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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8도와 수도권 백성을 동원한 대대적인 개천(청계천) 준설을 단행한 태종, 세종 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였다. 영조는 재위 49년(1775 년) 8월 6일, 세손(후에 정조)을 데리고 광통교의 석축을 살펴보고 지은 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濬川銘幷小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근 50년 동안 무슨 일을 했냐고 하면, 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세 가지 일했다고 한다.”
영조가 말한 세 가지 일은 탕평(蕩平), 균역(均役), 그리고 준천(濬川)이었다. 영조는 이 가운데 균역과 준천은 성공했으나 탕평은 실패했다고 밝혔다. 태종·세종 때 어느 정도 준설이 이루어졌던 개천은 이후 300년 동안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영조가 즉위한 1725년 토사가 개천 바닥을 거의 메울 지경이 되었다. 한양이 물에 잠기자 영조가 탄식했다.
“오호라, 개국 초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었겠는가? 백성들이 늘어나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여러 산은 민둥산이 되어 모래와 돌이 쓸려 내려 개천을 모두 메워버렸다. 심지어 을해년(1755년 영조 31년)에 광통교 아래는 모두 범람했으니 이미 그때 한심한 지경 이르렀다.”
개천은 영조 대에 이르러 임금이 보기에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개천의 하상(河床, 하천 바닥)이 높아지고 수구(水口, 물이 흘러들고 나가는 곳)가 자주 막혔다. 개천이 죽어가는 하천이 된 요인은 크게 2가지였다.
우선, 한양도성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이 황폐한 탓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도성을 둘러싼 산림보호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송림이 울창했고, 덕분에 모래와 돌이 떠내려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국법이 해이해진데다가 송충(松蟲)까지 번져서 도성 주변의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큰비가 오면 많은 사석(沙石)이 하천으로 흘려 내려와 개천의 하상을 메워갔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그런 상황을 “수십 리에 걸쳐 어린 소나무도 남은 것이 없고, 사방 의 산이 모두 붉게 되어 보기에도 참담하다”고 탄식했다. 여기에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상 기온 현상으로 태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다.
둘째, 개천의 유지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임진, 병자 두 차례의 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양의 인구가 급증했다. 1657년(효종 8년) 한성부의 호구는 15,776호, 80,572가구였지만, 10년 후엔 23,889호, 194,000가구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생활하수가 증가하는 한편 주민들이 개천변에 채소밭을 개간해 수로를 막히게 했으며 개천 바닥은 걸레, 깨진 항아리 등 생활 쓰레기로 뒤덮여 갔지만 200년 이상 방치했으니 모래와 돌 등 퇴적물이 하류로 쓸려 내려가지 못하고 개천 바닥에 쌓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개천의 관리는 태종 12년 제1차 공사 때 설치한 개천도감(開川都監)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세종 때는 서울 안의 개천과 다리를 공조에서 관리하게 했으나,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책임이 넘어갔다.
세조 6년에 단행된 중앙 관서의 기구축소에 따라 수성금화도감이 폐지되고 수성은 공조로 금화는 한성부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개천과 교량에 대한 언급이 없이 수백 년이 흐르고 비만 오면 범람을 일으켜 한양이 물바다가 되었으니, 영조 때에 이르러 대규모 준천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신중했다. 준천의 시행 여부를 조정 신료와 백성들에게 물어가며 오랜 시간 고민했다.
“방민(坊民,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개천을 준천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순문(巡問)했다. 임금이 돌아오다가 광통교에 이르러 시냇가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 순문하기를 “어영대장(御營大將, 훈련도감과 금위영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 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 개천이 메워져 막혀 있다고 아뢰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민력(民力, 백성의 노동력)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개천이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한, 도성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려면 개천을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조 29년(1753년)에 영조는 한성 5부(서울 전 지역. 당시 한 성부는 동·서·남·북 중부의 5부가 있었음)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듬해에는 명정문(明政門, 창경궁 정전의 정문)에서 조참(朝參, 문무의 관원들이 궁궐의 조정에 나가 왕에게 네 절하는 예의를 행하고 왕명을 받는 조회의식)을 행할 때, 서울 지역 주민을 불러 개천을 파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물었다.
