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에 힘이 쭉 빠진다.지난 6개월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큰 일을 치르고 난 뒤 밀려오는 허탈감이라고나 할까?지 금까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고도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기분이라면 너 무 거창하겠지….
어,죄송합니다.다짜고짜 내 감상부터 두서없이 늘어놓아서.‘저 친구가 지 금 뭔 소리를 하나’싶었을 게다.그런데 독자 여러분이 현재 내 기분을 조금 이라도 안다면 이렇듯 주절거리며 얘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하실 듯싶다.
기자와 마주앉아 얘기하는 지금 시각은 12일 오후4시,‘꼭지’의 마지막 녹화를 마친 직후다.방금전 정성효 감독님(‘꼭지’의 연출자)이 스튜디오로 내려와 우렁찬 목소리로 “모두들 수고하셨다”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했 다.그 말을 듣는 순간,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뭐랄까…,그거 있지 않나.왜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지?어휴,갑갑하네.맞아,시원섭섭! 바로 이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밖에 연기 못 하니,내 앞에서 다시 해봐”라며 호통치던 박근형 선생님의 얼굴과 (이)종원 형과의 엎치락 뒤치락 극중 싸움 장면 그리고 (박 )지영 누나와 나눴던 달콤한 뽀뽀-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까지,드라마의 앞뒤 장면들이 마치 빛 바랜 흑백사진을 볼 때처럼 기억의 빈 자리를 비집 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매섭게 코끝을 때리던 지난 1월, 당시 내 매니지먼트 일을 봐 주던 (이)호열형에게 무심결에 던졌던 말이 기억난다.
"형, 나 제대로 된 건달 한번 해 보고 싶어요."호열형은 내 얼굴을 잠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대답대신 "너 진짜 할수 있겠어?"라며 나직하지만 힘있는 어투로 물어봤다.순간 괜한 얘기를 꺼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대답해야만 했다. 아니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시켜만 준다면요. 단 속마음은 따뜻한...왜 그거있잖아요. 인간미가 넘치는 건달이었으면 더욱 좋겠어요."
호열형은 내 얘기를 듣고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뛰지도 못하는 놈이 벌써 날려고 하는구먼'이라는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쑥쓰러웠다. 그러나 호열형은 내 예상을 깨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망가질 자신이 있다면 노력해보지. 내가 말하는게 무슨뜻인지 알겠어?"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렴풋이 알것 같았지만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이다.
그 같은 대화를 나누고 난뒤 어느날 호열형은 대본 하나를들고 왔다. 표지에 '꼭지'라고 적혀 있었다.받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간 대본에서 '송명태'라는 인물이 눈에 쏙 들어왔다. 책을 덮은뒤 나는 대뜸 "형, 명태 역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호열형은 씩 웃으며 "감자바위같은 놈이 그래도 대본 볼 줄은 아네, 기다려" 라고 말한뒤 나가버렸다.
서울에 올라와 붙은 별명 감자바위가 그때처럼 기분좋게 들린 적은 없다. 근데 내가 왜 감자바위냐구? 자, 잠시 지금하는 얘기를 멈추고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보겠다.아시나요, 감자바위의전설을...
-2-
아마도 내 생김새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시청자 중에는 내가 서울 강남의 잘 나가는 집에서 태어난 귀한 외아들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시 말하자면 ‘온실 속의 잡초(?)’로 곱게 자라나 어찌어찌하다 보니 탤런트가 되고 아주 손쉽게 인기를 얻어 여기까지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무참히 깨뜨려서 어떡하나….나는 한겨 울이면 눈이 허리까지 쌓이는 강원도 정선의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고 자란,그야말로 ‘오리지널 촌놈’이다.
그래서 압구정동으로 대표되는 강남문화와는 거리가 멀고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게다가 외아들은 더욱 아니다.내 위로 형 1명과 3명의 누나가 버티고 있다.2남3녀 중 막내로 부모님은 평상시 일하느라 바빠 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잘 모를 정도였다면 이제 이해가 가겠지.
