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 제작 경주읍내전도
동편의 솟은 작은 산이 고성이고 독산(독뫼)라고도 한다.
논호수(황성공원 숲)가 삼국유사 김현감호에 등장하는 논호림
호원사터는 고성 남쪽에 있다.
여제단 자리는 호림정 궁터가 되었다.
강원도 인제의 복원된 여제단
경주읍성 남문-징례문
복원중인 경주읍성 동문-망일문
경주읍성 동문 부근의 옛성벽
경주읍성터에서 나온 주춧돌
2018년 5월 12일에 시행하는
경주교육지원청 주관 초중고생 교사 학부모
제1차 경주 향토 문화 답사(황성공원) 자료 수집을 위하여
3월 28일 오후 늦게 유명준, 차재환 선생님의 안내로 답사하고
지난 주 토, 일요일, 그리고 오늘 황성공원을 답사하였습니다.
황성공원에는
호원사터, 논호림, 호림정(안압지 임해정, 계파 최윤의 호림정 편액),
독산(고성), 김유신 동상(박정희 글씨), 신라충신 김후직묘,
무의공 박의장 동도 수복비, 임진왜란 문천(반월성)회맹비,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효자 남득온 비, 대한제국 진위대 장교와 관찰사 및 부윤들의 많은 선정비들,
박목월 노래비, 김동리 발자취비, 이경록 시비,
고려의 죽림칠현에 들어가는 문장가 시인인 복양선생 오세재비,
애국지사 일성 조인좌 선생비,
한국전쟁 충혼탑, 한국전쟁 및 월남전 참전 용사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보도연맹, 군인 경찰의 민간인 대량학살) 위령탑,
타임캡슐 등의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체육시설과 기념물들, 도로가 무분별하게 공원에 들어서서
황성공원의 동식물 생태계가 정말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점입니다.
황성공원의 숲은 논호수(삼국유사 김현과 호랑이 아가씨 설화),
고성수, 고양수 등으로도 불린
숲으로 경주의 북방의 바람을 막아주며
경주의 아늑한 기운을 보존하는 기능으로 경주의 풍수상의 허결한 점을
보완한 한국 최대 규모의 비보림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경주의 도시 풍치림으로 보존하여야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경주 신구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도시 공원으로 역사도시 경주의 소중한 공간으로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계림, 천경림, 신유림, 율림, 오리숲, 경기전 부근의 비보림 등
고도 경주와 숲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동편의 임정수, 서편 강변의 버드나무숲과 더불어
동물의 생태 이동로이기도 하였습니다.
진평왕의 사냥과 충신 김후직의 무덤,
원성왕 때의 김현과 호랑이 아가씨의 비련과 호원사터,
화랑의 무예 수련터와 이 숲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주변의 임정숲, 류림도 파괴되고 없었습니다.
또한 호원사터에 안내 간판 하나없이 버려져 있는 점이었습니다.
황성공원과 관련되는
경주읍성, 동경관 의풍루, 용담정, 수운선생 생가, 수운선생 태묘,
김동리, 박목월생가, 김유신 장군묘 등 경주의 다른 지역도 답사하였습니다.
무의공 박의장 부윤의 임진왜란 경주성 수복비의
비문은 글자의 붉은 칠이 벗겨져 비문이 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비문의 찬자인 이휘령의 문집을 검색하여 비문을 찾아서
교무실에서 쉬는 시간에 틈틈이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비문에 등장하는 최진립 장군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7대조이고,
이의온은 회재 선생의 손자로 2017년 12월 포항 신광면 지역 답사 때
우각리의 사의정이 이의온이 전쟁 뒤에 은거한 정자였습니다.
이의온, 김득복은 무의공의 추천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참모로
활약하였고,
황희안은 불국사에 진을 친 의병장인데 이의온이 황희안에게 보낸
간찰이 전하고 있습니다.
