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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3주간 금요일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2011-01-28)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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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는 1225년경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토마스는 18세가 되던 해에 가족의 반대에도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고, 파리와 쾰른에서 대 알베르토 성인의 지도 아래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대하여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겼고,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는 1274년 세상을 떠났으며, 1323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오늘의 전례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에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정성을 들이면 큰 것으로 바뀐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당신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고 믿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과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할 것이며 희망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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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추천성가] : 입당 성가 : 329번 미사시작 예물준비 성가 : 211번 주여 나의 몸과 맘 213번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217번 정성어린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 174번 사랑의 신비 182번 신묘하온 이 영적 504번 우리와 함께 주여 파견 성가 : 202번 구세주의 성심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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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2011-01-28) | 미사 전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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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띠를 둘러 주셨네.
[본기도] :
하느님, 복된 토마스를 통하여 뛰어난 성덕과 학문을 교회의 본보기로 주셨으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깨닫고, 그 삶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
사람들이 빛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의 과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회상시키며,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잘 견디어 나가도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제1독서). 하느님 나라는 마치 땅에 나무가 자라듯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다. 아주 작은 겨자씨도 자라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커진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다(복음).
[제1독서] :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37(36),3-4.5-6.23-24.39-40(◎ 39ㄱ)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네. ○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그분이 주시리라. ◎ ○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 ○ 주님은 사람의 발걸음 지켜 주시며, 그 길을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주님이 그 손을 잡아 주시니,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으리라. ◎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 ◎
[복음환호송] :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 음] : <씨를 뿌려 놓으면,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2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
하느님, 복된 토마스의 축일에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저희도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주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연중 감사송 1 또는 성인 감사송 참조>
[영성체송] :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줄,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
“혼인하고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홀시어머니와 외아들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병 수발까지 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라는 구절을 마치 씨앗처럼 가슴에 심고 묵상하며 어려움을 견디어 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인내하며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제가 하느님 앞에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보낸 때였습니다.” 한 자매의 신앙 고백입니다. 말씀을 씨앗처럼 품고 자신의 삶을 통해 물 주고 가꾸어, 지금은 가족 안에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맺었다는 나눔입니다. 신앙이 없고 말씀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는 심정으로 살아 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주십니다. 다 자란 큰 나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마다 하느님 나라를 열어 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돌밭 같은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우리 안에 심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물 주고 가꾸면, 어느덧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우리 자신이 큰 나무가 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 주님을 향한 희망 그리고 이웃을 품어 주는 사랑의 마음이 자라면 우리가 큰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의 넉넉한 그늘 아래 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자란 우리 큰 마음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로 저희의 힘을 북돋아 주시니, 저희가 복된 토마스의 축일을 지내며 오직 한 분이신 스승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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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3주간 금요일(2011-01-28) | 미사 강론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히브 10,32-39 / 복음 : 마르 4,2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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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1> :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신비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국내 영화가 있습니다. 한석규 심은하라는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잔잔히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꽤 괜찬았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그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런 한석규의 나레이션이 나오죠.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턴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내곁에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저는 이 영화의 이 첫 대사가 너무나 많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좋아했던 조금만 소년이었는데 어느새 그때에는 그렇게 크게 보이던 운동장이 너무나 작게 느켜지는 어른이 되었고 결국은 미래에는 늙고 죽을 것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생각을 다시 한번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뻔한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 하나의 단순함속에서도 왠지 모를 신비감을 느낄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늙어서 죽는 우리의 평범한 일생도 가만히 생각하면 어떻게 이렇게 자랐을까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예들이 많이 있지만 제 경험으로 한가지만 더 들어 볼까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수영을 못해서 물가에 가면 겁도 나고 왠지 모를 열등감도 느끼곤 했었죠. 그러던 제가 사제가 되어서 불어난 체중을 빼기 위해 수영장을 찿았는데 강습을 받는 반에 가서 보니 아줌마들이 너무 많아서 부끄러워 거기 들어가지는 못하고 혼자 물장구를 치면서 엉터리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좌절도 느켰지요. 아 역시 난 안되는가 하면서 말이지요. 그렇지만 큰맘먹고 끊어 놓은 이용권이 아까워서 꾸준히 갔는데 아니 나중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왠만큼의 수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의 신비감과 나도 할수 있다는 자신감은 참 절 행복하게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지만 우리 삶에는 자세히 살펴보면 신비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나 자식을 키우시는 부모님이나 동식물을 정성컷 키우시는 분들의 말들을 들어보면 더욱 그런 것을 많이 느끼시는 걸 느낍니다.
