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면 소재지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3km 정도 가면 만사리 마을이 나온다. 고분군은 만사리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산의 남향 사면 중상단부에 걸쳐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외견상 확인되는 것은 2기인데 하나는 10°편서하여 남쪽으로 장축을 두고 있다. 이 고분은 횡단면 4각에 평천정을 하고 있으며, 축조방식은 자연 할석을 여러매 세워서 동벽을 구축한 후에 커다란 할석으로 북벽을 쌓고 있으며 남벽에는 연도를 만들었다. 연도는 동편연도로 길이가 75cm이며 연도의 입구부는 나팔 모양으로 밖으로 퍼져 있다. 커다란 대판석을 올려 천정을 삼았는데 도굴로 인하여 동쪽의 덮개돌이 들려져 있고, 그 곳으로 토사가 흘러 내려 내부가 일부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 현재 바닥의 상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고분의 대략적인 규모는 동서벽의 길이가 240cm, 남북벽의 길이가 100cm, 현실의 높이가 75cm이며, 도굴로 인하여 파괴된 고분으로 수습되는 유물은 없다. 또 하나의 고분은 상술한 고분에서 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15°편서하여 남쪽으로 장축을 두고 있다. 고분의 덮개돌이 들려져 있어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데, 축조 방법은 커다란 판석을 비교적 반듯하게 다듬어 묘실을 축조한 것으로 횡단면 4각에 평천정 구조를 하고 있다. 연도는 동편연도이며 덮개돌이 유실된 부분으로 토사가 유실되어 고분의 정확한 규모나 바닥 상태 등은 확인이 어렵다. 이 고분도 파괴된 고분으로 수습되는 유물은 없다. 이 2기의 고분 외에도 다수의 고분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대부분 도굴과 주민들의 석재 채취와 토사의 유실 등으로 파괴, 매몰되어 외견상 더 이상의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분의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3기의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지정사항 지정종목기타 유형 고분/고분
지역 대한민국/충남/예산군 시대 고대국가/백제
지역상세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만사리 소장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산 불원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불원리 하원 마을의 입구 동쪽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산의 하단부는 약 1000여 평에 걸쳐 밭과 비닐 하우스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밭의 대부분에서 와편, 자기편, 토기편들이 산견되고 있는데 그 외에 사지로 추정할 만한 유구나 유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주민들이 전언에 의하면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망했다고 전하나 오랜 세월 밭으로 경작되는 동안 여러차례 복토되어 사지의 형태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개간된 밭 대부분에서 분청편, 백자편, 와편, 토기편들이 잘게 부서져 수습되고 있으며, 그 외의 건물의 존재를 추정할 만한 석축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예산 여래미리 사지(안곡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 우정리 마을의 동쪽에 있는 여래미 저수지의 동쪽 끝 산의 남향 사면 구릉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산사면을 깎아서 경작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원래 사지는 이미 파괴, 매몰된 상태이다. 주민의 전언과 지형으로 미루어 보아 사역은 약 600여 평으로 두단에 걸쳐서 조영되었던 큰 규모의 사찰로 추정된다. 주변에서는 다수의 와편이 수습되고 있다. 그 중에는 파손되었지만 ‘청(靑)...’이라고 양각되어 있는 명문 와편도 있다. 와편은 회청색의 경질로 기벽이 두껍고 파상문, 선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사지의 동쪽과 남쪽의 맞은편 산에 각각 약 50여 평의 암자터가
확인되고 있다.
예산 신양면 가지리 고분군
예산군 신양면 가지리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3.5km 가면 동쪽으로 가지리 입구가 나온다. 이 입구에서 800여 m 들어가면 가지리 자은동 마을이 나오는데 고분군은 자은동 마을의 북쪽에 있는 구릉의 남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동남에서 서쪽으로 낮은 구릉이 길게 이어져 있는 곳으로 구릉은 잡목과 소림이 우거져 있으나 일부는 밭으로 개간되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하는 구릉은 밭으로 개간된 부분으로 사면의 하단부에 고분의 덮개돌이 노출되어 외견되고 있으며, 구릉의 중, 상단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고분은 대개 남쪽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는데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연도를 가진 대형의 고분들이었다고 하며, 넓은 할석을 겹겹이 쌓아 벽을 구축하고 대판석으로 덮개돌을 삼은 형식의 고분이었다고 한다. 다수의 고분이 존재했었다고 전하나 파괴, 매몰되어 외견상으로 확실한 유구를 파악하기 어렵다. 주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없다.
