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28
2월6일 [연중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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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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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vG21py4xck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291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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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오늘 둘째 독서인 코린토 1서는 바오로 사도의 성공적인 회심, 개과천선과 인생 역전의 비결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회심 이후 그가 평생토록 잃지 않았던 초심과 항구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미성숙과 흑역사를 아무런 가감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는 한두 번도 아니고 틈만 나면 만천하에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켰습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큰 은총과 자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근본, 자신의 약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코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솔직한 겸손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15장 9절)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마냥 한때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배신에만 파묻혀 있지 않았습니다.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억눌려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부끄러웠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생각하며 훌훌 털어버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마음가짐이 또한 서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의 덕입니까? 그런 바오로 사도의 겸손의 덕은 그를 더욱 둘도 없는 주님의 제자요 탁월한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으로는 쉽지만 삶 속에서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덕이 겸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겸손의 덕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겸손의 덕을 지니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됩니다. 그다음 단계로 그에 비해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고 미소한 존재인지를 파악해야겠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지극히 상대적인 존재이며, 필연적이신 하느님 앞에 나는 우연적인 존재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나는 유한한 존재이며, 무죄하신 그분 앞에 나는 죄투성이인 존재입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보니 결국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최선의 태도는 겸손뿐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무상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크신 그분의 은총에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맨 끝자리라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앉아야겠습니다.
주제넘게 자신을 끝도 없이 올려놓고, 하느님께 속하는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며,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겸손의 덕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이니, 지상에서 부터 겸손의 덕을 갖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겸손의 덕은 특별한 사람들만 갖춰야 하는 덕이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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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36Kix74R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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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첫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재물은 물론이요, 세속적인 인간관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신앙체험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도자들의 입회가 줄어든 지는 꽤 되었습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수도자가 되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사제가 되는 성소자는 좀 있었지만 이마저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올해 수원교구의 신입생이 간신히 10명을 넘겼고 서울 대교구를 포함한 다른 교구에서는 없거나 10명 이하입니다. 신학교를 없애는 교구도 있습니다. 운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가 줄어드는 이유는 단순히 젊은 사람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력’을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삶이 더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분 중에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제 중에도 자신이 결혼생활을 포기한 고통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서 이런 말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수도자, 부모들조차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자녀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선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복은 크게 ‘존재적 행복’과 ‘소유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재적 행복이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고, 소유적 행복이란 엄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둘 다 ‘생존’에 관계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불안’(不安)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불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됩니다. 생존을 위해 소유를 늘려 불안을 해소하려 하고, 또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행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명예를 가졌더라도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과 장난감을 충분히 주고 아이를 혼자 집에 둔다면 아이는 소유적 행복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도 어머니의 존재가 옆에서 있을 때 즐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어린이처럼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자신의 창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옵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의 생존을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부모도 죽습니다. 결국, 죽음은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이때 죽지 않으려고 더 가지려 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창조자를 찾음이 옳을까요? 창조자를 찾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더 이상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느님께 양심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를 짓고 산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죽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부모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부모와 함께하고 싶으면 부모 뜻을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태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다 책임져주신다는 참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부들을 이 평화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목숨을 바쳐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주님께 더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문제는 그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생활도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혼의 삶이 오히려 방해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괜한 고통을 겪으며 참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록도에 불교를 전하러 갔던 스님이 신도들의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성령을 받아서 개신교 선교사가 된 이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본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상태로 성장하였습니다.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원불교 교무(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습니다.
고3 때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싶어서 소록도에서 봉사합니다. 소록도병원의 한 간호사가 성탄 행사에 간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라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환자들이 죽 일어서 뭘 하나 받아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한센병약이나 되는 줄 알고 얼떨결에 일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그는 말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성체였다니…. 저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에 처음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아마 저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오묘한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는 한 가톨릭 신자의 초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주신 체험이었습니다.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는 소록도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교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한평생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복해.”
불교 교리에 의하면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보를 받았다’라고 보는 게 맞는데, 그들이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인과응보가 아닌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로 혼란스러워할 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988년 3월 2일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틈만 나면 소록도로 가던 저는 그날도 소록도 법당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30분간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따) 요단강 건너가…. (딱딱딱)’. 화들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내가 멸치가 먹고 싶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만하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장의사 아르바이트할 때 개신교인 장례식에서 들었던 찬송가 가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는 법당에서 아무리 땡중이지만 입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데 혀가 멈추지를 않아요.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하다가 뜻 모를 소리까지 외쳐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방언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굉장한 쇼크였습니다.”
