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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9월6일 (녹)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수원]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1코린 4, 6ㄴ - 15
† 복음 루카 6, 1 - 5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것인 양 자랑하는 모습을 반성하라고 훈계한다.
오히려 주님 때문에 멸시받고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서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의 모습이 드러난다(제1독서).
★ 예수님과 함께 밀밭을 가로질러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을 한다고 시비를 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논박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보고입니다. 바오로가 직접 복음의 씨를 뿌린 이 도시
공동체는 유난히 심각한 분열과 오만한 태도로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려는 바오로 사도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십자가 신학의 정수와 신앙 체험의 깊고 절절한 차원을
만납니다.
코린토는 경제와 무역이 융성하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교차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입지 조건이 좋은 삶의 자리 때문인지 이 지역의
신자들은 더욱 허영에 들뜨고 교만하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유혹에
걸려 올바른 신앙에서 자주 벗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의
피눈물 나는 훈계는 세속화의 정점에 이른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필요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 야곱 크레머 신부는 자신의 주석에서 바오로 사도의 주된 의도를
잘 요약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허영심과 경박함과 도취감에 들뜬 코린토
신자들에게 참된 사도직의 형태를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겸손을 배우도록 합니다. 스스로를 많이 아는 자이자 부유하고 힘
있는 자로 여기며 자신이 종교적으로 큰 깨달음과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듯이 내세우는 교만은, 교회 안에 분파를 낳고 올바른 신앙을 해하는 큰
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이 너무나 깊기에 바오로 사도의 ‘치료법’ 또한 직접적이며
공격적이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기법을 사용해 유난히 신랄한
논박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이 자만과 자족, 교만함으로 오도되고 왜곡된
신앙에서 깨어나 다시금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서도록 호소하는 모습을
오늘 제1독서에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책의 핵심은 ‘모든 것이 선사받은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인식에 다다르는 데 있습니다. 여러모로 자화자찬과 자기
합리화의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 또한 이러한 참된 겸손함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기쁜 만남 행복한 명절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 6,1-5
사람들이 제게 이상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단 것을 잘 먹지 않거든요.
사탕도, 또 초콜릿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단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어렸을 때에는 저 역시 다른 어린이처럼
단 것을 참 좋아했었거든요. 어머니 몰래 숟가락으로 설탕을 퍼 먹기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긴 그 당시에는 단 것이 손님을 접대하는 기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오시면 맹물 한 사발에 설탕을 한
숟가락 타서 드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요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맹물에 설탕을 넣어드리면 어떨까요? 아마 욕먹기 십상이겠지요? 제
입맛이 단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역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옛날에는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현재에는
최악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과거의 관습에 얽매여 있을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의 관습이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그랬는데...’라는 이유로 또한 ‘남들도 다 그렇게 했어.’라는
말로써 과거에 갇혀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말씀 외에 영원한 진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어쩌면 감히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며 사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늘 겸손의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 진리는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주님의 뜻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의 영광을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바리사이들의 공격이 계속됩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옳지 않다고, 즉 밀 이삭을 뜯어
추수를 한 것이고 손으로 비볐으니 타작 행위를 했기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율법에만 매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율법의 기본은 사랑인데, 이들이 내세우는 율법은 사랑은 없어지고 대신
사람들을 옭아매는 억지와 부정적인 모습만 가득합니다.
과거의 관습만을 내세우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는 바리사이들의 이 모습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지
못하고, 나만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지요. 추석 연휴 동안 친척들을 비롯한 많은
만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만남에서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먼저 우선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기쁜 만남, 행복한 명절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깨진다. 그 뒤 많은 사람의 경우 깨진 부분이
단단하게 굳는다(헤밍웨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김진배, ‘내 인생을 바꾸는 유머 한 마디’ 중에서)
한 신사가 술집에 들어와서 스카치 두 잔을 주문했다. 그리곤 한 잔을 다
마신 후 나머지 잔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한 달이 넘도록 똑같은
방법으로 술 마시는 것을 보고 마담이 물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손님, 어째서 두 잔을 한꺼번에 주문하시죠?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다른 한 잔은 얼음이 녹아 묽어져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자 신사가 대답했다.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답니다. 내게는 늘 함께 어울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친구가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약속했답니다. 누구든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반드시 두 잔의 스카치를 주문해서 한 잔은 먼저
죽은 친구의 명복을 빌면서 마시기로 했답니다. 내가 스카치위스키 두 잔을
주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랍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마담은 아주 감동했다. 그런데 다시 한 달쯤 지나고
나서는 한 잔씩만 주문하는 것이었다. 궁금해진 마담이 다시 물었다.