언제가 제가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이 가톨릭의대 교수들과 어떤 자리를 한적 있다고 합니다. 그 때 추기경께서 의대교수님들에게 지금은 하도 세상의 과학과 의학이 발달해서 신체의 비밀을 거의다 풀었겠군요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걱정된 맘으로 물으셨다고 해요.
근데 다행히도 의사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직 우리 신체의 신비는 저희들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이 밝혀낸다고 해도 다 풀리는 것은 아닐겁니다 라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자연과 투쟁하는 사람은 사람들 나름되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키고 과학적으로 이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는 사람도 이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도 우리가 알수 없는 신비스러운 면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하셧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인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이 말씀은 결국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이해 할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이야기 한다고 생각됩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자연의 신비처럼 우리의 신앙이나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져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주위의 수많은 일상에서 신비를 발견하는데 그 신비를 더욱 깊이 체험하면 그 중심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오로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서 누구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튼 우리가 미쳐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길 때 비로서 하느님게 가까이 감을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계신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신비임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것이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신비를 경외하는 맘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깨우쳐 열심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신앙의 맘으로 받아들이고 그 계획에 한몫을 너나 할 것 없이 실천해 나갈 때 하느님 나라는 어느새 우리곁에 다가 올것입니다...............◆
[말씀자료 : 차공명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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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2> : 하느님의 섭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본당에서 경험했던 사소하면서도 놀라운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매일 미사 때,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해주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성체가 가장자리가 부스러져서 있었습니다. 연일 날씨가 춥다보니 성체가 얼고 건조해져서 가장자리가 부딪히면서 이빨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루는 가루대로 쌓이고 신자들에게는 못남이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하니까, 감실에 있는 성체를 다 영해주고 포장을 새로 따서 부스러지지 않은 좋은 것으로 축성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미사였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좀 많아 보인다 속으로 생각하고 영성체를 영해주기 시작하였는데, 성체는 줄어가고 교우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 여섯 사람에게 성체를 쪼개어 나누어 주고 나니 성합에 성체가 딱 하나,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런 세상에나!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바람도 들으시는구나, 이런 하찮은 기대도 들어주시는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도 들어서 처리해 주시니 주님 앞에 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참 경이로운 체험이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섭리하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해가 뜨고 지고 하는 사이에 싹이 터서 자라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지만, 이삭이 패고 낱알이 영글면 수확 때가 된 줄 알고 낫을 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아니,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가?’ 하고서는 도통 알아듣기 어려워합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명확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씨앗를 뿌려 놓으면 씨앗이 언제 자라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저절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고 다가오며,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씨앗이 저절로 자라고,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씨앗이 뿌려지면 반드시 추수가 있듯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신앙인 공동체는 반드시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의 씨앗을 간직하고, 그 씨앗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묵묵히 추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넉넉한 형편 속에서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하루하루 궁핍한 생활 속에서 삶에 지친 채로 불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누가 더 신앙생활을 더 잘하느냐, 어느 쪽이 낫겠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마지막 추수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엮어온 삶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가서 ‘제 삶이 이러쿵저러쿵 해서 신앙생활을 이것밖에 못했습니다’ 라고 변명을 늘어놓아 보아야 농부는 알곡은 알곡대로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낫을 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일이라는 시간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일 뿐이며, 어제는 지나간 시간의 기억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뿐입니다. 따라서 수확할 때는 먼 미래에 다가올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지금, 현재 이 시간이 바로 구원의 시간이요 은총의 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결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총을 때를 외면하고 허비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말씀자료 : 박 혁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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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3> : 겨자씨 신앙
실버스타인이라는 동화작가의 작품 중에 'The Giving Tree'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국말 번역본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변역되어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옛날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언제나 사과나무 그늘에 와서 놀았고, 이 나무는 소년을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때에 맞춰 소년에게 예쁜 꽃을 선사하고, 잘 익은 사과를 선사하고, 소년이 자신의 기둥과 가지에 올라와서 마음껏 노는 것을 늘 행복으로 생각하는 나무였습니다.
