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학 · 불교학 체계 세운 근대불교학 태두
1.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는 근대화의 격랑이 일던 1882년 6월 1일 아이치현(愛知縣) 호이군(宝飯郡) 미토정(御津町) 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우이 젠고(宇井善五)와 어머니 몬(もん)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단카(檀家)로서 사찰과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부친이 6 세에 사망했기에 편모슬하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이유가 결합해, 당시 막 의무교육화가 이뤄졌 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초등학교 저학년에 해당)를 졸업한 후 12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조동종 동점사(東漸寺)에 출가하고, 종단 소속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사 이)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2대 주지 가츠잔 만주(活山卍壽) 스님의 제자[徒弟]가 된 것은 12세였던 1893년 4월이며, 같은 해 10월 5일에 정식으로 입단[得度]하면서 스승의 존호 를 따라 가츠오 하쿠주(活翁伯壽)라 불렸다. 어렸을 적 이름은 시 게시치(茂七)이지만, 당시 일본의 승려들은 이렇듯 호적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우이 하쿠주는 어렸을 때부터 독보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교장이 스승에게 “이 아이는 당신의 이름을 떨치게 해줄 것이오.”라고 하며 2학년 편입의 편의를 제공했을 정도였다. 자연 히 스승의 제자 사랑 역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학교 졸업 이 후 인근 소학림(小學林)에 진학했으나 학제 개편으로 인해 부득이 나고야로 유학을 떠나야 했고 이후 도쿄로 옮겨 도쿄제국대학에 입 학하게 되기까지는 물론, 이후로도 제자의 교육비 대부분은 스승의 사비와 사찰 후원금으로 충당되었다. 스승은 자신이 먹고 입는 것 을 줄여서라도 제자를 공부시키겠다고 공언했고, 제자를 만나 사바 세계에서 떠나기까지 18년 동안 자신의 약속을 지켜냈다.
스승 가츠잔 만주의 사랑이 교육열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동점사에 있을 때는 중책을 맡고 있고 또 다른 제 자들도 함께 있었기에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광명사(光明寺)로 옮겨 한거할 적에는 제자의 여름 귀성을 어린아이처럼 기뻐 하며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학인들이 으레 그렇듯 귀성해 서도 평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철야로 공부하고 늦게 일어남에 도 꿋꿋이 아침밥은 제자와 함께 먹었다고 하니 다른 말은 보탤 필 요가 없어 보인다. 이런 스승이기에 가츠잔 만주 스님은 우이 하쿠 주의 인생에서 가장 각별한 존재 중 한 사람이었다.
2.
1906년 우이 하쿠주는 도쿄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의 전공 선택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근 대 불교학의 태두 중 하나로 거론되지만, 말년의 우이 하쿠주는 자신이 애초에 ‘불교’ 를 전공할 생각이 없었으며 인도철학이라는 보다 큰 맥 락 안에 불교를 적절히 자리 매김하고자 하였을 뿐이라 고 회고하였다. 그래서 “저 놈은 외도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중년의 우이 하쿠주에게서도 발견된다. 《인도철학연구》 6권의 서문에서 48세의 중진 연구자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나는 불교 전문가가 아니다. 또 당장의 상황으로 봐도 전문가 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나, 인도 사상을 연구하는 학도로서 적어도 인도에서의 불교의 발달을 아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를 위해 인도불교 연구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뭇 차가운 이런 ‘거리 두기’의 태도는 가히 전형적인 근대 학인 의 면모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전 학문의 주류적인 비 전은 ‘배워서 된다’로 요약된다. 즉, 전통시대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살행의 일환으로서만 이해되며 그 종착점은 곧 ‘보살 되기’ 내지 ‘붓다 되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를테면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공부는 단적으로 헛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연구 대상과 연구자의 관계는 혼융일체로 성립한다. 우이 하쿠주를 ‘외도’라 매도했던 주변인들은 근대 이전의 이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자세가 평생을 일관한 것이었다고 본다면, 과연 무엇이 청년 우이 하쿠주로 하여금 가혹한 근대학문의 길을 걷도록 했을까, 그것도 불교인으로서 전통적 정체성을 상대화시키기에 유독 최적 화되어 있는 인도학의 길을 선택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은 꽤 적절 한 것이 된다. 안타깝게도 이때의 사정을 직접 전하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이후의 기록을 통해 약간의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이 하쿠주는 젊은 시절 자신이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으로 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을 《인도철학연구》 4권의 서문에서 담담히 밝힌다.
