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6 ]
제 3사단 ( The US 3rd Division )
제 2차대전 후 본토에 있던 대부분 미 육군사단은 2개 대대로 편성된 2개 연대와 서류상으로 편성된 1개 연대로 ( Table of Organization and Equipment - TO&E ) 축소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제 3사단은 그 편제가 더욱 축소되어 있던 사단이었는데 예하 제 7연대와 제 15연대는 단지 1개 대대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1950년 8월 20일 부대를 일본으로 긴급 전개함과 동시에 푸에르토리코에 주둔한 제 65연대를 배속 받아 1950년 11월 10일 완편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휴전 후 1954년 10월 다시 본토로 철군합니다.
[ 현리의 위기를 막아낸 운두령 전투의 제 3사단 ( 1951 년 ) ]
이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편된 제 3사단은 이라크침공전시 선봉대의 역할을 맞아 전세계 TV 시청자들에게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진격하는 모습을 사상 최초로 생방송으로 보여주고 신속히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대통령궁을 점령하는 충격과 공포를 실현하였습니다.
제 7사단 ( The US 7th Division )
한번 부대해체 후 현재 州방위군으로 재창설 되어있지만 사단마크가 다를 정도여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전에 참전하였던 제 7사단의 전통을 승계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현재는 현역사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한국과 인연이 가장 많은 부대입니다. 일본 항복 후 1945년 제 7사단은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국에 진주하여 한국과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 한국전 참전 당시 (좌) 와 현재 주방위군으로 재창설된 제 7사단 사단마크 ]
이후 군정의 기반이 되었고 한국정부가 수립 후 이북에 주둔하였던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1948년 12월 31일 한국에서 철군하여 일본 北海島에 재배치되어 극동사령부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국전이 발발합니다. 낙동강 교두보에서 일진일퇴 하던 중 제 7사단은 일본에서 제 10군단 창설될 때 예하로 편제되었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한국에 다시 발을 들여 놓게 됩니다. 이후 계속 한국에 주둔하다가 1971년 미 본토로 철군하였습니다.
[ 미군 중 유일하게 한만국경까지 진출 한 제 7사단 ( 1950 년 혜산진 ) ]
인천을 두 번이나 상륙 하였고, 동해안의 이원에도 상륙을 하여 해병대도 아니면서 한반도의 동과 서에서 모두 상륙전을 섭렵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부대였고 1945년부터 따진다면 제 2사단 다음으로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하였던 부대였습니다.
제 24사단 ( The US 24th Division )
한국전 발발 시 제 24사단은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九州에 주둔 중이었습니다. 예하 제 21연대 1개 대대를 주축으로 한 전투단이 1950 년 7월 2일 한반도로 제일 먼저 투입되는데 이 부대가 바로 Task Force Smith 로, 한국전 최초로 투입된 미군부대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초전부터 참패를 당하며 결국 대전에서 사단장까지 포로가 되며 예하 제 34연대는 유일하게 한국전 중 해체되는 부대로 망신을 당합니다.
[ 미군 중 부산에 최초로 당도한 제 24사단 선도부대 ( 1950년 ) ]
미군전사에는 오산에서 낙동강교두보까지의 후퇴를 defeat after defeat 라고 표현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교두보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의 대열에 서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1952 년 1월 23일 제 40사단과 임무교체 후 일본으로 부대를 옮긴 후 재편과정을 거쳐 1953 년 7월 16일 재차 한반도에 배치되었으나 곧바로 휴전을 맞이합니다. 그 후 1954 년 미 본토로 철수하였고 현재는 해체 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출처] 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6 ]+*d|작성자 au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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