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북해 귀환기
1.
철갑마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게 ‘사람’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사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무언
가 움직이고 소리내는 것들이 방안에 있다는 정도만이 그가 인지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음의자 하나가 그의 발에 걸렸다. 그는 그대로 걷어차서 부숴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이쪽저쪽을 보았다. 의미없는 물건들, 의미없는 표정들, 의미없는 소리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끔찍한 비명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퍼져나갔다.
무언가 차가운 느낌이 가슴에 닿았다. 철갑마는 고함 지르던 것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그를 향해 손을(그게 손이라
는 것도 몰랐지만) 내밀고 있었다. 차가운 기운은 거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철갑마는 그것을 향해 다가가 손을 휘둘러 때렸다. 그
것이 재빨리 피해서 그의 손에 맞지 않았다. 철갑마는 화가 났다.
그는 그것을 따라잡으려 달렸다. 앞에 다시 무언가가 걸렸다. 그는 그대로 부딪혀서 얼음탁자를 부수고 그 건너편으로 달려나갔
다. 탁자에 올려져 있던 것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중 하나가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는 물건을 집어들었다. 둔탁한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때렸다. 강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진동시켰다.
철갑마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격렬한 고통과 충격이 그만큼의 분노를 가져왔다. 아까 전과는 다른
어떤 것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게 갈맹덕이고, 방금 장풍으로 그를 가격했다는 것을 그는 물론 몰랐다. 하지만 분노를
터뜨릴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그는 갈맹덕을 향해 손을 내밀고 달려갔다.
갈맹덕은 자신의 장풍에 맞고도 멀쩡한 이 괴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가 가까이 왔을 때에야 몸을 날려 피했다.
철갑마가 따라갔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점점 빨리 달리고 있었다. 머리는 비어 버렸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
이다. 소림 철비각에 이은 무당 제운종의 경공술이 발휘되었다.
그는 허공에 놓인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듯 공중으로 떠올라서 갈맹덕을 향해 날아갔다. 이번에는 무당 청운신법(靑雲身法)이었
다. 한 조각 구름처럼 그렇게 가볍게 날아가서 그는 갈맹덕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갈맹덕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다. 갈맹덕이 경악해서 도망쳤다. 신법은 정교했지만 공격은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피할 수 있
었다.
철갑마가 풍차처럼 팔을 휘둘러 대었다. 이것도 그의 신법과 마찬가지로 점점 빨라지고, 점점 강해졌다. 게다가 무언가 격식을 찾
고 있는 것 같았다. 갈맹덕은 철갑마가 만들어내는 압력에 밀려 후퇴하며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추위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교서열 팔십 삼위라는 이름이 무색한 일
아닌가.
갈맹덕이 고함을 지르며 팔을 뻗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손바닥이 솥뚜껑처럼 커지고 팔이 두 배 길이로 늘어났다. 밀종대수인(密
宗大手印)의 일초였다. 철갑마의 가슴팍에 이 일초가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철갑마가 뒤로 밀려갔다. 그러나 이내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갈맹덕의 팔을 붙잡았다.
갈맹덕의 팔이 팔꿈치 쪽으로 꺾였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대로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갈맹덕의 팔은 탄력있는 버드나무 가지
처럼 꺾는 방향으로 휘었다가 뱀처럼 구부러져서 철갑마를 밀어냈다. 그리고 철갑마의 가슴을 연달아 세 번 때렸다. 소뢰음사(小
雷音寺)의 절초 홍염수(紅焰手)였다.
그러나 철갑마는 여전히 무사했다. 그는 맞은 티도 내지 않고 묘한 각도로 손을 뻗어 다시 한 번 갈맹덕의 팔을 잡았다.
갈맹덕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번엔 추위 때문이 아니라 위기감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는 일부러 잡혀준 것이지만 이번엔 아
니었다. 피하려고 했는데도 그냥 잡혀버린 것이었다. 무언가 묘한 금나술을 사용하는구나 싶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팔을 꺾는 게
아니라 비틀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유가신공(瑜伽神功)을 익혔어도 비틀어 끊는 것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그는 운기해서 저항했
다. 그러나 그것도 힘겨웠다. 철갑마의 힘은 사람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엄청난 내공이었다.
금방이라도 갈맹덕의 팔이 부러져 나가려 하는 찰나, 한 자루의 몽둥이처럼 생긴 검이 철갑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철갑마는 팔뚝
으로 검을 막았다. 팔이 울렸다. 이 충격으로 그는 갈맹덕을 놓아버리고 이번에는 검을 휘두른 상대를 보았다. 무언가가 그의 시
선과 머리를 사로잡았다. 철갑마는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화도 내지 않았다. 반짝이는 무엇? 움직이는 저 무엇?
