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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출생과 사망1835년 !~ 1908년 11월15일 중국3대악녀 1.여태후 2.측천무후3. 서태후등 엽기적인 색녀는 남자를 벌레죽이듯했다 청나라 마지막 서태후 미소년을 불러 하룻밤 즐기고 는 죽였다 소문이 날까봐 궁에 들어오면 서태후의 파트너가 되어 만족 시키든 만족을 못시키면 사전에 죽였다 죽인 미소년의 숫자가 1만여명 북경의 미남자 소년을 모두 궁으로 불러 하룻밤 즐기 고는 살해하여 북경에 미남이 없어 씨가 말랐다 하니 얼마나 남색 남총을 밝혔는지 ㅠㅠㅠ 1.실질적으로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西太后)는 여러 가지 면에서 측천무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그렇지만 측천무후가 '사악한 찬탈자'인 동시에 '훌륭한 통치자'였던 반면,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사치에 우선한 '탐욕스러운 통치자' 근본적인 차이점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녀로 인해 청 제국의 붕괴가가속화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녀로 인해서 왕조의 몰락이 반세기 정도 늦춰졌다는견해도 있다. 2.그녀의 출신배경이나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은 측천무후의 것과 비슷하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엽혁나랍(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의 아버지 혜정(惠征)은 감찰 업무를 수행하던 하급 관리로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난아가 태어난 시기는 유럽 열강들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인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이나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굴욕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난아는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였는데, 나이는 자희보다 네 살이 많았으며 이제 막 제위를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무능하지도 않은 평범한 황제였다. 또한부지런하고 대단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태후 만약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선량한 사람이었던 함풍제는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격변의 시기를 맞이해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과 맞서기에 적합한 통치자는 아니었다.자희는 원래 처세에 능한 사람이라 수녀로 출발해서 의빈(懿嬪)에 이르기까지 고속으 승진했으나 오랫동안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함풍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지4년 만에 처음 황제의 성은을 입은 자희는 대단히 큰 행운을 잡았다. 스물한 살에 아들 재순(載淳)을 낳은 것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자희는 의비(懿妃)를 거쳐 의귀비(懿貴妃)가 되었다. 내명부에서 황후 바로 다음 서열로 올라선 것이다.자희 개인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겠지만 300년 전에 만족의 영웅 누루하치가 세운 청 왕조는 이 시기급속한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희가 입궁했던 시기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전국의 절반 이상이 태평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상태였다.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청 왕조의 팔기군(八旗軍)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두 한인 출신 지방총독들이 지휘한 군대만이 가까스로 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3.이 와중에 영국 상선 애로우 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 전쟁이 터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과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그들요구는 자국 공사의 북경 주둔, 교역항개항, 선교활동 보장과 같이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것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연합함대가 천진거쳐 북경까지 위협하자 근대식 군대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함풍제는 굴욕적인 천진 조약을 맺어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이어 희와 재순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혁흔은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가 북경 조약이었다. 천진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고 천진 항을 개방하며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보고 있는구룡 반도까지 영국에게 할양해야 했다 . 함풍제 함풍제는 자포자기에 빠져서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다 중병에 걸렸다. 서른한 살의나이에 죽음을 앞둔 황제가 여섯 살 난 후계자를 위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인물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 공친왕 혁흔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그는 추종자들도많이 거느리고 있어 제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두 명의 황후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명문가 출신인 자안 황후는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주변에 인물이많이 모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권력을 잡으면 외척들이나 측근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태자의 생모인 귀비 자희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무척 영리하지만 권력욕이 강했으며 권모술수에 능했다. 두 황후 외에도 선왕 시절부터 정권을 장악해온 팔대신(八大臣)이라는 막강한 세력이 더 있었다. 이 여덟 명 중신들 중에는 함풍제에게 숙부가 되는 선왕의 형제가 두 명, 사위가 한 명 끼어 있었으며, 이들의 리더인 숙순(肅順)은 황실의 종친이었다. 후계자를 위해서 과감한 숙청을 감행할만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함풍제는 세력 간의 견제를 통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조치했다. 동치제 대략 1860년대를 기점으로 광공업, 해운, 조선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 산업이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외유학생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서구의 근대적 포함에 놀랐던 중국인들이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해군 함정이었다. 서구 열강들도 양무 운동에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영국은 세 사람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유지했다. 이 시기에 서구 열강의 주선으로 중국 최초의 근대식 함선이 도입되기도 했다.그렇지만 동치중흥의 번영기는 동태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갑자기 방향을 잃고 말았다. 동태후 자안이 급작히사망한 시기는 광서 7년이었다. 당연히 서태후의 암살 배후설이 제기되었지만, 밝혀진 바는 아무 것도 없다. 정사의기록이 아닌 당시의 소문에 기초한 기록에 서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동태후가 예부와 폐후(廢后)를 논의했으며, 이를 눈치 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만약 동태후의 죽음에 서태후가 배후였다고 한다면 그녀의 사생활 때문이 아니라 권력축의 이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동태후와 공친왕은 점점 더 긴밀해져 가고 있었으며, 서태후는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것은 두 여인의 성격차이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치제조차 철이 들고 나서는 친 어머니인 서태후와는 소원해지면서 동태후와 가까워져 문안인사를 가서오래도록 그녀와 함께 머물곤 했다고 한다. 