그는 개종하여 목사가 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영적인 시련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귀신이 차 뒷자리에 앉았다고 옆자리에 앉아서 큰 사고가 났습니다. 얼마 동안은 잠자는데 오줌을 싸거나 대변이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두려움을 끊어내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도 생기고 어린 자녀도 둘이나 생겼습니다. 아내는 약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부르십니다. 이민교 선교사는 약국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아내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혼자 떠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마음을 바꾸어 약국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갑상선 질환으로, 첫째 아이는 급성 신우신염으로, 둘째 아이는 결핵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그리고 그쪽 동네 청년들은 “저녁 8시까지 옥상에 돈과 담배를 갖다 놓지 않으면 너희 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농아 축구단 감독을 병행하며 선교를 하고, 많은 것이 정리되었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단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게 되었으니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죽음의 불안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장애가 되는 것은 역시 가족들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면 부모도, 아내도, 자녀들도 미워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게 행복하겠니,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겠니?” 물고기를 잡는 것은 소유의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면 존재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 존재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결혼도 가족을 구원하고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등 엄청난 선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의 행복을 포기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에 저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어 영혼 구원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 말합니다.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똑같이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까지 그러면 누구도 이런 행복을 추구할 꿈도 꾸지 못하는 환경이 될 것입니다. 아주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님 뜻을 따르는 수월함에 있어서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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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사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카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또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우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11)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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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고기잡이 기적 -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또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들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겉으로만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내면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의 뛰어난 점은, ‘믿음, 열성, 겸손, 인내, 헌신’ 등입니다. 마태오 사도의 경우에, 사람들은 세리라는 그의 직업만 보지만(마태 9,9),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내면의 자질’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더 가꾸려고 노력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4-7)
‘고기잡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21,5-8) 두 기적 모두 제자들의 ‘사도 직무’와 직접 관련됩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은, “먹고 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은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요한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요한 21,3-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데’는 믿음 없는 사람들의 인생보다 차원이 더 높은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즉 영혼 구원을 추구하는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요한복음의 ‘배 오른쪽’은, ‘인생의(또는 사도직 수행의) 올바른 방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요한 21,6).> ‘고기잡이 기적’은 군중이 없는 상태에서 어부들만을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즉 그들을 제자로 부르기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래서 어부들이 잡은 ‘매우 많은 물고기’는 그들을 제자로 부르는 도구로만 사용되었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11절) 그 많은 물고기들도 버렸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8-11)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다가(5절) ‘주님’이라고 바꿔 부르는데, 이렇게 호칭을 바꾼 것은, 그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는 말은, 실제로 떠나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실제로 자기가 죄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신 분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예수님의 기적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루카 4장). 그런데 ‘고기잡이 기적’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들과는 ‘성격’이 아주 많이 다른 기적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일 수도 있고,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로 해석하면, “앞으로 더 큰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되고(요한 1,50),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로 해석하면, “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이 됩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는 그동안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를 따라라.”라는 ‘부르심’이 들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를 보면, 기적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따로 무슨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방향만 바로잡아 주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어부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아닌데, 인생의 목적을 바꾸고, 방향을 바꾼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이 말씀에는, 제자들의 사도 직무 수행은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도 사실상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구원’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신앙생활의 첫 번째 목표는, 또 주님의 일꾼으로서 수행하는 각종 직무와 봉사의 첫 번째 목표는 항상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대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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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으로 이민 오는 분들은 저마다 이유와 목적이 다릅니다. 유학을 왔다가 미국생활이 좋아서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을 왔다가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미국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간 가족의 초청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재원으로 왔다가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미국에 오게 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분들은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자리를 잡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않다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한다면, 법을 어긴다면 미국에 온 이유와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말 주변이 없음에도 하느님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치는 목동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직업, 나이, 성격, 재능이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된 사람들,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릇의 겉은 닦지만 안은 닦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무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짐을 맡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들의 이유와 목적도 저마다 다릅니다. 어려서 복사를 서고,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서 사제가 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제가 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나 보좌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사제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이유와 목적은 다양하지만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쌓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열정적으로 사목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 기도, 건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신학교의 규정을 잘 지키고, 동료들과 인격적인 우정을 쌓아야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사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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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어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묘사한 이사야는 ‘숯’의 정화로 새로워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술을 지니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처지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당당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분께 죄 많은 자신을 떠나 주십사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선택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사람들,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드러날 놀라운 업적이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제2독서에서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사제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저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이루신 그분의 놀라우신 업적이 마치 제게서 비롯된 것인 양 착각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도 자주 찾아올 수 있는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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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는 유학(儒學)이며 유학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 여정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요약됩니다. 공자(孔子)님은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다시 수신(修身)이 강조되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내면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을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양지(良知)를 얻는 길을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투철하게 밝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인간관은 어떠합니까?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이 하느님의 성성(聖性) 앞에 인간은 자신이 초라한 죄인(罪人)임을 뼈저리게 통감합니다! 지극히 선(善)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함(聖性)을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인간의 협력, 곧 인간이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되기를 바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은총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성화(聖化)를 이룩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10)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루카 5,5)라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봅시다!