자,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오래된 앨범의 먼지를 털어내는 기분으로 얘기를 시작하겠다.단 이것 하나는 미리 밝히겠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워낙 기 억력이 좋지 않아 내 얘기가 가끔 틀리기도 할 것이다.그럴 때마다 이를 제 대로 바로잡아주실 분들은 내 ‘스타고백’을 정리하는 기자에게로 E메일을 보내달라.바로 시정하겠다(조성준 기자,고치느라 고생 좀 하겠군.히히히…).
음력으로 1977년 9월 29일이 바로 내 생일이다.태어난 곳은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1리 2반,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아우라지 근처라고 얘기한다.세상에 처음 나올 적의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다.태몽은 무엇이었고 어떤 장소에 서 태어났는지 전혀 모른다.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어렸을 적 주위사람들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농담을 할 때면 속으로 ‘다리 밑에서 태어났으면 어때,나를 사랑하고 키워주기만 해도 고마 운 거지’라며 무시할 때가 많았다.그래,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참 희한한 놈이었다.
내 얼굴에서 자주 묻어나는 외로움은 아마도 혼자 자란 어린 시절에 생긴 것 같다.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2남3녀의 막내라면서 웬 외로 움?’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으리라.내 말은 가족이 없어 외로움 을 탔다는 것이 아니고 가족 모두 워낙 당신들 일하고 놀기에 바빠 나를 챙 겨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골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우리 부모님도 해가 뜸과 동시에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나간다.부모님이 나가면 형과 누나 들 역시 학교로 가 버리고 텅 빈 집에 나 홀로 있기 일쑤였다.영화 제목처럼 ‘나 홀로 집에’ 수준이라고나 할까.
강아지와 놀아도,흙바닥에 그림을 그려봐도 시간이 잘 안 가는 것은 매 한 가지였다.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산 속의 밤은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온다 는 것이었다.해가 지면 가족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오고 나는 반가운 마 음에 “으앙!”하고 울음부터 터뜨리곤 했다.
나가자,나가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집에서 혼자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놀 수는 없었다.나이를 먹어가며 집 밖으로의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탈출한다 고 해 봤자 산골 마을에 요즘처럼 만화가게 오락실 PC방 놀이터 등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조건 대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나는 본격적인 야생 수렵생활(?)에 들어갔다. 원시인도 아닌데 야생 수렵생활이라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야생 수렵생활임에 틀림없었다.
약초캐기와 천렵 그리고 심지어 뱀 잡아먹기까지,자연과 함께 놀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놀고 나면 캔 약초들 가운데 삽초 오미자 더덕 등을 장터에 가지고 가서 팔아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두어 시간 꼬박 서서 팔면 한 5000∼6000원 정도? 이 돈으로 뭘 해야할 지 몰라 많은 고민도 했었지.아! 소박했던 내 지난 날이여….
-3-
가족들의 전폭적인 외면(?)속에 친구들과 야생 수렵생활을 즐기던 나는 84 년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초등학교 입학을 맞게 된다.잠깐,공부를 하고 싶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단지 학교에 가면 더 많은 친구들과 훨씬 재미 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흐흐흐….
내가 들어간 학교는 마을 인근의 여량초등학교.형과 누나들을 따라 자주 놀 러갔기 때문에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특히 그 곳의 선생님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입학하기 전부터 형과 누나들이 공부하는 교실 부근에 가 창 밖에 몸을 숨긴 채 몰래 새총을 쏘고 물을 뿌리는 등 갖은 악행을 일 삼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당시 나는 지금의 홀쭉한 외모,내 성적이고 조용한 성격과 달리 통통하고 발그레한 볼살에 무척 장난이 심한 편이었다.
‘싸나이’들의 우정을 중시하는 내 성격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여전 했다.여자아이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어떤 추파를 보내도 나는 묵묵부답 이었다.뭐,멋있게 보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여자친구들보다는 남 자친구들과 노는 게 적성에 맞아서 그랬다.산과 들,강가로 친구들과 함께 돌 아다니다가 저녁 무렵이면 얼굴이 새카맣게 된 채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일 년 365일 중 360일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 자그마한,아니 대형사고를 겪기도 했다.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 다.형과 함께 만화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형에게 갑자기 몸싸움을 걸고 싶어 졌다.왜 그런 거 있지 않나,과격한 프로레슬링이나 만화영화를 보면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붕∼하고 멋지게 몸을 날려 형을 덮쳤다.운동과 장난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형은 바로 꺾기로 반격을 가해왔다. 그 순간 내 오른쪽 어깨에서 ‘우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엄청난 통증과 함께….
