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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본래 시민의 참여에 토대를 둔 정치체제 혹은 제도를 의미하는 용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민주정이라는 의미를 넘어 정치 영역 안에서 매우 유연하게 활용된다. 특히 부각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정치적 가치와 결합됨으로써 다양한 개념이 생성되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층위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ESG 경영이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기존의 경직된 구조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좋은 자극제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 교회는 이미 민주주의와 친숙하다. 많은 교파에서 채택하는 사무총회, 당회, 노회(지방회), 총회 등의 협의 구조가 민주주의와 매우 유사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민주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삶의 영역에 깊이 침윤됐고, 옳고, 선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 인식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다수결, 삼권분립, 공정한 절차, 공개성 등의 원칙을 통해 시민의 의견을 최대한 정의로운 방식으로 구현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가 오늘날 옳고, 선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 발전사를 살펴볼 때 아이러니다.
본래 교회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제도였기 때문이다.1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독일 교회의 《사회백서》를 통해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런 점에서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배경을 살펴보고, 그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는 사회백서 내용을 파악한 뒤 민주주의 사회 속에 상존하고 있는 빈곤 문제의 극복을 위한 교회의 과제를 검토하려고 한다.
낯설고, 위험한 제도로 이해되던 민주주의2
민주주의 제도적 기원은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로 소급된다. 당시 민주주의(Demokratia)는 인민(demos)에 의한 통치(kratia)라는 뜻이 있었다.3 그래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정치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정치체제라는 생각을 갖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인민은 엄밀한 의미에서 시민을 뜻했다. 당시 시민의 범위는 아테네 출신의 자유인, 그중 성인 남성으로 제한됐다. 이들만이 공동체와 그 이익을 위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외국인, 노예, 아동, 여성은 비시민으로서 이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제한된 시민에 의해서만 이뤄진 특징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이 제도를 지지하지 않았다. 시민 중 일부가 추첨을 통해 정치 참여의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낮은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으로 인해 선동에 휘말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정은 불완전하고, 위험한 제도이고, 그 대신 지적 능력과 경제력을 갖춘 한 사람 혹은 집단이 통치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더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됐다.
이후 로마 제국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근대 정신에 따른 시민에 의한 통치를 구현하는 제도로서 재조명을 받게 됐다.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는 투표를 통해 적합한 능력을 갖춘 대표자를 선출하는 공화정과의 결합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정착되며, 이 제도가 보편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는 아테네 같은 소규모 도시 국가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구를 가진 국가에서도 실현 가능하고, 더 나아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제도로 이해됐다.
미국 교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역사의 초기, 이곳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칼뱅의 언약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랑과 보호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순종으로 이해한 그들은 이 생각을 확장하여 기독교인의 책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서로 봉사, 협력하고, 국가 공동체를 위해 정치적 참여에 힘써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 생각은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적극적 참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와 정치 영역의 밀접한 결합을 가져왔고, 민주주의를 기독교적 정치체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4
하지만 미국 교회와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교회가 적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민주주의는 성경 속에서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지파 연맹 체제가 자리 잡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특성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었지만, 아테네와 같이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이후 왕정 체제가 발전했고, 신약 시대에도 로마의 지배를 통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 구조가 이어졌다. 예루살렘 공동체를 시작으로 형성된 교회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군주제와의 관계 속에서 그 발전을 이뤘다.
근대 이후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 왕의 통치에 중점을 둔 입헌군주제가 질서와 안정을 위해 적절한 제도라고 본 존 웨슬리의 생각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5 프랑스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 인식은 더욱 공고화됐다. 이 혁명이 기존 정치와 종교 영역에 대한 저항을 특징으로 삼고 있었기에 교회는 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이 혁명의 목표 중 하나로 이해되며,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도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기독교 정신과 크게 충돌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반혁명당을 조직해 기독교적 가치를 정치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왕의 존재와 역할을 높이 평가했지만, 동시에 다수결, 삼권분립, 공정한 절차, 공개성 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자 했다.6 여기서 민주주의는 신학적으로 해석되고, 평가됨으로써 이전보다 높은 위상을 갖게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독일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독일 교회는 400년에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정치권력과 결속된 국가교회로 운영됐다. 그래서 군주제에 대한 친밀감을 갖고 있었고, 반기독교적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 교회는 1918년 설립된 바이마르공화국을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히틀러의 제3제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 교회는 민주주의를 낯설고, 위험한 제도로 이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가 발전하고, 독일의 시민사회가 성숙하면서 이 제도가 가진 긍정적인 면을 신학적으로 성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행동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았고, 1970년대 후반이 돼서야 “더 늦기 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정립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비로소 현실화됐다. 그 결과 트루츠 렌토르프, 볼프강 후버 등 명망 있는 신학자들의 정교한 연구를 토대로 1985년 《개신교회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사회백서가 발표될 수 있었다. 이 민주주의백서를 통해 독일 교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그에 대한 과제를 설명했다.