예산 불원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불원리 하원 마을의 입구 동쪽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산의 하단부는 약 1000여 평에 걸쳐 밭과 비닐 하우스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밭의 대부분에서 와편, 자기편, 토기편들이 산견되고 있는데 그 외에 사지로 추정할 만한 유구나 유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주민들이 전언에 의하면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망했다고 전하나 오랜 세월 밭으로 경작되는 동안 여러차례 복토되어 사지의 형태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개간된 밭 대부분에서 분청편, 백자편, 와편, 토기편들이 잘게 부서져 수습되고 있으며, 그 외의 건물의 존재를 추정할 만한 석축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예산 연리 고인돌
예산군 신양면 연리 마을의 송림 속에 고인돌이 위치한다. 고인돌의 동쪽으로는 낮은 야산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커다란 내가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고인돌은 5기가 남아 있다. 가장 큰 고인돌은 석재의 장축이 320cm이고 단축이 240cm로, 대체로 210∼250cm 크기의 부정형의 괴석들이 확인되고 있다. 동쪽으로 창녕성씨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 고인돌의 일부가 파괴, 매몰되어 있으며, 외견상으로는 정확한 고인돌의 형태나 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연리 고인돌의 남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만사리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전체적으로 낮은 야산과 평야, 냇물이 흐르고 있어 환경이 좋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예산 죽천리 용왕동 고분군
신양면 죽천리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3.5km 가다가 고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의 남향 사면 중단부에 걸쳐 고분군이 분포한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가 급한 깊은 계곡으로 토사의 유실이 심한 곳이며, 현재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고분이 분포하는 곳은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구릉의 동향부로 대부분 파괴되어 있는 상태이며, 민묘 조성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기 노출되어 있다. 주변에 산재하는 고분용 석재로 추정할 때 벽돌 모양으로 대충 다듬은 돌로 벽을 구축하고 대판석으로 덮개돌을 삼은 형식의 고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고분의 주변에서 확인되는 유구나 유물은 없으며 고분군의 전방으로는 평탄한 지형이며 현재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예산 대덕리 고분
신양면 대덕리에서 3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약 3km 정도 가면 신양면 대덕리 마을이 나온다. 32번 국도의 북쪽으로 도로에 근접하여 말골 마을이 있는데 고분은 이 마을의 북쪽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중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 주민의 전언과 지형으로 미루어 볼 때 다수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되는 유구는 이미 도굴되어 파괴, 매몰된 고분 1기 뿐이다. 노출된 고분의 형태는 소형의 석실묘로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 고분은 약 1m 정도 깊이로 파여져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토사의 유실로 매몰되었다고 하며, 현재 주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전혀 없다. 고분의 주위에는 약 10년생의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에는 2기의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예산 귀곡리 성희옹사
예산군 성희옹사는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읍나무골 마을 뒤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자리한다. 이 사당은 중종반정 때의 공신인 성희옹의 사당으로 1943년에 증축하고 1990년에 보수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사당의 전면에는 솟을삼문이 있는데 중앙 상단부에는 ‘인정문(仁正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인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영세제’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정, 측면 3칸에 전면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양식을 하고 있고, 익공계통의 가구양식을 취하고 있다. 어칸 상부에 영세제라고 묵서된 현판이 걸려 있다. 영세제의 뒷쪽으로 내문을 지나면 ‘창의사(昌義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사당은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홑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취했으며 굴도리식 가구 양식을 하고 있다.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예산 귀곡리 정인기 신도비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4km 정도 가서 신양교에서 32번 도로가 갈라지는 도로 옆 귀곡리 수조리 마을 앞에 신도비가 위치한다. 정인기는 정조 때에 태어나 순조 17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길주목사를 지냈다. 비는 화강석재로 된 장방형 대좌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옥개형 이수를 올려 놓았으며, 비신과 이수도 화강석재로 되어 있다. 비의 총고는 242cm이고 대좌의 규모는 112cm×94cm×40cm, 비신은 70cm×55cm×165cm의 크기이다. 비신의 4면에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신도비는 광무 10년(1906)에 세워졌다.
