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치X카이토 감기 written by eio
엣취.
폐 속에서 터져나온 기침이 일순간 작은 바람을 만들어내었다. 먼지가 공중으로 뽀얗게 날아오르다 이내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다. 켈룩, 켈룩. 잇달아 나오려는 재채기를 망토 자락으로 간신히 틀어막았다. 거대한 빌딩의 천장 안, 갖가지 배선과 파이프가 자리 잡은 이 곳. 가끔씩 정기적인 검사나 수리를 하기 위한 발걸음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찾지 않는 여기는, 공기를 부유하던 미세한 불순물들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는 정착지다. 이런 곳에서 콧바람이라도 냈다간 순식간에 먼지폭풍, 그리고 기침, 그로 인한 새로운 돌풍과 찾아오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침…의 악순환을 맞이하겠지. 이런 중대한 시점에서 그건 곤란하다. 예고 시점까지 고작 5분도 안남은 이 순간에는 말이다.
역시 어제의 그 일이 문제겠지. 길가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던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겠답시고 밤 늦게까지 빗 속에서 싸돌아 다닌 거 말야. 그치만, 그치만 그 불쌍한 눈동자는 절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게다가 덕분에 그 주인이었던 소녀도 눈물을 그칠 수 있었구. 어쨌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랑 동물한테는 못 당한다니까, 질 수 밖에, 질 수 밖에. 조심스레 망토자락을 그러쥐고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가 일지 않도록 조심조심. 정말 고마워요, 오빠! 눈물 자국 범벅이 된 채로 환희 웃어주던 소녀의 미소가 다시금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가를 빙긋 올리고 말았다. 결국 그 후로 집에 도착하자 마자 열이 오르기 시작했지만……, 이미 일주일 전에 보낸 예고장을 물릴 순 없었다. 셋팅도 완벽하게 다 해놨는데 말이지. 까짓 감기몸살 정도로 이 대도님의 자존심을 굽힐 수는 없다고. 좋아 좋아, 아무튼 목적지 바로 위까지 순조롭게 도착.
그럼 이제……
3……,
2……,
1,
펑!
레이디스 앤 젠틀맨! 안녕하세요! 아아 뭐, 여긴 레이디는 안계시나? 온통 칙칙한 경찰 아저씨들 밖에 없으니까 말야. 오오, 나카모리 경부. 그간 잘 지내셨는지? 뭐어, 그럼 오늘 밤도, 약속대로 접수해갑니다!
다시 한 번 펑!
"키드!"
연막 사이로 몸을 숨긴 채 탈출구를 향해 달리는 순간, 혼란 속에서 불현듯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쩐지 경부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귀신같이 퇴로를 예측하고는 숨어있었던 건가. 과연, 과연.
"어라, 탐정군. 역시 와 있었네."
"시끄러워, 순순히 잡힐 준비나 하시지!"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요. 신이치가 서 있는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달려나가던 키드는 그와의 거리를 2m가량 남겨둔 상태에서 힘껏 발돋움을 굴렀다. 펑! 하얀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도약하는가 싶더니 신이치의 머리 위에서 연막탄이 터트려졌다.
"누가 놓칠 줄 알고! ……?! 우앗?! 쿨럭! 너 이, 너 이 자식 이게 뭐야…?!"
"미안미안, 그 연막탄엔 후추가 섞여있지롱. 탐정군 대비책이랄까나♡ 보통의 것으로 떨어지질 않으니까. 아하하! 덧붙여, 나는 마스크 쓰고 있어♡ 자, 그럼!"
"제길…, 후추 따위로 포기 할 것 같아!"
찔끔 나오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신이치는 필사적으로 키드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뒤쫓았다. 이내 뿌연 연기 속을 헤치고 저 만치 너울거리며 사라지려는 그의 망토자락이 시야에 잡혔다. 그런데…….
콰당!
"?,?!"
뭐, 뭐야, 이 광경은? 멀쩡히 달려가던 녀석이 혼자 넘어지다니? 이런 얼토당토 않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평소엔 말도 안되는 몸놀림으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열 번은 죽었다 살아나야 할 수 있을 법한 쇼를 펼치더니, 아무 것도 없는 평평한 길바닥에서, 제 풀에 넘어졌다고? 그 괴도 키드가? 순간 당황한 신이치는 걸음을 멈칫했다. 물론 당황한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더니 제 다리를 제어하질 못하고 쓰러진 카이토 역시 당황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 젠장, 이런 경우는 겪어본 적 없는데. 하지만 이대로 멍청히 앉아서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걸 기다리고 있을 순 없지. 곧바로 침착함을 되찾고 온 몸의 힘을 다해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 아하! 이런 실수를! 꼴불견을 보여드렸네, 탐정! 그럼 진짜로 안녕이니까!"
짐짓 여유로운 척 대사를 날리며 목적지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좋았어, 아슬아슬 세이프. 미리 설치해두었던 트랩은 밟자마자 무사히 가동되었고,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을 쫓아오던 명탐정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카모리 경부님! 건물 1층에서 키드의 모습이 포착되었다는 무전이!"
"멍청아! 그건 보나마나 더미라고! 한 두번 속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키드 녀석 주특기는 행글라이더니까! 전 대원 옥상으로 이동!"
"넵!"
철컹, 옥상으로 통하는 육중한 쇠문이 활짝 열렸다. 옥상으로 쏟아져나온 대원들의 눈 앞에 여유롭게 서 있는 키드의 모습이 보였다. 놀라거나 도망칠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꿈쩍않고 서있는다. 순식간에 대원들이 그와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그렇게 포위망을 만들어냈다.