소년은 점차 자라면서 도시에 가고 싶었습니다. 나무는 소년과 헤어지긴 싫었지만 자신의 가지에 붙어있던 모든 사과열매를 선물해서 소년의 꿈을 펼 수 있도록, (도시에 가는) 여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과를 한 상자 움켜쥐고 나무 곁을 떠나는 소년의 모습을 섭섭함과 행복한 모습으로 나무는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청년이 된 소년은 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결혼해서 살집을 짓기 위해, 나무의 가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기뻐하고 축복하며 자신의 몸을 모두 떼어 주었습니다. 이제 이 나무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잘 익은 사과열매도 맺을 수 없는 앙상한 기둥만 남은 초라한 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장년이 된 소년이 찾아와 초조하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먼 나라에 가고 싶으니 보트를 만들 수 있도록 나무의 기둥을 요구했습니다. 나무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기둥을 베어서 보트를 만들도록 허락했습니다. 이제 아름답던 가지도 튼튼했던 기둥도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초라하고 못생긴 “밑둥”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의 삶이 행복하기만을 소원했습니다.
오랜 해가 지나고 이제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된 소년이 고향에 돌아와 나무 밑둥 앞에 섰습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상처로 가득 찼고 눈에는 꿈과 희망대신 깊은 슬픔과 회한으로 가득 찼고, 당당했던 어깨는 세월의 상흔에 짓눌려 기백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나무는 사랑했던 소년의 아름답던 모습을 그리며 눈물을 짓고, 이제 내가 아무 것도 줄 수 없지만, 내 평평한 밑둥에서, 당신의 피곤한 몸과 영혼을 쉴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다 말하며 비바람에 단련된 자신의 밑둥을 소년에게 내놓았습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Compassion to self-giving love)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이 나무의 희생적 사랑의 이야기는 비단 어린이를 위한 동화일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삶의 신선함을 주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닌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며 사랑하는 나무의 밑둥까지 보고야마는 소년의 일생과 같은 삶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며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특히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메타포가 가지는 신선한 이미지를 통해 부활신앙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보는 예수는 언제나 「비유」를 써서 하늘의 진리를 표현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시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는 시의 언어요, 머리로 말해지는 언어가 아니라 가슴으로 말해 가슴으로 느껴지는 언어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자라나는 씨, 특별히 겨자씨의 비유”라 알려진 비유의 말씀입니다. 핵심적인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의 상징인 겨자씨! 눈에 가까이 놓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 공중을 나는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겨자씨 한 알, 그 보잘 것 없는 「씨앗」하나가 심겨지고, 자라면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가 되고 그 가지 위에서 공중을 나는 새들조차, 피곤한 날개를 쉬고 가는 평화와 안식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안에 심겨진 (십자가의 씨앗, 부활의 씨앗), 그 조그마한 믿음의 씨앗을 소중하게 가꾸고, 발아시키고, 성장시켜, 큰 나무가 되는 것,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생각합니다!!
그 나무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나무를 말할 것이고, 심지어 나무의 씨앗을 집어먹고 사는 공중의 원수! 저 새들마저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 “숨을 곳이 참으로 많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읽고 싶습니다.
때문에 이 비유의 말씀은 “부활 신앙”의 핵심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신앙은 겨자씨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믿음이지만, 그곳에는 생명의 기적이 담겨 있어서, 그 씨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 성장한 나무는 우주를 수용하는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부활신앙의 씨앗이 가진 성장하는 생명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가톨릭의 신앙은 무엇이고, 장로교의 신앙이 무엇이고, 감리교의 신앙이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때로는 눈앞에 잡을 수 있는 형태로 우리가 믿어야할 “신앙”에 대해 설명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신앙이란 “어떤 굳어진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물어서 해답이 나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란 단어는 결코 명료화될 수 없고, 동사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신앙은 우리 안에 담겨진 “생명의 씨앗”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만큼,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모험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존재와 신앙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결정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고 숙명입니다.