예산 귀곡리 시목동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시목동 마을 동쪽으로 깊숙히 형성된 계곡의 완만한 남향 사면 구릉 중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사지는 현재 밭과 집터로 개간, 변형되어 있는데 약 100여 평의 대지에 걸쳐서 사역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가 없어서 사지의 가람을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산사면을 깍아서 완만한 대지를 조성한 후에 1단의 기단 위에 남향으로 사찰을 조영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곳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며, 무문과 선문의 와편도 수습되고 있다. 사지의 전방으로는 개간된 논과 밭이 경작되고 있다.
예산 만사리 고인돌
고인돌은 예산군 신양면 만사리 마을 입구에 있는 소나무 숲과 마을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확인되는 고인돌은 3기로, 하나는 마을의 안쪽에 개설된 농업용 수로의 낮은 둑과 밭의 경계부분에 파괴된 채 남아있다. 이 고인돌의 주변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으며, 밭으로 개간하면서 파괴되고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변이 95cm, 단변이 71cm로, 지석으로 이용되었던 석재로 추정된다. 고인돌의 주변에서는 무문토기 재질의 어망추가 수습되었다. 다른 2기의 고인돌은 마을의 중심부에서 북서쪽 마을 입구변의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 하나는 하천과 소나무 숲 사이에 걸쳐 있으며,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장변이 300cm, 단변이 210cm인 돌이 확인되는데 개석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하나는 북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장변이 170cm이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3기의 고인돌과 함께 4개의 큰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을 하고 있어서‘칠성바위’라 불려졌었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이 3기의 고인돌 외에 적어도 4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농지의 개간이나 민묘, 민가의 조성 등으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예산 서계양리 최씨 정문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919번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서 북쪽으로 다시 1km 들어가면 서계양리 두련리 마을이 자리한다. 정문은 이 마을 입구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최필현은 편모 봉양을 지극히 하였고, 사망 후에도 3년을 시묘하여 고종 12년 어명에 의하여 명정되었다. 정문은 정, 측면 2칸의 익공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으며, 양 옆의 박공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했다. 4각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하방 아래는 고멕이를 하였으며, 정·좌·우면에는 홍살을 올렸다. 창방 위에는 각 칸마다 5개씩의 소로를 올려 놓았으며 중방 위에는 메뚜기 머리 모양을 한 장식을 올려 놓았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2개의 현액이 걸려 있으며, 뒷면 벽의 좌측 상단에는 언문으로 된 정려기가 걸려 있는데 퇴락하여 알아보기가 어렵다.
예산 서계양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리 두려리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작은 농로를 따라 500여 m 들어간 곳에 있는 낮은 구릉의 하단부에 남향하여 위치한다. 사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 민가가 1채 들어서 있으며, 사지를 추정할 만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주민의 전언에 의하여 이 곳에 민가가 조성되기 전에 사지의 흔적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수습되는 유물은 회청색의 경질 와편으로 무문이 다수이며 파상문도 일부 보이고 있다.
예산 신양리 조충수 묘
32번 국도변에 있는 신양면 신양 중학교 뒷쪽에 오리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이 입구의 북쪽으로 야산의 남향 사면 상단부에 조충수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충수는 초명이 윤충이고 생원 및 진사로 영의정과 한양부원군을 증직받았던 인물이다. 산의 상단부에 돌을 쌓거나 산사면을 삭토하여 100여 평의 대지를 조성한 후에 2기의 묘를 안치했는데 두기의 묘 사이에는 화강석재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대좌, 비신.이수 2개의 별석으로 되어있다. 대좌의 4면은 안상이 음각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우며, 상단에는 복련이 음각되어 있다. 비석의 총고는 222cm로 대좌가 110cm×63cm×45cm이고 비신은 73cm×23cm×123cm이며, 이수는 옥개형이다. 묘의 전면에는 석상이 놓여 있으며 석상의 좌우에는 높이 1m 정도의 홍패를 든 문인석이 석상을 사이로 마주보고 서 있다. 또 묘역의 전면 좌우에도 높이 2m 정도의 홍패를 든 문인석과 석주가 각각 1기씩 세워져 있다.