철학자 루이 라벨(Louis Lavelle)은 “성인들의 거처는 바로 이 세상의 내면성(intimité)”이라고 통찰합니다. 이 내면성은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질 자체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 내면(intimité) 안에 머무름은 인간의 내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침잠할 때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고요와 침묵 가운데서 우리의 내면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며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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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재현 요한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천주교 신자로 살면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간절히 바라지만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 하느님 체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을 만나고 싶고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어떨까요? 또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주님을 만나고,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체험하고, 삶이 변합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 앞에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자각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이사야 예언서 6,5)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야 예언서 6,7) 이렇게 주님을 체험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도구로 예언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이사야 예언서 6,8)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해 받는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코린토 1서 15,3) 그리고 주님 앞에 선 자신의 처지를 밝힙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코린토 1서 15,8-9) 그리고 주님의 은총으로 사도의 삶을 살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코린토 1서 15,10)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시몬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는 체험을 합니다. 고기잡이에는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시몬이 어부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겁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합니다. 주님 앞에, 하느님 앞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주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주님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아무런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성사 안에서, 특히 미사성제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모시는 나는 주님 앞에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묵상해 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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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명재 베네딕토 신부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23살의 노동자 청년 전태일이 분신하였다.
전태일 분신 50년 후, 신문들은 “그의 절규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썼다. 1984년 서울 마천 2동 한 지하 셋방에서, “턱을 없애 주시오”라고 외치며 서른세 살의 장애인 김순석이 ‘음독자살’을 했다. 그는 서울 시장에게 5장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김순석 자살 38년 후, ‘그의 절규는 현재 진행형’이다.
독서와 복음에서 흐르는 주제는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선교 사명이다. 제1독서에서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이사야를 부르시고, 2독서에서는 “칠삭둥이” 같은 바오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사도가 된 이야기를 전해 준다. 복음에서는 “죄 많은 사람”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부름을 받은 이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였는가? ‘깊은 곳’이었다.
그물을 칠 ‘깊은 곳’은 어디일까? 베드로는 어부로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한다. 어부는 어디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경험상 다니던 곳에서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깊은 곳’은 베드로가 늘 다니던 곳, 어부로서 동료들과 함께 다녔던 곳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곳, 관심에 없던 곳, 무심히 지나쳐 온 곳 따위일 수 있다.
교회는 본당 중심,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해 왔던 오래된 경험들이다. 마치 베드로가 늘 가던 곳, 경험상 얻은 곳만 갔던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그물을 치고 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는 야전병원.” “연구실이 아닌 변방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가지 않은 곳, 가기 싫은 곳, 왜 가야 하는지 묻는 곳이다. 전태일 들이 있는 곳, 김순석 들이 있는 곳, 아프고 힘들어 소리치고 있는 곳,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따위들이다.
2018년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이었던 장상원 신부는 이렇게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애써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려고 기를 쓰지 않아도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고,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은 서슴지 말고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 길을 곧게 내어라. 걸리적거리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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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5주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변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 공동체 혹은 가정의 변화, 타인들의 변화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변화’란 단지 자신의 악습이나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자기 교정이나 자기 개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질적인 변화, 곧 삶의 페러다임, 사고의 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등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변화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변화의 힘은 회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만남에서 오며, 회개는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곧 은총과 사랑의 체험의 수락이 변화와 회개를 불러오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렇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그렇고,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전해줍니다. 곧 하느님과의 만남 체험이 회개를 불러왔음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코린 15,9)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곧 체험이 회개와 변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회개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그 은총을 수락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코린 15,10)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앎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카 5,5)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하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죽음의 수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자신의 앎, 그것도 이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앎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많은 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단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어떤 한 분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체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진정한 변화’는 찾아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는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회개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 선물, 이 은총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하느님과 우리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아니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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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소서.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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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대박나는 길!>
오늘 복음(루카5,1-11)은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르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한마디로 대박이 납니다. 몹시 놀란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시몬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경 말씀은 항상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은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와야 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도의 책'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2독서(1코린15,1-11)에서 사도 바오로는 '케리그마(kerygma)', 곧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케리그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1코린15,3-5 참조)
케리그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늘 연결되어 있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지금 여기에서 '대박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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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일으킴의 말씀이니
쓰러진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나아감의 말씀이니
주저앉은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돋움의 말씀이니
무기력한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이룸의 말씀이니
비워진 터에서 울려 퍼지네
하느님의 말씀은
살림의 말씀이니
죽은 터에서 울려 퍼지네
실패한 어부의 배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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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께서 열심히 책 읽으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말 듣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도대체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강의를 들었던 분의 하소연입니다.