명나라 경리사 양호 추모비는 서울 명지대학교 교정에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 앞, 안동 등에는 지금도 명나라 군인들을 위하여 세운
관운장 사당이 있습니다.
2014년 1월 중국 중원(화북) 지역 답사 때
관운장의 무덤이 있는 관제사당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관운장은 중국인에게 재물을 주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고,
중국의 사찰에는 수호신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2월에 간 타이 방콕 가족여행 중
중국 명나라의 도자기를 탑의 표면에 박아 넣은
새벽사원에도 관운장 석상을 볼 수가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정의번은 영천의 의병장 호수 정세아 선생의 아드님입니다.
임진왜란 중 영천성을 처음으로 수복하고 사기가 오른 의병들이 두번째로
경주성 수복 전투를 벌였습니다.
정세아, 정의번 부자도 경주성 서편 전투에 참전했는데
전쟁 뒤에 아버지 정세아를 구출하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운
정의번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 정세아가 아들의 옷과 갓으로
초혼을 하고 선비들이 보내온 애도시를 시신 대신 관에 넣어
아들의 장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의번의 이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합니다.
시총 아래에는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죽은 정의번의 종 억수의 무덤이 있습니다.
억수는 정의번의 만류에도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싸우다 죽는 것이 도리라면서
정의번과 함께 순절한 충노였습니다.
지금도 영천의 오천 정씨 문중에서는 충노 억수의 무덤에 제향을 드린다고 합니다.
언제 인연이 되면 영천성 호연정, 서세루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 효자비부터
선원리 철불,
하천 시총, 용계리 이맹전 사당,
충효리 산남의진,
입암28경과 입암서원을
안내하여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일본놈들이 잔혹하게도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가서 만든 무덤이 일본에 있습니다만
일본놈들의 이런 지독히도 야만적인 행위에 비하면
당대 조선이 얼마나 인문이 발달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경주에 충의의 선비들이 많아서 경상좌도의 요충지이고
동쪽의 도읍, 동도 경주성을 수복하고 지켜낸 것은
옥산서원에 배향된 대유 회재 이언적 선생의 교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주부윤의 갑옷과 투구-무의공 박의장 부윤도 임란때 이란 전투복을 입었을 것이다.
비격진천뢰-대완구 포로 쏜 시한폭탄
구멍이 세 개인 삼안총
1882년 부윤 정현석의 글씨
동경관의 서헌인 의풍루
무의공의 동도복성비도 본래 의풍루 부근에 있었다.
박무의공수복동도비각
제가 카메라의 초점을 잡지 않고 촬영해 사진이 엉망입니다.
비석 받침이 탑의 지붕돌을, 기둥의 주출돌 하나는 맷돌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예를 배운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되어 서예법첩을 보고 습자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 비석 제액의 글씨가 대단히 잘 쓴 것임을 알겠습니다.
서예를 익히면서 문화유산 답사 때 거의 만나게 되는 편액, 현판, 금석문 등의
글씨를 보는 눈이 생겨서 문화유산을 더욱 깊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동기가 부여되어 좋습니다.
비석의 맨 위에 있는 전서체 글자는
'有明朝鮮國' 입니다.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명을 사대하였기 때문입니다.
'明'에 '有'자를 붙여 '有明'이라 한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행입니다.
