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국보급 미술관의 국보급 괴짜…
칠순 맞은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
[Why] [김윤덕의 사람人] : 2012.02.04.
겸재·추사… 옛사람들과 노는게 여인보다 좋더라
대학 때부터 '두루마기 패션' 진경산수화 보는 순간, 인생 바뀌었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미술 수천점…나이듦 눈치챌 새도 없이 살았다 여태 혼자인 것?… 공부가 있잖아요
1년에 2번 전시, 할 때마다 대흥행 수천년 전 서양그림만 명작이라 하더니 이제들 정신 차려가는 겁니다 먹고살만 해지니 '우리 것' 찾는 거지요 상설 전시?… 간송의 제1 목적은 연구다
노론의 화신? 사학계의 권력? 민족적 자긍심, 강한 조국애를 가진 조선시대 서인들을 좋아한다 당쟁은 건강한 문화라고 생각해요… 요즘 좌·우파 싸움과는 질적으로 다르죠
지난가을,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3시간 이상 추위에 떨며 줄을 선 사람이 30만명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서울 성북동 비탈길을 오르던 택시기사가 침을 튀기며 아는 체를 했다. "다 쓰러져가는 저 미술관에 국보급 보물이 수두룩하다네요. 저 집 우두머리 되는 양반도 국보급 괴짜라네요."
최완수 선생은 우리 한복을 맵시 있게 입는 사람으로도 소문났다. 손님을 맞을 땐 반드시 두루마기를 갖춰 입을 뿐 아니라 속바지도 전통식으로 지어 입는다. “조끼, 마고자 바람으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속옷만 입고 다니는 격이지. 그걸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기준을 세워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요.”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간송미술관 최완수(70) 선생이 올해 고희(古稀)를 맞았다. 택시기사가 허풍을 떨던 '국보급 미술관의 국보급 괴짜'다. 영 틀린 말이 아니다. 상투만 안 틀었지, 대학시절 이후 그는 언제나 두루마기 차림이다. "여인을 돌아볼 겨를 없이 공부에만 매진한 탓에" 여태 혼자 산다. 간송미술관 고미술(古美術)전시의 계속되는 '흥행'에 대해서는 놀랄 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들 정신을 차리는 거지요."
최완수는 '간송학파'의 수장이다. 전설적인 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이 남긴 수천점의 고미술품을 토대로, 숙종에서 정조대에 걸친 125년을 '진경시대'로 명명, 한국문화사의 르네상스로 규정한 학파다. '진경산수화'란 말을 확립시켰고, 진경시대의 스타였던 겸재 정선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존경과 찬사만큼 그를 사학(史學)의 권력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도제식으로 제자를 기르는 폐쇄집단, 조선후기 최고 권력층이던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조선문화사를 무리하게 확대 해석한다는 비판까지. 그러나 최완수는 '노론의 화신' '국수주의자'란 비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며 웃었다.
1년에 두 번 정기전을 할 때 빼고는 문을 걸어잠그는 간송미술관으로 최완수 선생을 만나러 갔다. 겸재에 이어 추사 김정희 연구를 집대성하는 작업으로 그와 제자들은 날마다 미술관에 나와 산다. 그가 한국 최고의 차(茶)로 인정하는 동춘차를 끓여냈다. "차맛이 평화롭지요? 오늘은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늙음을 눈치 챌 겨를 없이…
―고희를 맞은 소회가 어떠신지요.
"열심을 내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우면 근심이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지요. 늙음이 장차 이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삽니다. 공자님 말씀이에요. 나이듦을 눈치챌 새 없이 살았어요. 누가 이렇게 물어주면 그제야 (나이를) 깨닫지요."
―공부가 지겹지 않습니까.
"스스로 하는 공부는 즐겁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행복하지요. 억지로 하라니 싫은 거예요. 요즘 부모들처럼 말이지요."
―동안(童顔)이십니다. 걱정거리가 별로 없으십니까.
"걱정근심이 왜 없겠습니까. 매달리지 않을 뿐이지요. 공부라는 도피처가 있으니."
―지난 가을풍속인물화대전이 대흥행을 했습니다.
"이제들 정신을 차려가는 거지요. 아등바등 먹고 살기 바쁠 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지만, 먹고 살 만해지면 그 자존심이 돌아옵니다. 수천년 전 서양그림들만 명작이라 하고 우리 것은 낡았다 치부하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깨닫게 된 거지요."
―1971년 겸재 정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간송미술관의 첫 전시는 이 정도로 흥행하지 못했지요?