예산 신양리 조익 사당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백석 마을에 조익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익(1579∼1655)의 자는 비경이고 호는 포저 또는 존재로 본은 풍양이다. 선조 25년(1602) 문과급제 후 벼슬이 좌의정에 오르고 성리학자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이이, 이황의 문묘배향이 허락되지 않자 탄핵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 되었고 이듬해 다시 웅천 현감이 되었다. 1613년에 폐모의 의논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신창현 도고산 밑에 초가를 짓고 경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맨 먼저 기용되었으며 효종 때 우의정이 되고 이후에 좌의정에 올랐다. 문인화, 묵매도가 유명하며, 문집 15권, 저서 수십 권을 남겼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로 잘 정비되어 있다. 기단은 화강암 석재를 가공하여 낮게 조성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의 가공한 주춧돌을 놓았다. 원주에 공포는 익공 양식이며 겹처마를 갖추고 있다. 사당의 전면 1칸은 퇴칸으로 되어 있으며 양 옆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보호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유물관에는 그의 문집 15권, 용, 학, 인득 각 1책, 심법십이장 등 수십 책이 보존되어 있다. 조익선생의 묘 주변은 문화재자료 제28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포저공의 유서와 그의 아들인 송곡 조복양의 문집이 판각으로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예산 신양리 조익 묘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백석 마을에 조익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사당의 뒷편에 있는 야산의 북향 사면 중하단부에 조익과 그 아들 복양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비는 묘에서 아래로 30여 m 떨어진 산의 하단부에 세워져 있다. 조익은 조선조 효종 때 좌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성리학을 전공하고 효성이 지극한 우국지사였다. 비석에는 전, 후면에는 비문이 음각되어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석의 총고는 250cm로 기단부, 비신, 이수 3개의 별석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부는 110cm×80cm이고 비신은 85cm×44cm×190cm이고 이수는 옥개형이다. 현재 비석의 앞으로는 조익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비석의 좌우로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예산 신양리 조익 신도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백석 마을에 조익선생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사당의 입구 오른쪽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조익의 자는 비경이고 호는 포저 또는 존재로 본은 풍양이다. 문과급제 후 벼슬이 좌의정에 오르고 성리학자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이이, 성혼의 문묘 배향이 허락되지 않자 사직 귀향하였다. 입조 50년에 무택무전이었다. 문인화, 묵매도가 유명하며 신도비의 후면에 그의 묘가 조영되어 있다. 신도비는 125cm×90cm×62cm 크기의 화강석재로 된 기단 위에 71cm×37cm×192cm 크기의 오석의 비신을 올려 놓았으며 그 위에 옥개형의 이수가 올려져 있다. 신도비의 총고는 300cm로 기단부, 비신, 이수 3개의 별석으로 되어 있으며 4면에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비는 후손들에 의해 1927년에 건립되었다.
예산 신양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오리울 마을의 남쪽에 있는 야산의 북향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사지는 오리울 마을에서 하천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기전에 위치한 민가의 뒷편으로 약 50여 평 정도에 걸쳐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사지 내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초석이나 유구등은 외견상 확인할 수 없으나 백자편, 와편 등이 수습되고 있어 사찰이 존재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곳에서 수습되는 와편은 회청색 경질로 무문, 조합문, 파상문 등이 시문되어 있으며 백자편은 회청색에 가까운 투박한 것으로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여진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빈대가 많아서 폐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조영되어 있었던 작은 규모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 신양리 신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리 신리 마을 뒷산의 남향 사면 상단부에 위치한다. 주민들은 이 곳을 예전부터 절터골이라 불러 왔으며 빈대 때문에 망한 절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산사면의 상단부 약 500여 평에 걸쳐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계단을 지어 또 하나의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확실한 유구나 유물은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주민들의 전언과 평탄면 등으로 사지로 추정된다. 사지 내에는 현재 아래 평탄면에 2m×1m 정도의 샘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샘물은 솟아나지 않고 다만 웅덩이처럼 고여 있을 뿐이다.
