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비가 아침까지도 내려서 아무곳도 못가겠구나 했던 날~~ 그러나 걷는게 습관이 되어서 어디론가 자꾸 나가고픈마음~~ 청솔님 그러셨죠~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어 중증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오늘 걷지않으면 내일은 뛰어야한다고~~ 어디를 다녀올까 궁리를 하다가 연꽃도 볼겸해서 광릉내에 있는 봉선사를 가기로~~ 어제 쉬었으니 친구도 분명 근질거릴거얌!!! 그래서 긴급으로 나 봉선사 간당께롱 하고 문자를 날리고~~ 몇차례 주고 받은 문자로 의정부역앞에서 만나기로합니다. 전철로 의정부역으로 가서 버스가 다니는 대로로 내려서고~~ 그런데 눈을 들어 수락산쪽을 보니 어머나~~구름이 산봉우리를 쓰다듬고 있네요. 아~~이럴줄 알았으면 산으로 가는건데~~ 백운대에 올라서서 보면 저런 풍경 눈이 시리도록 볼텐데~~ 의정부역앞에서 광릉내로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집수리 할적엔가 홀로 다녀왔는데 그때는 사진만 올리고 느낌을 못올렸군요. 그때 의정부역앞 광장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어요. 오늘은 보니 너무 흉물스럽습니다.잡초만 무성해서~~ 친구가 도착할 무렵해서 버스는 떠나고~~21번버스~~ 그버스는 20~30분 간격으로 있다고 하는군요.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둘이 있으니 금방 시간이 가네요? 우리가 버스를 탔을때 시간이 아마도 11시가 넘었을겁니다. 둘러둘러 달려가 목적지에 내렸을때 11시 50분 가까이~~ 봉선사는 광릉을 들렀다가 가기로 하고 한정거장 전 인 광릉에서 하차를 합니다. 광릉(光陵)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재위 1455∼1468)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랍니다. 아랫글은 자료를 펌해와서 첨부합니다.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차장으로 해서 들어가 매표소에서 입장권 두장을 끊고~~일인당 1000원. 표를 받는분께 표를 건네주고는 재실부터 둘러봅니다. 재실 마당 한켠에 나리꽃이 비에 젖어 무게를 이기지못하고 땅에다 절을 하고 있군요. 부엌에는 반들거리는 가마솥이 걸려있고~~ 잠시 둘러보고는 나와서 능이 있는곳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능으로 오르는길~~밤새 내린 비로 공기가 상큼하고 좋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언젠가 닥친 태풍곤파스로 인해 넘어진거라며 숲으로 돌아가는중이라고 숲속에 쓰러져있고~~ 홍살문을 지나서 바로 보이는 정자각을 가운데 두고 능이 있습니다. 그곳은 격일제로 능 가까이 가보게 하는군요. 오늘은 짝수날이라고 왕후 능을 가게해놨습니다. 이미 여러명의 단체가 능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비각을 지나서 오르는길이 참으로 이쁘군요. 그곳에 오르니 단체분들 사진 담느라 분주합니다. 진사가 원하는데로 이리해라 저리해라~~ 청일점으로 남자분 한분이 끼어서 매우어색해합니다. 그팀 내려가고나서 우리도 우리끼리 추억을 담고~~ 올랐던 길 이 아닌 반대편 길로 내려와서 쉼터에 앉아 캔맥주 하나 따서 나누어마시고~~ 어머~그순간 왕릉을 올려다보니 물안개가 뽀얗게 일어나네요~~ 무슨일이야? 설마 맥주때문에 그런건 아니겠지? 빵과 함께 커피까지 마시고는 친구더러 잠시 앉아있어~~ 나 왕릉에 잠시 올랐다올께 했더니 울친구 겁도 많으시지~~ 길로 가지말고.숲 가까이로 가라나~~행여 CC티비에 잡힐가봐서 그러는거죠~ 살금살금 도둑고양이 마냥 왕릉 가까이 올라가봅니다. 왕후 능 과 별다를건 없지만 언제 다시 올지모르니 다녀와야죠~~ 발자욱 몇개 남기며 사진 담아들고 내려와서 자리를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능을 벗어나서 봉선사를 찾아서~~ 그런데 국립수목원 관계자 되시는분들이나 남양주시청에 계시는분들~~ 그길에는 인도를 왜 안만들어놓는건가요? 너무 위험스럽더군요.분명 우리처럼 걷는분들도 계실텐데말입니다. 긴바지를 입었으니 망정이지 좁은 길을 풀섶을 헤치며 걸으려니 ~~ 홴스를 조금 안쪽으로 들이고 조금만 길을 내어서 꾸며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곳은 잘해놓으면서 왜 그곳은 그렇게 놔두는건지~~ 봉선사 입구에서 일주문을 안거치고 곧장 연꽃이 있는곳으로 갔습니다. 봉선사는 해마다 연꽃축제를 하지요~~ 올해도 이번주 주말에 음악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꽃은 별로 안이쁘더군요. 세미원쪽에서 이쁘고 탐스러운것만 봐와서 그런가~~ 음악회 축제를 한다고 연꽃밭을 도는곳에 청사초롱이 줄줄이 걸려있습니다. 그곳을 돌고 있는데 청솔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연락이 오고~~ 셋이 만나 본격적으로 사찰을 둘러봅니다. 봉선사 무척 규모가 큰 절이군요. 