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쓰라는 책은 안 쓰고 자꾸만 기타와 음악에 빠져들었다. 옛날에는 책을 쓰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음악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책 쓰는 시간보다 음악 듣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나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인 전형적인 마감 기피증 때문이다. 어떤 일을 마감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엉뚱한 짓을 하면서 자꾸만 시간을 질질 끄는 병을 가리킨다. 마감 기피증은 원래 마감이 다가올수록 더욱 심해진다. 책의 진도는 거의 90프로 까지 왔고, 올해 중에는 반드시 마감해야 하는데 자꾸만 샛길로 빠진다.
마감기피증과 음악 중독증을 끊기 위해 4월 말에는 사흘단식을 감행했다. 자신을 따끔하게 질책하고 또 격려하기 위해 단식 둘째 날에는 우리집 뒷산 설봉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왕복 7킬로였는데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아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극기훈련의 차원에서 우리집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넘어 건너편 호수공원으로 갔다가 다시 정상을 넘어 돌아오는 제일 긴 코스를 택했다.
대략 10킬로 정도의 코스인데 산을 넘어갈 때는 그런대로 갈만 했는데 되돌아올 때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되돌아오는 길 정상에 오를 때는 한 걸음 내딛기가 천근만근이었다. 봉우리에 오르니 해는 서산에 기울어가고 내 몸의 기진맥진해서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거기서 집까지는 내리막길이어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가며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요 근래에 와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단식 사흘째 정상에서
산 아래 호수에서
남쪽 최고봉인 이섭봉에서
마감 기피증과 음악에 대한 중독을 끊기 위해 그렇게 지독한 극기 훈련을 겸한 사흘 단식을 했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더니 좀 지나자 다시 도로묵이 되고 말았다. 아니 어떤 면에는 오히려 심해졌다.^^;; 단식 하기 전에는 정훈희 송창식 <안개> 속의 함춘호 간주에 필이 꽂혀 열심히 연습했는데, 단식 마친 뒤에는 송창식의 <한번쯤>, 나훈아의 <찻집의 고독>,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의 전주와 간주에도 마음이 쏠려 연습하기 시작했다. 모두 옛날부터 좋아했던 곡이지만 전주 간주는 생략하고 그저 코드만 잡고 뚱땅거렸는데, 이제는 전주 간주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새로운 팝송도 익혔다. 사실 팝송은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가사를 익히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요즈음 필이 꽂혀 자꾸 부르는 노래는 폴 사이먼의 <Slip Slidin' Away>이다.
사실 이 노래는 그 옛날 재수생 시절에 자주 흥얼거렸던 노래다. 대학 입시에서 미끄러지고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와 종로학원에서 재수하던 시절, 당시의 내 마음을 잘 위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가사의 후렴구만 대충 따라서 흥얼거렸는데 근래 가사를 들어보니 지금의 내 심정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https://youtu.be/J4F_7vf73Z0?si=Ter3g0A-tF-aZzq1
Slip Slidin‘ Away
Slip slidin‘ away,
Slip slidin' away,
You know the nearer your destination, the more you slip slidin' away.
I know a man. He came from my hometown. He wore his passion for his woman like a thorny crown. He said, "Dolores, I live in fear. My love for you's so overpowering, I'm afraid that I will disappear."
Slip slidin‘ away ~~~~~
I know a woman, Became a wife. These are the very words she uses to describe her life. She said "A good day, Ain't got no rain." She said "A bad day is when I lie in the bed And I think of things that might have been."
Slip slidin‘ away ~~~~~
And I know a father, Who had a son. He longed to tell him all the reasons for the things he'd done. He came a long way, Just to explain. He kissed his boy as he lay sleeping, Then he turned around and he headed home again.
Slip slidin‘ away ~~~~~
God only knows, God makes his plan. The informations's unavailable to the mortal man. We're working our jobs, Collect our pay, Believe we are gliding down the highway, When in fact we're slip sliding away.
Slip slidin‘ away ~~~~~
미끄러져버리죠. 빗나가버리죠.
아세요? 당신의 목적지가 더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더 미끄러져버리죠.
한 남자를 알고 있어요.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이에요. 그는 애인을 향한 가시 면류관 같은 뜨거운 사랑을 지녔지요.
그가 말했어요. “돌로레스, 난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어.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너무도 강력해서 나란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 두려워”
후렴 ~~~~~
한 여자를 알고 있어요.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죠. 아래의 말들이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는 말이에요.
그녀는 말하죠. “좋은 날이란 비가 오지 않는 날이고, 나쁜 날이란 침대에 드러누워 일이 그렇게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날.”
후렴 ~~~~~
한 아버지를 알고 있어요. 그에겐 아들이 하나 있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들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고 싶어 했죠.
그는 먼 길을 달려왔지요. 단지 설명하기 위해서요. 그는 아들이 누워 잠들자 그에게 키스하고 돌아서서는 다시 살던 곳으로 향했죠.
후렴 ~~~~~
신만이 알고 있어요. 신은 자신의 계획이 있지요. 그 정보는 유한한 운명의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지요.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돈을 모으죠. 일사천리로 달려가고 있다고 우리는 믿지만, 사실은 그때가 미끄러지는 중이죠.
후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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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게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때로 더욱 더 빗나가게 된다는 후렴구도 그렇지만, 네 개의 스토리로 이루어진 전체 가사 또한 너무나 심오하다.
1절에서는 너무 큰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남자와 심드렁하고 별 볼일 없는 일상을 보내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 둘은 참으로 대조적이지만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사랑을 원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고 보니 자신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목표지점에서 미끄러지는 것이고, 달콤하고 환상적인 결혼을 꿈꾸며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너무나 따분한 삶을 보내는 것도 결국은 꿈에서 빗나간 것이다.
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주제다. 전반부는 아들에게 용서를 빌러갔다가 말을 전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서는 아버지의 가슴 아픈 이야기이고, 후반부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아버지인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네 보통 인간들은 일 잘 하고 돈 잘 벌릴 때 인생 잘 풀린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때가 바로 미끄러져버리는 때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이다. 폴 사이먼은 정말 가사를 잘 쓴다.
노래를 들으면서 현재 나의 모습을 많이 반추해보았다. 지금의 책을 구상하고 기본 틀을 잡은 것은 대략 12년 전이다. 필생의 역작을 남기기 위해 책에 좀 더 몰입하겠다는 결심에 교수라는 좋은 직장도 버린 지도 벌써 5년, 늦어도 2~3년 정도면 완성될 줄 알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집념을 가지고 꾸준하게 달리다 보니 이제 거의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이제 조금만 더 쓰면 되는데, 대략 두어 달이면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그러나 고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나를 본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식을 통해 마음이 정화된 탓도 있지만, 폴 사이먼의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아 그런지 이제는 생각이 좀 정리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조급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글이란 때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인데, 그 사이 빨리 완성하려는 욕심이 앞서 나 자신을 너무 닦달한 것 같다. 그래, 이제는 글을 억지로 쥐어짜기보다는 글이 저절로 흘러나올 때까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자.
그리고 음악을 마감 기피증의 도구로 여기거나 중독증의 하나로 보기보다는 열정의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그냥 음악 자체를 즐기자. 이렇게 연금을 받으면서 공부에 몰입할 수 있고, 마음 내킬 때마다 기타와 노래를 즐길 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더군다나 내 주변에 음악을 좋아하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 그 또한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첫댓글 너른돌님 정도면..
' 참 잘 살아왔고
참잘했어요!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토닥토닥..^^
바욜렛님의 따스한 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