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완전정복]
Ep.4) 축구 때문에 자살을? 마라카낭의 비극
1950 FIFA World Cup 포스터
(출처: 영문위키)
전쟁 이후의 월드컵
1938년 프랑스 월드컵 다음 해인 1939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다. 이후 45년까지 계속된 전쟁은 전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FIFA는 종전 5년 후인 1950년, 월드컵을 다시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장소는 브라질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전쟁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월드컵과 같은 큰 축제를 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파로 대회 진행 역시 순탄치 않았다. FIFA는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6개 팀으로 대회를 주최하려 했다. 그러나 유럽을 비롯한 세상은 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국가가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다. 월드컵을 얼마 앞두지 않고 불참을 택한 국가도 여럿 있었다. FIFA는 16개 팀을 맞추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13개 국가로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대회 방식
지난 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됐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방식을 달리하기로 했다. 경기 수를 늘려 티켓 수입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멀리서 온 팀들이 한 경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주장 역시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16팀을 4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위 팀이 4강에 진출했는데, 이 네 팀이 토너먼트가 아니라 결선 리그를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FIFA는 토너먼트가 주는 재미와 장점을 잘 알았기에 이 방식을 반대했다. 그러나 경기장 건립에 들어간 돈을 회수하려는 브라질 축구협회가 이 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대회를 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유럽이 엉망진창인 상황인지라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FIFA는 브라질의 바람대로 대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갑작스레 불참한 국가 때문에 빈자리가 생기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난다. 이미 조를 다 짜놓은 상황이라 FIFA는 변동 없이 그대로 조별리그를 실시하기로 한다. 그 중 4조는 두 팀이 참가를 포기한 덕분에 우루과이는 단 한 경기만을 이기고 결승 리그에 진출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기고 만다.
설레발
결승 리그에 진출한 팀은 브라질, 스페인, 스웨덴, 우루과이였다. 풀리그 전으로 시행된 결승리그는 거짓말처럼 초대 월드컵 우승국인 우루과이와 개최국 브라질 두 팀의 마지막 경기를 통해 우승자를 가리게 된다. 사람들이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를 결승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결승리그의 마지막 경기였을 뿐이다.
당시 브라질은 2승, 우루과이는 1승 1무를 기록한 상황이었기에 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브라질은 대회 내내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 특히 자국민들은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 확신했다. 심지어 결승리그 두 경기에서 7-1, 6-1 큰 점수 차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브라질 국민들은 설레발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초대 우승국 우루과이는 20년 전과 같은 강력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조별리그에서 볼리비아를 8대 0으로 박살 내며 결승리그에 진출했지만, 스페인과는 비기고 스웨덴은 가까스로 이겼다. 앞선 결승리그 경기에서 대승을 거둔 브라질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브라질의 설레발은 지나쳤다. 마지막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진 금메달을 만들어두었다. 심지어 상파울루 시장은 마지막 경기가 시작하기 전, 브라질의 우승이 확정적이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설레발은 브라질만 한 것이 아니었다. 쥘 리메 회장 역시 포르투갈어로 브라질의 우승을 축하하는 연설만을 준비했다. (우루과이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확실하지 않으나 FIFA는 미리 브라질에게 쥘 리메 트로피를 주었다는 설도 있다. 그렇게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스타디움에는 173,850명(정확한 수치는 통계마다 다르지만 대략 20만 가까이 되는 인파라고 봄)이라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침묵
브라질의 우승이 확정적이라 생각했지만, 우루과이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수비적으로 나올 거라 예상됐던 우루과이는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브라질은 초반엔 당황했으나 기세를 되찾고 최강팀답게 우루과이에 맹공을 퍼부었지만, 지난 경기처럼 쉽사리 골이 터지지 않았다. 후반 2분이 되어서야 선제골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선제골 이후 우루과이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우루과이의 캡틴 옵돌리오 바렐라는 팀원들에게 “이제 우리의 차례”라고 외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캡틴의 외침에 큰 힘을 얻었고 반격에 나섰다. 결국 우루과이는 스키피아노의 동점골, 그리고 기지아의 역전골에 힘입어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역전극이었다. 마라카낭을 가득 채운 브라질 축구팬들은 기지아의 역전골이 터진 순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역전골을 넣은 우루과이의 영웅 기지아는 이 날의 경기를 회상하며 “역사적으로 마라카낭을 침묵시킨 사람은 단 세 명이다. 교황, 프랭크 시내트라 그리고 바로 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 위대한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는 1980년 마라카낭에서 175,000명을 상대로 콘서트를 했는데 아마 음악을 감상할 때 이들을 침묵을 시켰다는 뜻으로 보임.)
우루과이 기지아의 결승골. 이후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11분 동안 경기장은 침묵을 유지했다고 한다. (출처: FIFA 유튜브)
마라카낭의 비극(Maracanaço)
후폭풍은 정말 엄청났다. 브라질의 패배 직후 경기장에 있었던 두 명은 자살, 두 명은 심장마비로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장 밖은 더욱 난리였다. TV로 경기를 보던 팬들도 50여 명이 자살 혹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날 브라질이 입었던 흰색 유니폼은 패배를 상징한다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의 노란색 유니폼이 등장한 것은 바로 마라카낭의 패배 덕분이다. 카나리아 군단(노란색 유니폼을 상징하는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별칭)의 역사는 뼈아픈 패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승전에 출전했던 선수들은 모두 브라질 국가대표 유니폼을 다시 입지 못했다. 특히 골키퍼 바르보자는 패배의 원흉으로 취급받았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바르보자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자 “저 사람은 브라질에 큰 절망과 좌절감을 안긴 사람이란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르보자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브라질에서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43년형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마라카낭에서 패했다는 이유 하나로 50년 동안 죄인으로 지내야 했다.”
브라질이 축구라는 것을 단순한 스포츠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마라카낭의 비극이 발생한 날, 한 소년은 라디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브라질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였다.
경기 전 우루과이 대표팀의 모습. 승리를 거둔 후 경기장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우승 세러모니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경기장을 도망치듯 삐져나갔다고 한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은 찾을 수 없다. (출처: Indepen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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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월드컵의 탄생, 쥘 리메의 꿈
Ep.2) 초대 월드컵,'메이저 3연패'를 이룩한 우루과이
Ep.3)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무적의 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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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원문 : https://blog.naver.com/football1229/222883595716
첫댓글 브라질은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다 비극을 ㅠ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