"핫하! 키드! 또 네 녀석의 얄팍한 술수에 넘어갔을 줄 아나?! 오늘에야말로 널……!"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경부가 키드에게 다가간 순간,
퍼엉!
키드의 몸이 폭발해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흩날리는 색색깔의 종이조각과 작은 풍선에 의지에 둥실둥실 내려오는, 카드형 녹음기…….
"아쉽지만 경부! 이 쪽이 더미였네요! 덕분에 입구로 여유롭게 퇴장하는 날도 있고 말이죠, 땡큐 베리 머치! 자아, 그럼 쇼는 끝났으니까 굿나잇!"
"……키, 키드 네 이놈! 서둘러! 1층으로!"
모두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던 입구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이내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고, 공기가 차츰 가라앉았을 무렵…, 어둠에 가려져 있던 사각지대 속에서 불쑥 하얀 물체가 튀어나왔다.
"하아, 이쪽도 저쪽도 더미 작전 성공~. 그럼, 귀가해보실까나. …아,…윽…."
역시 현기증이 너무나 심하다. 이런 상태로 행글라이더 탔다간, 낙사할지도……. 잠깐만 몸을 추스리고 가는 게 나을까. 쌀쌀한 밤 공기를 망토로 막으며 살짝 벽에 기대었다.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어 오늘 훔친 보석을 꺼내보았다. 달빛에 영롱하게 흩어지는 광채. 하지만 역시 이것도 자신이 찾던 물건은 아닌 것 같다. 귀찮지만 돌려주는 수 밖에. 아아, 싫다. 돌려주는 것도 훔치는 것 만큼 꽤 까다롭단 말이지. 차라리 탐정군한테 맡기고 가면 편할 텐데, 으응.
"뭐야? 물건도 훔친 주제에 여유롭게 현장에서 설렁설렁 거리고 있는 이 멍청한 도둑은?"
"우, 우앗?!"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정체를 드러 낸 것은 다름 아닌 신이치였다.
"오, 마침 잘 와주었어, 탐정! 보석 돌려주기 귀찮았는데, 좀 맡기자!"
"하아?"
조심스레 손수건으로 감싼 보석을 살포시 발 밑에 내려놓고, 가뿐히 담을 넘으려는 순간-
불현듯 엄청난 현기증과 어둠이 카이토의 눈 앞으로 엄습해왔다.
털푸덕.
별안간 몸을 날리려다 말고 옆으로 쓰러지는 키드를 보고, 신이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이 녀석. 또 아까처럼 실수라도 해서 넘어진 건가? 하지만 좀전과 달리 쓰러진 그의 몸에선 다시 일어나려는 어떠한 몸짓도 보이지 않는다.
"뭐하는 거야, 신종 장난? 연극 중이라면 그만 두시지 그래…. 수갑을 채워버리기 전에 일어나 도망치는 게 이로울 테니까."
천천히 다가가 몸을 굽혀 보석을 집어 들며 읊조렸다. 그래도 여전히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이. 야. 키드?"
몹쓸 장난이라도 치려고 저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접근 하는 순간 휙 몸을 뒤집어서 수면 마취제라도 분사한다던가.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나직이 불러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없다. 신이치는 침묵에 휩싸인 채로 키드를 내려보았다. 그 순간, 귓가에 분명히 스쳐가는 신음소리.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엎어진 몸뚱아리를 안아일으킨다. 불덩이와도 같은 체온이 손에 전해져왔다. 이 녀석, 감기라도 걸린거야? 것보다 이런 몸으로 그렇게 날뛰고 다녔던 건가. 분명, 아까 넘어 진 것도 제 몸을 가누지 못해서였나. 그렇담, 이렇게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체포를……. 하는 건 역시 어쩐지 용납되지 않는다……. 하얀 수트가 품 안에서 파들파들,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적군을 치료해주기라도 하란 거야?
일단은 옮기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경찰들의 시선은 대부분 아래로 쏠렸고, 그 마저도 곧 실망감을 안은 채로 해산하겠지만, 여전히 경계의 태세는 남아있다. 그래도 지하 주차장 까지만 어떻게든 무사히 갈 수 있다면. 우선은 이목이 타는 커다란 실크 햇을 벗겨내었다. "……."
