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릿, 찌룻, 쭈비쭈, 쭈릿쭈릿, 째릿째 쭈비쭈, 쨋쨋쨋쨋쨋.........”
우리 집 2층 베란다에서 키우는 사랑앵무새 한 쌍의 울음소리다. 나나 내 아내나 평소 반려 내지 애완동물에는 전혀 관심 없었는데 뜬금없이 우리 집에 앵무새가 등장한 사연은 이러하다.
은퇴 후, 내차는 팔아 치우고 나들이 때는 버스, 또는 집사람 차를 이용한다. 집사람이 운전을 도맡아 해주니 편리하기 이를 데 없다. 차를 운전하고 관리하는 수고를 깔끔히 벗어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속 기사의 월급도, 설 추석 때 보너스도, 기사 아드님 병원 입원 위로비도, 기름값도, 보험료도, 수리비도, 새 차 구입비도 내 호주머니에서 지출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그저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히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팔짱 뜨윽하니 끼고 두 다리 쭈욱 뻗고 세상만사 열중 쉬어, 편히 쉬어 자세로 단지 턱짓으로 좌회전, 우회전 지시만 하면 된다. 사람이 한세상 태어났으면 이 정도 호사는 누리고 가야지 않겠는가? 아프리카 어린이도 우크라이나 젊은이도, 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뵈지 않는다.
지난 봄 어느 날, 코로나의 기세가 수그러지는 즈음, 볼일이 있어 전속기사를 대동하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 들머리 네거리 길옆에 여러 종류의 새가 든 새장들을 주욱 진열해 놓고 파는 떠돌이 장사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붉은 신호에 걸렸다. 신호가 청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새장에 노는 새들의 정경을 기웃기웃 바라보다가 얼핏, 언젠가 읽었던 앵무새에 관한 유머 하나가 생각이 나서 전속기사님께 아뢰었다.
“어떤 집에 삼형제가 있었다. 세 명의 아들들은 장성하여 집을 떠나 각자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생신에 어떤 선물을 할지 삼형제가 모여 고민을 했다.
첫째 아들은 왈, “어머니를 위해 큰 집을 지어드려야겠어!”
그러자 둘째아들 왈, “그럼 난 어머니를 위해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외제차를 선물로 드릴거야!”
그러자 셋째 아들이 웃으며, “형님들 선물도 좋지만 제가 준비한 선물이 가장 좋을 걸요? 형님들도 알다시피 어머니는 지금 눈이 안 좋으셔서 성경책을 못 읽자나요. 그래서 제가 한 수도원에다 10년 동안 매년 5억씩 들여 부탁해서 모든 성경구절을 외우는 앵무새를 준비했습니다!”
결국 생신에 삼형제는 어머니에게 각자 준비한 선물을 드렸다. 얼마 후 어머니는 안 보이는 눈으로 삼형제에게 각각 편지를 썼다.
첫째 아들에게,
“네가 지어준 집은 너무 고맙지만 나 혼자 생활하는데 집이 너무 커서 청소하는 게 힘들구나.”
둘째 아들에게,
“엄마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기엔 갈 곳도 없고 너무 많이 늙어서 필요가 없구나.”
셋째 아들에게,
“사랑하는 막내야! 역시 엄마가 뭘 바라는지 아는 아들은 너뿐이 없구나. 니가 보내준 닭 정말 맛있게 먹었단다.^^ ””
아내는 깔깔깔 웃으면서 당장 앵무새를 사자고 하였다. 갑작스런 결정에 얼떨떨하였지만 결제는 그분의 관할 사항이라 엉거주춤 묵언 동의를 하였다. 이미 신호가 풀려서 새장수의 위치를 통과해버려 한 블록을 다시 ‘ㅁ’자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 앵무새를 흥정하였다. 앵무새 종류도 가격도 여러 층차였다. 충동구매 내지 ‘보복 소비’를 경계해가며 적당한 예쁘기와 상식적인 가격의 사랑앵무새 한 쌍을 골랐다. 제일 미심쩍은 것은 과연 이 녀석들이 말을 배울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여쭤 보았다. 새장수는 받은 현찰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우리를 넌지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새의 주인이 새와 얼마만큼 교감(交感)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감’이라..... 그렇게 우아한 용어를 써서 일러주는 그분이 갑자기 우러러 보였다. 차들이 분주히 오가는 대로변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식, 무교양이 들통 날까봐 한껏 몸을 낮추며 ‘교감’의 의미를 단번에, 깊이 이해한다는 표정과 웃음을 지었다. 그러느라 ‘차후, 앵무새가 말을 못 배우는 경우가 닥치더라도 자기의 책임은 없고 다만 우리의 교감 능력, 교감 노력의 부족 탓’으로 떠넘기려는 회피성 발언일 수도 있었다는 걸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다.
