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의 과부(로마)가 아비뇽 유수를 슬퍼하고 있다/wikipedia commons
성경 읽다가 보면 이집트 문명이 힘을 발하다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다시 페르시아가 나타나더니, 신구약 중간사를 건너뛰고 신약에 오면 대뜸 로마가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앗수르나 바벨론, 페르시아는 같은 동네 사람들로 지금의 이란, 이라크, 터키가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손들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똑똑한 왕이 나오느냐에 따라 힘의 패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중해 윗동네인 발칸 반도의 마케도니아에서 나타난 알렉산더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구약 중간의 시기에 일어난 일이지요. 알렉산더는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동쪽으로 인더스강 유역까지 왔었던 인물로 가히 대왕이라 할 만한 전쟁의 신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서른두 살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이후 알렉산더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 그가 세운 거대한 제국은 분열됐지요.
알렉산더는 그리스 지방 출신이라 헬레니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복한 나라들에 헬라 문화를 전파해 주었는데, 이것이 제법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헬라화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지중해의 장화 모양으로 생긴 반도 땅에서 신생 로마가 등장하여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요. 로마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통일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 아래 동네랑 싸우면서 아무도 건들 수 없는 거대 강국이 됩니다. 헤롯이 이 로마에 아부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왕으로 등극하지요. 일종의 로마 속주가 된 곳의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거대 강국으로 팍스로마나를 구가하며 지중해를 자기네 바다로 만든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내부에 부패가 일어나 내전이 발생하고, 돈 많고 시간 남아도는 애들이 타락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네로 같은 미치광이 왕이 나타나 로마시에 불 지르고 그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지목하는 바람에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잡혀가 사자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사자 밥은 할 일 없는 로마인들의 유흥거리 같은 거였습니다. 일종의 쇼인 셈이지요. 사람을 굶주린 사자와 싸우게 하고 그것으로 오락거리를 삼았을 정도니, 제대로 부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가 되면 자연히 처녀가 귀해지게 되고, 돈 있고, 힘 있는 귀족들은 처녀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인 처녀를 며느리로 삼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를 공인해 주었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로 아들이 내전으로 혼란했던 로마를 다시 평정하고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이 전쟁에서 이기게 도와준 것이 하나님이라고 믿어서 기독교를 공인해 주고, 기독교의 재산을 인정해 주게 되었지요. 이후 4세기 말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일대 부흥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의 재산은 점점 늘어가고 지켜야 할 땅이 생긴 것이지요. 이로써 기독교는 대표를 구성할 필요가 생겼고, 그에 따라 교황이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의 로마 교황청을 바티칸 시국이라고 부르지요. 이탈리아 안에 바티칸에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나라라서 바티칸 시국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안에 성벽으로 둘러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 싶습니다. 고대에는 교황이 생기면서 로마 제국 내에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는데, 소위 황제와 교황의 세력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황제가 다스리니까 황제가 높냐, 황제에게 대관식을 해 주는 교황이 높냐의 싸움이었습니다. 황제 자신의 신앙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유럽의 사람들 속에서 교황이 어떤 존재로 대접받느냐에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그 위상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한 대립 속에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11세기 말경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카노사라는 지역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사건을 말합니다. 교황 밑에 일종의 지역 책임자 같은 주교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 주교를 교황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그레고리 교황이 자기가 가져오려다가 황제와 쌈이 붙은 사건이지요. 교황은 이 일로 황제를 파문하고 이단이라고 정죄를 해 버렸습니다. 당시에 신앙인이 많았던 탓인지, 교황이 자기를 파문한 일로, 자기를 폐위시키려는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황에게 달려가 무릎 꿇고 사죄했던 것입니다.
지중해 아래 동네에서는 7세기경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고,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심지어는 유럽 본토인 스페인까지 치고 들어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지중해 패권이 아래는 이슬람, 위로는 기독교가 대치하였습니다. 근데 위에서는 황제와 교황이 서로 세력 다툼을 하다가 교황이 간발의 차로 황제를 누르고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 카노사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1세기 말경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다시 찾기 위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데 자그마치 7차에 걸쳐 200년 동안 진행됩니다. 결과는 십자군의 타락으로 실패하고, 교황은 대중의 인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황이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시기에 유럽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돈이 부족해졌는데, 그 이유의 하나가 교회의 사유재산에는 세금이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성직자에게 과세하려는 황제와 이를 거부하던 교황 세력이 다시 한번 부딪혔습니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된 시기라 이번에는 황제가 이기고 교황청을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비뇽으로 옮겨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이 200년을 끌어왔으니 이 시기는 14세기 초쯤이 됩니다. 로마 교황청이 탈탈 털리고 아비뇽으로 그 거처를 옮긴 뒤 프랑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황도 세우고 주교도 임명하고 했었지요. 다시 교황청이 로마로 옮겨가기까지 아비뇽에서 약 67년간을 지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것과 비슷해서, 바벨론 유수를 패러디해서 아비뇽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을 겪고 다시 로마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아비뇽에도 교황청이 존재하는 바람에 교황이 난립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로마에서도 교황을 세우고, 아비뇽에도 교황을 세우면서 서로를 가짜라는 둥, 적그리스도라는 둥 비난하며 강력하게 싸웠습니다. 당연히 민심은 이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지요. 요 시기가 15세기 말쯤 됩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면죄부 사건으로 인해 마르틴 루터가 일으키지요. 교황이 면죄부로 이런(15) 삽질(17)을 했던 1517년이니까 십자군 사건이 14세기에 끝나고 15세기 시절에 아비뇽에서 헤매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황이 난립하면서 온갖 싸움을 해대는 바람에 종교개혁을 통한 민심 이반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일은 다시 유럽 땅을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두 세력의 싸움터가 되게 합니다. 르네상스도 이 시기에 일어났는데, 르네상스라는 게 고대로 회귀하려는 운동이라, 교황이 다스리기 전 헬레니즘 문화가 꽃피웠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문예부흥이었던 것도 교황의 잘못들이 한몫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