어찌 답답함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모자 안에서 눈처럼 새하얀 비둘기 한 쌍이 포르르 날아올랐다. 이 마당에 구태여 비둘기를 챙겨 다니다니 어이가 없어서, 원. 신이치는 나직이 혀를 차며 키드의 품 안에 모자를 안겼다. 녀석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트럼프 한 세트와 함께 가지런히 접혀진 얇은 검은 천뭉치를 발견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길 때 뒤집어 쓰는 망토인 모양이다. 업고 가기엔 이 녀석의 실크 햇이 걸리적거려. 씌워 놓기에도, 자신이 직접 들고가기에도 너무 튀는 물건이다. 그래서 모자를 껴안게 한 채로 전신에 녀석의 검은 망토를 둘둘 감아버렸다. 그 꼬락서니가 영락없이 김초밥같다. 정말이지, 속은 하얀데다 겉은 얇고 검은 것으로 둘러져있으니.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어이없는 웃음을 참으며 신이치는 품 속에 키드를 안아올렸다. 마치 공주님을 안는 모양새로. 김초밥공주라니, 그거 꽤 괜찮군. 틀림없이 웃긴 이야기가 될 거다. 다행히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리면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아 30층 가까이 되는 고층건물을 계단으로 조심조심 걸어내려갔다. 제기랄. 대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드문 드문 바깥에서 분주하게 철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품 속의 신음소리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김초밥은 자동차 뒷 좌석에 가로로 뉘여진 채 간헐적인 기침을 터뜨렸다. 가끔 꿈틀거리며 낑낑 거리기도 한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입구의 경관들과 마주쳤지만, 검은 차 시트와 적절한 어둠이 드리워진 탓에 발각되지 않았다. 뭐, 어차피 자신이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해서 의심을 살 인물도 아니고 말이다. 땀에 흠뻑 절어있는 키드의 몸을 어깨 위에 들쳐업고 신이치는 불편한 몸짓으로 현관문 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곧장 올라가 품 안의 열 덩어리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뉘인다. 잠깐 안고 있었을 뿐인데도 자신마저 체온이 오른 듯하다. 손 부채질을 하며 겉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다시 침대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일단 옷을 갈아입혀야겠지. 정장 차림으로 재울 순 없으니. 휘감긴 검은 천자락을 벗기고는 어깨의 망토 견장을 떼어냈다. 그러다간 생각났다는 듯 아 소리를 내고 방에 딸린 작은 욕실로 들어가 수건을 찬 물에 적신 뒤 꽉 쥐어틀었다. 방으로 돌아와도 녀석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이따금씩 콜록거리며. 문득 키드의 모노클을 벗겨야 할까 말까 망설여졌다. 이런 식으로 맨 얼굴을 보게 되다니, 이건 반칙이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마음 속에서 솟아났다. 더불어 녀석을 한 대 걷어차주고 싶은 마음도. 한숨을 내쉬며 모노클에 손을 가져다댔다. 잊어버리면 되지. 녀석이 다시 모노클을 썼을 때, 나는 그 얼굴을 모르는 거다. 아-주 건강하게 날뛰는 녀석의 얼굴에서 직접 그 같잖은 것을 벗겨 낼 때까지는 말이다. 만면에 가득한 승리의 미소를 날려주며 말이지.
―하지만 그 맨 얼굴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건 그냥 자신의 얼굴을 ctrl C해서 ctrl V한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머니, 아버지. 혹시 제게 숨겨진 동생이 있었나요? 아니면 어릴 적 잃어버린 쌍둥이 형제가? 자신으로 변장하고도 마스크따위가 벗겨지지 않는 걸 보고 대충 눈치 채긴 했지만, 이건 정말 영락 없이 쿠도 신이치 2다. 무슨 영화 제목도 아니고. 허허. 허심탄회한, 그리고 망연한 웃음을 내뱉으며 신이치는 감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기에 천천히 아래로 손을 내려 하얀 정장의 단추를 풀렀다. 그러고는 붉은 넥타이를 풀러주고, 푸른 와이셔츠의 단추를 세 개 정도 끌러내리다가, 잠시 손짓을 멈추었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단, 갑작스레 느껴진 머쓱함 때문이었달까. 대신 옆에 놓여진 젖은 수건을 들어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으응, 하는 신음 소리와 붉은 열기를 머금은 하얀 얼굴이 곱게 찌푸려진다. 뭐랄까, 계속해서 보니 녀석은 꽤 자신을 닮긴 했지만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대체로 날카로운 본인의 인상과는 달리 이렇게 살짝 구겨진 얼굴에마저도 부드럽고 귀여운, 천진난만함이 머금어져 있달까. 문득 KID라는 별칭이 꽤나 어울리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단어가 1412라는 번호로부터 파생된 것이야 어찌 됐든 간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다 닦아주고서야 남은 단추를 풀러낸다. 땀에 흠뻑 젖은 신체는 성년이 된 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쳐도 꽤나 선이 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드러난 하얀 몸은 묘하게 붉어진 얼굴과 어울려서, 왠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지, 아냐. 내가 왜 같은 남자 몸을 보고 창피해하고 있는 거람. 한 차례 머리를 붕붕 휘젓고는 서둘러 탈의 시킨 후 마저 땀을 닦아내었다. 다행히 서랍에서 꺼내 온 자신의 잠옷은 그에게 잘 맞는 편이었다. 뭐 평소에도 얼추 비슷한 신장과 체격으로 보였으니. 이불 속에 제대로 누이고 괜히 녀석의 비죽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보았다. 부슬부슬한 감촉이 꽤 기분이 좋다. 강아지 같군. 피식 웃으며 옷장 안에서 얇은 모포를 꺼냈다. 두 사람이 자도 충분한 크기의 침대지만 오늘은 김초밥, 아니 감기 걸린 멍멍이한테 양보해보도록 할까.