지기 싫었던 나는 형의 꺾기 공격에서 빠져나와 다시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통증 때문에 오른팔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백기를 들었다.
그 후 몇 시간이 흐른 뒤 부모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애써 아픔을 참고 밥을 먹기 위해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려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대수롭지 않 게 생각하던 어머님이 하도 내가 아파하며 어쩔 줄을 모르자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다.내 옆에서 밥을 먹던 형은 부모님과 나를 번갈아보며 눈치 보기에 바빴고 누나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충 얼버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간 뒤 자리를 깔고 누워 잠을 청했다.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갔고 신음소 리는 점점 커졌다.이 소리를 들은 부모님이 방으로 와 낮에 무슨 일이 있었 느냐며 캐묻기 시작했다.부모님의 불호령과 빗자루가 무지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대로 솔직하게 얘기한 나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그런데 이게 웬인인가?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 니 옷을 입혀 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었다.이상했다.분명 벼락 같은 꾸중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부모님의 모습이 의아하기만 했 다.
밤12시에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인 정선병원 응급실에 간 나는 오른쪽 어 깨에 금이 간 사실을 알게 됐다.이 사실을 옆에서 들은 아버지는 조용하게 “너 당분간 오른팔은 사용하면 안된다”고만 말씀하신 뒤 입을 다무셨다.당 시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별것 아닌 장난에도 자주 화를 내시던 당신이 정작 큰 사고에는 왜 그리 조용했을까….그러나 요즘 와서는 이해할 것 같다.그것이 바로 부모 님의 참사랑이었다는 걸….
-4-
가만히 TV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직업이 연예인인 것 같 았다.잠깐 동안 드라마와 영화나름대로 사고도 자주 치고 시끌벅적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마감하고 90년 에 여량중학교로 적을 옮겼다.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조그마한 규모의 남녀 공학이어서 중학교 친구라고 해봤자 모두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그렇 다고 공부에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방과후 생 활에만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초등학교때부터 짬짬이 해 왔던 육상부 활동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산골 마을 어린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 역시 산과 들을 한 마리 산양처럼 뛰어다니던 가락이 남아있어 뜀박질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값 비싼 장비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런닝셔츠와 반바지 한 벌 그리고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하는 운동이 바로 육상 아닌가? 집안에 경 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장,단거리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뛰고 또 뛰었다.내가 무슨 세계적인 육상 스타도 아닌데 찬 밥,더운 밥을 가리겠는가.성적 순위 등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코치가 뛰라고 하면 ‘돌쇠’처럼 그냥 뛰는 거였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운동이 지금 내 연예계 생활 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같다.육상에서 지구력과 인내심을 배웠다.또 나보 다 땀 한 방울이라도 더 흘리며 연습에 몰두하던 친구들이 대회에서 좋은 성 적을 올리는 것을 보고 땀의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됐다.그래서 지금도 나는 축구나 농구,욱상처럼 땀 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스포츠를 좋아한다.반대로 머리로 재고 잔꾀 부리는 듯한 스포츠는 글쎄…,영 아니다.
육상과 더불어 중학교 시절의 나를 사로잡은 그 무엇이 있었으니 그는 바 로 긴 머리와 청바지 맵시가 어여쁘던 한 여자애였다.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있던 내 가슴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주던 그 아이,아! 보고 싶다.
내가 여자 보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머리가 길어야 하고 청바지 맵시가 예뻐야만 한다.