언젠가 '진주'라는 보석이 생성되는 과정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조개 속에 들어오는 모래알이 모두가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조개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카라 불리는 특수한 효소를 생산해서 모래 위에 코팅작업을 시작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길이 있습니다. 모래알을 무시하고 효소를 생산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면, 진주를 만드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결국은 모래 때문에 조개는 병들고 썩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굴조개가 당면하는 두 개의 선택이란, 침입한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여, 진주로 만드느냐? 아니면 그것을 무시해서 고생은 없지만, 마침내 병들고 썩어 가느냐? 의 선택입니다. 저는 이 선택이 모든 생명 있는 삶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신앙, 부활의 신앙은 겨자씨처럼 조그마한 형태로 우리의 생명 속에 들어와 우리의 선택을 묻습니다!
이 신앙을 우리의 생명에 받아들여 큰 나무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성장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신성을 향해 성장해가고 있는 “부활의 씨앗”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영원의 가능성을 실현해 가는 사람이며, 진실로 사람이 되어 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씨앗을 우리 생명 속에 받아들여, 영원을 향한 성장에 동참할 때, 우리 존재 안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마치 아스팔트 위를 뚫고 나오는 들풀의 생명력처럼, 죽은 가지를 뚫고 몽우리를 피우는 봄 잎파리 처럼,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마치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이 비추이는 것처럼, 부활의 신앙, 겨자씨가 들어오면 우리 속 안에서 무엇인가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의 심장을 고동치게 합니다.
이것이 곧 부활신앙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주삼라만상의 맥박과 함께 숨쉬는 놀라운 축복의 발견! 이것이 부활의 노래요, 환희라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삶의 축복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비유 속에 담긴, 큰 나무의 포용성, 수용의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볼 수 있는 인간 예수의 인격은 “큰 나무의 인격”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전혀 강요하지 않으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서,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으로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의 인격!―열매와 가지와 기둥까지 다 내어주고 밑둥만 남아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소년의 삶을 위해 소년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로 준비하며, 포용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인격!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의 인격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부활신앙의 종국은, 우리도 예수처럼 큰 나무의 인격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의 큰 나무의 인격을 볼 때마다 참으로 지나온 날의 미움이 부끄럽고, 미안스럽고, 마음 속 깊이 자신도 모르게 다짐했던 “복수심”의 마음도 참으로 후회스럽게 여겨집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파데레우스키(Paderewski)의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가, 자기 딸이 피아노 발표회를 하니 집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선약 때문에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일 사정이 달라져서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어 예고 없이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친구의 어린 딸이 막 한 곡을 끝내고 십여 명의 손님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는 두 번째 곡을 시작하려는 순간 파데레우스키 선생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만 아주 얼어버렸습니다. 억지로 연주를 시작했지만 외웠던 곡도 잊어버리고, 연주는 엉망이 되고, 소녀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파데레우스키 선생은 조용히 소녀 곁에 가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인자하게 속삭였습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는 거야. 틀려도 좋고, 잘 못쳐도 좋으니까, 다시 한번 시작해 보지 않겠니?”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마음에 자신감을 찾아 훌륭하게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인격은 우리들의 삶에 조용히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실수 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라. (You can start all over again!)"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의 인격은 “큰 나무가 자신의 씨앗을 쪼아먹던 공중의 새까지도 수용한다는 것”에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예수의 생명에 어긋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빛보다는 어둠에 속한 실존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허위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의 삶을 수용해 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인격! 저는 이것을 큰 나무의 인격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가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죄와 어둠과 실수가 아니라, 우리의 허약함 가운데서도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며, 새롭게 일어서려 하는, “우리의 삶”을 수용하고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은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 말합니다.
이제 씨앗을 뿌리고, 꿈을 뿌리고, 사랑을 뿌리는 봄의 계절이 은총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미래의 씨앗, 생명의 씨앗, 부활의 씨앗을 소중하게 여러분의 가슴속에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 씨앗이 생명의 약동으로 자라나길 기도하며, 가꾸며,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 씨앗이 자라 가지를 내고 큰 줄기를 뻗어 우주를 포용하는 큰 나무가 되어, 삶에 지친 모든 영혼들을 포용하는 큰 그늘을 풍성하게 이루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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