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이사야 49:15
제목 : 외로우십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오늘은 제가 지난 주에 이어서 방문해 주신 여러분들과
또,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또 한 가지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은 교회 사무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불쑥 어떤 분이 찾아오셨어요. 얼굴을 뵈니까 안면에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리에 앉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저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어요.
제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저기에다가 제가 병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 때에 저와 저의 가족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냐고 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써 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갑자기 명함 크기의 종이를 내밀면서 그런 질문을 해서 처음에는 좀 황당했지요.
그래도 안면이 있는 분이기에,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서 제가 잠시 생각을 했어요.
내가 병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혹은 내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내가 죽었다고 할 때에,
나와 내 가족을 책임져 줄 사람이 있나? 갑자기 탁 생각을 하는데,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그분이 저 명한 크기의 종이를 뒤로 탁 뒤집으면서
그리고는 "제가 목사님 가족을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그랬어요.(생명보험 보험회사 명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초대 받아 오신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병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또, 여러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된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배영만 전도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 분을 철저하게 책임져 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가족을 책임져 줄 사람이 있나요? 갑자기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아마 그게 정상일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관계는 조건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시, 나에게 그토록 잘해주던 사람들이,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힘이 없어지면 나 몰라라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없나요?
우리는 그런 일을 겪으면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또 이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꼭 그런 일을 겪지 않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외로움과 고독을 느낄 때가 있지요.
사업장에서 회사에서 혹은 가정에서 내가 홀로 있는 것도 아닌데,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는데, 다 있는데...
홀로 있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해서 고독에 빠질 때가 간혹 가다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누군가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그 한 사람만 있다면,
우리는 그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 때문에 오는 고통보다도 더 쓰디 쓴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할 때가 간혹 가다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팡세'라는 책에서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팡세는 '인간 모두가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외로운 존재'라고 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인간은 다 외로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스스로가 외롭지 않다고 자부한다고 할지라도
홀로 있는 어느 순간에 가슴 한 켠이 뻥 뚫린 것처럼 마음에 외로움을 느낄 때가 간혹 가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그렇게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림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미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지난 2012년 미국의 뉴욕에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었는데, 그 당시 낙찰 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1356억원,
12년 전에, 그림 작품 하나가 1356억원이었어요. 당시로서는 가장 비싼 그림이었지요.
바로 저 작품입니다. 어디서 한 번쯤은 보셨을 것 같아요. 노르웨이의 한 유명한 작가인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입니다.
뭉크가 이 작품을 그리기 1년 전에 쓴 일기가 있는데,
그 일기를 읽어보면 이 '절규'가 어떤 작품인지 우리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 기분이 우울해졌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죽을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핏덩이처럼 걸려 있는 구름, 검푸른 바다와 협곡, 마을 위에 칼처럼 걸려 있는 구름 너머를 멍하니 쳐다봤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공포를 떨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이 엄청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절규'가 자연 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 뭉크 -
뭉크의 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뭉크는 무언가 숨 막힐 듯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런 그의 심리를 그림에 담아낸 것이 바로 저 '절규'라는 작품입니다.
뭉크는 굉장히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래요. 5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었고, 14살 때 누나가 죽었습니다.
남동생 또한 젊었을 때 죽었고, 여동생은 정신질환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모두가 죽거나 혹은 병들고, 또 뭉크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사랑도 할 수 없었고, 그러니 참 외로웠습니다. 뭉크는 그런 불행한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그렸던 거지요.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유명한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인간의 오묘함, 따뜻한 인간애, 그리고 사랑이 그 주제입니다.
그런데 뭉크의 '절규'는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그리고 있지요.
그림 볼까요.. 저 그림을 보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는
그리고 뭔가 잔뜩 겁을 먹고 공포에 질려 있는 뭉크의 저 '절규'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 속 주인공처럼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크가 그린 저 그림이 여전히 현대인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사랑을 받는다는 거는 이게 뭘까요?
그만큼 현대인들은 여전히 불안과 공포의 절규 속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뭉크의 '절규'는 그동안 절대자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 뭉크의 '절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절대자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어디에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실존적으로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이지요.