그 친구(지금부터 그 친구를 K라 부르겠다.그 아이에게도 소중한 사생활이 있는데 실명 공개는 조금 그렇지 않은가?)가 바로 그랬다.두 가지 조건을 완 벽하게 갖춘 바로 내 이상형이었다고나 할까.게다가 귀엽고 명랑하기까지 해 가만히 K를 지켜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K에게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나보다 한 살이 어리니까 편 한 동생처럼 대해도 됐는데 이상하게도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누나도 많아 여자들과 얘기하는 게 자연스러울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여자 앞에만 가면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내 방식대로 ‘작업’(?)에 들어 갔다.K가 부담스럽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 아끼고 보호해주는 것,그것이 ‘ 작업’의 주된 내용이었다.조금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떡하나? 그 방법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현재 방송 중인 모 CF에서의 내 모습을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난 너의 수호천사야∼”를 목청 높 여 멀리서 외치던 그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보는 K의 눈빛은 지극히 평온 하기만 했다.아무런 사심도 섞이지 않은,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런 눈빛 이었다.
-5-
그러던 중 마침내 말할 기회가 왔다.아니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옳은 표현 일 게다.흰 눈이 펑펑 내리던 졸업식장에서 K에게 그동안의 속사정을 담은 편지 한 통을 건넸다.편지를 받은 K는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 니 이내 방긋 웃었다.그 모습을 본 나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무언의 허락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 후로 내가 춘천기계공고로 진학한 뒤에도 1년여 동안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내가 겪은 경험상 그 건 정말 맞는 얘기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춘천기계공고로 진학해 그곳의 친구들과 어울려 정신 없이 놀다보니 K의 얼굴이 머리 속에서 점차 지워지기 시작했다.잠깐,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이성 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고독한 승냥이’(?)였는데 그럴 일이 있겠는가.
덤덤하고 조용하게 K와 나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간간이 오던 편지도 끊기 고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당시를 생각해보면 가슴 아프고 애절하다기보다 는 자연스럽게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그후 연예인이 되고 나서 K의 소 식을 들었다.아주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기뻤 다
-6-
어렸을 적부터 공부보다 하루 빨리 집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에 관심 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카 센터 를 운영하면 돈벌이도 쏠쏠하고 다른 직업에 비해 남는 시간도 많아 자유롭게 놀기에 좋을 것 같았다.그런데 막상 해보니 자동차 정비라는 게 그리 쉬 운 일이 아니었다.특히 추운 겨울-잘 알다시피 강원도의 겨울은 엄청나게 춥 다-에 자동차를 만지고 있으면 손이 차디찬 철판에 쩍쩍 달라붙었다.죽을 지 경이었다.또 손톱에 낀 기름때는 일주일이 지나도 빠지기는커녕 어쩌면 그토록 시커멓게 변해가는지….
이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다.아니 자동차 정비에 흥미를 잃었다고 보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친하게 지내는 4명의 단짝들과 함께 담배 맛을 알게 됐다.그리고 오토바이에도 재미를 붙였다.그 리 값 비싼 오토바이는 아니었지만 바람을 가르며 타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 정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우리 가족 전부가 그렇듯이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 먹는다는 것이다.아마 내가 술까지 잘 먹었으면 고교시절에 이미 폐인 일보 직전까지 가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면 자취방에서 뒹굴며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던 나의 머리에 어느날 문득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앞으로의 밥벌이,즉 진로에 관한 생각이었다.