백지처럼 비어버린 머리 구석 어딘가에서 조금 움직이는 게 있었다. 철갑마는 그게 뭔지 생각했지만 끝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
아 괴로워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철갑마는 신음하며 머리로 손을 올리다가 아까 주웠던 물건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그의 머리 한쪽 구석에서 무
언가가 움직였다. 눈에 익숙한 물건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무영이 예물로 가져온 빙후의 조각상이었고, 그의 눈에 익숙한 것은 조
각상이 아니라 그 원형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끝내 그걸 알아보지도 못했다. 철갑마는 조각상을 던져 산산조각
이 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훨씬 흥미가 끌리는 무영을 향해 접근했다.
무영은 창백한 얼굴로 철갑마를 보았다. 묵염흔을 팔뚝으로, 비록 갑옷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팔뚝으로 막은 괴물이었다. 이렇게
강철 산을 때린 듯이 반응이 없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제 그를 목표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갈맹덕이 바닥에 구르는 석판을 챙겨 품속에 넣으며 소리쳤다.
“그만 가자! 우리 일은 이제 끝났어!”
설녀들이 그를 원망스럽게 흘겨보고는 서로를 향해 의견을 구했다. 평정이고 뭐고 없었다. 이제 그녀들이 처벌받는 것은 기정사
실이었다. 일이 조금이라도 더 커지지 않게 수습하는 것만이 그녀들의 살 길이었다.
제칠설녀가 외쳤다.
“모두 동시에 한기를 뿜어 공격해요!”
운이 좋으면 다시 얼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다섯 명의 설녀들이 동시에 손을 뻗어 철갑마를
향해 한기를 뿜어냈다. 철갑마가 잠시 움찔했다.
무영이 묵염흔을 휘둘렀다. 검은 마기의 불꽃을 뿜으며 묵염흔은 철갑마의 투구와 갑옷이 연결되는 선을 때렸다. 철갑마가 고개
를 갸우뚱했다. 이번에는 무영이 반대방향으로 돌며 파천황을 휘둘러 갑옷 틈으로 찔러 넣었다. 파천황은 한 치쯤 들어가다가 단
단한 벽에 걸린 듯 멈췄다. 무영의 표정이 변했다. 분명히 갑옷 틈새로 박아 넣은 것인데 갑옷보다 단단한 무언가에 막힌 것이다.
철갑마의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무영은 몸을 기울여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철갑마의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무영
은 이번에도 피했지만 이상한 느낌이 뇌리를 때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철갑마의 공격이 가해질 때 그는 그게 뭔지 깨달았다.
‘대력금강수!’
갈맹덕이 소리치고 있었다.
“대력금강수다! 그놈은 소림사 출신이야!”
철갑마가 멈춰섰다. 그는 멍한 눈으로 갈맹덕을 보다가 다시 무영을 보았다. 설녀들이 계속 그를 향해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는 기분 나쁜 한기 정도에 불과했다. 단지 기분이 좀 나쁜 정도였다. 하지만 ‘대력금강수’라
는 소리가 그를 자극했다. 방금 전까지 그가 노렸던 ‘그것’도 뭔가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생각을 포기하고 다시 무영을 노렸
다.
그를 자극하는 그게 뭘까.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흑색의 검도 아니고, 뭔가 반가운 듯한 백색의 칼도 아니었다. 반짝이는 보석도
아니었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사람, 혹은…….
그는 그걸 찾았다. 검은 목걸이, 어딘가 반가운, 마치 그의 신체 일부와도 같은 느낌의 강철 목걸이였다. 그는 손을 내밀어 무영의
목을 노렸다. 그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건 내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무영은 철갑마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순간 목이 당겨졌다. 아직 철갑마의 손이 닿기도 전에 목걸이가 절로 반응한
듯이 철갑마의 손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무영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예전에 제강산의 손에 잡힐
때와 마찬가지 느낌이고 상황이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그는 꼼짝도 못하고 철갑마의 손에 잡혔다. 철갑마가 잡은 것은 목걸이였
지만.
철갑마가 목걸이를 잡아 당겼다. 무영이 끌려갔다. 그는 그 힘으로 파천황을 철갑마의 배에 찔러 넣었다.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철갑마가 목걸이를 흔들었다. 무영은 그 손길을 따라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건 마치 닭목을 잡아 흔드는 꼴이나 다름없었
다. 무영은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철갑마를 향해 묵염흔을 휘둘렀다. 철갑마가 귀찮다는 듯 묵염흔을 잡더니 그 손에서 빼앗아 저
만치 던져 버렸다. 그의 손에서 무영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다뤄졌다.