목구멍에서 밀려올라오는 작은 쿨럭임을 느끼며 잠을 깼다. 푹신한 침대와 이불의 감촉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초조한 의구심이 밀려온다. 나, 제대로 집에 돌아왔었던가? 분명 건물 옥상에서 보석을 돌려주던 것 까진 생각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누워있는 걸 보면 제대로 온 거겠지…. 멍하니 허공을 훑던 시선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졌다. 창 밖에서 스며들어 온 희미한 빛에 어슴푸레 보이는 천장이 어쩐지 아침마다 익히 보던 풍경과 다르다. 낯선 공기. 카이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긴 우리 집이 아냐. 그럼 누구 집이란 말야. 엄습하는 미약한 두통을 억누르며 초조한 시선을 뒤적인다. 맞은 편 소파 위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 히…익!"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 보았지만 이미 새어나간 단말마의 비명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발, 하고 간절히 기도 했지만 모포 덩어리의 그 것은 이미 잠을 깬 듯 부스럭 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 깼냐…." "……." "지금…몇 시…두 시군……." 잠 기운이 남아있는 듯 눈을 부비며 신이치는 비척비척 침대로 다가왔다. 대체 뭐가 뭔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다. 여기, 탐정네 집인거야? 나, 잡힌겨!? 머릿 속에서 도망쳐야해, 온통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지만 몸은 단 1cm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와는 달리 상대방은 태연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직 많이 뜨겁잖아…체온계를 어디뒀더라…." 신이치는 침대 옆의 탁자를 더듬어서 램프를 키고는 수은 체온계를 찾아냈다. 여전히 뻣뻣이 굳어 있는 카이토를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야, 단추 좀 풀어봐. 체온 재게." "……."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내가 벗기리?" 여자도 아니고 남자 옷을 내가 벗겨야겠어? 투덜거리더니 -사실 이미 한 번 벗겼지만- 결국 멍청하니 앉아 있는 카이토의 잠옷 단추를 풀러내기 시작했다. 수은계를 쥔 손목을 두어번 탈탈 탈더니 옆구리와 팔 사이에 끼워넣는다. 도무지 뭐지, 이 상황은. 아무리 애써도 이해가 안 돼. 것보다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너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아서 생각을 할 수 없는 걸지도. "…나 잡혔어? 여기 감옥?" 황망히 내뱉은 첫 마디는 이랬다. 한심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더니 손을 내밀어 체온계를 거두어간다. "이렇게 안락한 감옥 봤냐? 게다가 감옥이라면 내가 있을리가 없지. 39.8도… 이 지경을 해가지고 그렇게 싸돌아 다닌거냐, 나 원 참." "그, 그럼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거야?" "신고 따위도 하지 않았어. 단지 아파서 쓰러진 녀석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을 뿐이라고. 못 잡힐까봐 걱정은 마시지. 반드시 현장에서 사지 건강한 네 놈의 양손목에 수갑을 선사할테니까." 다시 탁자 위에 체온계를 올려놓고 신이치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향해 몇 걸음 걷는 듯 싶더니 빙글 돌아선다.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인데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나라고 해도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엎어져 있는 놈을 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디 가는 데?" "약 가지러." 문 너머로 뒷 모습이 사라진다. 카이토는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황, 공황, 대공황! 침대 밖으로 나가려 시도해보았지만 자신의 몸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워 축축 처지기만 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고를 멈추는 일이었다. 포기하자. 포기하고 그냥 믿어보는 수 밖에. 설령 최악의 상황이 와서 붙잡힌다 해도 자신으로서는 탈출할 기회가 아직 무궁무진하다. 벌거벗기고 사지를 결박 당하는 그런게 아니라면 말이지. 설마 본인이 아무리 악독한 도둑인들 그런 비인도적인 처우를 하진 않겠지. 여기는 고대 이집트나 중세시대 따위가 아닌 현대라구!
잠시 뒤 돌아온 신이치의 손에는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쓸 것 같은 진갈색의 액체가 담긴 머그잔이 들려있었다.
"옆 집 박사님한테 받았던 건데, 좀 쓰지만 효과는 확실하니까." 머그잔을 받아들고 카이토는 머뭇머뭇 거렸다. 향기부터 범상치 않게 코를 찌른다. "빨리 안 먹고 뭐해." "그…그치만…." "빨리 마시라니까." 독촉에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숨을 멈춘 채로 정체불명의 약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푸웃! 써! 이, 이건 도저히…."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소리도 모르냐? 빨리 빨리, 쭉쭉, 원샷해."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크레파스를 갈아서 마셔도 이것보단 맛있겠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다. 이게 어딜 봐서 '좀 쓴'거야? 미각마비냐, 네 놈은! 아니, 아니면 고문인 건 아닐까. 탈출 할 생각이 들지 못하게 감옥이 아닌 척하고 가둬놓은 거다! 그렇군! 필시 이건 약이 아닌 괴롭힘임에 틀림 없다. "후…후후후, 난 속지 않는다구, 탐정." "하아?" "감금이 아닌 척 날 안심시켜서 탈출을 막으려 하다니! 하지만 소용 없어. 이 고문을 통해서 모두 눈치 챘다아!" "어디 그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계속 지껄여보시지. 원한다면 바로 문 밖으로 내던져주마." "……히잉…." "내 참, 그렇게 쓰다면 먹고나서 초콜렛이라도 줄테니까." "초, 초콜렛?" "아아. 지난 번에 형사님께 받은 게 책상 서랍에 있었지.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당분은 두뇌 회전에 도움을 주는 편이니까 사놓고 가끔 먹곤 해." 그렇게 말하며 신이치는 천천히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맨 아랫단의 서랍을 열자 갈색 뚜껑의 납작한 상자가 들어있었다. 일전에 경시청에 들러 조언을 해주고는 다카기 형사님께 고마움의 표시로 받았던 것. 상자를 집어들고 몸을 돌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드의 시선에 눈이 마주 쳤다. 뭔가 기대에 찬 눈빛. 그 얼굴에 신이치는 쿡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뭐야." "아무 것도. 빨리 마셔." "우씨…." 눈을 질끈 감은 뒤 합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머그잔의 액체를 들이킨다. 뭐랄까, 하얀 수트를 입고 괴도 일을 할 때 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진다. 범행 중엔 나름 프로페셔널해 보였는데. 이렇게 보면 영락 없이 귀여운 복슬강아지 한마리라서.
"초…초코…." "풉…자, 여기." 엄청난 일이라도 했다는 듯 힘든 얼굴로 간신히 초콜렛을 중얼거리는 녀석의 입가에 동그란 갈색 초콜릿을 내밀었다. 손으로 받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신의 손에서 바로 낼름 물어갔다. 손가락 끝에 가볍게 스친 입술이 부드러웠다고, 생각했다.