“왜 전처럼 돌아가신 분을 위해 한 잔을 더 안 시키는 거죠?”
“나는 이번에 의사의 권유로 술을 끊기로 했소. 이 술은 그러니까 친구의
몫이요.”
스스로 만든 원칙이겠지요? 스스로 만든 억지 원칙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억지 원칙이 아닌 보편적인 원칙. 특히 주님께서 제시하신 원칙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복음: 루카 6,1-5
<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혼자였으면 배서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친구들의 무리에서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 무리의 행위를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죄는 사회성이 있는데 혼자서보다는 함께라면 그 책임이 경감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와도 죄를 짓고는 그 죄를 아담에게 옮겼습니다.
야곱의 10명의 아들들이 작당해서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물론 그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집단에 속하게 되면 혼자만이 성인인척 할 수는 없기에 그냥
그런 죄의 경향에 휩쓸리게 됩니다. 이것을 ‘상황의 힘’이라고 하는데 그런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나를 잡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상황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범’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이수현 군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죽었습니다.
그것을 본 많은 일본인들은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먼저 뛰어 내려가
사람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희생이 ‘모범’이 되어 상황의 힘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 자신들의 잠자고 있는 사랑의 본성을
깨우십니다. 우리는 그 모범을 바라보아야만 이 세상의 힘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는 가르침을
내세우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똑같이 추구하며 살면서도
겉으로만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들은 일단 사목자들을 판단하여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오로 파니, 아폴로 파니 하면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들입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은 ‘가난’인데도 모두 ‘부자’가 되어있는 신자들을
질책합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서로 ‘임금’이 되려는 신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세상에 내던져졌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강해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 지혜만 믿고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있고 남을 비판을 하며 살기도 합니다. 반면 사도들은 약하고
어리석고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바오로는 ‘기록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기록된 것’은
분명 ‘성경’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자신의 삶의 모범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의 ‘모범’이 바로 ‘기록된 것’입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곧 ‘기록된 것’이고 그 모범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자녀들이고 사도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지금 교황님의 모범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록된 것’
입니다. 그분이 우리 사제들이나 신자들의 삶을 보면서 오늘 바오로가
느끼는 답답함을 느끼고 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보여주는 모범은
가난이고 낮아짐이고 공감해 주는 것인데, 우리들은 부자가 되려 하고
높아지려 하고 사람을 판단하려 합니다. 성경만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이들의 모범 속에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살아있는 기록들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부족한 목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론이 졸려도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냥 자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기록된 것’은 찾으려고만 하면 우리 도처에서 찾을 수 있고
본받기 위한 모범이요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범’들이 바로 나를
이 세상의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도구들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이기적인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이기적인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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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부님께서 페이스 북에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단식 기도회를 주도하셨던 신부님께
수고하셨다고 박수를 치니까,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무슨 박수냐?”고 멋쩍은 대답을 하셨나 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독백을 남깁니다.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박수인 게다.” 라고.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박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박수란 보통 감사의 마음, 칭찬의 마음,
혹은 동감이나 격려의 마음으로 어느 누군가에게 보내는 몸의 언어입니다.
사실,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무슨 박수냐 라고 하신 신부님의 말씀도,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 박수라고 하는 신부님의 말씀도 모두가
맞는 말입니다. 단, 박수 받아야 할 자와 박수를 쳐야 할 자의 복음적
태도가 다를 뿐입니다.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17,1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일을 한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일 이유가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요구될 것이고, 그를 바라보았던 사람은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냄이 당연함이다.
문제는 이 간단한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두 가지만 명심하도록 합시다. 혹시 나로 인해 어떤 일이 잘 되었다면 먼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잘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고마워하고 박수를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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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박수를 받은 신부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사랑하는 1년 후배 신부님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혜화동
신학교에서 함께 보낸 동생입니다. 제가 그 신부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늘 밝고 맑은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유쾌하게
하던 친구였지요. 한 이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신부님의 얼굴이
인터넷이나 동영상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용산 용역 철거 화제
사건을 비롯해 억울한 고통이 있는 현장에는 항상 그 신부님의 모습이
있었지요. 경찰에게 멱살이 잡히는 모습과 같은 험한 꼴을 당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고, 의로운
분노와 버리진 이들에 대한 연민은 가득했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잘 살고 있는 후배 신부님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의 중견 사제로서 편안하게 존경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은 마다하고, 길거리로 나아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투신하는 삶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복음적으로 가장 옳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길거리에 나서서 외치고 있는 사제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적 인간들이 아닙니다.