교회가 수용할 만한 제도인 민주주의
민주주의백서는 미국 교회가 갖고 있던 인식과 달리 민주주의를 기독교적 정치체제로 보지 않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는 이질성과 위험성을 지닌 제도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백서는 루터의 사상에 근거해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동일시 혹은 결합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봤다.7 루터는 교회와 정치권력이 하나님이 활용하시는 2개의 정부라고 생각했다. 두 정부는 고유의 기능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죄인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역할을 하고, 정치권력은 평화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복음이 확산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위해 두 정부는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루터의 이해를 통해 볼 때, 정치권력이 채택하는 정치체제 역시 교회와 다른 역할을 가진 것으로서 고유의 영역을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되거나 결합되는 것은 두 정부를 활용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배치되는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체제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것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기독교적 정치체제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민주주의백서는 민주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합치될 수 없지만, 교회가 수용할 만한 정치체제라고 봤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제도가 성경에 나타난 인간 이해를 적극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8 먼저 민주주의의 기본 방향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성경의 인식에 상응한다. 성경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점(창 1:27)을 밝히고 있다. 이 독특한 지위를 통해 인간은 특유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 이로부터 인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윤리적 요구가 도출된다.
이러한 교회의 인식은 민주주의의 방향과 궤를 같이 한다. 독일 기본법 제1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존엄성의 보호는 민주주의 국가의 근본 과제다. 민주주의백서는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통해 증진될 수 있다고 봤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그 구현을 통해 인간 존엄성을 보호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존중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교회에 의해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백서는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개선돼야 할 정치체제라는 점이 교회의 인간 이해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인간은 죄성을 가진 존재로서 악한 행동을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정치권력은 인간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 제도도 선하지 않다. 민주주의 역시 악한 구조로 형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선이 이뤄질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제도라 말할 수 있다. 이 불완전성은 특히 종말론적이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민주주의 장점은 시민의 참여로 그 개선이 이뤄지는 데 있다. 기독교인도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일차적으로 기독교인은 정치권력에 충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롬 13:1)을 강조하고, 루터 역시 평화와 질서의 보장을 위해 동일한 요구를 한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백서는 성경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복종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행 5:29)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충성의 태도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 연대는 기독교인이 민주주의를 대하는 기본 원칙에 해당한다.9 여기서 비판의 기준은 자유와 평등의 증진을 통해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는지 여부다. 기독교인은 정치 권력이 이를 존중하는 정책을 펴는지 잘 관찰하고, 이것이 부족할 경우 그 개선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비판적 연대의 태도로 그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비판적 연대
민주주의백서는 루터의 직업 이해를 비판적 연대의 신학적 근거로 삼았다.10 루터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신뢰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는 것을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이라 생각했다. 이때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루터는 이웃 사랑을 일회적이고, 특별한 이타적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행위로 생각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직업과 일터는 이웃 사랑의 실현 장소다. 민주주의백서는 이 생각에 기초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과 이것이 비판적 연대를 통한 정치적 책임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있도록 비판적 연대를 구체화하는 차원에서11 교회는 정치 영역을 위한 기도에 힘쓰고, 기독교인들에게 정치적 책임의 중요성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공론장에 참여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이것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도록 선거 참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백서는 이러한 비판적 연대가 약자를 위한 노력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12 특히 빈곤층은 사회적 불평등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경시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약자다. 독일 교회는 또 다른 사회백서를 통해 빈곤층의 삶을 주제화하고, 그 개선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빈곤 문제와 그 해법
서독과 동독의 통일 이후 심화된 빈부 격차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극심한 사회 분열을 야기했다. 이 현상은 독일 사회에 큰 고민을 안겨 줬고,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삶을 크게 위협했기 때문에 독일 교회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관심은 2006년 《정의로운 참여》라는 제목의 사회백서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독일 교회는 이 빈곤백서를 통해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과 그 실현을 위한 교회의 구체적 역할을 제시했다.
빈곤백서는 먼저 빈곤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 관심과 제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여기서 빈곤은 단지 경제적 궁핍에 국한되지 않는다. 빈곤은 확장된 의미에서 참여의 부족과 결핍을 뜻한다.13 빈곤층은 가난을 통해 곤궁에 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빈곤층의 선거 참여율이 현저히 낮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빈곤 문제는 경제적 궁핍의 해소와 함께 참여의 증진을 통해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빈곤백서는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편으로 분배의 정의가 구현돼야 한다고 봤다. 개인이 자기 능력으로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얻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의 확립이 필수다. 그러나 빈곤백서는 이 노력만으로 빈곤 문제가 극복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 지속적인 실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분배의 정의와 함께 역량의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14 역량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그 배경과 상관없이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서 경쟁할 수 있도록 기본 능력의 함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체로 삼고 있다. 말 그대로 역량 강화를 통해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빈곤백서는 특히 교육의 역할에 주목했다. 학령 발달에 따른 기초 교육, 취업을 위한 직업 교육, 노동자를 위한 재교육 등이 잘 이뤄져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빈곤백서는 이러한 역량의 정의를 통해 노동의 기회를 얻게 되고, 이것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참여를 촉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점에서 빈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참여의 정의는 분배의 정의와 함께 역량의 정의를 통한 노동 기회의 보장을 토대로 이뤄질 수 있다.