"으으, 좀 살겠네. 정말 끔찍한 맛이었어." "고작 그런 걸 가지고. 한약일 뿐이잖아." "고작 그런 거라니, 앗, 하나만 더 줘." "뭐야. 그럼 이 것만 먹고 얌전히 자." "치사하긴."
뭐가 치사하다는 거냐? 중얼거리며 상자 안의 초콜릿을 집어 다시 키드의 입가에 갖다댔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먹는 모습이 마치 손바닥 위의 모이를 물고 가는 비둘기 꼴이다. "감기엔 자는 게 약이니까. 사실 지금 깨어 있는 것도 용하다, 너. 아무튼 빨리 자. 불 끈다." "으, 으응. 근데 탐정." "왜?" "아, 아니." 뭔가 우물거리는 키드를 바라보며 램프의 불을 껐다.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어둠을 더듬고 소파로 돌아가 모포를 덮고는 눈을 감았다. "…탐정." "왜." "음, 그러니까, 고맙다구. 일단은." "응. 잘 자." 날 잡아서 감옥에 쳐 넣은게 아니라면 말이지. 생략 된, 뻔한 뒷 말을 생각하면서 신이치는 숨 죽여 혼자 웃었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단조롭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이다. 밤새 서늘한 공기에 내려 앉은 풀이슬 내음.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창문을 열어 놓은 걸까.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옆에 누군가 있다. 느릿한 박자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을 귀 기울이고 있다가 살며시 눈을 뜨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덮쳐 오는 나른함. 잠 기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일어났어?" 상냥한 말이 건네져왔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인영이 일어나 다가온다.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감촉의 손이 앞머리를 걷어내고 이마를 매만졌다.
"꽤 많이 내린 것 같지만…, 아직 열이 좀 있는 거 같네."
이건 꿈일까나.
"꿈은 무슨 꿈. 단추나 푸시지. 체온 잴 거니까." "헉!" 순식간에 현실로 이끌려 돌아옴을 느꼈다. 시야가 또렷해진다. 침대 옆에 서 있는 신이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시에 어젯 밤의 일들이 무비 필름처럼 머릿 속에서 휘리릭 되감겼다. 맞다. 나, 쓰러져서 탐정한테 구조됐었지. 구조? 구조인가, 체포가 아니고? 아니, 역시 구조가 맞나? 헤메고 있는 자신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직접 앞섶의 단추를 풀러내고 팔과 옆구리 사이에 온도계를 끼워넣었다.
"죽 끓였는데, 먹을 수 있겠어? 37.2도." "으, 으응? 응." 방으로 가져다줄까? 하는 물음에 손사래를 치며 일어섰다. 제가 무슨 중병환자랍시고 그런 극진한 대우를.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서는 그를, 잠시 머뭇거리다 서둘러 따라갔다. 어젯 밤부터 신세져놓고 이런 말 하기는 뭐했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머릿 속을 지배했다. 자신은 그에게 문전박대 당해도 변명할 말이 없는 입장의 인물인데, 어째서 이렇게 상냥하게 구는 거지. 것보다 저 인물이 상냥하다는 것 부터가 그닥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부분이건만. 계단을 내려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화이트베이지와 브라운톤의 모던한 매치가 깔끔스러운 부엌. 가만히 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짚고서 찬장에서 식기를 꺼내는 신이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앉지 그래?" "어? 어." 갑자기 건네져 온 말에 당황하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의 뒷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왠지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몰래 봤던 일인 마냥 부끄러워졌다. 가볍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곧 한 손에는 하얀 그릇이 담긴 쟁반을,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식탁으로 다가온다. 눈 앞에 살짝 쟁반이 내려졌다. 맞은 편의 의자를 당기더니 털썩 앉고는 후룩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잘 먹겠습니다." "도둑님도 식사 예절은 있으시군." 뭐시라?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웃어주고는 한 숟갈 입 안에 떠넣었다. 적절히 간이 맞춰진 야채죽. 기대했던 것과 달리 꽤 맛이 괜찮아서, 속으로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탐정, 요리 잘하네." "뭐, 꽤 오래 혼자 살았으니까." "탐정은 안 먹어?" "난 아까 먹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의례상 질문을 하였다.
"그래도 죽은 처음 끓여봤어." "에?" "혼자 지내니까 식구가 아프다고 죽을 끓여 줄 일은 없잖아?" "자기가 아프면?" "아파서 귀찮은데 무슨 죽을 끓이냐." 뭐, 일리가 있군. 순순히 받아들이며 천천히 식사를 진행한다. 탐정은 아프면 혼자서 끙끙 앓는 것인가. 괜시리 측은지심이 드는 것이었다.