朴武毅公東都復城碑銘 幷序
무의공 박의장 경주성 수복 비명 및 서문
粤執徐作噩之難。吾嶺先受兵。慶乃嶺之關防而賊路之衝。此城不守。前去長江大嶺。不足恃也。于時朴武毅公以大尹。收復安集。屹然爲全嶺保障。州人士至今追思公不已。將勒石以垂功德于後。屬不佞記其事。
아! 임진년(1592), 정유년(1597)의 왜란에 우리 영남이 먼저 병란을 당했다. 경주는 곧 영남의 방어 관문이어서 왜적이 들어오는 요충지이었다. 이 경주성을 지키지 않으면 도성 앞에 큰 강과 큰 고개가 있다 하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 무의공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부윤으로서 성을 되찾고 백성을 평안케 하셨으니 영남을 지키는데 공이 우뚝하시어 경주 사람들이 오늘에도 공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비석을 세워 공덕을 후세에 보이고자 하여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按公務安人也。諱毅長。字士剛。號淸愼齋。少從惟一齋金公學。旣博通經史。旁治武藝。弱冠。中 萬曆別科。 宣廟辛卯。 除本州判官。
살피자니 공은 본관이 무안(務安)이고 이름은 의장(毅長)이며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청신재(淸愼齋)인데, 어려서 유일재 김공(金彦璣, 1520-1588)에게 배워 유교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한편으로 무예를 닦았다. 약관의 나이에 만력 연간(선조10년, 1577)의 무과 별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신묘년(1591)에 경주부의 판관(判官: 큰 고을의 수령을 보좌하여 주로 잡다한 소송 사건의 재판을 담당한 종5품 외관직)으로 제수되었다.
翌年。倭大擧入冦。釜山僉使鄭橃。東萊府使宋象贒死。公曰。此爲國一死所也。率部兵從左兵馬使李珏。將並力往討之。珏懼欲遁去。公忿然罵。遂還本州。府尹尹仁涵見公。握手慟曰。我獨守空城。只待死日。今公至。願戮力。我有巡察營檄。出城去。公與長鬐縣監李守一。爲死守計。忽賊兵至。將士並縋城走。公與守一出迎賊。旣而曰。無益。徒魚肉我士卒。
다음해(1592), 왜병이 대거 침입했는데 부산 첨사 정벌(鄭橃),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贒)이 죽자 공이 말하였다. “이곳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한 번 죽을 곳이다.” 부하 병사를 거느리고 경상좌병마사 이각(李珏)의 휘하에 들어가 힘을 합쳐 왜군을 치러 갔지만 이각이 두려워하며 도망가려고 하였다.
공이 분노하며 그를 꾸짖고는 경주로 돌아오자 부윤 윤임함(尹仁涵)이 공을 보고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였다. “나 홀로 빈 성을 지키며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이제 공이 왔으니 바라건대 죽을힘을 다하자. 나는 병영을 순찰하고 격문으로 군사를 모집하겠다. 그대는 성을 나가라.” 공이 장기현감 이수일(李守一)과 성을 사수할 계획을 하였는데 갑자기 적병이 오자 장수와 병사들이 함께 성벽을 타고 나가 달아났다. 공은 이수일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적병을 맞아 싸우고서 말하였다. “이익 될 게 없고 한갓 병졸들만 죽일 뿐이다.”
乃退據府北竹長縣。或勸赴 行在。公曰。守封疆者。當死封疆。勑官吏召募散亡。洞諭大義。軍勢稍振。另擇智勇。設伏要害以遏截之。往永川。約義兵討賊。捷聞。 授公繕工監副正。
이에 경주부 북쪽의 죽장현(竹長縣)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어떤 사람이 국왕이 머무는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갈 것을 권하자 공이 말하였다. “지방 땅을 지키는 자는 마땅히 그곳에서 죽을 뿐이다.” 왕이 임명한 관리들이 흩어져 도망간 사람들을 모집하고 나라를 지켜야 할 대의를 잘 설득하여 군사력이 점차 강해졌다. 따로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을 선별하여 요충지에 매복시켜 적병을 막고 차단시켰다. 영천으로 가서 의병을 결성하고 적병을 쳤는데 공로가 조정에 알려져 공에게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 관직이 제수되었다.