무영은 파천황 마저 놓아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갈맹덕과 설녀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대력금강
수로 철갑마의 가슴을 때렸다.
갈맹덕이 또 소리쳤다.
“네가 왜 대력금강수를 사용하는 거지?”
물론 그의 말에 대답하는 소리는 없었다. 철갑마는 잠깐 멈춰서 무영을 보다가 두 손으로 강철 목걸이를 잡고 좌우로 당겼다. 강
철목걸이가 비틀려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영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잡아 비틀던 철갑마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답답한 모
양이었다.
그는 목걸이를 잡아늘이다 말고 손으로 목걸이를 후려쳤다. 무영의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개의치도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
기 강철 목걸이를 잡고 눈을 빛냈다. 마치 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공할 기세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강철장갑이 터져 나가고
손이 드러났다. 불에 탄 것처럼 일그러진 앙상한 손이었다. 그 손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뿜어지더니 강철목걸이에 전달되었다.
강철목걸이가 기묘한 반응을 보였다. 목걸이는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조금씩 꿈틀대더니 무영의 목에서 풀려나가 철갑마의 손에
잡혔다.
철갑마는 꿈틀대는 길쭉한 강철봉을 잡은 것처럼 그렇게 놈을 들고 있다가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마치 만족한 웃음소리와도 같은
그런 소리였다.
갈맹덕이 소리쳤다.
“무영, 그만 두고 가자! 우리 일은 끝났어!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
철갑마가 그 말에 다시 갈맹덕을 보고, 무영을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깊은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언가 소
리가 흘러나왔다.
“그그그그기기……!”
무영은 멍청하게 서서 자신의 목을 만지고 있었다. 저 끔찍한 강철 목걸이가 이런 방식으로 목에서 풀려나갈 줄은 몰랐다. 대체
이 철갑마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강철 목걸이가 어떻게 저렇게 된 것인지도.
갈맹덕이 달려와서 그를 잡았다. 그리고는 억지로 끌고 문을 향했다. 무영은 정신을 차리고 갈맹덕의 손을 뿌리쳤다. 고집을 부려
철갑마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철갑마는 도저히 그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상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의문은 의문대로 남겨두고 이곳을 떠나는 게 나을 것이다.
무영은 묵염흔과 파천황을 챙기고, 마침 묵염흔이 떨어진 곳 부근의 깨어진 항아리에서 쏟아진 벽곡단을 한줌 집어 품에 넣었다.
그는 설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이제 철갑마를 제압할 생각을 포기하고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영은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문을 향해 뛰었다. 갈맹덕은 이미 계단을 통해 위로 달려가고 있었다. 뒤에서 철갑마가 고
함을 지르고 있었다.
“무, 무우우우 무영-!”
무영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괴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거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들은 말을 되
풀이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다시 계단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빙궁의 지상으로 올라가 정문을 빠져나간 뒤 갈맹덕의
뒤를 따라잡을 때까지 그는 쉬지 않았다.
2.
무영과 갈맹덕이 떠난 후 빙궁의 설녀들에게는 철갑마를 제어할 수단이 없었다. 그들이 있었을 때는 그나마 싸워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이제 그들도 없었고, 그녀들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들의 유일한 무기인 ‘한기’가 통하지 않으니 아무런 저항
수단이 없었다.
제칠설녀는 철갑마를 피해 방 한쪽 구석으로 가면서 자신들의 장점이 곧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곱씹었다. 그건 무영을
통해서 이미 명확하게 드러났다.
제삼설녀가 물론 게으름을 피우며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약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한기가 아닌 순
수한 내공으로 밀어붙였으면 무영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등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하고 있던 한기로, 그리
고 별로 능숙하거나 효과적이지도 못한 초식으로 상대했으니 지게 된 것이다. 무공의 고하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천적관계라는
게 문제가 되었다고 그녀는 보고 있었다.
사실 승부는 무영이 탈의실을 지나 성전에까지 따라왔을 때, 그곳에서도 그저 조금 추위를 탈뿐 얼어붙지 않았을 때 이미 그녀들
의 패배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빙정의 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는 사람에게 그녀들이 달리 무슨 방법을 더 사용해 볼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제삼설녀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비무를 한다고 해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이 이야기
를 했다고 해서 제삼설녀가 패배를 인정했을 리는 없었지만 어쨌든 이건 나중에라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이화태양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고, 또 이화태양종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기에 강한 자들이 강호에 또 없으리란 법도 없
으니까.