예산 다박골 와요지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황계리 황계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약 500여 m 들어가 다박골 마을 입구의 북쪽에 있는 낮은 구릉의 남서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현재 요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약 100여 평에 걸쳐서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있어 대부분이 파괴, 매몰된 것으로 보이는데,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 곳에는 화구가 노출된 1기의 와요가 있었다고 하며, 개간 당시 매몰했다고 한다. 또한 요의 주변은 민가가 1채 자리하고 있으며 앞의 대부분이 논으로, 원래의 지형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다. 요로 추정되는 곳 주변에서는 잘게 부서진 와편들이 밭에 폭넓게 산재되어 있는데, 수습되는 와편들은 대부분이 기벽이 두껍고 태토가 고운 것들이다.
예산 황계리 다박골 고분군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서쪽에 있는 ‘신양교’를 건너 919번 도로를 따라 약 4.5km 정도 들어가면 황계리 황계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서 동남쪽으로 ‘황계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약 1km 들어가면 다박골 마을이 나온다. 고분은 이 마을의 남쪽에 있는 저수지를 따라 개설된 농로를 통해 약 1.5km 정도 계곡을 따라 들어간 곳에 있는 박봉이라는 산의 남향 사면 구릉의 중하단부에 위치한다. 현재 이 곳에서는 3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는데 하나는 과수원의 윗쪽으로 형성된 구릉의 중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구릉에 다수의 고분 석재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릉에 다수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은 정남향에 남북으로 장축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길이 252cm, 넓이 62cm이며, 묘실의 높이는 현재 토사의 유실로 인해 측정할 수 없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바닥에는 잔돌을 깔아 놓았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고분의 축조 형태는 횡단면 4각에 평천정을 하고 있으며 동서벽은 자연석재를 여러 단 쌓아서 묘벽을 구축한 후에 커다란 판석으로 남벽과 북벽을 세웠다. 또 커다란 판석을 올려 덮개돌을 삼았으며 동쪽의 덮개돌은 유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도굴, 매몰된 상태로 바닥은 확인이 안되며, 주위에서 수습되는 유물도 없다. 또 하나의 고분은 먼저의 고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내려온 구릉의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일부가 밭으로 개간되어 있어 북쪽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벽은 붕괴되어 있다. 10°편동하여 남북으로 장축을 이루고 있으며 고분의 축조 형태는 먼저의 것과 비슷하게 동서벽을 자연석재를 여러단 쌓아 축조한 후에 커다란 판석으로 북벽을 세웠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바닥은 흙을 다져 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커다란 자연 석재를 올려 덮개돌을 삼았는데 북벽쪽의 일부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된 상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로 보아 횡단면 4각에 평천정의 구조를 한 고분으로 생각된다. 세번째의 고분은 두 번째의 고분에서 서쪽으로 약 3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도굴로 인해 파괴가 매우 심한 상태여서 자세한 축조형태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앞 두기의 고분과 같은 형식의 고분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이미 도굴과 개간으로 인해 대부분이 심하게 파괴, 매몰된 상태이므로 주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전혀 없다. 지형적으로 완만한 남향 사면이어서 낮은 구릉 전체에 걸쳐 많은 고분이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도굴과 개간으로 인해 대부분의 고분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예산 황계리 박도한 정문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919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4km 가면 황계 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 학교의 동쪽으로 효자 박도한의 정문이 위치한다. 남향 사면의 하단부에 대지를 조성한 뒤 세워진 정, 측면 1칸의 익공식 건물로 홑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으며, 양 옆의 박공밑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원형의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하방 아래는 벽돌로 고멕이를 하고 창방 위에는 2개씩의 봉황 머리모양의 장식을 하였다.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돌렸으며 정려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명정현액이 걸려 있다.