그래서 “책을 얼마나 읽고 계시는데요?”라고 묻자, “1년에 50권 정도 읽습니다.”라고 답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2021년에 320권 정도의 책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50권은 한참 부족한 양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분에게 50권은 너무나 많은 양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겠지만, 더 큰 변화를 원하셨는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 역시 32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저의 지식은 얼마나 보잘것없어 보이겠습니까? 종종 자신이 최고의 노력을 하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분을 만납니다. 자기 관점에서는 최고의 노력이겠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더 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외부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함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제자들을 뽑으셔야 했기에,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그 동업자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전문 어부이기에 이미 깊은 데에서 그물을 내리지 않았었을까요? 더군다나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순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예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해서 자격조차 없는 몸이었지만 사도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격 운운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베드로도 죄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자격 운운한다는 것, 능력과 재주가 없다는 것, 주변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는 것 등의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노력만이 제대로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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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으로 주님의 능력을 만나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 시간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한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고 하셨을 때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가 5,5)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부로서의 생활을 하루이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만일 그 말씀을 무시하여 듣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고기를 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석, 으뜸제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시몬의 순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게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순명이란 자신의 지식과 사고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권위에 대한 신뢰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기를 잡는 시몬은 자기 경험과 판단을 제쳐놓고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권고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기뻐하지 않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몬의 눈에는 고기 대신 능력의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죄스러움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주님 앞에 서니 자신의 허물이 보였습니다.ㅈ그분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에 스스로 엎드려 자백한 것입니다. 이미 그는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 이라고 부르지만, 능력을 만난 다음에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아주 오랫동안 쉬다가 오시는 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분의 고해성사는 내용이 아주 짧습니다. 몇 마디로 죄를 고백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은 내용이 많고 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주 보는 사람이 짧을 것 같은데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 ‘들보’ 같은 죄도 안 보이다가 ‘티’ 만한 죄도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 앞에 서면 어느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가 5,8)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보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자비를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시몬은 그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생활이 전개 되었습니다. 그들은 따름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는 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시몬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어부로써의 경험을 접었듯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 판단을 주님께 맡길 때 놀랍게도 신앙의 눈이 새롭게 뜨이기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애착을 버림으로써, 그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감히 예기치 못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21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의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넘쳐 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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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소명召命의 여정>
-만남, 발견, 버림, 따름-
어제 성가 연습 시간에 있었던 평범한 ‘더불어’의 따뜻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난생 처음 저녁성무일도서 안티포날레를 깜박 잊고 지참치 못해 그냥 부르던중 이를 알아 챈 옆에 있던 형제가 말없이 웃으며 슬며시 다가왔습니다. 이어 형제의 성무일도서를 펴들고 함께 성가를 연습했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책이 없을 때 옆에 동무와 함께 정답게 동무의 책을 함께 펴들고 읽던 추억이 생각나 순간 마음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일희일비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늘 한결같이 새롭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런 일어날 힘을 주는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고 살아 온 삶의 원리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소명의 여정’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어진 소명의 여정입니다. 오늘 두 독서에 이어 복음은 소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독서는 이사야, 2독서는 바오로, 그리고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두 어부들의 소명에 관한 일화입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연인 듯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님은 한 눈에 어부들의 갈망渴望을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어부들은 평생 단조로운 고기잡이 일상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우리의 경우와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가르침을 계속하신 후 말씀을 마치시자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면서도 내심 시몬을 주목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고 받은 내용이 깊은 의미를 함축한 화두처럼 들립니다. 바야흐로 주님과 어부 시몬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흡사 우리 한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평범한 일상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깊은 데를 찾아 어디 밖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여기가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입니다. 바로 베드로에게 이를 확인시켜준 주님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없는 삶의 허무를 말해 줍니다. 평생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마음을 여전히 공허할 뿐입니다. 마음의 허기虛氣는 여전하며 삶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강원도 오두막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던 고故 법정 스님에게 어느 분이 던졌다는 화두 같은 말씀도 생각납니다.