집으로 데려온 앵무새에게 일단 이름을 지었다. 졸속하긴 하지만 암놈은 ‘앵’, 수컷은 ‘무’로 부르기로 했다. 앵두꽃의 ‘앵’, 앵돌아지다의 ‘앵’의 어감이 암컷과 어울려 보였고, 무심, 무표정, 무감동의 ‘무’가 수컷과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었다. 암, 수가 구별이 안 되었다. 인터넷을 뒤지니 수놈은 납막(부리 바로 위쪽 피부)의 빛깔이 파랗고, 암놈의 것은 밝은 갈색이라는데, 이런 구별은 번식기라야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지금 이놈들은 아직 어려서 둘 다 흰색이었다. 그래서 번식기를 기다리고, 사물마다 이름이 있다는 자각이 들기까지 무작위로 “앵!”, “무!”라 불러 소리에라도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이 일이 계제가 되어 나 아닌 다른 생명을 곁에 두고 함께 조응, 감응하며 산다는 일이 사뭇 생경하고 낯설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식물을 키우는 일과도 느낌이 달랐다. 젊은 시절, 자식을 낳아 기르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때는 내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내 사단칠정 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른 목숨을 곁에 두어 거두고 돌보는 일의 갸륵한 경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 희미하게나마 그 일의 지엄함이 생각 속에 아른거렸다.
최종 목표는 말 가르치기지만 그 전, ‘교감’이 중요하다 하였다. 처음에는 모이나 물을 주기 위해 새장 가까이만 가도 나를 무서워하여 푸드덕, 푸드덕, 발작하듯 어지러이 날아 새장 속에 설치된 작은 나무통속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아예 대면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 언젠가는 “안뇽!”이라고 인사를 건네며 사뿐히 날아올라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인내와 기다림!
한 주가 지났다.
보름이 흘렀다.
한 달, 두 달..... 진척이 보이지 않았다.
“앵!”, “무!”, “안뇽!”을 아무리 수없이 외쳐도 저들의 반항적인 울음소리만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내가 만물의 영장 아니냐.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원리를 내가 꿰뚫고 있다!
내가 집을 비울 때를 생각해서, 또는 새장을 지키고 앉아 같은 말을 반복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녹음기에다 “안뇽!”을 무한 반복 녹음하여 새장 옆에 놓아둘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미물이기로서니 내가 몸소 다가가 한 번이라도 정겹게 말을 건네는 것이 도리에 맞고, 이른 바 ‘교감’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석달, 넉달......
서서히 지쳐갔다.
어느 날, 벼락처럼 한 생각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차라리 내가 앵무새의 언어를 깨쳐 본다면?”
어떤 경우에 ‘찌룻’이라 울고, ‘쯔빗쯔빗’이라 울고, 어떤 의미로 ‘째릿째쭈비쭈’라 발성하는지를 섬세하게 관찰, 분석해서 내가 이 녀석들의 언어를 장악하여 내가 먼저 저희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우리 두 종족의 ‘교감’에 이르는 더 쉽고 빠른 방법이 아닐까? 어느 날부턴가 내가 새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무릎을 쳤다. 그렇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면 어디 보자, ‘불립문자(不立文字)’ 아니더냐?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법, 왜 교감과 소통이 꼭이 언어로만 가능하겠느냐? 언어는 포기하자, 부처님이 설법 중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었을 때 가섭존자가 그 뜻을 알고 빙긋이 웃었다는 그 모티브! 내가 앵무새 앞에서 언어를 뛰어 넘는 모종(某種)―그 모종은 마르셀 뒤샹이 남자의 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하는 기상천외를 백 배 쯤 뛰어 넘는 창의가 작용해야겠지만―의 퍼포먼스를 한다면, 이 녀석들이 조류와 영장류가 서로 나누어져 따로 진화한 수억 년 전의 간극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이를테면, 내가 이들 앞에서 학춤을 덩실덩실 춘다면, 드디어 이들도 나의 치성에 감동하여 궁상각치우 가락으로 울면서, 궁중 연회 마당의 앵무춤을 한들한들 추어주지는 않을까?
꿈 깨라. 새소리는 새소리로 나날이 더욱 선명해져 가고, 어안이 벙벙한 채 나는 새장 앞에서 차츰 말수가 줄어 갔다.
‘교감’이라..... 사람 사이의 ‘교감’, 범신론 차원의 삼라만상 사이의 ‘교감’, 절대자와의 ‘교감’, 우주에 충만한 ‘교감’, ‘교감’의 절체절명, 교감‘의 불가함, 아득함......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을 지나 지금 겨울 초입, 나는 ‘교감(交感)'의 절벽 앞에 벙어리처럼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