時左兵馬使朴晉代珏至。發十六官兵攻慶州賊。是戰也。左界義兵大將與列邑義兵將。卛所部兵與焉。賊出北門掩後。永川義士崔仁濟,鄭宜藩十七人死。晉遂退陣一舍。公住府近地。多設疑兵。卛驍勇敢死士。日馳突城外。使賊不敢安息。夜放飛擊震天砲。所觸盡死。賊以爲神。乃遁 追擊破之。
당시에 경상좌병마사 박진(朴晉)이 이각을 대신하여 부임했는데, 16고을의 관병을 동원하여 경주성의 적병을 공격하였는데 경주성 수복 전투이다. 경상좌도의 의병 대장과 여러 읍의 의병장들이 부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왜병이 경주성의 북문으로 나가 후방을 막았다. 영천의 의병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등 17명이 전사하고 박진이 마침내 군진을 한 관사로 후퇴시켜 공은 부근에 머물며 허수아비 병사들을 많이 설치하고 날래고 용감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낮에 성 밖으로 치달려가서 적병이 감히 편히 쉬지 못하게 하고, 밤에 비격진천뢰 대포를 쏘아서 건드리는 자는 모두 죽게 하니 적병이 신이하게 여기고서 성 밖으로 도망가니 추격하여 부수었다.
遂入城。掃城堞廨宇。得米四萬七百餘石。招亡賑飢。民歸之日千計。後體察使開府于州。 天將吳惟忠,駱尙志,楊鎬,麻貴。領十萬衆。次第來駐。其支接供應極浩澣。實賴此無缺焉。城旣復。公將兵四出。擊大丘,梁山賊。破永川,慈仁賊。截蔚山,彦陽賊。數與賊戰于府東西克之。與奉事李芳隣。進擊林浪浦賊大破之。前後獲賊首屢千。奪被搶男女牛馬無數。體察使奏聞于 朝。繼有巡察使狀啓。 上嘉其績。特陞通政府尹。 賜表裏。癸巳冬遭故。州民恐遞職。參奉李士謙等三百餘人。訴巡使。上言于 朝。特命起復。
드디어 성에 들어가 성첩과 건물들을 뒤져서 쌀 4만7백여 석을 얻어서 도망 간 사람들을 불러서 굶주린 그들을 먹였다. 돌아오는 백성이 하루에 천명을 헤아렸다. 뒤에 체찰사(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가 경주에 관부를 열자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양호(楊鎬), 마귀(麻貴)가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차례로 와서 주둔하였는데 그 접대와 먹이는 일이 극히 넓고 컸지만 실로 이것에 의존하여 흠이 없었다.
성이 복구되고 공의 장수와 병졸들은 사방으로 출정하여 대구와 양산의 왜적을 치고 영천과 자인의 왜적을 부수고 울산과 언양의 왜적을 잘랐다. 왜적과 여러 차례 경주부의 동서에서 전투를 하여 이겼다. 봉사(奉事) 이방린(李芳隣)과 임랑포(林浪浦: 부산 기장군 임랑리 해안)의 왜적을 쳐부수었다. 앞뒤로 노획한 왜적의 머리가 몇 천이었고 잡힌 남녀와 소와 말을 탈취한 것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체찰사가 조정에 보고하고 이어서 순찰사의 보고도 있었는데 선조 임금이 그 공적을 아름답게 여겨서 통정대부의 부윤으로 특별 승진을 시키고 옷 한 벌을 하사했다.
계사년 겨울에 아버지 상고를 당하여 경주 백성이 공이 떠날 것을 두려워하여 참봉 이사겸(李士謙)등 300여 인이 관찰사에게 상소하고 조정에도 말하여 특명으로 복귀하였다.