그러나 찬반이 있어 의결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해 영조는 과거시험 때 명정전에 나가 “개천을 트이게 하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묻는 문제를 냈다. 영조 35년 10월 조참을 할 때 문무백관에서 개천 준설에 관해 물었다. 그때 “내를 파내는 것이 편리하다”라는 의견을 모아, 300여 년 만에 준천 사업을 시행할지를 백성에게 물었다.
“도랑을 파내는 일절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 준천하기로 결정한 이후 음식이 달갑지 아니하고 잠자리도 편치 못하였으니, 역시 너희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준천하는 일에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생각한 바를 전달하고 억지로 따르거나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면서 영조는 준천이 백성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자발적 참여가 없으면 시행하기 어려운 만큼 각자의 생각을 말하면 그것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영조의 말에 도성 방민들의 생각과 반응이 긍정적이었던지 영조는 같은 해 10월 29일, 홍봉한, 김상로, 홍계희 등과 함께 준천에 대해 논의하고 준천을 관리할 관청의 이름을 준천소(濬川所, 훗날 준천사)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한다. 영조는 당시 준천을 결정하기까지의 심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신료들에게 물어보고 백성들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 방도가 막연하였으므로 이에 나는 준천할 것을 명하였다. 대궐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렸으니 여러 차례 오간 수문에 나아가 파내는 일을 독려하고 남은 물력은 비축하도록 하였다. 준천사를 설치해 매년 개천을 고쳐 쌓도록 하니, 이후부터는 개천이 모두 소통되고 천변의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영조의 대표적 참모였던 홍계희가 영조의 뜻을 받아 기록한 ‘준천사실’ 서문에는 “큰일과 중요한 일은 비록 거론할 수 없으나 그 가운데서 보수하고 보충해야 할 곳은 감히 게을리할 수 없다. 준천과 같은 일은 백성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백성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다”고 명시됐다. 청계천 준천이 국가의 최우선 사업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영조는 “나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으니 무슨 마음으로 백성을 괴롭히겠는가?”라고 하면서 준천 사업이 백성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한 신경을 썼다.
영조는 청계천 준천을 역대 중국의 주요 치수 사업과도 비교했다. 주나라 문왕의 영대(靈臺·임금이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던 대)나 하나라 우왕의 치수 사업을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한편 백성을 착취한 은나라 주왕과 수양제의 사업은 결코 답습하지 않기를 다짐했다.
1759년 10월 6일 준천 공사 진행이 결정됐다.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濬川所)가 설치됐고 홍봉한, 홍계희 등이 준천소 당상으로 임명됐다. 한성부좌윤 구선복이 직접 현장에 가서 준천도(濬川圖)를 그려오면서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준천 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돼 4월 15일 끝났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5000여명의 백성이 동원됐는데, 도성의 백성을 비롯해 각 시전상인과 지방의 자원자,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000여명은 품삯을 받기도 했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5000냥의 돈과 쌀 2300여석의 물자가 소요됐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이에 호조판서가 된 홍봉한은 “현재 금위영, 어영청 소속 군사들이 동원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영조는 가장 어려운 공사인 오간수문(五間水門) 공사를 6일 만에 끝낸 사실을 매우 흡족해했다.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했고, 영조는 모든 백성의 적극적인 협조를 치하했다. 영조의 준천 사업은 국가 사업으로 모든 백성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마침내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됐다. 책 제목도 영조가 직접 정했다. 영조는 공사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100년은 갈 것이다”라고 답해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을 만들 것을 건의했고, 영조는 표석에 ‘1760년 지평’이란 뜻의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됐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했다.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에게도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였다.
공사 기간 동안 영조는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했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해 모화관에서 시재(試才·재주를 시험해봄)를 베풀어 경사를 자축했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해 연융대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계첩(濬川契帖)’에 담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준천계첩’에 그려진 네 폭의 그림에는 오간수문 아래에서 소와 쟁기를 동원해 흙을 파는 인부들의 모습 등 준천 사업의 현장 모습이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영조의 두 번째 준천은 영조 49년(1773년) 계사년에 시행되었다. 주로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2달 후인 8월 초에 완성되었다. 8월 6일 영조는 왕세손(후일 정 조)과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에 공사에 참여한 자들을 치하하고 상을 내린 뒤 직접 준천명(濬川銘)과 소서(小序)를 짓기도 했다.
영조는 청계천 준천 사업은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추진해 영조는 도성 내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일부 도시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었다. 영조의 준천 사업은 1930년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보다 무려 170년 전에 추진된 사업이라는 점에서도 무척 큰 의미가 있다.