봉선사는 조선조 8대 예종이 선왕인 세종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1469년에 창건한 절이랍니다. 그래서 대웅전의 현판도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쓰여져있습니다. 아랫글은 펌해와서 첨부합니다.출처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法印國師)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雲岳寺)라고 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때에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할 때 이 절을 혁파하였다가,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라고 하였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선사대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1551년(명종 6)에 이 절은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 주지 낭혜(朗慧)가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637년에 주지 계민(戒敏)이 중창하였으며, 1749년(영조 25)에는 재점(再霑)이 중수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나라에서 전국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5규정소(五糾正所)를 설치할 때 이 절은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 성암(誠庵)과 월성(月城)이 중수하였고, 1902년에 도성 안의 원흥사(元興寺)를 수사찰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삼았을 때 이 절은 16개의 중법산(中法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하였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교종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 1926년에는 주지 월초(月初)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1951년 3월 6일에 법당 등 14동 150칸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뒤 1959년에 화엄(華嚴)이 범종각을 세운 데 이어 1961년부터 1963년까지운경(雲鏡)과 능허(凌虛)가 운하당(雲霞堂)을 세웠고, 1970년에는 주지 운허(耘虛)가 큰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큰법당·삼성각·개건당(開建堂)·방적당(放跡堂)·운하당·범종각·청풍루(淸風樓)·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큰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한글현판을 단 것이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봉선사대종을 비롯하여 1903년에 그린 칠성탱화, 사찰 입구의 보운당부도(報雲堂浮屠) 등이 있다. 그리고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으며, 1981년에는 운허의 부도탑을 세웠다. 이 밖에도 사찰 안에는 ‘춘원 이광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절 옆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이며, 천연기념물 제197호인 크낙새가 주변 숲에 서식한다. 요즘은 각 사찰마다 템플스테이가 유행인지~~ 절을 돌아보고 나오다가 거위가 스님한테 빵을 받아먹는것도 보고~~ 웅덩이 근처에서 놀다가 스님이 뭐라 한마디 하니 냉큼 물을 가로질러와서는 반깁니다. 아마도 자주 그러 그러길래 그렇게 하겠죠? 봉선사를 니서서 서파검문소 근처 까지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우렁이 쌈밥~~청솔님께서 운전도 하시고 점심도 사주셨네요.^^* 아주 맛있게 잘먹었습니다.감사드려요~~ 점심먹고는 돌아~돌아~돌아서 청학리로 가서 카페에 들러 팥빙수도 맛있게 드셔주공~~ 에구 오늘도 입이 호강 한 날이넹~~ 바짝 가물었던 계곡에 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있습니다. 두분 덕분에 몇시간 시원하게 잘 보내고왔네요. 지금도 다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발길을 잡아도 그나름데로 다닐곳이 있지요~~^^* 오늘도 고운 추억 남기며 하루의 문을 닫습니다.
이곳부터는 세조의 능
첫댓글 두루두루 구경도 잘하고 바람 잘쇄고 왔어요 ~~~
점심을 늦게들 드셔서 시장하셨겠네요도 이쁘고 잘 봤습니다
광능과 봉선사에 역사공부도 잘 하고 체철
오후에는비도안오고 햇볒이쨍쨍 ㅎㅎ 요모저모 구겅잘했습니다 안불러주었으면 방콕했을텐데 고마워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