丙申。公弟牧使弘長奉使日域。還 啓賊有再猘憂。公益加戰守備。丁酉遇賊。戰于永川倉巖。再戰于本州安康踣之。及 天將衂于蔚山賊。公使金得福領射牌。三戰勝之。 上有旨賜戰馬。陞嘉善。尋陞嘉義。公九年于州。大小五十餘戰。掃淸境土。撫摩瘡殘。以時謁玉山院。有文諭講約五條。蓋公勇於戰伐。惠于鎭撫。旣使流亡者還集。而繼以文敎治之。
병신년에 공의 아우 목사 박홍장(朴弘長)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왜적에게 재침의 우려가 있음을 알렸다. 공이 더욱 싸우고 수비하였다. 정유년에 다시 침입해온 왜적과 영천 창암(倉巖: 영천시 고경면 창암리)에서 싸우고, 경주부의 안강(安康)에서 다시 싸워서 궤멸시켰다. 또한 울산성에서 명나라 장수가 패하자 공이 김득복(金得福)으로 하여금 활 부대를 거느리게 하여 세 번 싸워서 다 이겼다. 임금님이 교지를 내려 군마를 하사하고 가선대부로 관작을 올려주었다.
공이 경주부에서 판관이나 부윤으로 9년 있으며 5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여 경주부 관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부상자를 위로하였다. 또 옥산서원을 배알하였는데 글이 있어서 축약한 5조목(*회재 선생의 원조오잠(元朝五箴)인듯 하다.)을 강론하였다.
대개 공은 왜적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용맹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은혜롭게 하였으니 떠도는 사람을 불러 모아서 가르침으로 다스렸다.
東都古稱多忠義之士。義兵將崔震立。放火于府南。燒殺賊數十百。設伏兵于彦陽。追殺賊以千數。因本府檄。射殺蔚山西生浦賊。從都元帥權慄。擊島山賊。賊丸洞腮。尙勵氣衝殺。 上壯之。 命授官賜弓矢。
동도(東都) 경주는 예부터 충의의 선비가 많다고 하였으니 의병장 최진립(崔震立, 1568-1636)은 경주부의 남쪽에서 불을 질러 왜적 수백 명을 태워 죽이고, 언양에 병사들을 매복시켜서 왜적을 쫓아가 죽인 것이 수천 명이었다. 그래서 경주부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울산 서생포의 왜적을 활로 쏘아 죽였다.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도산(島山: 薄島山, 울산 鶴城)의 왜적을 치다가 왜적의 탄환이 뺨을 뚫고 지나갔지만 오히려 매서운 기세로 적을 쳤다. 선조 임금님이 그를 장하게 여기시어 관직을 제수하고 활과 화살을 내렸다.
前奉事金虎。卛義旅遏賊路。屢戰大捷。獻䤋數千。武科崔奉天,白以昭。戰死于倉巖陣。奉事李葩秀,芬秀。力戰于西門外死之。權復興率家僮。與賊戰于多大浦死之。賊義畏之。不敢逼公。幕府文武。亦皆一時之傑。以李宜溫爲糧餉官。收拾蕩殘。轉漕不絶。孫香爲贊劃士。參决機務。與有戰功。 啓蒙恩典。孫應老崔洛爲掾曹。崔大智爲遮箭士。俱有才器。閑習戎事。衛將金得福,僉使朴春碩,金麟壽,黃希顔,朴春茂,金應忠,朴鳳壽,朴利孫,金允福爲將佐。得其死力。體察使 啓曰。將士之可用戰陣者。慶州爲上。公 啓略曰。審量賊勢緩急。山川險夷。所向克捷。皆賴此輩云。
전 봉사(奉事) 김호(金虎, 1534-1592)가 의병을 통솔하여 왜적의 길을 막고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는데 바친 머리가 수천 개가 되었다. 무과에 급제한 최봉천(崔奉天), 백이소(白以昭)는 창암 군진에서 전사하였다. 봉사 이파수(李葩秀), 이분수(李芬秀) 형제는 경주성 서문 밖에서 힘써 싸우다 죽었고, 권복흥(權復興)은 집의 노비를 데리고 부산 다대포(多大浦)에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왜적이 의롭고 두렵게 여겨서 감히 공을 핍박하지 못했다.