메이지 39년(1906년) 9월부터 개론적인 인도철학사 강의를 들은 이래 각 방면에서 세밀한 연구가 진전된 것은 현저했으나 일반적인 경향을 보자면 최초기부터 도이센의 《일반철학사》 첫 세 권에 기술 된 인도철학에 대한 견해 내지 취급 방식에 대한 해석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곧이어서 자신이 어떻게 도이센을 극복하게 되었는지 또한 술회한다.
사실 나 자신도 처음에는 도이센에 경도되어 다른 연구나 해석을 거의 돌아보지 않았던 듯했다. 그러나 후에 서양으로 유학 가서 그곳 학계의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는, 여러 학자의 연구 성과및 원전을 폭넓게 섭렵하며 체류 4년의 첫 반절을 남모르게 고심하여 미흡하나마 도이센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해석과 취급[방법]이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처럼 우이 하쿠주에게 도이센의 극복은 한 사람의 연구자로 거 듭나기 위한 성장의 과정으로 기억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이 과정 이 자신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학계 전체에 요구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또 공개적으로 도이센의 학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당시 도쿄제국대학 철학 서클에서 도이센이 선풍적인 인 기를 끌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북중학교(京北中學校)의 설립자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는 도이센을 높이 평가해 자신이 직접 그의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또 우이 하 쿠주의 걸출한 제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자신이 제1고등학 교(第一高等學校) 재학 시절 도이센 신봉자 이와모토 테(岩元禎)의 강연을 들었으며 후일 그를 ‘비교사상의 선구자’라 칭하고 심지어 “인도철학 내지 불교의 사상적 이해 및 그것을 널리 알리는 데에서는 나는 아무래도 도이센을 일인자로 꼽고 싶다. 이는 서양의 학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정하는 부분이다.”라고 극찬하기까지에 이 른다.
우이 하쿠주가 약관으로 도쿄에 유학을 온 1901년과 도쿄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한 1906년 사이 다녔던 학교들이 방금 언급 한 경북중학교 그리고 제1고등학교이다. 전자는 이노우에 엔료가 고이시카와 하라마치(小石川原町)에 설립해 현재 도요대학(東洋大學) 부속으로 남아 있고, 후자는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위한 첩경이 자 복잡한 학제 개편의 결과 도쿄대학 교양학부로 흡수되어 현재는 고마바캠퍼스에서 과거의 흔적을 일부 찾을 수 있다. 이렇듯 그는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도쿄제국대학의 지적 영향권 안 에 놓여 있었으며 그 한복판에는 바로 도이센이 있었다.
3.
우리는 난조 분유(南条文雄)와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로 이어지는 도쿄제국대학의 학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근대적 인도 학 · 불교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들의 학풍은 1) 산스끄리뜨어, 빨 리어 등 고전어의 습득과 원전 문헌의 철저한 장악, 2) 영국, 독일 등지로의 유학을 통한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 3) 한문 원전의 재 발견과 대외적 소개로 요약될 수 있다. 도쿄제국대학의 일원으로 서 우이 하쿠주의 학자적 삶 역시 이 3가지 요소로 정리해볼 수 있 다. 우이 하쿠주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1909년에는 이미 그의 스승 다카쿠스 준지로가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등의 고전어 강좌를 개설하고 심지어 《빨리어불교문헌독본[巴利語佛教文學講本]》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서를 산출하는 등 교육의 토대가 잘 갖춰진 상황이었 다.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에 필적하는 우수한 제자로서 그가 최 선의 환경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13년 9월 우이 하쿠주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조동종 을 대표하는 유학승으로서 튀빙겐으로 가 리하르트 갈버(Richard Garbe)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와 같은 배를 탔던 인물이 천 태종의 이케다 쵸타츠(池田澄達), 그리고 진언종의 간바야시 류죠 (神林隆浄)이다. 와타나베 카이교쿠(渡辺海旭)는 여기서 장래가 촉 망되는 후배 우이 하쿠주를 꼭 집어 기대감을 한껏 표출했다.