촬영 또는 음반 활동을 하고 나면 저마다 외 국에서 재충전을 하는 연예인들과 달리 기름밥을 먹어가며 자동차 배터리의 재충전 여부나 살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자동차정비사를 꿈꿔왔던 나를 흔들 리게 만들었다.물론 연예인이 되고 난 뒤 그 같은 당시의 생각들이 아주 단 순무식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에이,XX.나도 연예인이나 한번 돼볼까?’ 일단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자동차 곁에도 가기 싫어졌다.그래서 정비 가운 데도 가장 기름밥을 적게 먹는 전기정비로 전공을 바꿨다.때마침 이때부터 외모도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통통하고 동글동글했던 얼굴은 살이 쪽 빠져 갸르스름해졌고 키 역시 쑥쑥 자라 자타가 공인하는 춘천기계공고 최고의 미 남으로 자리잡게 됐다(으흠,내 입으로 얼굴 자랑을 하자니 조금 부끄럽군).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가 뛰면 어디로 뛰겠는가? 연예인이 되겠다는 뜻과 의지만 있었지 도대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방송 관계자들과 매니저들이 춘천까지 내려와 나를 발탁할 리도 없고 빠듯한 가정형편에 서울을 오가며 연기학원에 다닌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었다.일단 연예인의 꿈을 접어두고 삼촌이 소개해준 경기 시흥에 있는 자동차정비공장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그러니까 95년 고등학교 졸업 을 한 학기 남겨둔 시점이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려 했다.그러나 외롭고 적막한 정비공장 생활은 내 인 내심을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광명의 큰 누나 집에서 경기 시흥의 공장까지 출퇴근했는데 보통 해 뜨기 전에 버스를 타면 거짓말 조금 보태 점심 먹을 때쯤 돼야 공장에 도착하곤 했다.게다가 또래 친구들 하나 없이 나이 지긋한 어른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 은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나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한마디로 말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7-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 탈출을 구체적으로 꿈꾸고 있을 즈음 무심코 스포츠 지를 보다가 신인 탤런트 모집 광고를 발견했다.지금은 드라마넷으로 이름이 바뀐 케이블채널 제일방송에서 전속 연기자를 뽑는다는 얘기였다.
눈이 번쩍 띄었다.‘그래,바로 이거야!’ 주저하지 않고 막내 누나한테 얘 기했다.내 계획을 들은 막내 누나는 “도진아(내 원래 이름은 김도진,아는 분은 다 안다),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데 괜찮겠어”라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렇지만 한번 마음을 먹으면 주위에서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무조건 저지르고 보는 성격인 내가 누나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리 만무했다 .
옷장을 뒤져 몇 벌 되지도 않는 옷들 가운데 가장 폼나는 옷을 입고 막내 누나와 함께 집앞 공터로 나갔다.미용사로 일해 아무래도 미적 감각이 우리 남매들 중 가장 뛰어난 막내 누나는 빨간 벽돌담장을 배경으로 열심히 셔터 를 눌러댔다.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그날만큼은 무슨 모델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그리고 멋있게 포즈를 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모한 발상인가.남들은 수백만원씩 들여 스튜디오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을 방송국에 제출하는 마당에 손바닥만한 싸 구려 카메라로,그것도 담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원서에 붙여 제출할 생각을 하다니….‘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였다 .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제출한 원서가 의외로 쉽게 제일방송 드 라마 관계자들의 눈에 들었던가 보다.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쳐 당당히 공채 3기로 전속연기자 모집 시험에서 합격했다.95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쁜 사실을 함께 살고 있는 누나들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 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왜냐하면 당시의 내 신분은 학생이었고 만 약에 공장 일을 그만뒀다는 얘기가 학교 선생님들의 귀에 들어갈 경우,당장 춘천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실업계 고교에서는 3학년 마지막 학기에 취업했다가 도중에 그만두면 다른 회사에 갈 때까지 다시 학교에 다녀야 한다.그래서 공장에 다니지 않 는다는 것을 선생님들이 알게 되면 나 또한 바로 ‘춘천 가는 기차’를 타야 만 했다.
그 때부터 나의 이중생활은 시작됐다.아침에는 공장으로 출근해 잠깐 얼굴 만 내비치고 오후에는 제일방송 사무실로 가 연기 훈련을 받았다.그 과정에 서 몇 편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그러나 전속 신인연기자들에게는 출연료가 없었다.단지 한달에 12만원씩 월급을 받을 뿐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나는 큰 누나에게 5만원을 떼어 생활비로 준 뒤 7만원을 가 지고 한달을 버텼다.주머니에는 언제나 100원짜리 동전 서너개가 있었고 이 돈으로 방송국 동료들과 어울려 논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답답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 이 내가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남보다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태어나면서부터 늘 없던 놈에게 무슨 욕심이 있었겠는가? 뭐든지 그냥 죽기 살기로 하는거지...그렇게 지내던 95년 12월의 어느날 모 PD가 나를 급하게 사무실로 불렀다.
-8-
“디자이너 앙드레김 선생 TV에서 봤지? 그 양반이 내일 너 좀 보잔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 나는 앙드레 김이 뭘 하는 분인지도 전혀 몰랐다.