예산 차동리 불무골 요지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 불무골 마을의 입구 서편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요는 현재 완전히 파괴되어 그 형태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우나 큰 정자나무 주위로 약 100여 평에 걸쳐서 토기, 소토, 옹기편이 수습되고 있어 요가 존재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밭 개간시 많은 그릇편과 소토가 있었다고 하나 오랜 동안 복토되어 현재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다만 약간의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는데 회백색에 태토는 정선된 것으로 비교적 경질에 속한다. 토기의 내부에는 물레로 성형할 때 생긴 회전선이 남아 있다. 요로 추정되는 곳 앞으로는 논과 밭이 경작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동쪽으로 길게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예산 차동리 효자비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5km 정도 가면 차동리 마을이 나온다. 효자비는 32번 도로에 근접하여 차동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데 자연석재의 한 면을 매끔하게 다듬고 그 곳에 비문을 각서해 놓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가로 70cm, 세로 85cm이며 비신에는 ‘효자흥갑지촌’이라고 각서되어 있다. 비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마을 촌로들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만 전한다.
예산 차동리 손응시 신도비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5km정도 가면 신양면 차동리 송정 마을이 나온다. 손응시 신도비는 32번 국도에서 100m 떨어진 송정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150cm 크기의 정방형 화강석재로 된 기단 위에 높이 70cm 정도의 귀부가 올려져 있으며 이 거북의 등에는 복련이 양각되어 있다. 이 복련의 위에 다시 50cm 정도의 정방형 비신 받침을 양각하고 그 위에 오석의 비신을 올려 놓았는데 비의 전면에는 ‘증병조참판익충의밀양손공신도비’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좌우측과 뒷면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비신 위에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양각한 이수가 올려져 있다. 이 신도비는 기단, 귀부, 비신, 이수 등 4개의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부는 95cm×79cm×60cm의 크기이고, 비신은 61cm×30cm×79cm의 크기로 총고는 234cm이다. 신도비의 주변에는 보호시설을 설치해 놓았으며 북쪽으로는 높이 80cm 정도의 손공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마을 입구에서 북쪽으로 500여 m 들어간 곳에는 손응시의 사당이 세워져 있다.
예산 차동리 구련사
구련사는 예산군 공주∼예산간 32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차동휴게소를 지나 1.5km 정도 가면 차동리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입구에서 다시 1km 정도 들어간 서향사면의 중상단부에 구련사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사찰은 법당과 요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의 법당이 작아서 가건물로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고 그 안에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불법당은 정, 측면 3칸의 규모에 홑처마를 하고 있는데 기단은 시멘트로 쌓았고 그 위에 방형의 자연 초석을 놓고 원주를 올렸다. 우측 퇴칸에는 아궁이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석지붕을 올린 건물로 후대에 수차 개축을 한 사찰이다. 사찰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스님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사찰은 대흥면 대련사 위쪽에 위치했던 ‘구련사’가 소실된 이후 한 스님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사찰이라고 한다. 현재 이 사찰의 법당에는 6구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사찰의 규모는 비교적 작고, 탑이나 석등 등은 없다.