승정원일기 : 1760년 2월 23일 기록
영조가 재위 기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청계천공사에 관한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보면 「승정원일기」가 얼마나 상세히 싣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대화체로 영조와 신하들의 의견을 적고 있어 현장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다음은 1758년(영조 34) 5월 2일 영조가 미시(未時:오후 2시경)에 숭문당에 나갔을 때의 「승정원일기」기록이다. 영조가 어영대장 홍봉한을 비롯하여 승지, 기사관, 기주관 등과 준천문제를 깊이 논의한 사실이 나타난다.
영조 : 저번에 광충교(廣衝橋-현 광통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 :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 인가는 필시 대부분 떠내려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영조 : 경들이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하면 좋겠다.
홍봉한 : 신들이 담당하게 된다면 어찌 진력하여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영조 :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해도 사토(沙土:모래흙)를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 번 시험해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영조(웃으며) : 성중(城中)에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 :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 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합니다.
영조 : 사관(史官)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보라.
사관 :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나, 만약 민력을 동원한다면 초반에는 원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영조 :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말해보라.
기사관 이해진 : 신은 시골사람이라 준천의 이해난이(利害難易)에 대해 정견(定見)이 없습니다만, 도성내의 여론을 들어보니 모두 준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기주관 서병덕 : 준천의 방도에 대해서 강구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북악이 잘 붕괴되고 동쪽 도랑이 잘 막히니, 먼저 북악의 수목(樹木)을 기르고, 동쪽도랑의 막힌 부분을 깊이 파낸 연후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 : 옳은 의견이다.
[上曰, 頃見廣衝橋比年尤爲湮塞, 可悶矣。鳳漢曰, 川渠之浚, 急於救焚拯溺, 若遇大水, 則川邊人家必多漂没矣。……上曰, 卿等擔當濬渠, 可也。對曰, 若使臣等當之, 則何不盡力奉行乎 上曰, 召問都民, 而後試之, 可也。上曰, 雖使濬掘, 而其沙土, 無處可置矣。鳳漢曰, 或云舟以運之, 或云車以載之, 馬以駄之, 而第試事, 則可有區處之道矣。上笑曰, 舟何以入城中乎鳳漢曰, 舟運之說, 若値大水, 則似有運去之道矣。上曰, 史官, 不爲苟同, 而各陳所見, 可也。臣達曰, 濬渠雖急, 而若動民力而爲之, 則不無初頭民怨。……上曰, 上番陳之。海鎭對曰, 臣鄕曲之人也。浚渠之利害難易, 未有定見, 而第聞城內物議, 則皆以可濬矣。秉德對曰, 浚渠之策, 曾未講究, 而北岳善崩, 東溝下塞, 必須先養北山之樹木, 深濬東溝之湮塞, 然後乃可責效矣。上曰, 是矣]
「승정원일기」는 『영조실록』과 비교해보면 특히 그 내용의 상세함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 36년 2월 23일 호조판서 홍봉한이 성 밖의 물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자 이를 윤허한 내용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은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진시(辰時:오전 8시경) 희정당에서
영조 :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濬川)에 있다. <중략>
영조 : 오간수문의 역처가 이미 깊어졌으니 6일내 한 일이 대단하다.
홍봉한 : 그저께만 해도 역군이 수문 간에서 몸을 펴지도 못했으나 한번 구멍을 뚫으니 점차 팔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많은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
영조 : 정말 그러하다.
홍봉한 :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영조 : 괴이한 일이다. 그들이 흙과 물을 볼 수 있는가?
홍봉한 : 반드시 그들이 가동(家僮)과 노비를 부역에 보내려는 것이니, 신들이 보내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를 내렸습니다.
영조 : 그 마음은 가상하다.
[上曰, 予之一心, 在於濬川 ……上曰, 五間水門役處旣深, 六日內役事, 可謂壯矣。鳳漢曰, 再昨則役軍, 不能屈伸於水門之間矣。一出穴之後, 役處漸出, 眞所謂人衆勝天矣。上曰, 然矣。鳳漢曰, 盲人欲爲赴役·聚會自願矣。上曰, 可怪矣, 渠何能見水土乎 鳳漢曰, 必以渠輩家僮僕赴役, 而臣勿赴之意, 已分付矣。上曰, 其心則可嘉]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유시(酉時:오후 6시경) 희정당에서 호판, 판윤, 훈련대장 등이 입시(入侍)했을 때의 기록을 보자.