사제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인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임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기도를 삶으로 실천하는 또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뜻밖의 선물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 6,1-5
뜻밖의 선물
바오로 사도! 베드로 사도 못지않게 생각만 해도 재미있고 특별한 인물,
연구 대상의 인물이 분명합니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
드라마틱했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생, 한권의 소설로 엮어도
베스트셀러가 될 인생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그의 저작들은 세월의 벽을
넘어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한때 그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내가 요즘 제일 잘 나가!’라고 외쳐도 무방한
인물이었습니다. 앞길이 창창한 유망주 청년이었습니다. 유다 고위층
인사들은 혈기 왕성할 뿐 아니라 박학다식했던 바오로 사도에게서 장래
유다 민족을 이끌 큰 제목으로 점지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오늘날 한국 사회로 치면 S대학교 B대 수석
졸업생이다, 사법, 행정, 외무 고시 합격생, 성골 중에 성골, 진골 중에
진골이었습니다. 더구나 바오로는 애국심이 투철했습니다. 유다교 역사와
전통,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런 청년 바오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였습니다. 사사건건 그 찬란한 역사를 지닌 유다 율법을
사사건건 거스르고 파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야말로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청년 바오로는 어떻게 해서든 유다 민족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를 척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년 바오로 입장에서 보니 다마스쿠스는 유다 민족의 반역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던 반골 지역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입수한 청년 바오로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고는 즉시 말을 달려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참으로 유머러스하시고 때로 짖꿎으십니다. 앞뒤 모르고
길길이 뛰는 청년 바오로에게 보란 듯이 한방 제대로 날리십니다. 그리도
높던 청년 바오로의 코가 순식간에 납작해집니다. 그리도 기고만장하던
청년 바오로였는데 순식간에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에 하느님께서 그를 제대로
한번 말에서 떨어트리십니다. 제대로 된 바닥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청년
바오로는 그 가장 밑바닥에서 뒤늦게야 주님의 얼굴을 제대로 만납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박해의 대상이었던 예수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거듭납니다. 그 뒤로 청년
바오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그의 행적,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예수님이었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회개 이후
그 어떤 사도들, 그 어떤 목격자들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코린토서는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변화된 삶을 너무나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코린토 1서 4장 11-13절)
보십시오. 한때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박해하던 청년 바오로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위한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만민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은 오묘하십니다. 박해자를 애제자로 변화시킵니다.
배반자를 수제자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런 하느님의 손길을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때로 철저한 배신에 떠는 우리들, 수시로
반역을 거듭하는 우리들이지만 그분의 놀라운 은총, 한없는 자비의 손길에
힘입어 어느 순간 그분의 참 제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런 뜻밖의 은총을 기대하면서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 6,1-5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 합동 위령 미사, 주일
미사’ 등으로 바빴을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연휴가 있는 날에 행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레지오 야외행사, 노인대학 소풍, 본당 체육대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구청에 있으면 여유가 있습니다. 쉬는 날은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구청 사제들도 연휴가
한가합니다. 이번 연휴에는 아버님이 계신 ‘비봉 추모관’에도 가고,
의정부에 계신 어머니께도 가려고 합니다. ‘추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둥근 보름달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넉넉해져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추석 연휴를 기쁘게 지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사랑하는 가족을
찾지 못한 세월호의 실종자 가족들이 있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세월호의 유족들이 있습니다. 잠시의 잘못으로
교도소에서 추석을 지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런 분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님과 한 자매님과 차를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했던 자매님은 반대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이 있다면, 사고로
병원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전쟁과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들도
감사하면서 지낼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고통, 슬픔, 아픔’
가운데서 과연 ‘감사’를 드릴 수 있을지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냉철한 이성도 있지만 쉽게 흔들리는 감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멸시도 당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을 뻔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 사도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체념하고, 원망하고, 좌절해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순명을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하기를 멈추지 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가6,1-5)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 6,1-5
사랑하기를 멈추지 마라.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성체는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미사참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에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악 법도 법”이라고 선언하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악법이 사람을 죽이는 폐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억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오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참으로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을 수밖에 없었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빈털터리로 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의 탐욕과 쉽게 결탁하여 종종 악을 불러오게
됩니다. 요즘 예언을 하고 미래를 알려 준다며 돈을 챙기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분명 예수님이 제자가 아닙니다. 일부 교파에서 교회의 세습 문제로
갈등을 가지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작은 차를 타시고 일반 숙소를 이용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니 후손에게도 재산이 아니라
신앙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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