우이 학사[文學士]는 튀빙겐대학에 적을 두며 갈버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바, 선생이 인도철학에 조예가 매우 깊음은 학계에 정평 이 나있다. 특히 상캬[数論]철학 연구에서는 독보적인 대가이며 인도에 유학한 것이 길며 빛나는 필력 또한 독일 문단의 걸물이니, 우이 스님[師]은 탁월한 이해력으로 인도철학 연구가 차츰 숙달되어 완숙 해지는[蔗を噛む] 경지에 들어가, 이제는 시성 울란트가 노닐며 음유 한 절경의 땅에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석학에게 사사하니, 그 장래는 반드시 보아야 할 터 참으로 부러울 따름이다.
이처럼 노골적인 선망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우이 하쿠주의 튀빙 겐 유학은 커다란 특권이었으며, 역으로 그가 이런 특혜를 받을 만 하다고 인정되는 발군의 실력을 이미 내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자 나카무라 하지메에 따르면, 튀빙겐 유학 초창기에 우이 하 쿠주와 갈버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잇었다고 한다.
(우이가) 어떤 뛰어난 사전(모니어 윌리엄스 저)을 보여주자 갈버 는 “흠. 그런 사전이 있었구나. 버려버리게나. (독일어로 쓰인) 뵈틀 링크 · 로트의 일곱 권짜리 책을 사용하게.”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갈버가 영어로 된 뛰어난 사전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다. 전혀, 전적으로, 이렇게 무시하고 넘어가는 그런 식이었다.
여기서 모니어 윌리엄스(Monier Williams)의 사전보다 뵈틀링 크(Böhtlingk) · 로트(Roth)의 사전이 실제로 더 뛰어났는지는 전 혀 논점이 아니다. 나카무라 하지메가 다소 불만스레 추정했듯 갈 버가 ‘무시’로 일관한 것이야말로 사태의 핵심이며, 여기에 우이 하 쿠주가 가담하길 당당히 요구한다는 점이 중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포인트이다.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콧대 높은 갈버가 보기 에도 일본에서 온 우이 하쿠주라는 승려-학생은 자기편으로 만들 어야 할 만큼 ‘인싸’였다는 점이다. 갈버는 간혹 빨리어도 직접 가 르쳤으며, 또 함께 괴팅겐에 방문해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를 만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이 하쿠주의 튀빙겐 체류는 그다지 오래 유지되지 못하 였다. 독일에 온 지 일 년이 채 안 된 시점인 1914년 7월 말에 1차세 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국 일본이 독일과 반대편에 서게 되자, 그 는 8월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많은 유학생이 귀국을 서둘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영국행은 실로 도박에 가까웠다. 그는 다소 담담한 어조로 2년간의 영국 유학은 ‘자기 혼자 힘으로’ 해냈다고 술회하였다. 전쟁통에 본국으로부터 유학 자 금을 계속 받는 것이 당연히 여의치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더군다 나 영국에 체류 중이던 1915년에 이미 종단 소속 대학인 조동종대 학림(曹洞宗大學林, 고마자와대학의 전신)의 교수로 임명되어버렸으니, 종단은 그에게 우아한 방식으로 귀국을 종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 런던에서 그는 당시 인도도서관(India Office Library, 지금 은 대영도서관의 일부가 됨) 사서였고 이후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되는 프레더릭 토마스(Frederick Thomas)를 만나 그에게 의탁하였 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도쿄대학 학풍의 세 번째 공식에 따라 한 역으로만 전하는 《승론십구의론》의 연구를 원전에 대한 영어 번역 과 함께 제출해 서구권에서 일약 스타로 데뷔하게 되었다. 한문으 로만 접근할 수 있었던 이 바이셰시까(Vaiśeṣika) 철학의 원전을 유 려한 영어와 깊이 있는 해설로 세계 학계에 내놓은 것이다. 아마도 토마스의 지도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1917년,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해 그는 인도를 경유해 불교 유적지를 순례 하고 11월 멋지게 금의환향하였다.
귀국 후 조동종대학림을 비롯해 도쿄 시내 여러 곳에서 강의하다가 1919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 모교 문학부의 강사가 되었으며, 1923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国大學) 인도학과 주임교수로 발령이 나 센다이(仙台)로 거처를 옮겼다. 센다이에서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인도철학연구》 여섯 권을 완성했다. 그리고 1930년 모교인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고, 이듬해 1931년 《인도철학연구》로 제국학사원상(帝国學士院賞)을 수상했다. 1941 년 고마자와대학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1943년 도 쿄제국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 1945년 12월 제국학사원(현재의 일본학사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그는 귀국 이후 출세의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와 동시에 《인도철학연구》 여섯 권에 뒤이어 1934년에 《유심의 실천》, 1936 년에 《지나불교사》, 1939년부터 1943년 사이 《선종사연구》 세 권, 1947년과 1948년에 걸쳐 《불교범론(佛敎汎論)》 두 권을 출판하는 등 끊임없이 연구 성과를 생산해 냈다.