◈ 왜 인간은 외로움 때문에 고통을 겪는가?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로움과 고독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살도록 지음 받은 그런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관계를 벗어나면 그러면 이제 불안한 거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신 뒤에, 보시기에,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그랬어요.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떼서 하와를 만드셨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 '갈빗대'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주 단순한 단어입니다.
직역을 하면, '더 사이드'예요, '그 옆'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단어대로 말을 하면, 옆에서 빼냈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가 이렇게 해석을 했어요.
"그러기에 아담은 그 옆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끊임없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 받았다는 거예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함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거지요.
◈ 바스티유 감옥에서 외로이 죽어간 한 죄수 이야기
프랑스 파리의 동편에 위치한 중세시대 요새로 쓰였던 바스티유 감옥이 있습니다.
'바스티유' - 유명한 감옥인데, 한 죄수가 어둠침침한 감옥에 독방에 갇혔어요.
실화인데, 오랜 기간 동안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벽을 향해서 말하곤 했지만, 이야기 상대가 없이 혼자서 계속 말한다는 것도 참 고통스러웠지요.
그는 혼자 있는 외로움, 죽음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서서히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있던 감옥 앞에 거미 한 마리가 들어와서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죄수는 그 거미와 친근하게 되었고, 자기 생명처럼 그 거미를 애지중지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죄수는 움직이는 거미를 보면서 꿈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거미지만, 미물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 거미에게 자꾸 말을 걸고 대화를 하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고독했으니까, 너무 외로웠으니까, 그 거미하고 대화하는 것이 그에게 유일한 소망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루하루 그의 유일한 낙은 거미가 집을 만드는 것과
벌레 혹은 파리가 걸리면, 그 거미가 그걸 잡아먹는 것을 보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거미는 죄수의 친구나 다름없는 그런 소중한 존재가 된 거지요.
그렇게 죄수는 거미와 대화하면서,(사실은 대화는 아니지요.)
거미가 이제 움직이니까, 살아있는 움직이는 것이 있으니까, 이제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지내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간수가 독방을 이렇게 지나가다가 그 죄수가 거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러고는 그 거미를 즉시 그 자리에서 밟아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러고 나서 이 죄수가 시름 시름 앓아 누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죄수도 죽고 말았습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실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뭔가요?
외로움과 고독은 이렇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랑의 관계 맺음이 없이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미 뭉크의 '절규'에서 말씀드렸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남으로 외로움과 고독 속에 방치된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비로소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가시나무' -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씨가 작사작곡한 노래인데, 가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우리 한번 들어 볼까요...
그는, 자기 마음 속이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다'라고 탄식합니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덕규씨는 '가시나무'에서 자기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과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바람만 불면 외롭고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다고 고백하는데, 사실 이게 하덕규 씨의 인생이었어요.
그는 참 불행한 삶을 살았어요. 그의 부모님은 그가 어렸을 적에 이혼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로 그는 부모님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고독감과 외로움 속에 지내게 되었지요.
힘든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기에 그는 술과 담배로 허전한 마음을 채웠습니다.
심지어는 본드에까지 손을 댔지요, 본드에 취하면 몽롱한 상태에서 그 외로움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드에서 깨어날 때면, 깨질 듯이 아픈 머리와 지독한 외로움이 또 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정말 힘들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 시절,
술과 담배, 본드보다 그에게 한 가지 유일하게 위로가 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그는 커피 한 잔만 시키면 하루 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다방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DJ가 생전 처음 듣는 음악을 들려 주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 내 친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신 주...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찬송가 88장의 가사입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날 안 버려"라는 가사가 그의 마음에 파고 들었습니다.
"뭐! 내 부모도 날 버렸는데, 세상이 날 버렸는데, 나를 안 버린다고!"
하덕규 씨는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그 예수가 누구길래, 부모도 버린 날 버리지 않는다는 것일까?"