주위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 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이며 앙드레 김 패션쇼에 선다는 것 자체가 연예인으로서 더할나위 없는 영광이라 고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속으로 ‘그게 그렇게 좋은 거야? 좋으면 하지,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방송국 관계자와 함께 앙드레 김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앙드레 김 선생님은 특유의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태도로 나를 반겨줬다.공중파에 얼 굴 한번 내밀어 본 적 없는 햇병아리 탤런트인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당시의 대화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앙드레 김:안녕하세요,김도진씨.TV에서 잘 봤어요.
나:(쭈뼛거리며)예,고맙습니다….
앙드레 김:시간이 되면 제 무대에 한 번 나와주세요.가능하시겠어요?
나:(더욱 쭈뼛거리며)언제라도 불러만 주신다면….
드디어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장소는 서울 H호텔,이름만 가끔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특급 호텔이다.엄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웅장 한 분위기의 패션쇼 무대와 달리 분장실과 대기실은 완전히 시골장터 수준이 었다.옆에 남자가 있건 말건 훌렁 훌렁 옷을 갈아입는 여성 모델들부터 바닥 에 주저앉아 자장면을 어지러운 먹는 유명 탤런트들까지 무척이나 낯설고 정 신없는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구석에 처박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동건 형이 대기실 안으로 걸어오는 것을 봤다.평소 형의 팬이었 던 나는 쑥스러움을 애써 참고 동건 형에게 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동건 형은 “네,근데 누구시죠”라며 그 커다란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나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나중 에 같은 소속사(스타 제이)에서 만난 우리는 당시의 첫 만남을 얘기하며 유 쾌하게 웃은 적이 있다.
되풀이해서 얘기하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은 정말 맞는 얘기다.
유명 모델들도 올라가면 떤다는 앙드레 김 패션쇼였지만 나는 전혀 긴장하 지 않았다.아니 긴장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뭘 알아야지 무서워하거나 긴장 할 것이 아닌가? 무조건 눈에 힘을 주고 무대 위를 왔다 갔다하니까 끝이란 다.나는 속으로 ‘에이,패션쇼도 별 거 아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같은 내 ‘무대포’같은 모습을 주의깊게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 나보다.
바로 지금의 소속사인 스타제이의 정영범 사장(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른다) .나를 발탁해 오늘날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한마디로 은인 같은 존재다.
영범 형은 패션쇼가 끝난 뒤 나를 찾아와 “무대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봤 다”며 한번 만나자고 얘기했다.못 만날 이유가 없던 나는 그러자고 순순히 대답했다.며칠 뒤 영범 형은 나를 만나더니 대뜸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 ”고 제안해 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내가 뭐 좋다고 이런 얘기를 하지?’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형의 얼굴을 보니 왠지 믿음이 갔다.다른 매니저들보다 조금 젊어서 그랬을까….호감을 느낀 나는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형은 내게 “지금부터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당부했다.나도 영범 형에게 “다른 건 모르겠는데요,저는 하기 싫은 것은 때려죽여도 안해요”라고 말했다.이 얘기를 들은 형은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씩 웃기만 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5년여 동안 나와 영범 형은 잘 지내오고 있다.물론 가 끔씩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마다 형이 “어휴,이 꼴통 XX야”라며 한 숨을 내쉬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영범 형의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김도진이란 본명이 그리 촌스럽지는 않으나 좀더 강한 인상을 주려 면 예명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원빈이란 이름을 택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 사극에 주로 등장하는 ‘세자빈’과 머리가 나쁜 것을 뜻하는 속어 ‘골이 빈(?)’이 연상돼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자주 듣다보 니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9-
나름대로 혹독한 연기훈련과 캐릭터 구축작업을 거쳐 97년 드디어 공중파 드라마 데뷔작이 결정됐다.당시나 지금이나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김희 선 류시원 주연의 K2TV 월화미니시리즈 ‘프로포즈’였다.꼼꼼하기로 소문난 연출자 윤석호 PD(현재 K2TV ‘가을동화’의 연출자)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 어가기 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잠시 후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촬영장에 가 보니 웬 개 한 마리가 와 있었다.연출진 은 나에게 “그거 비싼 개니 조심해서 잘 다루고 빨리 친해져라”고 말했다. ‘개키우기’라면 마을에서 왕년에 한가락하던 나 아닌가? 비록 족보를 알 수 없는 개들이어서 그렇지….개는 금세 내 말 한마디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충견이 됐다.