"아. 그거 다 먹고 약 먹어." "에엑! 어제 그거!" "당연하지." "싫어어-!" "허튼 소리 마시지." "……. 그럼 초콜릿 세 개 주라." "하?" 한사코 먹기 싫다고 하는 녀석을, 잠시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더니 절망적인 표정으로 컵 안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한 숨에 다 마시더니 켁켁거리며 아주 중환자처럼 다 죽어가는 모습이다. 그 꼴이 너무 우스워서 신이치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몰래 쿡쿡거렸다. 기분이 꽤 유쾌해져서 서랍 속의 초콜렛을 상자 째로 넘겨주었다. 단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지 금방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화색이 돈다. 한꺼번에 먹지마, 주의를 주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모양새다. 하나를 집어서 입 안에 가볍게 톡 털어넣더니 맛있어-하고 얼굴이 헤벌레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기에 살짝 움찔하고 말았다. "아, 음. 그럼 탐정군. 신세 많이 졌으니까." "응?" "불청객이기도 하고- 역시 이만 가는 게 탐정한테도 좋지 않을까 하고. 물론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제가 비록 도둑이긴 하지만요." "…꼭 지금 갈 필요는 없잖아?" "에?"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와버려서. 스스로도 적잖이 당황하며 둘러 댈 구실거리를 생각했다. "아직 열 있는 편이고, 좀 더 쉬었다 가도 괜찮아." "이 정도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시끄러워. 네 놈이 그 초콜렛을 한 번에 몽땅 털어넣지 않게 감시할 거니까." "에에엥? 그치만." 초조하게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다. "신고 같은 거 안한다니까 그러네. 나 참, 내가 진짜로 널 신고하면, 탐정이라는 내 간판을 버린다. 어때, 이 정도 보장이면?" 마지 못해 수긍하지만 의문이라는 표정이다. 당연하지. 자신을 잡아 넣으려고 혈안인 상대의 집 안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범죄자라니, 있을 리가 만무하다. "…네 놈 인생이 불쌍해서 돌봐주는 거야."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갖다대며 기다란 소파의 한 쪽 팔걸이를 등 받침 삼아 가로로 걸터 앉았다. 내 인생의 어디가 어때서? 입을 비죽이며 반대편 팔걸이에 똑같이 마주 기댄다. 소파 중앙에서 서로의 발 끝이 부딪혔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탁자 위의 소설책을 집어와 중간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주 앉은 상대방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숙여 탁자 위에서 신문을 집어들었다. 날짜를 확인하고 1면부터 휙휙 훑어보더니 안도의 숨을 내쉰다.
"…키드. 너 본명이 뭐야?" "뭐야, 그건 왜 묻는 건데? 역시 날 취조할 셈으로 붙잡아 두려고 한 거였어-!" "시끄러워. 어차피 네 놈 얼굴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거짓말도 소용 없어. 좋은 말 할 때 대답하시지." "……쿠로바 카이토입니다." 쿠로바 카이토?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의 이름인데. 어디선가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것만 같은. "나이는." "…스물." "뭐야, 역시 동갑이었나. 잠깐, 그럼 너 설마 9살 때부터 도둑질을 하고 다녔다는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어쩔 건데?" "어쩌긴 어째. 감옥에 잡아쳐넣어서 평생 콩밥만 먹게 해줘야지. 다시는 나쁜 손버릇 못 들이게." 에엑. 너 지금 체포하기 없기다. 약속했잖아. 간판 건다며. 불만사항이 쏟아져 나온다. 좀 더 사소한 이런 저런 것들을 캐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너 말이야, 어째서 도둑질을 하는 건데?" "엥?"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으니까. 항상 훔쳤던 보석을 돌려주는 이유는 왜지? 어차피 도로 줄 거라면 애시당초 훔칠 필요가 뭐가 있냔 말이야. 네 녀석은 항상 자신이 찾던 물건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점도 의아해. 진품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모조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녀석이 타켓이 어떤 물건인지 아닌지 모를 리도 없겠지. 그렇다면 반드시 훔쳐야만 알 수 있는 어떠한 사실이 물건에 있거나, 혹은 훔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거 겠지. 아마 후자가 아닐까 생각했어. 항상 예고장을 날리고 범행 자체도 소란스럽게 꾸며대니까 말야. 도둑이란 건 원래 자신의 범행을 들켜서는 안되는 인물인데, 너는 항상 범행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 해. 그렇지만 단지 흥미 본위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면, 넌 정말 구제불능의 미친 놈이겠지. 그리고 후자 쪽의 이유로만 판단하기엔 뭔가를 찾고 있다는 듯한 네 말도 걸리고. 어쩌면 전자와 후자, 양 쪽 다 일까나? 그렇다면 네 녀석이 대체 얼마나 거창한 동기로 도둑질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질 않아." "과연 탐정. 남들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는 부분을 꼼꼼히 짚으셨군. 그렇지만 세상엔 수수께끼로 남겨 두는 게 좋은 것도…있는 법이잖아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보인다. 째려보는 시선으로 응답해주었다.
"음, 말해 주지 못할 건 없을지도, 하지만 일단은 기업 비밀! 이거든." "당장 말해." "뭐야! 탐정이면 탐정답게 추리해서 알아내라구!" "탐문 수사도 탐정의 업무다." 젠장, 역시 이럴려구 붙잡은 거였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리는 녀석에게 살고싶거들랑 어서 똑바로 고해바치라고 협박해댔다. 그러지 않으면 네 눈 앞에서 이 초콜렛들을 곱고 고운 가루로 만들어주겠노라! 하는 유치한 말까지. 적잖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이내 키득키득 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어, 탐정. 의외로 이런 구석도 있구나, 너." "무슨 구석이." "귀여운 구석?" 남자가 남자한테 귀엽다는 소리 들어봤자 별로 기쁘지 않다고. 그리고 귀여운 쪽으로 따지자면 네 녀석이….
"뭐, 탐정한테는 왠지 말해줘도 괜찮을 것 같지만. 하지만 탐정, 하나만 약속해주지 않겠어?" "뭐?" "혹시 내가 붙잡히거나 사라져도 이 비밀은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어째서?" "약속할 거야, 말거야." "…알았어."