예산 차동리 신덕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 신덕 마을의 남쪽에 있는 산의 북서향 사면 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약 50여 평에 걸친 사역으로 암자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 곳으로 기도하러 찾아오는 신도들이 있어 이 곳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간이 사찰로 삼고 있다. 이 곳에서 확인되는 유구나 유물은 없지만 주민들의 전언과 지형으로 미루어 사지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사지의 후면으로는 암벽이 둘러 싸고 있고 주변에는 참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사지의 전방으로는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예산 시왕리 분청요지
요지는 신양면 시왕리 시왕 천주교회 남쪽에 있는 야산의 북향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요는 북향으로 형성된 능선의 끝부분, 산사면 하단부에 걸쳐 나란히 2∼3기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밭으로의 개간과 토사로 파괴, 매몰된 상태로, 파괴된 요의 주변과 밭으로 개간된 부분에 소토편, 분청편, 토기편 등이 수습되고 있으나 정확한 유구의 확인은 불가능하다. 다만 산사면의 깍아지른 구릉에서 나타나는 유물과 밭에서 산견되는 유물 등을 통해서 요의 존재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곳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귀얄문, 인화문 분청편이 다수이며 요가 파괴되면서 흩어진 요벽이나 소토편, 또 분청사기 번조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먹 크기의 도짐 등이 수습된다. 기종은 대체로 접시, 대접, 발 등이 대부분이며 녹청색과 청색을 띤 것들이다. 모래받침 번조방식을 이용하였으며 굽은 낮은 것과 높은 것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예산 시왕리 백자요지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시왕 천주교회 맞은편 야산의 북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하는데 산의 하단 산자락을 따라 약 50여 m 정도에 2∼3기가 나란히 분포되어 있다. 요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농로의 개설로 인해 2기 정도의 요가 파괴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의 하단부는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는데 요가 위치한 곳은 바로 밭과 산사면의 경계로 요는 둥그런 둔덕을 이룬 상태로 외견되며, 파괴된 2기의 요는 절반 이상이 잘려져 있는 상태로 요벽을 노출시키고 있다. 밭으로 개간된 산의 하단부 대부분에서 토기편, 청자편, 분청편, 백자편, 소토편들이 폭넓게 산재하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큰 규모의 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요의 동쪽 부분에서 다수의 와편이 산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기와도 함께 생산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와는 기벽이 1.5∼2cm 정도이며 태토는 비교적 고운 것이다. 표면에는 어골문과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어 조선시대 중기에 생산된 제품으로 보여진다. 유물은 인화분청이 다수이며 기종은 접시, 발, 병 등 다양하다. 기형은 청자에 가까운 기형이며 굽은 낮고 안으로 기울어져 있다. 태토비짐눈받침 번조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인화문은 정교하게 시문되어 있다. 백자는 대접, 발이 대부분으로 모래번조 방식을 이용하였으며 기형은 대체로 투박한 편이다. 요에서 출토되는 백자편과 소토편이 일반 민간 보급용으로 생산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산 시왕리 요지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시왕 천주교회에서 100여 m 떨어진 북쪽 야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자리한다. 요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고 있는 곳으로 개간 당시 요는 파괴, 매몰된 것으로 생각된다. 요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사방 10여 m 이내의 밭에서 청자편, 분청편, 백자편, 도짐편 등이 두루 수습되고 있고, 외견상 추정할 수 있는 요는 1기 정도이나 시대를 달리하는 자기들이 산견되는 것으로 보아 요가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는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수습되는 유물은 인화분청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우점문, 국화문, 연화문, 운문 등이 나타나고 있다. 번조는 태토비짐눈받침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굽은 낮고 안으로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밭의 약 100여 평 정도에서 수습되고 있으며, 요의 뒷쪽으로는 남북으로 좁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예산 시왕리 중불운리 요지 ②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중불운리 마을의 정미소 남쪽에 있는 야산 북동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요로 추정되는 곳 주변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있어, 요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민의 전언과 이 곳에서 산견되는 소토와 토기, 자기편 등으로 미루어 요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토기와 분청편, 백자편 등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요로 추정된다. 수습되는 토기편은 격자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투박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문양은 대부분이 귀얄문으로 태토비짐눈받침 번조방식을 취하고 있다. 백자는 대접류가 대부분으로 모래받침 번조를 하였는데 기형이 투박한 것으로 보아 민간에게 보급되던 용기를 생산하던 요였을 것으로 보인다.
예산 시왕리 중불운리 요지 ①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중불운리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야산의 남향 사면 구릉 하단부에 자리한다. 현재 약 200여 평의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는 이 곳은 밭 전체에 걸쳐서 요벽의 파손에 의해 나타난 소토와 분청사기편, 태토비짐눈 받침이 다수 산재해 있다. 요는 약 2∼3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밭으로 개간하면서 요는 파괴,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요의 중심으로 보이는 곳은 구릉과 밭이 접하는 부분으로 분청사기편과 소토가 산견되고 있으며, 수습되는 유물은 대체로 대접류와 병류가 주를 이룬다. 문양은 귀얄문과 인화문이 나타나고 있으며 태토비짐눈받침 번조방식을 취하였다.