"그땐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전문가라는 사람들, 미술계나 학계에서 우리나라 최고라는 사람들만 오고갔지요. 지금은 일반 대중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 섭섭한 모양입니다만, 우리로서는 제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웃음)"
최완수가 간송미술관과 인연을 맺은 건 1966년이다. 유년기부터 불상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한 그는 고려대장경을 새롭게 편찬한 신수대장경이 간송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발이 묶였다. 간송이 집중적으로 수집해 놓은 겸재와 추사의 작품 수백점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다.
―겸재와의 인연은 순전히 간송에서 이뤄진 겁니까.
"그럼요. 71년 첫 전시회 준비하느라 겸재 그림을 처음 봤는데 그야말로 충격이었죠. 청풍계도, 경교명승첩, 해악전신첩 등 겸재 그림을 본 순간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 간송미술관 제공
―그림에 매혹되신 건가요?
"내겐 일제 식민사관이 조선의 문화를 왜곡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조선은 당쟁만 하다 망한 나라이고 문화도 형편없었다는 조선정체설 말입니다. 그걸 뒤집고 싶었는데 기록만으로는 어려웠어요. 그걸 불상으로 해결해보려고 전국을 뒤지고 다니다가 겸재를 만난 거죠. 아, 이거구나, 싶더라고요. 당시엔 조선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 미쳤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겸재로 조선문화의 힘을 증명해 보여야겠다 생각했지요."
―겸재로 어떻게 조선문화의 힘을 보여줍니까?
"우리 산천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진경(眞景)화풍을 확립해 진경문화를 절정에 올린 분이 겸재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소를 그려도 물소를 그리고, 사람들도 죄다 중국 옷을 입혔지요. 하지만 정선은 우리 갓과 도포를 입은 선비, 우리 승복을 입은 승려, 우리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을 그렸어요. 중국의 산하가 아니라 금강산과 인왕산을 그리지요. 겸재 이후 김홍도와 신윤복의 조선풍속화가 출현하는 겁니다."
―겸재의 그림만으로 조선후기를 우리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명명할 수 있나요?
"그래서 떠올린 게 왕릉이에요. 왕릉에 쓰인 석물을 조사하면 통사를 아우르는 증거가 되겠구나 싶었지요. 실제로 왕릉을 조사하니 가설이 다 맞아들어가요. 숙종 이후 왕릉 석물에는 겸재 그림에서처럼 서울 사람들 모습이 그대로 사생돼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한글소설, 시조, 판소리 등 우리 고유의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까. 불상과 불화도 마찬가지였어요. 불상은 책 읽는 조선 선비의 모습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고, 불화 역시 진경산수화처럼 우리 주변의 생활모습을 재현해내고 있지요."
◇국수주의자? 칭찬으로 생각한다
―진경시대의 이념적 뿌리를 조선후기 권력을 장악한 율곡학파, 서인(노론)의 사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을 이기일원론으로 심화발전시킨 것이 율곡의 조선성리학입니다.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우리의 독자적인 사상체계죠. 자기 고유의 이념이 생기면 자기애, 국토애, 민족애가 생겨납니다. 실제로 율곡의 평생지기인 송강 정철이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장식합니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불정폭포를 예찬하는 대목이 있어요. '만일 이태백이 지금 있어 다시 본다면 (중국의) 여산폭포가 여기보다 낫다고 못하리라' 하지 않습니까. 글씨에서는 한석봉이 조선 고유의 서체를 이뤄냅니다. 겸재는 율곡학파 3대 수장인 우암 송시열과 그 제자인 삼연 김창흡의 제자입니다."
―우암 송시열은 중화(中華)주의자 아닌가요?
"통설이 그렇지요. 하지만 우암의 사대(事大)는 명을 정복한 청에 저항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취해진 겁니다. 야만인 여진족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이 없으니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폈지요. 일종의 정치적 쇼예요. 서인들이 진정한 사대주의자였다면 왜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조선의 고유색이 피어났겠습니까. 역사란 기록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기록 밖으로 나와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미술사는 그래서 중요하지요."
◀ 추사 김정희의 글씨. ‘명선(茗禪)’은 추사가 ‘차(茶)의 성인’으로 불린 초의선사에게 붙여준 호다. / 간송미술관 제공
―최완수를 '노론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서인들의 혁신적인 생각을 좋아하지요. 민족적 자긍심, 강한 조국애, 우리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꽃피우려 했던 노력들."
―조선시대의 당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시죠?