4.
이렇듯 중장년의 우이 하쿠주는 연구, 교육, 대학 행정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으리라 추측된다. 그가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시 점은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때는 사회주의의 유행을 비롯해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지성계가 활발발하게 타오르던 시점이기도 하다. 우이 하쿠주의 라이벌로 곧잘 언급되는 기무라 타이켄은 시대의 아들로서 당대의 사회주의 내지 무정부주 의 진영의 반(反)종교운동에 소리 높여 맞서 싸워나간 것으로 유명 하다. 그는 타성에 젖은 일본불교를 현실에 맞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정화된 불교로부터 미래의 희망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사회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우이 하쿠주의 삶은 상아탑 이미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위 ‘개혁’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에 일절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 인다.
다만, 학문의 자체적 영역을 확보하는 데에는 비상한 관심이 있 었으며 또 이와 관련해서라면 우이 하쿠주 역시 나름의 고집과 강 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두 가지 있다. 하나 는 동점사와의 애매한 관계 설정이다. 전술하다시피 그는 어린 나 이에 동점사에 출가하여 32대 주지 가츠잔 만주 스님의 특별한 총 애를 받았다. 그가 센다이로 옮긴 후인 1926년 동점사의 33대 주지 가 입적하며 후임으로 다름 아닌 우이 하쿠주를 지목했다. 유훈에 따라 그는 이후 12년간을 동점사의 34대 주지로 있었으나, 자신은 센다이와 도쿄만을 오갈 뿐 동점사 근처에는 일절 가지 않았고, 대 리로 하여금 사찰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자신의 보 수는 자신과 같은 처지 아이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 금도 일본에서는 많은 승려들이 학계에 진출해 있지만 우이 하쿠주가 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면 사찰 경영을 위해 학업을 기꺼 이 마무리하고 서둘러 자신의 근거지로 되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를 감안해 볼 때 우이 하쿠주의 그 같은 결정은 실로 남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는 조동종 종단 자체와의 충돌이다. 전술하다시피 도쿄 제국대학의 정년을 몇 년 앞둔 1941년에 그는 고마자와대학의 교 수 겸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종단 측의 결정으로 우이 하쿠주 는 애초부터 수차례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높은 명 성이 필요했는지 종단 측에서는 거듭 제안했고, 이에 마지못해 그 는 총장이 되기로 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고마자와대학 이 종단 소속 대학인 만큼 행사시에 총장이 대도사(大導師)의 역할 도 맡아 의례를 집전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는데, 우이 하쿠주는 양자를 분리해 자신은 총장의 업무만을 보고 대도사의 역할은 다른 교수에게 의뢰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곧 종단 내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반발해 우이 하쿠주는 총장 사직서와 함께 자신의 승적 또한 반납해버렸다. 학문과 종교 사이에서 우이 하쿠주는 나름의 뚜렷한 경계선을 만들었고, 이 선을 지키기 위해 정년퇴임 이 후 보장된 자리는 물론 오래된 자신의 정체성 일부마저 던져버린 것이다. 혹은, 자신이 그러한 이미지로 비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 았던 것이다.
이처럼 종교와 학문의 간극에는 한껏 예민했던 그였지만, 정치와 학문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 서 이야기했듯 그는 제국학사원상을 받고 제국학사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제국대학의 교원으로서 품계도 꾸준히 상승했 다.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 중에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서 교편 을 잡은 사람도 있다. 1939년에는 신생 만주국으로 출장을 갔고, 1946년 덴노(天皇) 앞에서 17조헌법(十七條憲法) 제2조에 대해 강 의하였으며 1953년 문화훈장을 받는 등 국가권력과는 큰 불화 없이 지냈다.
일본제국이 명실상부 전쟁 기계 모드로 변해 미쳐 날뛰던 당시 그는 대다수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침묵과 순종으로 일관했다. 이 비겁함을 어떤 맥락에서 평가해야 할지는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 놓은 채 우이 하쿠주는 1963년 7월 14일 협심증으로 사망했 다. 자식은 5남매를 두었으며 다수가 과학자가 되었다. 그의 묘는 다마레이엔(多磨霊園)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도젠지 34대 주지 가츠오 하쿠주 큰스님(東漸三十四世 活翁伯壽大和尚)”이라고 새겨져 있다.