영조 : 준천공사는 지금 어디까지 했는가?
홍봉한 : 송전교에서 광통교까지 이미 완료되어 내일 연결될 것입니다. 수표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구간은 너무 넓어 공역(工役)이 갑절 어려웠습니다.(이하 공사 경과보고)
영조 : 나는 사토(沙土)의 처리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 번의 일은 매우 잘 된 것 같다.
홍계희 : 옛날에도 하천을 다스린 사례를 신도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글로 써서 공사의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데 제목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조 : 『준천사실』로 이름을 정하라.
영조 : 금번 준천 후에 다시 막히는 일이 없겠는가?
홍봉한 : 갑을지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영조 : 승지의 의견은 어떤가?
이사관(승지) : 얼마나 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다시 막히는 일은 분명 없을 것입니다.
홍봉한 :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에 대비한다면 매우 편의할 것입니다.
구선행 : 홍봉한의 의견과 같습니다. 이렇게 한 연후에 앞으로도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금 번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고 차후에는 이것으로 한계를 삼아 항상 노출되어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조 : 표석은 ‘경진지평(庚辰地坪)’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하면 유효할 것이다.
[上曰, 濬川役事今至何境乎 洪鳳漢曰, 自松廛橋至廣通橋, 已爲, 自明日始編結矣。自水標橋至廣通橋, 其間闊大, 工役倍難矣。上曰, 予以沙土處置爲難, 而今番事善爲矣。……洪啓禧曰, 昔之導川, 臣亦聞之, 而未得其詳, ……作一文字以記事實, 而題目難矣。上曰, 以濬川事實, 名之, 可也。……上曰, 今番濬川後, 能不更塞乎 鳳漢曰, 不無甲乙之論, 而百年內必不堙塞云矣。……上曰, 承旨之意, 何如 李思觀曰, 久近實不知, 而必不至猝然更塞矣。鳳漢曰, 此後使京兆長官·三軍門大將主管, 軍門各出若干財力, 以爲日後濬川之費, 則事甚便矣。具善行曰, 小臣之意, 與戶判同矣。如此然後, 來頭亦有實效矣。今番掘去後, 各橋皆有標石, 此後以標石爲限, 使之常露則好矣。上曰, 標石刻以庚辰地平, 而使不堙沒, 則有效矣]
이상에서 청계천 준천 사업의 경과를 「승정원일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영조실록』에는 간략하게 결과에 해당하는 사실이 기록된 반면, 「승정원일기」는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국왕과 신하의 대화형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일이 추진된 시간, 장소, 배석인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여 국왕의 동 선을 추적할 수 있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찬반의견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진지평 표석은 현재의 광통교 다리에서도 볼 수 있어 역사의 생동함을 확인할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계천 공사기록은『조선왕조실록』보다 「승정원일기」가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중심으로 재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비해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정조의 준천사업
제22대 왕 정조의 준설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정조 원년(1777년) 7월이었다. 정조는 준천을 게을리했다며 준천사 (濬川司) 당상관인 구선복(具善復)에게 엄중한 벌을 내렸고, 도청(都廳) 윤수인(尹守仁)을 곤장 쳐서, 도태시키라고 명했는데 그 이유를 정조는 이렇게 설명했다.
“올해는 오래 가물어 당초에 장마로 흙탕물이 내려갔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도 듣건대, 경진 지평(庚辰地平)-경진년에 세운 수표 (水標)의 비각(碑刻)에서 거의 한 글자도 보이지 않게 (퇴적물이 쌓여있게)됐다고 한다.
선조(영조)께서 비를 세운 것은 어떠한 성의(聖意)였겠는가? 그런데 수거(修擧)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러한 극도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는 또한 내가 당구(堂構,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아들이 이어받는 일)의 책임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정조의 말대로 당시 청계천의 바닥에 퇴적물이 쌓여 비각의 수위표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조는 4년 뒤에 개천이 준설이 되지 않았다면서 똑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어도 쏟는 듯 내리지 않아서 측우기(測雨器)의 수심도 서너 치에 지나지 않았는데, 새벽에 수표(水標)에서 보고한 것을 보면 표 위로 물이 넘었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근래 천거(川渠)가 막혀도 전혀 준설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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