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략가 남로당 총책 박 헌 영 은 ?
충남 예산출신 1900년 – 1956년 경기고졸 -모스크바 국립대졸
박헌영은 해방전후 남로당 총책 부인 주세죽 조선 최고미녀 박헌영은 왜 모략가인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하다 수차례 검거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정신이상자 행세로
옥에서 똥을 싸서 벽에다 바르고 벽에 붙어있는 똥을 혀로먹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자
일경도 그를 풀어주고 이어 45년 해방이 되자 북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고 남한은 이승만이 정권을 잡자 박헌영은남로당 총책으로 테러 암살 등으로 체포령
내리자1948년 행여로 위장 관속에 숨어 월북에 성공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수립을 하나
둘사이는 라이벌 관계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그의 아들 살아남은 아들 원경은
평생 중으로 살다 2021년 사망했습니다 조계종 좌파 스님 박헌영의 둘째 아들 원경스님
박헌영과 주세죽 미인은 미인이네요 모습
= 6.25전쟁전에 남한에서는
1.제주 4 · 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로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 등이 겹쳤으며,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에 한라산 깊은곳에 숨어서 밤마다 제주도 중산간지역에 내려와 테러를 일삼는 남로당 김달삼 부대가 제주도민을 살해 약탈하고 프락치 활동으로 하고 있는중에 .,.,
2.여순반란사건이 일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제주4.3사건을 진압하는 부대가 여수에 진주중 국군 14연대의 장교 3명 좌익극렬분자들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을 중심으로 행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점심시간을 이용 장교 40여명이 식사중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가 장교식당에 총을 난사해 장교를 전부 죽이고 14연대를 장악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일당과 겁에 질린 14연대 군인들이 합세하여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전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이렇게 연순반란군은 인근도시로 번져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여수 순천은 불바다가 되고 여기에 지리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참여 반란이 진압되자 지리산으로 숨어 남부군이 편성되었고 이현상은 사살되고 제주 4.3사건 의 대장 김달삼은 한라산에서 공비활동하다 강원도로 탈출 훗날 태백산 전투에서 사살당합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여순반란사건에 가담 했으나 만주군관학교 출신 백선엽장군(선후배)이 토벌대장에 참여 백선엽장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 나왔으며 최근들어 제주 4.사건도 여순 반란 폭동사건도 여순 항쟁 운동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좌파정권)
여순반란으로 붙잡힌 민간인들
(군부 프락치가 일으킨 반란을 여순민중 항쟁이라 부르라 하며 여순민중항쟁으로 변질)
여순반란에가담한 박정희 대통령 무기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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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남침후 북한군이서울점령 주둔 3일간의 지연 미스테리?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은 단 3일만에 서울에 도착을 한 뒤 진격을 멈추고 3일동안 남으로 진격을 멈춘 것은 서부전선 백선엽 1사단장 유재흥 사단이 북한의압도적 화력에 무너지고 백선엽장군은 홀로 한강을 건너 탈출했습니다
동부전선에 김종오장군 6사단과 장도영 장군의분투로 남진을 지연시킴(1951년 유엔군)
지원아래 장도영 장군은 훗날 파로호 전투로 중공군 2만 4,141명을 사살하고 7,905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파로호는 6.25 끝난 후 10년이상 물을 먹지 못했다 합니다 중공군시체가 가득 덮여서 ....
=파로호란 오랑캐를 크게 무찌른 전투란 뜻 =
이승만 대통령이 대붕호를 파로호로 명칭을 변경 몇년전에 중공이 거칠게 항의한 적 있슴
김일성 박헌영의 속셈은 서울을 점령하고 당시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사로잡아 남북 공동
회의를 개최 통일을 선언하려고 했으나 포로로 잡힌 의원은 단 1명뿐이고 모두 남으로 피난을 가서 연방회의를 좌절시킴 한 달 안에 한반도가 적화가 되어 전쟁이 끝 날 경우 그들이 의도를 한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를 해서, 스탈린에게 긴급하게 타전을 해서 김일성에게 북한군의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 3일간 머물라고 지시를 했으며, 하지만 서울 점령 3일의 남진 지연은 그동안 국군이 북한군들에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전열을 가다듬고 미군과 연합군이 도착을 할 시간적인 여유를 준 절대적 적화를 방지하는 3일의 시간을 도와준 김일성의 오판은 박헌영 등 남로당이 몽땅 뒤집어 쓰게 됩니다
파로호 전경 (대붕호) 강원도 춘천
=모략가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은 김일성에 의해 처형=
한국전쟁 기간 중 남아 있던 그의 친척들은 수난을 당했다.그들은 박헌영의 월북으로 월북자의 친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거나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다가 사살되었다.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呂運亨)·허헌·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과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주도권 싸움에서 밀려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체포된 직후 박헌영은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그는 철산군 정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북한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죄명이었다.여기서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붙힌다.박헌영은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집어던지면서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 라며 강하게 격노한다함북 화성 16호 수용소는.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다 숙청된 김창봉이나 남로당 박헌영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화성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박헌영 투사로서 김일성에 큰소리로 나무라자 김일성은 커다란 세퍼트로 하여금 박헌영의 몸을 갈기갈기찢어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면서 죽도록 말로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박헌영의 부하들에 수많은 남한사람 민간인들 우파들은 속절없이 살해 당합니다
=저의 친척들도 면장하다 사택에서 피살당해 가족이 흩어지고 저의 외가는 외동이신 외숙부가 현리전투에서 전사 외갓집이 없어 방학이면 놀러갈곳이 없었습니다=
또한 당 출신 간부 12명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고. 이들은 북한의 2인자로서 남로당 계열을 이끌던 부수상 박헌영의 측근이었다. 얼마 후 박헌영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됐다. 이승엽 등 12명은 8월에 재판을 받고 숙청됐다. 박헌영도 1955년 12월김일성에게 남한 해방을 못시킨 반역죄로 세퍼트로 하여금 물어뜯어 잔인하게 처형시킴
6.25전쟁 피난민 모습
첫댓글 일제로부터 해방이되고나서 어지런운 남과북의 중심에서
오늘도 한자락 역사를배우고갑니다.ㅎ^*
경기고를 졸업 했다면 공부잘하는 사람이로군요 결국은 배신당했으니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최고의 모략가 머릭가 좋아야죠
우리나라가 복잡한 시대를 거 첬습니다
초기 누군가는 북으로 누군가는 남으로 사상을 달리했지요
결과는 죽고사는일 생사갈림길에서 고생을 했지요
우리가 겪고있는 현대사의 역사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