예산 시왕리 윗불운리 요지
요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윗불운리 마을의 북쪽에 있는 야산의 남향 사면 구릉 중하단부에 걸쳐서 위치하는데 약 100여 평의 개간된 밭에서 청자, 분청편이 수습되고 있다. 요의 중심부는 산사면의 중하단부에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는 1기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매몰,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사면 하단부에 큰 둔덕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하나의 요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간된 밭의 대부분에서 청자편, 분청편이 산재해 있으며, 수습되는 청자는 상감청자로 대개 접시, 대접류이다. 분청편은 인화문이 대부분이며, 기형은 접시, 대접류이고 모래받침 번조와 태토비짐눈받침 번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습된 분청의 일부는 고급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는 상감분청이 있는데 제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 중앙에 ‘사선(司膳)’이라는 명문이 있다. 기형은 구연부는 넓고 저부는 좁은 낮은 대접형태로 약간 파손되었다. 또한 이 곳에서 동쪽으로 약 4m 떨어진 곳에는 백자요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요의 중심은 남향 사면의 둔덕진 능선 부분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는 부분이다. 1기의 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변에 다수의 백자와 소토편이 산재되어 있다. 수습되는 유물은 연한 회색 계통으로 정선된 태토를 이용하고 있으며 기벽은 얇고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던 요로 보인다. 기형은 굽이 없는 것들이며 모래받침 번조방식을 취하고 있다. 수습되는 백자의 기형은 대부분이 대접류로 일상용기용으로 생산되었던 것 같으며 모래받침 번조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요는 서편의 청자, 분청요지와 함께 이 지역에서 시대를 달리 하며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예산 시왕리 고분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km 정도 들어가면 불원교회에 이른다. 이 곳을 지나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3.5km 정도 들어가면 하불운리 마을과 중불운리 마을의 중간 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고분은 이 길에서 북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약 0.5km 들어간 곳에 있는 계곡의 남향 사면 구릉에 위치한다. 현재 정확한 고분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무는 찾아보기 힘들며, 수습되는 유물도 없다. 다만 고분의 존재 유무는 주민의 전언과 이 곳이 지형적으로 암반이 많아서 고분 축조에 필요한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추정된다. 낮은 구릉의 주변에는 고분 석재로 추정되는 다수의 석재가 널려 있으나 고분의 형태를 정확히 알려줄 만한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 곳의 고분은 돌로 양벽을 구축하고 대판석을 덮어서 축조한 형식이었다고 한다. 고분군으로 추정되는 곳 주변에는 잡목과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예산 시왕리 정학수 정려
정려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중불운리 마을 입구의 남쪽에 있는 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북향하여 위치한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으며,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화강석재로 된 팔각의 고주 초석을 놓고 원주를 올려 놓았다. 가구는 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쇠서 대신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전면의 창방 위에는 2개의 화반대공과 4개의 소로를 올려 놓았으며 양 옆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정려의 하방 아래는 시멘트로 고멕이를 하였으며, 정려의 후면은 시멘트로 벽을 하고 나머지 3면은 홍살을 세웠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주칠한 현액과 후면 상단부에 2개의 정려기가 걸려 있다.
예산 시왕리 사지
사지는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중불운리 마을에 서남쪽으로 형성된 구릉의 북서향 사면에 위치한다. 사지는 약 100여 평의 평평한 구릉으로 현재는 다수의 밤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곳에서 사지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사지의 중심부로 추정되는 곳에는 낮은 토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후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사찰은 구릉의 사면을 평평하게 깍아서 대지를 조성한 후 두단에 걸쳐서 사찰을 조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첫댓글 일일히 답사하지는 못했지만 정확한 자료 입니다. 틀림이 발견될시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