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집계
올 146건 검거 역대 최다
보안 치약한 중기가 90%
중견 에너지 기업 연구소장으로 재직한 B씨는 중국 C사로부터 현재 받는 연봉의 2배에 차량과
주택까지 제공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이직을 결심했다.
그는 퇴사 직전 한 주 동안 1만5000여 개에 이르는 회사 기술자료 파일을 은밀히 빼냈다.
임원 권한을 이용해 보안 시스템을 직접 해제하고, 클라우드 시스템 등을 통해 기술자료를 유출한 뒤
퇴직 직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했다.
경찰과 국가정보원은 B씨가 대형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잠시 입국한 사실을 확인하고 출국 직전에 검거했다.
첨단 기술과 K브랜드로 전 세계에서 위상을 높아진 한국이 '산업 스파이'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술 경쟁이 촉발되고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는 게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14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연초 이후 올해 10월까지 산업기술 유출로 인한 검거 건수는 146건으로
2004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래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산업기술 유출로 검거된 인원만 314명에 이른다.
기술 유출로 인해 피해를 입은 기업 10곳 중 9곳은 중소기업이다.
특정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보유한 강소기업들이지만 보안 대책에 추자할 여력이 없어
그야말로 무방비로 기술 유출에 노출돼 있다. 김정범.진영화.이지연 기자
자율주행.수소전기.핵융합...미래 핵심 기술까지 털어간다
올 기술유출 검거 역대 최다
최근 6년간 반도체기술 39건
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줄줄'
중기 공정기술도 주요 표적
피해규모 5년간 25조 육박
국정원.경찰 전담조직 총력
'퇴직자 사후관리도 만전을'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조선 같은 산업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춘 나러로 꼽힌다.
해당 산업은 후발국의 기술 추격과 저가 공세로 경쟁이 치열하고 기술 유출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특히 최근에는 자율주행, 수소전기차, 핵융합을 비롯한 차세대 주력 산업에서까지 기술 유출 시도가 이뤄지는 실정이다.
14일 국정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까지 반도체, 2차전지, 자동차, 조선을 포함한 국내 대표 업종에서 국가핵심기술 5건을
비롯해 총 23건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국내 대표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 유출로 적발된 건수는 2012~2017년 7건에 끄쳤지만,
2018년부터 올해 11월까지는 39건으로 5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기술의 완성도와 희소성이 높은 국가핵심기술을 빼내기 위한 시도가 크게 늘고 있다.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하다 적발된 사례는 2018년부터 올해 11월까지 총 38건으로 2013~2017년(23건)에 비해 65% 이상 늘었다.
해당 기술이 유츌되면 피해 기업이 도산하거나 경영 악화에 빠질 수 있고 국익도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산업스파이는 국가핵심기술을 비롯해 영업비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으로 개발한 기술을 노린다.
최근에는 중소기업의 소재.부품 같은 정밀 기계 분야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의 핵심 중소기업이 보유한 공정 기술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는 중소기업이 기술보호 시스템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악용한다.
상당수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은 첨단 기술을 개발한 이후 기술보호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이들 기업이 연구인력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도 기술 유출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이유로 꼽힌다.
이동훈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중소기업은 산업 기술 보안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정책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기술 유출을 막을 수 있는 관리체계 강화와 더불어 퇴직을 앞둔 이들에 대한
사후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산업 기술을 해외로 뺴돌리려다 적발된 사례가 93건에 달한다.
R&D 비용, 예상 매출액으로 환산하면 피해 규모가 2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산업 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 규모가 이보다 더 많은 연간 최대 56조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이는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의 2.6%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산업스파이가 이처럼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일단 첨단 기술을 뺴내는 데 성공하면 기술개발에 소요되는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발주자들은 제조업 고도화를 추진하면서 제품의 생산과 판매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공정 기술 입수에 혈안이 돼 있다.
이에 기술강국인 한국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산업 고도화 전략으로 꼽히는 '중국 제조 2025' 계획을 발표하고 세계의 공장에서 벗어나 기술 집약형 첨단 제조강국
진입을 목표로 내걸었는데 한국이 '캐치업' 대상인 산업이 상당수다.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로 피해가 확산되면서 관계 부처에서도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안보수사국 산하 조직에 방첩경제안보수사계를 신설해 인력을 확충하고 산업 기술 유출 대응을 위한
수사 역량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8월 11개 주요 시도 경찰청은 산업기술보호수사팀을 산업기술안보수사대로 격상했다.
국정원 역시 전담조직인 '산업기밀보호센터'를 20년째 운영하고 있다.
산업기밀보호센터는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이 갖고 있는 핵심 기술과 연구 성과물을 보호하는 일에 집중한다.