그러곤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별안간 몸을 굽히고 콜록거리며 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이, 야, 괜찮아?" "흐아-, 괜찮아. 목 안이 간질간질해. 왜, 목감기 같은 거 나을 쯤엔 참을 수 없이 간지럽잖아? 분명 낫고 있는 걸껄." 고개를 들어 빙긋이 짓는 웃음을 본 순간, 왜 그랬을까,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갈색 고수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말았다. 살짝 휘둥그레지는 커다란 두 눈.
"…개 같아서." "뭐?"
고운 얼굴이 황당한 표정으로 일그러진다. "머, 머리카락이 되게 개털 같길래 궁금해서 한 번 만져본거야. 이런 머리카락은 어떤 감촉인가, 하고. 생각보단 부드럽네. 하하핫." 뭐냐, 탐정이면 그런 식으로 인신공격해도 돼? 잔뜩 억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하하, 미안, 본의 아니게 부적절한 표현을. 것보다 말 많이 하면 목 아프지 않아? 물이라던가 가져올게." 미친 듯이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어쩌자고 그런 행동을 한 걸까.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연기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껏 삐진 듯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본다. 서둘러 부엌을 향했다. 아까부터 자꾸 왜 이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나 행동들이 멋대로 튀어나가버리는 거, 정말이지 심장에 좋지 않다. 커피 포트의 물을 데우려다 문득 밀크 코코아가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냄비에 우유를 붓고 불을 올렸다. 찬장을 뒤져 코코아 가루가 든 병을 꺼낸다. 손 안에 들면 기분 좋을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머그잔에 가루를 덜어 넣었다. 우유가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호감인 걸까? 자신을 닮은 외양에 밝고 쾌활한 그의 행동이 어쩌면 동생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인지도. 외동 아들이라 한 번도 느껴본 적은 없지만, 필시 그런 류의 기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쿠도 신이치, 감정 같은 것에 휩쓸려선 안 돼. 녀석은 어쨌든 범죄자니까 언제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친밀감을 가진다는 것은 탐정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데운 우유를 컵 안에 따르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달달한 향기가 코 끝을 간질인다. 거실로 돌아가니 카이토는 여전히 한 쪽 볼을 부풀린 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찌 됐건 괜찮잖아―지금은. 이내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범행 동기는?"
언제 삐졌었냐는 듯 기분 좋은 얼굴로 밀크 코코아를 홀짝거리고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표정 한 번 변화무쌍한 인물이다.
"범행 동기라니, 표현이 무섭네, 탐정." "사실이 그렇잖아." "아까 개털같다는 말도 그렇고, 어휘력이 참으로 냉랭하구나~ 탐정은." "그 놈의 탐정 타령 좀 그만하지 않겠어." "엥, 그럼 뭐라고 불러? 신이치?"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어째서 바로 이름으로 건너 뛰는 건데? 네 놈.
"불만이야? 그럼 너도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큭큭." "그래…. 알겠다. 바.카.이.토." "에엑!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는 거지!" 그건 됐으니 본론이나 말해주지 않겠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금새 또 삐진 듯 혼자 작게 구시렁거리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믿을 지 어떨 지 모를 오컬트 적인 이야기지만- 이 세계 어딘가에 '판도라'라는 보석이 있다는 군. 커다란 보석 안에 잠들어있는 또 다른 보석으로, 발리 혜성인지 뭔지 하는 것이 지구를 지나쳐 갈 때, 만월에 그 보석을 비추면 불로불사의 묘약을 얻을 수 있다고 해. 판도라인지 아닌지 알아 낼 수 있는 방법은 보석을 달빛에 비춰보는 거야. '반드시 훔쳐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을 것'이라는 네 추리, 맞았지." 뭐어, 하고 신이치는 김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비과학적인 오컬트 이야기를 나에게 변명이라고 거냐, 너는? "나도 그런 이야기 별로 믿지 않아. 더군다나 불로불사 따위에 관심 있지도 않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살해 당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9살 때부터 괴도 일을 한거냐고, 그랬지. 물론 11년 전의 괴도 키드는 내가 아니었어. 나의 아버지, 쿠로바 도이치였지." "쿠로바 도이치?!"
분명 부모님의 친한 지인 중 한 사람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마술사. 자신도 어릴 적 그의 공연을 보고 굉장히 감탄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생생히 머릿 속에 남아 있는 부드러운 미소의 얼굴. 그 사람이 11년 전의 괴도 키드였다니. 아까 카이토의 이름을 들으며 느꼈던 익숙함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는 공연 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사고가 아니었어."
나직하지만 부드럽던 말소리가 순간 날카로워짐을 느꼈다. "아버지는 살해 당한 거야. 그 판도라를 쫓고있던 괴조직에게.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괴도 키드로 분해 판도라를 찾아다녔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3년 전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키드의 이름을 물려받기로 한 거다. 죽인 줄 알았던 괴도 키드가 보석을 훔치고 다닌다면 필시 녀석들로서는 곤란한 일 이겠지. 실제로 접촉이 있었어. 조직의 잔당들에게 판도라인지 뭔지 내가 먼저 찾아내서 산산조각 내주겠다고, 보스에게 전하라고 했지. 암살 시도와 함정들도 있었어. 하지만 녀석들에게 확실히 나의 존재를 인지 시켜야 했으니까, 그렇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고 다녔던거야. '훔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던 추리도 맞았어. 자,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
"별로 재미 없는 이야기지? 밥 값이라고 생각해줘."
좀 전 까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무표정하던 카이토의 얼굴은 어느 새 다시 밝고 천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은, 여전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아-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꽤 홀가분한 것 같아. 아무튼 우리, 서로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으니 이젠 막역한 사이?"
