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과 덕산의 인재불사 발원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참된 시주와 불공은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던 성철이 덕산을 가까이했음은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절 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철의 반대에도 권력에 맞선 것은 어쩌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
성철은 승려 정규대학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속에 또 아쉬운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재가불자 덕산 이한상(1917~1984)이다. 사람들은 덕산(德山)이란 그의 호를 따서 ‘덕산 거사’라 불렀다.
절집에 처사는 많지만, 거사는 드물다. 처사란 이름에서는 은둔 선비, 낭인 같은 체취가 풍겨 나온다. 하지만 거사란 호칭은 자못 무겁다. 비록 산문 밖에 있지만 오계를 지키고, 삼보에 보시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거사라 부른다. 인도에는 유마(維摩), 중국에는 방(龐), 한국에는 부설(浮雪) 거사가 있었다. 이렇듯 엄중한 호칭을 왜 이한상에게 붙였을까. 성철은 왜 그를 아꼈을까.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덕산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단신 상경했다. 고학으로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덕산은 풍전산업과 대한진척공사를 창업하여 1960년대 초에는 3,000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린 최대의 토목건축회사로 키웠다. 정부종합청사, 조흥은행 본점, 섬진강댐, 팔당댐, 풍전 상가 등을 지었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여 그가 세운 건물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덕산은 한마디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큰돈을 벌어 불교계에 아낌없이 썼다. 삼보장학회를 창립하여 미래의 인재들을 후원했고, 삼보학회를 설립하여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를 편찬했다. 재가불자 모임인 ‘달마회’ 회장을 맡았고, 삼보 법회를 만들어 당대 선지식을 모시고 정기법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요 법회였다. 이로써 도심의 대중 법문 시대가 열렸다. 그 밖에도 종립학교 교법수호회와 군 포교의 이정표를 세운 군법승 설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불교 교재 편찬 및 배포 등으로 불교 교육의 전기를 마련했다.
덕산은 종단의 강력한 권유로 경영난에 빠진 대한불교 신문사(현재 ‘불교신문’)를 인수해야 했다. 그는 ‘대한불교’를 월간에서 주간신문으로 바꾸고 불교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소통의 매체로 육성시켰다. 또 대학생 불교연합회(대불론)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봉은사에 수도원을 차려 학업과 수행을 겸하여 정진토록 배려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불련 총재를 맡아 수련대회와 구도 행각에도 동참했다.
1968년 5월 덕산의 사재 헌납으로 장충단공원에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치사했다. 각계 인사, 스님과 신도 등 3만여 명이 참석했다. 덕산 생애의 찬란한 날이었다.
‘사명대사의 성상은 박 대통령의 원력으로 세워지는 이충무공 동상과 김종필 씨에 의하여 덕수궁에 마련되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등과 함께 애국선열조상 건립 제1차 연도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대한불교)
이처럼 덕산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과 나란히 동상을 세우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1960년대 중후반은 덕산의 이름이 불교계를 풍미했다. 거의 모든 불사 뒤에는 덕산이 있었다.
덕산은 성철의 초전법륜이라 일컫는 운달산 법회에서 법문을 들고 성철을 지극히 섬기게 된다. 덕산은 성철의 법문에 빨려 들어갔다. 그 후 성철이 정규 승가대학을 세우기 위해 지혜를 모을 때도 그 곁을 지켰다. 인재 불사를 서두르는 큰스님의 발이 되고 손이 되었다.
“덕산 거사가 성철 스님을 모시고 학교 터를 보러 다녔지요. 산속에 대학을 지어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데 뜻을 모은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덕산 거사의 차가 수렁에 빠져 성철 스님이 고생한 적도 있었어요.” (조호정 전 삼보 법회 회장)
그러던 덕산에게 불행이 다가왔다. 1969년 3월 덕산은 전국신도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불교 안팎의 신망이나 불심으로 볼 때 마땅히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출마자가 거물이었다. 바로 당대의 실력자인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소식을 듣고 성철이 덕산을 불렀다.
“이번 신도회장 자리는 덕산이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네.”