그건 그렇고,주인공인 김희선씨 옆집에 사는 미남청년이 바로 내 배역이었 다.대사는 별로 없었지만 개를 데리고 나온 모습이 브라운관에서 제법 그럴 싸하게 비쳤나 보다.내가 봐도 괜찮았으니까. 흐흐흐.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사방에서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아! 내가 연예인이 되기는 됐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제 ‘스타고백’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왔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 기자들로부터 ‘인터뷰하기 가장 힘든 연예인’이란 평을 듣는다.워낙에 말 주변이 없어서도 그러려니 와 ‘배우는 작품을 통해서만 얘기해야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지론에서 말 을 아끼기 때문이다.실제로 드라마의 녹화 도중 인터뷰를 하면 그날 녹화는 NG의 연속일 정도로 인터뷰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편이다.내공이 붙어 한번 만 쓱 대본을 훑어봐도 머리에 대본이 들어올 때까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자세를 유지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내가 가족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어서 밝힌다.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형은 내 직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시골에서 소박하게 생활해 왠 지 화려하게만 보이는 탤런트란 직업에 대해 아직도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당신들이 탤런트 원빈의 가족으로 알려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에 ‘스타고백’의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나에게 가족들 은 기뻐하기는커녕 이구동성으로 지면에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니까.
올해 들어 출연작인 K2TV주말드라마 ‘꼭지’와 K2TV월화미니시리즈 ‘가을 동화’가 연이어 인기를 얻고 있어 무척 기분이 좋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상 당히 부담스럽다.내가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은데 자꾸만 퍼내기만 하고 담 지를 못해 말라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그럴 때마다 팬들의 성원과 격려가 도움이 된다.
일부 방송 관계자들이 “쟤는 안돼”라고 말할 때도 변함없이 나를 지켜봐 주는 팬들이 고맙기만 하다.우직하게,때로는 몸을 던져가며 연기할 것이다. 복잡하게 머리 쓰는 것은 정말 질색이다.흘러가는대로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지면을 빌려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 다.“고맙습니다.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첫댓글 아 감사합니다,,재밌네요^-^;;ㅋㅋ 또 많은 도움도 됐고,,,,흐흐 ;;
악 ~~ 너무 재밌어요 근데 이걸 진짜 도진님이 쓰신건가요?????
우와 재밌어요 '-'a 많은걸 알게됬음,ㅎㅎ
네. 도진님이 쓰셧죠. 중간에 기자분이 수정하신 부분도 쬐끔있을진모르지만요 ^^
너무 신기해요^^ 이런 자료가 있었다니~ K양 정말 부러워요ㅜㅜ
이거 몇십번을읽었어요 ㅋㅋ
우와 ㅋㅋ 웃겨요 ㅋㅋㅋㅋㅋㅋㅋ모르던부분을많이알게됬어영♥캬캬ㅑㅑ캬ㅑ
어머......너무 재밌게 읽었어요....점점......알면 알수록 빠져드는것 같네요....머리 계속 길러야겟어요 ㅋ
오옹, 나도 머리를 기르고 예쁜청바지 많이 입고다녀야지~~ 너무 재밌어요~~
하기싫은건 때려죽여도 안해요 완전 멋져-ㅋㅋ
ㅎㅎ 이거 우리언니 보여줄려고 찾아다녔는데 .. 나도 머리 기르고 다녀야지~
>_<// 도진군, 넘 좋아용, 헤헤헤,//
꺄악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지도록 읽었네요>_< 오빠가 시골에서 그렇게 자랐을줄이야>_< 어쨋든 감사합니다+_+
원빈오빠한테 저런면이 있다니~ ㅋ 좀 의외이네요~ ㅋㅋ 하지만 넘 멋있어요~ ㅋ 담배 끊으세요 . .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