5.
그의 학문은 인도학 · 불교학의 여러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술했듯이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 져다준 바이셰시까 연구가 하나이고 진제(眞諦, Paramārtha) 계통 의 유식학 연구가 또 다른 하나이다. 주지하다시피 일본 법상종은 현장-규기의 학설에 기초를 둔다. 이런 상황에서 종래의 관점을 일 신해 초기 유식의 비교적 충실한 계승자로서 진제를 발굴하고 그와 현장의 차이를 다각도로 규명해 낸 것이 그의 큰 성취라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우이 하쿠주의 ‘진제 편향’은, 2022년 불교전도협회(仏教伝道協会)와의 인터뷰에서 아라마키 노리토시(荒牧典俊)가 지적 했듯, 《대승기신론》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가지 방증일 수도 있다. 우이 하쿠주 자신은 철저히 인도철학의 맥락에서 불교 를 상대화시켜 바라보려 했지만, 여전히 기신론적인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빌헬름 가이거(Wilhelm Geiger)가 《디빠왕사(dipavaṃsa)》에 근 거해 붓다의 재세 시기를 기원전 563년~483년으로 추정한 것에 반 대해 우이 하쿠주가 북전 계통의 문헌에 근거해 기원전 466년~386 년으로 제안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기반해 초창기의 불교를 (광의의) ‘원시불교’로 보고 다시 이를 ‘근본불교’(기원 전 431년~350년)와 (협의의) ‘원시불교’(기원전 350년~271년)로 나누는 우이 하쿠주의 독특한 시각이 빚어졌다는 점은 비교적 덜 알려진 것 같다.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에 따르면, 이러한 시대 구분은 이후 《불교범론》으로까지 이어져 일본불교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가 12지연기의 위상을 놓고 기무라 타이켄과 논쟁을 벌인 것은 비교적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인식논리학이나 선불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산스끄리뜨 원전 연구를 통해 동 아시아 인명(因明) 중심의 연구 관례를 깨고 인식논리학 연구의 새 물꼬를 텄으며, 북종선을 적극적으로 시선에 넣은 채 치밀한 문헌 탐구 방법을 전개함으로써 기존의 교조적인 접근법을 무력화했다.
《대승기신론》 《성실론》 《전심법요》 등 수많은 경론을 현대어로 번역한 공로 역시 매우 크다.
교육 분야에서도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여기서도 재기환발(才氣煥發)의 라이벌 기무라 타이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츠네미츠 코 넨(常光浩然)에 따르면, 기무라 타이켄은 후학들에게 주어진 자료나 기존의 견해로부터 자유로이 자신만의 견해를 우선 가지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물론 그 자신은 누구보다도 엄밀한 문헌학적 바탕을 가졌으니, 후학들로서는 마치 황새를 바라보는 뱁새와 같았으리라. 그런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해 버렸고, 대신 방대한 문헌을 묵묵히 독파해나가는 우이 하쿠주가 엄격한 스승으로 오랜 시간 모범을 보인 결과 도쿄제국대학의 인도학 · 불교학 학풍은 기무라 타이켄이 경계했던 우직한 원전주의로 더욱 쏠리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도쿄대학의 학풍은 기무라 타이켄보다는 우이 하쿠주 의 그림자가 크다.
그의 《불교범론》 두 권은 향후 오랜 기간 불교학 개론서의 전형 이 되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도 뇌허 김동화의 《불교학개론》이 표절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불교학개론》의 표절률이 얼마만큼인지를 따지는 것은 사소한 논점을 붙잡는 것으로 보인다. 뇌허가 척박한 환경에서 한 편의 개론서를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유학 생활에서 막대한 지적 자극을 받았던 것이 주요한 자량임에 틀림이 없고, 그 영향 전체에서 보자면 우이 하쿠주 일인의 비중이 꼭 절대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제대로 판정하려면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불교학사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의 지적 역량이 확장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우이 하쿠주가 우리에게 완벽한 과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길산 leegilsan@kyungnam.ac.kr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일본 누마타재단 지원으로 도쿄 대학교 인도철학 · 불교학과 특별연구생 과정을 거쳤다. 유가행 유식학파를 중심 으로 불교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 유식이십론과 유식성 개념의 변화〉 등이 있다. 현재 경남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 조교수로 재직하며, 경남대 무 크지 《아레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