정의로운 참여를 위한 교회의 노력
빈곤백서는 이러한 대안이 교회의 노력을 통해 구체화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빈곤층에 대한 관심을 요구받고 있다.15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집트에서의 비참한 삶의 경험을 토대로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 등의 일을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순수하게 도움을 줄 것을 요구받았다(레 25:35-38). 예언자도 그 선포를 통해 가난한 사람을 위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사 58:6-8). 이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의 처지와 동일시하여 설명했고(마 25:31-46), 사도 바울도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며, 그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드러내기도 했다(고전 1:27-28).
빈곤백서는 빈곤층에 대한 성경의 관심이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개념 속에 집약될 수 있다고 봤다.16 빈곤층을 위한 교회의 노력을 요구하는 이 윤리적 원칙은 참여의 정의가 실현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교회는 분배의 정의뿐만 아니라 역량의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것이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참여의 전제로서 중요성을 지닌 노동의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노동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위임이자 수고와 노고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17
이를 종합해 보면, 노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는 행위라는 신학적 함의를 갖고 있다. 교회는 이처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노동을 토대로 빈곤층이 세상의 사회, 문화, 정치를 형성하는 과업을 동등하게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그래서 교회는 노동이 가능하도록 교육의 보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노력은 정의로운 참여의 구현과 빈곤 문제 해결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빈곤 문제
과거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민주주의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 교회에는 친숙한 정치체제다. 그 친숙함을 넘어 이 제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해와 과제 인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이것을 기독교적 정치체제로 이해하기보다는 민주주의백서의 설명처럼 시민의 참여를 통해 죄성을 가진 인간의 제도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정치체제라는 정교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 인식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의 증진을 통한 인간 존엄성의 보장을 위해 기도와 선포, 공론장 참여와 선거 참여에 힘쓰는 것이 교회의 과제라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자유의 보장과 빈곤층의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18
특히 빈곤백서를 통해 빈곤층 역량의 증진이 이뤄져 노동 기회를 얻는 것이 빈곤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교회는 이것을 돕는 발전권의 정책적, 법률적 보장을 위해 공론장 참여와 선거 참여에 힘써야 하고,19 다양한 사회봉사를 통해 아동과 청소년의 기초 교육과 돌봄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20 참여를 통해 죄성을 가진 인간의 제도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이러한 교회의 노력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빈곤층의 삶의 개선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註
1)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창비, 2023), p. 22.
2) 민주주의의 개념과 인식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연구 논문인 “민주주의와 교회의 공적 책임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신앙고백서의 법윤리적 조명,” 〈신학사상〉 196(2022)를 토대로 작성됐다.
3) 강병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윤리, 사상》(열린서원, 2023),
p. 225.
4) Wolfgang Huber, “Protestantismus und Demokratie,” In Protestanten in der Demokratie. Positionen und Profile im Nachkriegsdeutschland (Kaiser Verlag, 1990), pp. 15-19.
5) 만프레드 마르쿠바르트, 《존 웨슬리의 사회윤리》, 조경철 옮김(보문출판사, 1992), pp. 217-218.
6) Abraham Kuyper, Antirevolutionaire Staatskunde. Volume.2(J. H. Kok, 1917), pp. 61-79.
7)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vangelische Kirche und freiheitliche Demokratie. Der Staat des Grundgesetzes als Angebot und Aufgabe(Gutersloher Verlagshaus, 1986), p. 12.
8) 앞의 책, pp.13-17.
9) 앞의 책, p. 17.
10) 앞의 책, p. 22.
11) 앞의 책, pp. 22-24, 45-47.
12) 앞의 책, p. 23.
13)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Gerechte Teilhabe. Befahigung zu Eigenverantwortung und Solidaritat. Eine Denkschrift des Rates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zur Armut in Deutschland(Gutersloher Verlagshaus, 2006), p. 16.
14) 앞의 책, p. 44.
15) 앞의 책, pp. 45-46.
16) 김성수, “볼프강 후버의 의사소통적 자유의 개념과 윤리적 함의,” 〈인문사회 21〉 12/1(2021), pp. 2776-2777.
17)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Gerechte Teilhabe, p. 47.
18) 김성수, “민주주의와 교회의 공적 책임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신앙고백서의 법윤리적 조명,” pp. 362-364.
19) 김성수, “능력주의의 문제와 법의 역할 - 볼프강 후버의 법윤리의 적용,” 〈기독교사회윤리〉 53(2022), pp. 27-29.
20) 김성수, “기독교 사회봉사의 법윤리적 해석,” 〈인문사회 21〉 14/1(2023), pp. 3101-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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