“스님,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흡사 의미없는 삶, ‘텅 빈 충만’이 아니라 ‘텅 빈 허무’의 삶같습니다. 여전히 삶은 무지의 어둠입니다. 다음 시편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일미사후 낮기도를 대체하여 바치는 시편 126장은 부를 때 마다 새롭습니다. 바로 주님이 삶의 의미임을 밝혀 줍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짧은 시간 잘 자고 나서 이렇게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과 어부 일행입니다. 새삼 주님이 함께 계신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의미를 풍부히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데’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몬 베드로의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반응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참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발생한 은총의 체험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자기를 발견한 구원의 체험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한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명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해 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와 흡사한 이사야의 소명 체험입니다. 사랍들 천사들의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듣고 보는 중 이사야는 주님을 만났고 동시에 참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미사중 “거룩하시다” 환호는 여기에 근거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지는 사랍들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입에 대고 말합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흡사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해당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의 죄는 없어지고 우리의 죄악은 사라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좌우간 이런 강렬한 소명 체험의 기억은 이사야의 평생 삶에서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소명 체험의 고백도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돌리는 바오로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소명을 체험한 이들의 공통점은 겸손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자기를 발견했을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소명을 체험했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주님의 소명 체험을 통한 참자기의 발견뿐입니다. 복음 말미의 시몬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사라지는 무지의 어둠이요 두려움입니다. 삶은 소명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복음 선포의 삶이 시작됨을 뜻합니다. 마지막 결론같은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과의 만남과 참나의 발견에 이은 모든 것을 버림, 예수님을 따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부의 삶에서 제자의 삶으로 운명이 바뀐 이들입니다. 새삼 소명의 여정은 만남, 발견, 버림, 따름의 일련의 요소로 이뤄짐을 봅니다. 소명의 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만남의 여정, 발견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1독서 말미에서 주님의 파견 말씀에 대한 이사야의 자발적 응답은 얼마나 멋진지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파견되어 주님을 따르는 소명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소명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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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는 이사야처럼, 입술이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로써 다른 이들을 아프게하고
욕도 하고 뒷담화도 하곤 합니다.
하느님 당신을 늘 말과 노래로 아름답게
찬미하는 이들을 보며
참 좋구나 하면서도
저는 입술이 깨끗하지 못하니
주님 제 입술을 치유시켜 주시고
열어주시어
당신의 좋음을 내 입이 늘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주님,
저는 사울처럼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사람들을 내 맘대로 재단하고 판단하며
뜯어 고치려고 하곤 했지요.
당신이 큰 빛을 비추시어
제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다시 보게하셔서 바오로가 되게 하셔서
이제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요 모두 나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게 하소서.
나의 하느님,
저는 베드로처럼
제 눈으로 당신의 놀라운 기적들을
깜짝 놀라며 자주 체험하면서도
제 죄 때문에 때론 당신이 무섭답니다.
저의 죄를 말끔이 씻어 주시어
두려움 없이 당신의 뒤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
비록 이사야처럼 입술이 더럽고
사울처럼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하고
베드로처럼 죄와 허물에 짓눌려
당신의 제자되기에
당신의 복음선포자가 되기에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공로로
저를 깨끗이 씻어주시어
당신이 원하는 곳에
정 보내실 사람이 없다면
"저를 보내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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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nJkO3x-K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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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 5)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우리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과
무력함으로
또 다시
곤두박질치는
은총의
시간이다.
진짜 삶은
먼저
우리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내면의 성장
그 첫걸음이다.
기존의 삶을
바꾸려는
우리의
정직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변화는
또 다른
파괴이다.
과거의 방식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도를
원하신다.
새로운 시도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음을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인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전환
그 자체이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다시
내려 고기를
잡게 하시는
새로운 변화의
주님이시다.
깊은 곳이란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우리 마음을
다시 환하게
만드신다.
더 나은 삶을
살고싶은
우리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간결한
부르심을 통해
새로운 삶을
우리들어게
보여주신다.
새로운
방향 전환이
새로운
삶이다.
매순간
우리 삶에
채워야 할
주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이
간절히
필요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워지는
삶을 원하신다.
살고싶은 삶이란
깨어나는 삶이다.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해지고
더 가치있는
복음의 삶을
믿는다.
먼저 나의
내면을 향하여
복음의 그물을
힘껏 던지는
은총의 주일이다.
새로워지는
첫걸음은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려놓는
오늘의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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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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