"역사는 일당독재시대가 마치 태평성대인 양 기록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의견, 다른 정파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문화라고 생각해요. 요즘의 좌파, 우파가 싸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그때는 싸움을 해도 공부를 하면서 싸웠어요. '진경시대'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화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에요. 옛것을 충분히 익히고 나서, 근본을 잃지 않으면서 혁신해나가는 것. 좌파든 우파든 요즘 사람들은 5000년 역사를 그냥 버리려고만 해요. 제 것도 못 챙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죠."
―선생님을 국수주의자라고도 합니다.
"이런 외세 추종시대에 국수주의자가 있어야 나라와 민족의 문화를 지키지 않겠습니까.(웃음)"
◇학문? 밥짓기부터 배워야
―서울대 출신 박사제자 40여 명은 한국사와 동양미술계에 두루 걸쳐 있습니다. 간송학파를 두고 폐쇄적인 도제집단이라고도 합니다.
"학문은 어차피 폐쇄적일 수밖에 없어요. 통설에 맞서는 그룹은 더더욱 그렇지요. 꽃이 봉오리졌다 만개하듯이, 어떤 연구가 절정에 이르면 개방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폐쇄집단이 아니에요. 저렇게 줄을 서지 않습니까?(웃음)"
―공부를 배우러 온 제자들에게 빨래하고 밥하는 것부터 가르치신다 들었습니다.
"문화의 기본이 의식주예요. 그걸 모르면 그 문화는 소멸하지요. 격물치지(格物致知). 일도에 통하면 만사에 통합니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초간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전신첩 등 국보와 보물이 수천점에 이른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소장품 전모를 밝힌 적은 없습니다.
"궁금한 건 궁금한 채로 남겨야지요. 굳이 알릴 필요 있습니까."
―상설전시관으로 전환해달라는 요구가 큽니다.
"상설전시를 하면서 어떻게 연구에 몰두합니까. 간송의 제1 목적은 연구입니다."
―간송의 유산을 거의 독점해오신 셈입니다.
"독점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아요. 규장각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규장각 자료를 다 독점하는 건가요? 그걸 제대로 연구하기는 할까요?"
―박사학위는 왜 얻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나에게 학위를 줄 수 있나요? 더구나 나는 통설에 정면 도전해온 사람인데.(웃음)"
―비자금을 위해 고가의 명화를 수집하는 재벌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간송은 우리 미술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라면 골동가치가 크지 않아도 수집했습니다. 비자금 용도로 모으는 사람들에 대해선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경전을 날줄 삼아, 역사를 씨줄 삼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셨지요. 어릴 때부터 불상에 관심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6·25 직후였나. 할머니 따라 절에 처음 갔는데 미남(불상)이 한 분 앉아 계세요. 한데 머리가 이상해. 사발을 하나 쓴 것도 같고, 소라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듯도 하고요. 스님께 여쭈니 퍽 당황해하시며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수도할 때 그 열매가 떨어져 쌓인 것이라고 해요. 어린 마음에도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데요.(웃음)"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 / 간송미술관 제공
―경복고 시절 한학과 보학(譜學)의 대가였던 백아 김창현 선생을 만나면서 조선 사대부의 문화에 빠져들었지요.
"고전문학 첫 시간에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한눈에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실 분이라는 확신이 왔어요. '춘향전'을 하나 배워도 선생님은 변사또의 잔칫상에 오른 음식까지 세세한 설명을 하시니 나는 재미있어 죽겠는데 애들은 지겨워 죽지요. 공부하다 막히면 약주 들고 찾아뵙고, 돌아가실 때까지 좌우전후로 사제간에 이야기가 난만했습니다."
―결혼은 왜 안 하셨습니까.
"여인보다 좋은 세상에서 옛사람들과 노느라."
―결혼 후 학문적 성취를 이룬 분도 있지 않습니까.
"잘하는 사람 별로 못봤어요. (웃음)"
―휴대폰도 없습니다.
"휴대폰 있으면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걸려오는 전화를 다 어떻게 막아냅니까. 옛 선인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웃음)"
―차를 즐겨드시지요?
"풍류있는 운사들이 즐겼지요. 다산 정약용, 추사 같은 분들. 문·사·철에 능통한 통유(通儒)들이지요."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까.
"경전을 날줄 삼아, 역사를 씨줄 삼아 학문의 베를 짤 줄 아는 사람. 그런데 지금은 군주를 백성이 뽑는 시대이니 민도(民度)가 그만큼 높아야겠지요. 역사가 없는 것도 야만이지만, 역사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야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