 장군(스트라테고스) 직에
재임하며 그리스를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통치기구는
민회, 500인 평의회 그리고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으로 운영되는 법원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정 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정치영역에서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에 대해 최종 의사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과 재판 업무 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권한으로 여겼다.
아테네의 최고 의결 기구인 민회는 모든 남자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의 남자 시민들은 20세가 되면 민회에 참가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민회는 외교문제, 재정, 선전 포고와 군사 작전 등 나라의 중대사와
관련된 문제를 의결했으며, 장군들의 선발 심지어는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재판까지 했던 기구이다.
500인 평의회는 주로 민회의 업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그날그날의
일상 행정을 맡아보는 기구로서 아테네 전역에서 매년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려면 적어도 30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평생 두 번을 초과하여 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이는 가능한 모든 시민들에게 골고루 정치 활동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평의회 의장은 일종의 아테네 폴리스의 수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임기는 24시간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일생에 한번쯤은 민주 공화국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재판제도는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 제도였다.
즉 아테네의 배심원은 행정 단위인 10개 부족에서 600명씩 추첨으로
선발된 6,000명의 배심원단 명부에서 지명되었다. 배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30세 이상의 아테네 남성 시민들이었다.
이 재판제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식적인 기소를 담당하는
독립 기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크로폴리스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인 이곳에는
시민의 정신적 지주인 각종 신전이 있었다.
모든 시민은 법이 어겨졌다고 생각될 때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모든 재판은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재판을 담당하는 시민들은
추첨에 의해 정해졌는데, 이들은 시민 배심원으로서 해당 사건의
양쪽 당사자들의 발언을 모두 들은 후에 판단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검사가 기소를 독점하고 있고
재판에 시민들은 참여할 수 없다. 물론 서유럽과 미국과 같은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배심 원으로서 재판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 이념에 더 충실한 제도이다.
그러나 2,500여 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하여 배심원과 재판관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아테네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가장 유명한
주장은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들어 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 시민들을 애도하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의 특징을 모든 아테네의 시민들이
아테네 정치 공동체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즉 민주주의는 권력이 소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적의사 결정 과정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시민들의 공개토의 내지 토론을 강조한다.
시민들은 민회나 각종 회의에서 동등한 발언권에 의거한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린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토론을 통해 집단적 구속력을 지니는
결정을 한다는 페리클레스의 신념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반 대중의 정치 능력에 대한 신뢰 속에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아테네 시민들은 국가의 공적 사안에 적극 참여하는
삶을 훌륭한 시민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물론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강제로 민회나 법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리클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런
사적 인간들은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적인 삶에 무관심하고 민회나 법정에 참여하여 자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지 않고 개인적인 활동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디오테스’(idiote⁻s)인데
이 단어가 현재 영어에서는 백치나 바보를 가리키는 ‘idiot’의 어원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민회나 법정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여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하는 삶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했다.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지름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에게 정치 생활은 시민 생활의 핵심 영역으로 여겨졌다.
아테네인들에게 정치적 공동체와의 일체감, 즉 애국심은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 미덕이 되었다. 그들은 공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해 국가에 혜택을 줌과 동시에 개인은 더할 나위 없는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했다.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에게
유한한 삶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 신과 같은
영원불멸의 삶을 획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조국인 폴리스, 즉 도시 국가의 번영과 명예를 위한 행동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은 아테네 시민들 모두의 이상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 시인들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나
소포클레스(Sopho-cles)도 조국을 위해 여러 번 전쟁에 참여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아테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 유명 한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 해전에 참여했던 아이스킬로스는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을 인생의 최대 자랑으로 여겼다.
‘비극의 창조자’로서 위대한 명성을 떨쳤던 그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묘비에는 마라톤전쟁에서
페르시아와 싸웠던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함대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하여
아테네에게 승리의 결정적 기회를 주었던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이 끝난 후에 소포클레스는 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신을 찬미하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했다. 그 후에 그는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불멸의 비극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도 정치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와의 전쟁 때는 장군으로서 전쟁을 지휘하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 또한 시민으로서
여러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참가한 전투들을 언급할 정도였다.
넷째,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공이 제국으로의 팽창과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페리클레스 또한 아테네 제국을 ‘독재’로 부르면서 아테네가 제국으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잘못인지 모른다는 후회의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 역사를 이해할 때, 아테네의 정치적 안정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국으로의 팽창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어두운 점들
아테네 민주주의가 장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한계들도 드러냈다.
첫째, 20세 이상의 아테네 자유 시민인 성인 남성만이
시민권을 향유했을 뿐이고 노예와 여성 그리고 외국인 거류민들은
그런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을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둘째, 대중들에게 거의 무제한적으로 결정 권한을 부여했고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할 여러 폐단을 교정할 수단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소수의 혹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상황을
염려하는 것처럼 인민 대중에게 모든 권력이 독점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유명한 격언은 권력이 소수나
일인에 집중되었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사형을 언도 받은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셋째, 아테네 민주주의는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었고,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독선적 태도는
그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문명을 야만인 내지 야만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가는 말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시민이 이상적으로 간주했던
‘정치적 삶’의 중요성이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훌륭한 삶의 전형으로 생각한 ‘훌륭한
시민의 이상’은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하다.
시민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사안들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주주의적 자치의 이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물질적 풍요나 소소하고 안일한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시장의 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인 생활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이
부여한 중요성은 커다란 귀감이 될 만한 것이다.
시장의 무차별적 논리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도 시장의 가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와 민주적 시민의 덕성도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우리들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공부많이 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