어쩌면 해남도에 있는 빙후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빙정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해남도에서 빙궁 사람들
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빙백한공 외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을 테니까. 어쩌면 그게 북해를 이화태양종에게 내주고 멀리 해
남도로 이주하라는 대종사의 명령에 따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빙궁의 힘이 빙정에서만 나온다면 차라리 빙궁에서 결사항
전 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힘이 전부인 마도천하에서 점점 약해진다는 것은 어차피 죽는 길이 될 터
이므로.
제삼설녀가 외쳤다.
“다가오고 있어!”
제칠설녀의 상념이 중단되었다. 철갑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삼설녀를 비롯한 설녀들이 철갑마를 피해 방 건너편으로 우루루 몰
려갔다. 겁먹은 여자애들이 하는 행동 그대로였다. 제칠설녀는 그녀들을 경멸하는 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벌어진 일만으로도
그녀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철갑마가 해치지 않는다 해도 빙후가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보기엔 철갑마가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통제할 방법이 없어서 탈이지 난폭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지만 않으면 철갑마가 날뛰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설녀들과 달리 피하지 않
았다.
철갑마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제칠설녀는 움직이지 않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눈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철갑마는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장갑이 부숴져 맨살을 드러낸 그 손이었다. 따듯했다. 철갑마의 손에는 온기가 흐
르고 있었다. 차츰 철갑마의 눈빛이 안정되고 있었다. 붉은 기운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야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철갑마의 투구 사이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무, 무영! 무영!”
그는 설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무영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철갑마는 곧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
다.
설녀들이 제칠설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지?”
제칠설녀가 대답했다.
“따라 가야죠.”
제칠설녀를 선두로 해서 설녀들은 철갑마의 뒤를 따랐다. 철갑마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가 지상으
로 나가더니 정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설녀들은 정문 안쪽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도망가려나봐!”
“이제 어떻게 하지?”
“빙후님이 아시면 우린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제칠설녀는 말없이 빙궁 밖으로 나섰다. 제삼설녀가 뒤에서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거야?”
제칠설녀가 대답했다.
“철갑마가 가는 곳이라도 확인해야죠. 청소라도 하면서 기다리세요.”
제삼설녀가 펄펄 뛰었다.
“청소라도 하라고? 네가 감히 그런 말을……!”
제칠설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빙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제삼설녀는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제칠설녀의 말대로 청소라도 하는
것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만찬이 열렸던 방을 정리하고 혹시나 해서 성전에 내려간 그녀들은 잃어버린 것이 철갑마뿐만이 아
니라는 걸 알게되었다. 빙검도 사라졌던 것이다.
* * *
무영과 갈맹덕은 거의 하루종일 걷고 나서야 바람이 덜한 곳을 찾아 휴식했다. 갈맹덕은 그 혼란 중에도 초피 이불은 잊지않고 챙
겨와서 감싸덮고 앉았다. 무영도 그 부근에 누웠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하루였다. 빙궁을 구경했고, 비무를 했고, 괴물을 만
났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지만 연거푸 충격을 받다보니 오히려 무감동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떨어져서 다
시 생각하자 그 모든 일들이 내포하고 있는 갖가지 의미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이제 마교혈맹록 서열 일백 오십 위가 된 것이다. 서열대로 하자면 그보다 강한 자는 마도천하에 일백 사십 구명밖에 없다.
제강산에게 많이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철갑마는 대체 정체가 뭘까. 빙궁에 갇혀있던, 혹은 보호되고있던 저 괴물이 소림사와 무당파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원래 정종의 고수였던 것인가. 그런데 빙후에게 잡혀서? 설녀들의 합동공격을 받고도 멀쩡할 정도로 한기에 강하지 않았던
가. 빙후는 설녀들에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한 고수라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무영이 문득 갈맹덕에게 물었다.
“빙궁이 원래 이렇게 약한가?”
이불 틈으로 갈맹덕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만하지 마라 애송아! 빙궁의 무공은 원래 한기에 강한 사람에겐 안 통해. 네가 그렇게 한기에 강한 줄 모른 게 총단의 실수였을
뿐이다.”
“총단의 실수……, 총단은 내가 실패하길 바랐나?”
“흥!”
갈맹덕은 말실수 한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누구나 짐작하는 사실이지만 그걸 직접 확인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문득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이지만 막상 물어볼 기회가 되자 잊고있던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꼬마야. 바른대로 대답해라. 대력금강수는 어디서 배웠나?”