공의 휘하에 있었던 문관과 무관들 또한 모두가 한 때의 뛰어난 인물들이었는데 이의온(李宜溫)은 군량미 조달하는 양향관(糧餉官)이 되어 부상자들을 거두고 세미의 운송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손향(孫香)은 찬획사(贊劃士)가 되어 정무를 도와 처리하고 전투에도 공이 있어서 임금의 은전을 입었다. 손응로(孫應老), 최락(崔洛)은 아전이었고 최대지(崔大智)는 화살을 막는 사졸이 되었는데 모두가 재능이 있어서 틈나면 무예를 익혔다. 위장(衛將) 김득복, 첨사(僉使) 박춘석(朴春碩), 김인수(金麟壽), 황희안(黃希顔), 박춘무(朴春茂), 김응충(金應忠), 박봉수(朴鳳壽), 박리손(朴利孫), 김윤복(金允福)은 참모들로서 죽을힘을 다하여 공을 도왔다.
체찰사가 조정에 보고하기를 “장수와 사졸을 군영에서 쓰는 것이 경주가 최고다.”고 하였다. 공이 대략을 조정에 보고하며 말했다. “왜적의 형세가 급하고 느린 것, 산천이 험하고 평이한 것을 살피고 헤아려서 향하는 곳마다 이기고 승리한 것은 모두가 이들에게 힘입은 것입니다.”
甲辰。錄公宣武一等勳。己亥。遷星州牧兼防禦使。庚子戊申壬子。三 除左兵馬使。終移水使。盖公以文武兼才。擧空城而禦劇冦。修廢校而申學令。得士民心最深。故 朝家欲使公不離嶺藩。以絶南顧憂也。乙卯。卒于營。 上震悼。遣禮官致祭。壬戌 贈戶曹判書。 正廟甲辰。 贈謚武毅。寧海人立祠于九峯以享之。我東都可無一片石勒功而頌德乎。
갑진년(1604)에 공은 선무공신 일등에 올랐고, 기해년(1599)에 성주목사 겸 방어사로 관직을 옮겼다. 경자년(1600), 무신년(1608), 임자년(1612)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고 끝에는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옮겼다.
대개 공이 문무의 재능을 겸하였기에 빈 성의 인력을 동원하여 왜구를 방어하였고, 무너진 학교를 수리하여 학생을 교육하였다. 사대부와 백성의 마음을 가장 깊이 얻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공을 영남 지역을 떠나지 않도록 하여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의 근심거리를 살피게 하였다.
銘曰。
宣廟知臣。曰汝儒將。夙判于慶。慶我關防。唉時板蕩。海冦猝發。蔚帥欲遁。萊醜莫遏。卷甲返州。賊已滿城。元戎退壘。烈士塡坑。主將誓死。晝突夜薄。乃放大砲。烈火飛擊。賊殪且僵。我城遂復。 王命尹玆。殿爾南服。多士雲委。有米山積。將奏敏功。師 啓整律。矧我東都。大贒攸宅。風敎在人。忠義成俗。雪涕登埤。幾箇英傑。信甲禮櫓。東鏺西撇。公無遽歸。一州肉骨。民蠲晉絲。士挾楚纊。是以有慶。嶺道蔽障。天下不亡。自江淮始。臨陣擊節。體察經理。爲國盡事。君子不功。獨屛大樹。講道雍容。 先王則哲。乃爵崇秩。海士瞻仰。九峰崒嵂。東人曰噫。報公何以。穹然石立。萬山流水。
비명:
선조 임금님의 지우(知遇)를 입은 신하, ‘그대는 선비 장수라’ 하셨네.
일찍이 경주 판관이 되었고, 경주는 우리나라의 국방 요충지였네.
아! 당시 전쟁이 일어나, 왜구가 갑자기 침공해왔네.
울산에서 장수들이 도망하려 하였고, 동래의 왜구를 막지 못했네.
쇠뇌 들고 갑옷 입고서 경주로 돌아오니, 왜적이 성에 가득하였네.