국가핵심기술(13개 분야 75개)과 국가 R&D 성과물 보유 기관에 대한 보안 취약점 등을 집중 점검하고 있다.
대검찰청 역시 기술 유출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지난해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설치했다.
김정범.이지안 기자
클라우드.SNS로 은밀하게
연구용역 위장해 대담하게
더 교묘해지는 범죄수법
노액연봉 미끼로 채용 빈번
기업 통째 인수해 뺴내기도
매년 형량 낮아져 솜방망이
산업스파이들의 범죄 수법 역시 갈수록 첨단화.지능화되는 양상이다.
인수.합병(M&A)을 가장한 기술 유출은 물론 핵심 인력 채용, 해외 체류 인력 포섭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술 빼내기가 이뤄지는 양상이다.
국가저옵우너 고나계자는 '최근 클라우드 시스템이나 사회고나계망서비스(SNS)처럼 다양한 경로로 기술을 유출하며, 수법이 고도화되고 있다'며 '곤련 직원을 직접 채용하는 방식을 남어 자문과 연구용역 형식으로 위장하거나 기술 탈취 목적으로 국내 기업을 통쨰로 인수하는 식으로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기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살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 10월까지 6년간 703건의 기술
유출 시도가 적발됐다.
지난해레 이어 올해도 300명이 넘는 인원이 검거됐다.
홍기원 의원은 '기술 패권시대에는 일단 기술이 유출되고 나면 그 피해를 돌이킬 수 없기 떄문에 사전 예방이 특히 중요하다'며
'양형 기준 현실화로 범죄 억제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고 수사기관의 전문성을 확보해 신속한 수사와 장확한 기술가치 판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액 연봉을 제사하는 식으로 금전적인 보상을 미끼로 핵심 연구 인력과 임원급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력 빼가기도 빈번하게
이뤄진다.
특히 기업 내부 직원 매수를 통해 기술을 뺴내는 비중이 갈수록 넢아지고 있다.
기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고 접근 권한이 있는 직원을 통해 유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떄문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내부 직원에 의해 기술이 유출된 경우는 전체의 76%였지만, 올해는 84%까지 비중이 높아졌다.
기술 유출 범죄는 수법이 치밀하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탓에 증거 확보가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산업기술 개발에 참여한 직원 상당수가 기술 소유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며 '기술보호 전문인력이 더 확충돼야 한다'고 말했다.
설령 국내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을 적발하더라도 처벌 수위가 약해 일벌백계가 쉽지 않다,
대검찰청의 검찰 사건처리기준에 따르면 국가핵심기술 국외 유출의 경우 기본 구형은 7년,
산업 기술 국외 유출의 기본 구형은 5년이 기준이다.
하지만 실제 기술 유출 사범의 평균 징역형량은 2020년 18개월에서 2021년 16개월, 지난해 14.9개월로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선고된 기술 유출 사건 중 실형은 10.6%에 불과했다. 김정범.진영화 기자
중서 팔려고...유명 홍삼제품 베꼈다가 덜미
K브랜드 노린 범죄도 기승
국정원 첩보망서 단서 포착
시가 1천억원어치 최대규모
전 세계적으로 한국 상품과 콘텐츠에 대한 인지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유명브랜드 상표권이나 특허 등 지식재산권 유출로 인한
피해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추적으로 국내 유명 홍삼 브랜드의 모조 제품 1000억원어치를 판매하려던 일당이 붙잡힌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인 일당이 국내 유명 홍삼 브랜드인 정관장의 포장지를 제작할 수 있는 인쇄업자를 알아보고 다닌다는 정보가
국정원첩보망에 걸려든 게 발단이다.
국정원은 유명 인삼 재배지인 충청남도 금산군 등의 농가와 관련 업체를 접촉하고 장기간에 걸쳐 이들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 결과 중국 지린ㅅㅇ에서 장고나장을 모방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한 전력이 있는 중국인 H씨가 한국에 인삼 유통 회사를 차렸다는 결정적 단서를 호가보했다.
이후 국정원은 이들이 설립한 금산 소재 A사에서 대형 트럭이 컨테이너를 싣고 출발하는 것을 포착했다.
인천항에서 적발한 컨테이너에서는 중국으로 반출하려던 정관장의 위조 포장 용기가 쏟아져 나왔다.
국정원 관계자는 H씨 등 중국인 5명이 전국을 돌며 약 5t의 저가 홍삼을 사들이고 중국에 수출한 후 유사품을 생산하려고 했다'면서 '정관장 상표 도안을 입수해 포장지를 자체 제작한 것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H씨 등 주범 2명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서녹했다.
위조 제품은 시가로 1000억원어치가 넘는 규모로 단일 위조 상품 적발 사건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처럼 피해 기업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수사를 의뢰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단속은 지지부진하다. 김정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