알아보고 싶었어요. 교회를 갑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온 세상이 날 버려도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해서 소망으로, 외로움에서 기쁨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 시간 여러분들 가운데 정말 외로움에 지쳐있는 분 있습니까?
때로는 소리내어 흐느끼고 싶은 때가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무엇으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 어떤 사람도 사실은 우리의 위로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외롭고 고독하기에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겉은 멀쩡하고, 행복해 보이고, 돈도 많아 보이고, 명예도 있어 보이고...
아니요.. 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깊숙이 들어가 보면, 외로움과 고독이 있어요. 탄식하고 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줍니까?
그런데, 여기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이사야 49장 15절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만,
때로는 전쟁과 같은 아주 극한 상황 속에서는 부모도 자식을 포기할 때가 있어요.
하덕규씨처럼, 부모가 이혼하고 애를 버린다고요. 그런 경우가 사실은 비일비재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기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온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손가락질 한다고 할지라도,
나를 받아주지 않고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중요한 인생의 과정에서 실패했어도
오늘 우리가 사실 배영만 전도사님의 간증을 들었잖아요..
"정말 비참하게 태어났고, 아무도 그를 도와줄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의 삶에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그런 섭리가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안고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심지어는 나를 아주 내 부모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버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위기상담 상담 전문가인 정태기 박사님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쓴 책 중에 이런 책이 있는데, 한 번 읽어보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 책에 보면, 정 박사님이 한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경험한 자기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때 기도도 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에 힘들어하다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는데, 이해가 안 되고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하루는 무작정 한센병 환자들, 나환자들이 살고 있는 소록도를 향해 내려갔습니다.
마침 소록도에 도착해 보니까, 교회에서 수요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그래요.
예배가 끝나고 이제 기도 시간에 되어서 각자 알아서 통성 기도를 시작했는데,
정 박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서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목구멍으로 나오질 않았대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정박사님의 귀를 파고들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제가 어찌하면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큰 은혜에 제가 어떻게 하면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 박사님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은혜를 저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나?
자기는 기도가 안 되니까, 눈을 뜨고 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박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거기에는 60이 훨씬 넘은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이 다 빠져버리고, 그리고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 아래가 붙어버린 눈, 그런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냐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어요.
손목 뿐인 손바닥, 손가락은 다 썩어서 문드러지고,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터져라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있었어요.
감사를 하고 있었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그 모습을 보는데, 정태기 박사는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답니다.
그리고 그 안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막 울면서 기도합니다. 한참 동안 정 박사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마침내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에 눈을 떠보니까, 아까 그 할아버지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겁니까?"
정 박사님이 보기에, 그의 모습은 뭐 한센병으로 완전히 일그러지고 형편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감사가, 어떻게 저렇게 감사할 수 있냐 말예요.. 이해가 안 됐던 거지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십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정박사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내가 나병에 걸리니까,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친구들도 다 나를 떠나갔지..
그런데 말이야~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이 소록도까지 나와 함께 계신 분이 있어.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참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정 박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가 같이 오신 거예요?"
"아니, 아니야~ 할머니도 오지 않았어.."
"그러면, 누가...?"
"예수님이 오셨어.. 예수님이 함께 오셨어."
할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 나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 주님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아내도, 자식들도, 친구들도 다 버리고 떠난 이 할아버지를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들을 만나시고자 오래 전부터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까 배영만 전도사님이 얘기했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 시간 여러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덕규 씨처럼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신다면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오셔서 여러분과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억눌린 마음을 자유롭게 하시고, 여러분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따뜻한 손으로 우리 주님이 어루만져 주실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이 할아버지처럼 망가져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품에 안아주실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그 주님을 만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외로움에서 자유함과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 잠시 눈을 감고, 우리 함께 결단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다 눈을 감으세요.. 이 시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시고, 하나님이 왜 오늘 나를 여기까지 초청해 주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난 주에 오셨고, 또 오늘 처음 우리 교회에 오신 VIP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 있는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 안에 안아 주시려고
지금 당신의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지금 두드리고 계십니다.
외로움과 고독감에 떨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와 좌정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