왜적이 성에서 물러났지만, 맹렬한 사졸의 시신이 구덩이를 메웠네.
공은 장수가 되어 죽기를 맹서하고, 낮에는 치고 밤에는 쓸어버렸네.
마침내 대포를 놓아, 비격진천뢰 사나운 불꽃이 일어났네.
왜적은 쓰러지고 넘어져, 우리 경주 성을 드디어 찾았네.
왕명으로 경주의 부윤이 되고, 전하께서 옷 한 벌 내렸네.
많은 의사들 구름처럼 모였고, 쌀은 산더미처럼 쌓였네.
체찰사는 민첩한 공을 아뢰고, 장수는 군율을 가지런함을 보고했네.
하물며 우리 동도 경주는, 큰 유학자(회재 이언적)의 고향이네.
교화가 인민에게 있어서, 충의(忠義)의 풍속이 이루어졌네.
원한을 씻는 눈물을 흘리며 언덕에 오르니, 영웅이 얼마이던가.
신임하는 장졸과 예의 바른 참모들이, 동에서 왜적을 베고 서에서 쳤네.
공이 급히 돌아가지 못하고, 한 고을이 가족이 되었네.
백성은 은덕을 입고, 선비들은 위로를 받았네.
이렇게 하여 경주가 있게 되고, 영남이 방어되었네.
천하가 망하지 않음은, 강회(江淮, 경주)에서 비롯되었네.
군진에서 치고 절의를 다하였으니, 체찰사와 경리사가 공로를 보고하였네.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을 다 하였고, 군자는 공훈으로 여기지 않았네.
큰 나무 아래로 물러나, 도를 기쁘게 강론하였네.
선왕(先王, 선조)이 어지시어, 나라에서 관작을 높여주었네.
영해(寧海)의 선비들이 우러러서, 구봉(九峯)사당에서 제향을 드렸네.
경주 사람들이 말하였네, “아, 공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하늘 높이 치솟은 빗돌, 일만의 산과 흐르는 물이 다하도록 영원하소서!
(김희준 옮김)
-이휘령(李彙寜), 고계문집(古溪文集) 권5
*이휘령(1788-1861):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 아버지는 승순(承淳)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종가의 지순(志淳)에게 입양하여 이황(李滉)의 10세 종손이 되었다.
*원조오잠: 이언적은 27세 되던 해 정월 초하루에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바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피력하면서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지었는데, 〈외천잠(畏天箴)〉, 〈양심잠(養心箴)〉, 〈경신잠(敬身箴)〉, 〈개과잠(改過箴)〉, 〈독지잠(篤志箴)〉으로 이루어져 있다. 《晦齋先生全集 卷6》
*구봉서원: 1665년(현종 6) 당시 영해부(寧海府)의 부사(府使)였던 농은(聾隱) 백동현(白東賢)이 발의하여 이듬해인 1666년(현종 7)에 영해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중구봉(重九峰) 아래에 건립하고,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과 목사공(牧使公) 박홍장(朴弘長)을 배향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정충묘(貞忠廟)와 구봉사(九峰祠)
*영해의 무안 박씨 1861년 정월 영해 원구리에서 돌을 다듬어 각자까지 마친 뒤 바닷길과 형산강 수로를 따라 운반하여 경주에 도착하였다. 지역 문중 간의 의견 차이로 우여곡절 끝에 1862년 9월 하순 경주부 관아 의풍루(동경관 서편 건물) 앞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옮길 때 기록을 보면 구만점(九萬店)-광제원-지북리(枝北里)-고양수(高陽藪: 황성공원)를 지나 읍성으로 들어오는 경로가 적혀 있다.(조철제)
1915년 일제에 의하여 황오리로 옮겨 세움
1959년 도시 계획으로 인왕리로 옮겨 세움
1981년 폭풍으로 비각 무너짐
2001년 황성공원으로 옮겨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