무영은 그 말에야 중요한 사실들 사이에 가려졌던 사소한 일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철갑마와 싸우는 와중에 자신이 대력금강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부분이었다. 알고 보면 그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수없이 경고를 받은 일 아니었던
가. 그걸 가장 보여줘선 안될 사람 앞에서 사용한 것이다.
무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알 필요 없다.”
갈맹덕이 음산하게 웃었다.
“알 필요 없다고? 건방진 꼬마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할아버지 머리위로 기어오르는구나. 넌 그 사실에 대해 반드시 해명해야
할거다. 필요하다면 총단까지 끌려가서라도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비틀어 줄 수도 있지만 제강산이 난처해하는 꼴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 일단은 그냥 두지. 나중에 아주 재미있어질 거다. 흐흐흐.”
그는 다시 초피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무영은 이 자리에서 갈맹덕을 죽여버릴까 잠깐 갈등했다. 죽여버리고 여행길에 사고로 죽었다고 보고하면 그만일 것이다. 추위에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가 무영보다 고수라 해도 여기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이불을 둘둘 감고 있는
지금 기습을 가하면…….
그는 문득 철갑마가 나타났을 때 그가 어떻게 싸웠던가를 생각해 냈다. 여기보다 훨씬 추운 그곳에서도 갈맹덕은 상당한 무위를
드러냈었다. 어쩌면 추위에 약한 척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고수일 수도 있다. 지금 저러고 있는
것도 두심오가 그랬던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영은 포기하려고 하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반격을 두려워하다간 아무 짓도 못한다. 차라리 여기서 반격당해 죽는 한이 있
더라도 시도하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갈맹덕을 죽이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화태양종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들이 이대로 북해에 돌아가서 총단에 그 사실을 보고한다면 종사가 곤란해지고, 그건 즉 이화태양종도 곤란해진다는 뜻이니까.
좋다. 죽이자. 그러나 기습은 아니다.
무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라!”
갈맹덕이 다시 이불 사이로 코끝을 내밀었다.
“뭐냐, 꼬마야.”
무영이 말했다.
“널 죽이겠다.”
갈맹덕이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암습은 않으니 제법 쓸만한 녀석이긴 하구나. 하지만 겁이 없으니 일찍 죽겠지.”
그는 얼굴을 내밀고 무영을 보며 말했다.
“계집애 하나 이겼다고 간이 부었나 본데, 날 이길 자신은 있는 거냐? 내가 추위에 약해 보이지? 난 추운 게 싫은 거지 약한 건 아
냐. 장담하지만 세 초식 안에 네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어.”
무영이 묵염흔과 파천황을 뽑아들었다.
“덤벼라.”
갈맹덕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어지간하면 살려서 돌아갈까 했더니……. 뭐 좋아. 널 죽이고 빙궁 쪽에 이번 비무를 덮어버리는 걸로 협상을 할 수도 있을 테니
까. 빨리 해결할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
갈맹덕의 말이 끊어졌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무영은 옆으로 걸음을 옮겨 갈맹덕을 여전히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뒤에 무
엇이 나타났는지 살폈다. 철갑마였다. 어느새 철갑마가 나타나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강철투구 사이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철갑마는 잠시 무영과 갈맹덕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무, 무영.”
3.
싸움 일보직전이었던 무영과 갈맹덕이 시선을 교차시켰다. 살기가 아니라 의혹을 담아서였다. 철갑마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왜 무영의 이름을 말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두 사람의 머리에 동시에 떠올랐던 것이다.
갈맹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널 찾아 온 것 같다. 물어봐.”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것 같아서 한편 우습고, 한편 갈맹덕조차 떨게 만드는 철갑마의 신위가 놀랍기도 했다. 갈맹덕과 마찬가지
로 무영도 철갑마와 싸웠고, 상대도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느낌은 없었다.
무영은 철갑마를 향해 말했다.
“내가 무영이다. 날 찾나?”
철갑마가 손을 뻗었다. 무영은 흠칫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철갑마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철갑마는 무영의 뺨을
만지며 다시 말했다.
“무영. 무영. 무영. 무영…….”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제까지고 그 말만 되풀이 할 것 같았다. 무영은 철갑마의 손을 밀어내었다.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나?”
철갑마는 다른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둘째치고, 다른 말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무영의 질문에 대해서 전혀 반응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동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밀어내려 하는 무영의 손길을 거의 닿을락 말락 피해
가며 돌려서 퉁겨내고 그대로 무영의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무영이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영의 손은 철갑마의 손에 닿지도 못했다. 철갑마의 손에
가까이 가면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압력이 작용해서 미끄러뜨리고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압력이란 철갑마의 손
이 만들어내는 정밀하고도 매끄러운 반응동작 때문인 것을 무영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본능적인 반응인줄로만 생각했다가 그게 세 번 네 번 다시 반복되자 그때에야 알았다.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에 실린 엄청난 힘과 내공, 한 줄기 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중첩되어 끝내는 이쪽이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기운, 무당 태극권의 구결을 구체화한다면 딱 이랬을 것 같은 동작이었다.