하지만 덕산은 성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큰스님, 제가 이만할 때 신도회장을 맡아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승가대학 세우시려는 큰스님 뜻도 따르고 불교신도회의 면목도 일신해 보고 싶습니다.”
“그 뜻은 알지만, 저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할 구석이 있을 것이야.”
그래도 출마를 강행했다. 하지만 권력의 비호를 받은 이후락의 위세 앞에 덕산은 너무나 작았다.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신심도, 그간의 보시도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어쩐 일인지 사업마저 기울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1971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이 땅을 빠져나갔다.
덕산의 출국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권력의 견제가 날카로워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과 기계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다가 점점 인간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설(박성배 추측) 등이 나돌았다. 지금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황망히 재산을 처분하고 서둘러 미국으로 떠난 이면에는 덕산이 차마 밝히지 못한 뭔가가 있을 것이다. 실체를 알기 위해 불을 밝히면 역시 권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덕산은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카멜 산정에 삼보사를 설립하고 수도원을 조성했다. ‘대한불교’(1973년 2월 18일 자)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에 삼보사가 건립됐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종단 전체의 사업으로서가 아니라 신도 개인의 힘으로 이룩된 사찰이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한상 거사의 원력으로 된 사찰. 아름다운 카멜 계곡,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사찰. 삼보사의 창건을 계기로, 우리 불교가 좀 더 웅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길 바란다.’
새 신도회장인 이후락도 승려대학을 세워보려는 성철의 구상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백련암을 찾아가 성철에게 정규대학 설립에 앞장서겠으니, 자기 손을 잡아 달라 청했다. 그러나 성철은 답을 주지 않았다. 제자 원택 스님 또한 스승으로부터 덕산 거사 얘기를 종종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 온 덕산이 성철을 찾아왔다. 백련암에 도착한 덕산은 성철과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누고 산에서 내려갔다. 원택은 산 밑까지 배웅했다. 오솔길을 내려가던 덕산이 원택에게 말을 건넸다.
“스님, 스님은 제가 모르는 얼굴입니다.”
“예, 저도 거사를 처음 뵙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스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동생한테 ‘인천 월미도 땅을 큰스님께 드려서 원하시는 정규대학 만들도록 해드리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이제 와 보니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큰스님 말씀 듣고 앞뒤 잘 살폈더라면 지금 해인사 강원이 정규대학이 되었을 것인데…. 그러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원택은 그런 덕산이 안쓰러웠다.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 씨는 하산하는 길에 몇 번이나 말꼬리를 흐리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그 말끝마다엔 탄식과 회한, 그리고 큰스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미국으로 돌아간 덕산은 1984년 8월23일 입적했다. 그가 세운 카멜 삼보사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덕산 거사가 남긴 것들이 사라져가니 안타깝습니다. 달마회는 없어졌고, 정릉에 있는 삼보정사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장충단공원 사명대사 동상을 어디에서 관리하는지 찾아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에도 적(籍)이 없었습니다. 시청에서도, 구청에서도, 공원 관리공단에서도 그저 모른다고만 합니다. 참으로 덕산 거사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조호정 전 삼보 법회 회장)
그 말을 듣고 문득 사명대사 동상의 안부가 궁금했다. 장충단공원에 막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공원에 내리는 겨울비는 쓸쓸했다. 동국대 후문 길옆에 서 있는 사명대사 동상은 천을 둘둘 감고 있었다. 아마 무슨 탈이 난 듯했다. 동상 앞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었다. 공원 내 다른 조형물마다에는 안내판이 있었다. 이한상은 시나브로 지워지고 있었다. 동상 제막식과 법요식에 참석한 스님과 신도들도 거의가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오직 사명대사 동상만 남아서 천을 둘러쓴 채 겨울비를 맞고 있었다.
성철과 덕산의 인재 불사 발원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참된 시주와 불공은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던 성철이 덕산을 가까이했음은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절 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철의 반대에도 권력에 맞선 것은 어쩌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성철이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함도 운명 아니겠는가. 덕산 거사의 섬광처럼 빛났던 불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