동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권력은 서태후에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서태후는 공친왕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눈치만 보고있었고, 공친왕은 20년 이상 외교 책임자로 일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신뢰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태후가 사망하고 3년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쫓겨나자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과 관련해서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권력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서태후의 권력 독점과 함께 거대한 제국도 몰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서태후는 첫 위기부터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전적으로 두 나라의 문제로 간주한 다른 열강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때 청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단결하여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서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태후는 갑자기 이홍장에게 서둘러서종전 협상을 벌이도록 지시했다.비록 이 전쟁에서 청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원하지 않았던 서구 열강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안위자신과 서구 제국과의 관계만을 생각해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권력이 민족적인 자긍심보다 우선이었던 것이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서태후는 민중들로부터의 신망을 잃게 되었지만,달콤한 권력의 맛에 빠진 그녀는 이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민중들은 이제 삼두체제하의 동치중흥 시절과 달라진 점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태후가 동태후, 공친왕과 함께 권력을 나누고 있던 시절에는 최소한 황궁 내에서의 호사로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없을 정도로 권력자들이모두 자숙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권력이 분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고 나서무너져 가는 제국의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로 호사를 즐겼다.그녀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다. 그러니 매일 그녀의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는데, 당시 서민들 100명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 하루의 식비로 책정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또한 자신의 은퇴를 위해 광서제에게 명 왕조부터 조성되어 있던 황실의 휴양지인 서원(西苑)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북경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서원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삼해(三海)라는 이름으로 유명한데, 이 호수는 남해,중해, 북해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주변에는 수많은 누각들이 건설되어 있다. 서태후는 이 삼해에 철로를 건설하고 그녀의 전용기차를 프랑스에 특별 주문해서 제작하기까지 했다.이 정도로 끝이 아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고 10년 후에 서태후는 환갑을 맞이했다.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당한 참패는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청나라는 거액의 전쟁배상금과 함께 요동 반도까지 일본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요동 반도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돌려받았지만, 백성들은 분노했다 중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무술변법(戊戌變法)이고, 전반적인 개혁 운동을 변법자강 운동(變法自疆運動)이라 부른다. 그러나 광서제의 개혁은 불과 100일 만에 좌절되 서태후가 야심가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삼해의 가운데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감금한 것이다. 그녀는 광서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 했으나 청나라 국민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의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밀사를 각국 공사관으로 파견하여 영사관을 보호할 것을 확약하면서 화의의 뜻을 은밀하게 전했다. 청나라의정규군은 북경을 향해 진군하는 서구의 연합군을 막아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북경은 의화단이 무장한 칼이나창과 같은 전통무기를 제외한다면 서구의 군대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오자 그녀는 변장을 한 채 광서제만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난을 가면서, 이홍장에게 8개국과 강화를 지시했다 동시에 그녀는 의화단에게 우호적이었던 대신들을 모두 처형했다. 결국 의화단은 청나라의 정규군과 연합군 양쪽의 공격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벌인 도박에 서구 열강들과 의화단이 모두 걸려들어 마치 장기판의 말처럼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녀는자신의 권력 기반이 침략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광서 26년인 1900년, 서구의 열강들이 12개 조의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절차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 서안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하루에 200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말년의 서태후 서태후는 신축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에 북경에 돌아왔으며, 다시 예전의 호사스럽고 안락한 생활로 돌아갔다. 전쟁기간중에 전면에 내세웠던 광서제는 다시 영대에 감금되었으며, 4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제 서구 열강들은서태후의 통치를 환영하게 되었다. 토지의 임차, 이권의 확보 등 요구하기만 하면 모두 들어주는 멋진 파트너를 싫어할사람이 있을 리 없다. 측천무후에 대한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냉혹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서태후의 그것은 '탐욕'이었다고 하고서태후는 분명히 측천무후와 같이 냉혹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통치자에게는 냉혹함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함이 훨씬 더 큰 죄악인 것이다. 중국의 양무 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 진행 과정은 메이지 유신 쪽이 훨씬더 혼란스러웠다. 메이지 유신은 폭력과 광기가 수반된 개혁 운동이었지만, 양무 운동은 현명한 지도체제 아래서는온화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양무 운동의 성과를 원점 이하로 돌려놓은 사람이 바로 자신의 탐욕과 허영에 모든 통치력을 쏟아 부은 서태후였다. 서태후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연금되고, 10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그녀는 세 살 먹은 부의(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웠다.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는 선통제가 즉위하고 바로 다음날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 어린 미소년들이 색녀 요망한년때문에 1만명 죽음을 당했단 색녀중에 색녀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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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서운 역사 이야기 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래전 일이 아니라 1900년도 초까지 살았던 이 ㅡ여인 이화원 이란 초호화 별장별장에서 즐기고 놀고 나라를 망하게 했지요
중국가면 지금도 서태후가 거처하던 궁궐이있지요
그리고 연못도 있구요 역사가 있는 공원도 있습니다
서태후가 나라를 망했다고 합니다
이화원이라는 별장인데 여기서 사치하여 결국은 청나라는 이화우너 때문에 멸망초래
계집하나 때문에 만명이나죽었다니 상상도못할 일인데 나라가 잘될턱이 없겠지요
하룻밤 자면 자기가 남자를 밝혓다는 소문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마져 없앴다 합니다 오래전 일이 아니라 1900년도 초까지 살았던 이 ㅡ여인 이화원 이란 초호화 별장별장에서 즐기고 놀고 나라를 망하게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