손으로 밀어낼 수 없다면 피할 수밖에 없다. 무영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서 철갑마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
도 소용없었다. 철갑마는 자석에 달라붙은 쇳덩이처럼 무영에게 따라붙었다. 처음의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유지한 채로.
무영은 벌컥 화를 내며 대력금강수로 철갑마의 가슴팍을 밀었다. 대력금강수는 정교한 초식도 아니고, 그 자체로 파괴적인 위력
을 가진 기공도 아니었다. 그러나 본신의 내공을 남김없이 담아서 실어보내는 데에는 더없이 적합한 무공이었다. 손실 없이 온전
히 힘을 담아서 상대를 격타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소림에서 오랜 세월동안 다듬어진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낮을 때는 일
반적인 권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내공이 심후해질수록 차원이 다른 무공처럼 위력이 달라지는 것이 대력금강수였다.
현란한 변화도 없고, 불필요한 기교도 없다. 더없이 정직하게, 오로지 심후한 내공만을 담아서 순박하고도 솔직하게, 파괴적이면
서도 중후하게 일장을 가격하니 적은 오히려 상대할 방법을 못 찾아 허둥거리다가 당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단순하고 솔직한 공
격에 대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더 강하게 맞받아 치거나 그 단순함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현란하
고 복잡 미묘한 방법으로 흘려버리는 것만이 가능한데, 전자에 대해서는 대력금강수 만큼 온전히 힘을 실어보낼 수 있는 무공이
드물고, 후자에 대해서는 역시 그걸 압도할 만큼 정교한 무공이 드물었다. 그러므로 대력금강수가 소림사 최고의 수법으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철갑마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가공할 압력을 느끼고 있었을 텐데도 피하지 않았다. 무영의 뺨에 댄 손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일 완도(腕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자유로운 나머지 한쪽 손으로 대력금강수를 맞받아서 흘
리려고 했다. 그 손에는 아직 강철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더없이 부자유스러울 것 같은 그 손이 영활하고도 정교한 동작을 보여
주었다.
철갑마의 손은 비스듬히 무영의 팔뚝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서 곡선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흘러나왔다. 봄바람처럼 가볍고 부드러
운 동작이었지만 그 속에 갈무리된 힘은 황하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흘러서 거역할 수 없는 큰 힘을 이루었다. 무영의 팔뚝이 밀려
나갔다가 끌려가고, 다시 꺾였다가 풀렸다. 대력금강수의 힘은 허공에 흩뿌려지고 무영은 어린아이처럼 철갑마가 끄는 대로 움직
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대력금강수를 사용하기 전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철갑마의 투구 사이로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 혹은 웃음을 참는 소리처럼 들렸다.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또 어떤
방법을 쓸 테냐 하는 듯한 철갑마의 행동이었다.
무영은 조롱당하는 것 같아서 발끈 달아올랐다가 이런 식으로 해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철갑마의 의도가 뭐건 일단은 저항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그리고 무당 태극권은 그도 할 수 있었다. 갈맹덕의 눈이 의
식되긴 하지만 하나를 들켰으니 하나를 더 들킨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뺨을 만지고 있는 철갑마의 팔뚝을 잡으려 했다. 철갑마의 팔뚝이 묘하게 뒤틀려서 무영의 손에서 빠져
나갔다. 철갑마의 오른손이 무영의 오른팔 팔뚝을 잡으려 들었다. 무영은 오른팔을 철갑마의 오른손에 내주고 왼손을 뻗어 철갑
마의 오른팔 손목을 제압하려 했다. 철갑마의 오른팔이 미꾸라지처럼 무영의 왼손을 빠져나가서 무영의 오른팔 팔뚝을 옆에서부
터 밀어내고 다시 무영의 왼쪽 팔뚝을 노렸다. 무영 역시 철갑마가 팔뚝을 움직이는 원리, 즉 태극권의 전사경(轉斜勁) 구결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왼쪽 팔뚝을 비틀어 철갑마의 오른손을 벗어나려 하고, 한편으로 오른쪽 손으로 철갑마의 오른팔을 노렸
다. 그러나 그의 왼쪽 팔뚝은 힘없이 철갑마에게 잡히고 꺾여서 밀려 나가버렸고, 오른손도 다시 한 번 퉁겨나갔다.