"뭐어?"
"엣, 아니야?"
"내가 너의 비밀을 알게 된 건 그렇다 쳐도 네가 아는 내 비밀이 뭐가 있는데?"
"우웅, 왜 이러세요, 꼬마 명탐정군♡"
몸을 배배꼬며 하트를 날리는 녀석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적 이야길 하는 거야? 코난에서 신이치로 되돌아 온 것도 벌써 2년이 넘었다구. 그거 약발 떨어졌어."
"치잇, 그래도 비밀은 비밀이잖아."
굳어져 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밝은 모습을 보니 왠지 안심이 된다. 슬몃 웃음을 짓는다. 다소 서늘했던 오전 공기가 어느 새 온후한 낮의 기운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시끄러, 임마. 밥이나 먹자."
"그래봤자 죽이겠지."
"잘 알고 있군."
식사 후 카이토는 욕실을 빌릴 것을 청했다. 감기가 악화되지 않겠냐며 만류했지만 괜찮다고 외치고는 쏙 들어가버렸다. 한약도 먹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대신 보통의 양약을 먹게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너를. 신이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아침 점심으로 쌓인 설거지 거리를 처리했다. 그리고 약간은 느긋한 속도로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집안 일들을 마저 해치웠다.
방으로 올라갔더니 카이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도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하니 가버린 건가? 망할 자식, 그럼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린 기분이 드는 걸까…. 힘 없이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헌데, 떠나버린 줄 알았던 비둘기는 그 곳에 엎어지듯이 누워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있지 않은가. 어이가 없어져서 웃고 말았다. 부슬부슬한 갈색 머리칼에는 아직 촉촉하게 젖은 기운이 남아있다. 바보야, 머리를 다 안 말리고 자면 어떡하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이치는 카이토의 옆자리에 몸을 뉘였다.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응시한다. 한가로운 오후의 나른함이 서서히 찾아왔다. 너무 고요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기분 좋은 정적감. 있잖아, 혹시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거라면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나를 한심하게 보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싱긋 웃어보이고 보통의 괴도로 되돌아갈까. 문득 팔을 뻗어 그의 가느다란 손을 살짝 쥐었다. 부디, 내가 잠든 사이에 날아가버리지 말기를.
눈을 뜨니 바로 앞에 자신을 닮은 얼굴이 누워있었다. 완전히 잠이 깨지 않은 채로 탐정, 아니, 신이치…, 하고 입 속에서 웅얼거렸다. 붙잡힌 손이 옆 사람의 얼굴에 내려앉은 노을빛처럼 따듯했다. 조금 더 온기를 느끼고 싶어 꿈지럭대며 그의 가까이로 붙었다. 움직임을 느꼈는지 상대방의 눈이 살짝 떠졌다.
"카이토…."
분명 잠결이라고 생각한다. 마주한 입술이 스치듯 붙었다 떨어져 나간 것은. 어째서 네가, 나에게? 라는 일말의 의문은 마저 피어날 새도 없이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졸린 탓일까, 왠지 그것이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인양 여겨졌다. 풀린 눈빛으로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던 얼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녁… 뭐 먹지."
"점심 먹고 한 것도 없이 잤는데."
"난 집안일 했거든."
"그럼 난 샤워했다 뭐."
어이구, 큰일 하셨네요. 국어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가 빈정거렸다. 그러곤 이내 둘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주 잡은 손에 꼭 힘을 준 채로 두 남자가 침대 위에서 킬킬거린다. 잠시 뒤 호흡을 가라앉힌 신이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엔 언제 돌아 갈 거야?"
"글세…." "…카이토. 가지 마." "…왜?" "너 때문에…감기 걸린 것 같거든." 이렇게 온 몸에서 열이 나는 걸. 그러니까 돌봐줘야 할 것 아냐. 엷은 미소를 띈 얼굴이 중얼거린다.
"…그 감기, 나도 걸린 것 같지만. 뭐 그럼 평생 돌봐주도록 할까."
"네가 나를? 너 죽은 끓일 수 있어?"
한 껏 장난스러움을 머금은 목소리가 킥킥대며 흘러나왔다.
"글쎄? 먹는 건 자신있지만. 그래도 난 천재니까 그깟쯤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바-보가 뭐라는 거야."
"뭐, 그렇담 너야말로 초바보잖아! 한 번도 날 못 잡았으면서!"
"지금 잡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꼭 끌어안는다. 품 안에 안긴 채로 또 다시 함박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음이 바이러스처럼 우리를 자꾸자꾸 감염시켜서 멈추지를 않는다.
어쩌면 이 바이러스는 처음부터 걸려있었는지도 모르지. 우리가 서로를 쫓고 쫓기던 때부터.
잠복기가 아주 긴 바이러스였다던가. 어쩌면 특정 조건에서 발열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진정제는, 오로지 당신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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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긴 신카이 단편을 읽어 보네요. 감기라는 게 참 흔한 소재지만 자꾸자꾸 써먹게 되는 그런 마약같은 녀석이죠ㅋㅋㅋㅋ 감기 걸렸을 때는 웬만히 틀려먹은 놈들(진&베르무트 정도?)이 아니고서야 달달달달달달달ㄷ랃ㄹ달 하기 마련이니까요ㅋㅋㅋ 달달한 신카이 잘 읽고 갑니당~^.^
그렇죠, 저도 사실 감기를 소재로 쓰게 된 것이 문득 다른 분이 이 소재로 글을 쓰신 걸 보고 망상이 무럭무럭 커져서였답니당. ㅋㅋ 달달함이 느껴지셨다니 너무 기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