철갑마는 이 일련의 결투를, 태극권의 추수(推手)를 사용한 이 격투를 단히 한 손만으로 해내고 있었다. 무영은 두 손으로도 철갑
마의 한 손을 제압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나중에는 손과 팔만이 아니라 몸까지 소용돌이치는 모래 늪에 빠져 든 것처럼
철갑마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떠밀려 갔다가 다시 끌어당겨지고, 비틀거리고, 회전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무영은 주저앉아 있었고, 철갑마는 얌전한 개처럼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유일하게 할줄 아는 말을 되풀이하
고 있었다. 시를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듯 낮은 소리로.
“무영무영무영…….”
무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철갑마를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둬야 했다.
갈맹덕이 건너편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둘이 자주 친해 보이는구나. 아깐 다정하게 태극권 수련도 하고……. 네 혐의가 하나 더 늘었다. 태극권은 또 어디서 배웠지?”
무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 거 없다.”
철갑마가 그 말을 따라했다.
“알 거 없다, 알 거 없다, 알 거 없다…….”
갈맹덕이 일어섰다. 무영의 퉁명스런 대답에 철갑마의 메아리가 따라 붙으니 놀림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까마귀의 발톱 같은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했다.
“하려다 만 승부를 다시 진행해보려느냐? 겁나면 말고.”
무영이 무기를 잡으며 일어섰다. 철갑마가 따라 일어났다. 무영은 철갑마를 힐끗 보고 갈맹덕을 향해 걸었다. 철갑마가 걸음도 똑
같이 해서 옆에 따라붙었다. 갈맹덕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그놈은 두고 와라.”
무영은 난들 어쩌겠느냐는 표시를 해 보였다. 철갑마가 왜 이러는지 그도 모른다. 그걸 그가 어쩌겠는가.
갈맹덕이 잠시 갈등하다가 철갑마의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무영을 노리고 손톱을 휘둘렀다. 단순히 할퀴는 동작 같지만 순간적으
로 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밀종의 구혼조(句魂爪)라는 무공으로 살갗만 긁혀도 중독되어 죽어버리는 치명적인 살수였다.
무영은 갈맹덕의 기습에 순간 당황했다. 예고동작도 없이 바로 쳐올줄은 몰랐던 것이다. 급하게나마 무기를 뽑아 방어하려고 했
는데, 철갑마가 빨랐다. 철갑마는 무영을 잡아 당겨 자기 뒤로 밀어놓고 손을 뻗어 대력금강수로 갈맹덕을 쳐갔다. 나직한 신음이
투구 속에서 흘러나오고, 강렬한 살기가 눈에서 뻗어나갔다.
갈맹덕이 놀란 참새처럼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철갑마가 따라붙다가 무영에게서 멀어지자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추더니 다시무영의 옆으로 돌아갔다. 갈맹덕은 놀란 가슴을 벌떡거리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무영에게 말했다.
“설마설마 했더니 한 편이었냐! 원래 그놈을 알고 있었던 거냐, 아니면 여기서 우연히 만난 거냐! 설마 애초에 그놈을 노리고 여기 온 것은 아니겠지?”
무영은 잠시 고민했다. 답답하기도 했다. 철갑마의 정체로부터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까지 그로서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갈맹덕을 향해 소리쳤다.
“알 거 없다!”
철갑마가 그 말을 반복해 읊조리는 것을 들으며 무영은 갑자기 몸을 날려 갈맹덕을 향해 달려갔다. 빙산 모서리를 밟고 뛰어 올라파천황을 휘둘렀다. 그의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떠오르더니 갈맹덕을 향해 같이 떨어져 내려갔다. 무지막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가공할 압력이 갈맹덕의 머리로 떨어졌다. 갈맹덕은 허겁지겁 몸을 굴려 피하고 뛰어 일어나 달아났다.
콰앙-!
갈맹덕이 서 있던 자리의 빙산이 산산조각나서 얼음가루와 파편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빙원이 한동안 흔들이고, 빙산과 빙산이 맞붙어 있던 자리가 조각나서 균열이 일어났다. 무영은 날아드는 얼음파편을 칼로 쳐내고, 빙산 모시리를 밟아 자리를 비켰다. 철갑마는 자기가 때려부순 바로 그 자리 옆에 내려섰다가 미끄러져서 균열을 향해 빠져들어 갔다.
무영이 재빨리 달려가 철갑마를 잡고, 다른 한손에 든 파천황을 얼음에 박아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버텼다. 철갑마가 무영의 팔뚝을 잡더니 새털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 빙원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 힘으로 무영을 들어올려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남들이 봤으면 미리 약속된 묘기를 펼쳐 보인다고 했을 정도로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무영은 파괴된 빙산과 균열을 어이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방금 철갑마가 소림절기 쇄비장(碎碑掌)의 일초인 차천개지(遮天開地), 즉 ‘하늘을 가리고 땅을 연다’는 초식을 사용한 것은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초식이 이런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름 그대로의 위력을 보인 것이긴 하지만 대개 이름이란 과장되기 마련 아니던가. 이건 초식보다도 그걸 사용한 사람이, 그가 가진 힘과 능력이 만들어낸 위력이었다.
갈맹덕은 이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입은 여전히 살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림 쇄비장이지! 다 알아봤다! 너흰 이제 둘 다 죽었어! 총단에 보고하지 않나 두고봐라!”
무영이 외쳤다.
“그전에 네가 먼저 죽을 거다!”
갈맹덕이 외쳤다.
“그놈 믿고 큰 소리 치는군! 그놈 떼 놓고 혼자 와봐라! 누가 죽나 보자!”
무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갈맹덕을 쫓아가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갈맹덕은 그냥 둬도 죽
을 것이다.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식량도 그가 가지고 있고, 길도 그가 안다. 갈맹덕이 똑같은 길을 왔지만 그 길을 되짚어 혼자
북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갈맹덕은 길을 잃고 얼어죽거나, 그 전에 굶어죽고 말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무영은 휴식처로 돌아갔다. 갈맹덕이 벗어놓고 간 초피 이불이 거기 남아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갈맹덕이 얼어죽을 확률
이 높아진 것이다. 그는 초피 이불을 집어들고 북해를 향해 걸었다.
이미 오랫동안 걸었는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빙궁의 한기를 체험한 후라 이곳 빙원의 한기는 오히려 따듯하
게 느껴질 정도였다. 배도 안 고팠다. 이건 어쩌면 빙궁에서 먹은 벽곡단의 덕분일지도 모른다.
멀리 뒤쪽에서 갈맹덕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불 내놔! 이불은 두고가라 이놈아!”
무영은 돌아보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비로소 피곤이 느껴질 때가 되자 그는 적당한 곳을 찾아 초피 이불
을 깔고 앉았다. 여태 따라온 철갑마가 가까운 곳에 와서 앉았다. 무영은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투구는 몇 개의 부분을 이어 붙여
서 만들어진 것인데, 머리 전체를 가리게 되어 있었다. 눈구멍이 있고, 입은 귀 아래에서부터 연결된 강철 덮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는 유심히 투구를 살펴 보았는데, 여는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철갑마가 그 손을 바라보았다. 무영이 말했다.
“싸우자는 거 아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철갑마의 투구를 만졌다. 철갑마가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긴 했지만 그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무영은
조금 더 자신을 가지고 투구를 만지며 관찰했다. 이쪽 저쪽을 움직여 보았지만 입 가리개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은 한편
흥미롭게, 다른 한편 조금 당황하며 투구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투구를 벗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입 가리
개만 열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해놓았지 벗을 수는 없게 만들어진 투구였다. 연결한 다음에 못을 박아 고정시켰거나 아니면……,
그가 이미 당해봐서 아는 끔찍한 방법이지만 아예 달구어서 붙여버린 것 같았다.
이 투구를 철갑마에게 씌운 사람은(아마도 빙후가 그 사람이겠지만) 철갑마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막고싶었던 것 같았다. 잔인
한 방법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가 걸고 있어야만 했던 강철 목걸이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그나마 그는 행동이 불편
하진 않았다. 하지만 철갑마는 씻을 수도, 긁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무영은 돌아가면, 그리고 만약 철갑마가 거기까지 따라오면 공야장청에게 보여줘서 투구를 벗기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
다. 강철 목걸이를 풀어준 것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었다. 끝내 그 강철목걸이를 그가 풀지 못하고 우연한 기회에 이상한 방법으
로 풀려 버렸기 때문에 제강산에게서 받은 굴욕을 속시원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문제는 남아버렸지만 말이다.
강철목걸이에 생각을 미치자 그는 철갑마가 그걸 들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디 있을까? 한참을 살펴보아서야 그는 그 강
철 목걸이가 이번에는 팔찌처럼 철갑마의 팔뚝에 여러 겹으로 둘둘 감겨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모양이 그렇게 바뀌어 있어서 알
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를 더 찾아냈다. 강철 목걸이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그 강철 팔찌와 팔뚝 사이
에 제삼설녀가 사용했던 무기, 마치 얇은 얼음조각 같던 그 검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