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문명은 십자군 전쟁으로 집결지 피렌체시에서 집결 성지 예루살렘을 찾고자 전쟁에 소요된 군인과 군수물자를 조달한 피렌체의 엄청난 부를 가져와서 이돈을 모두 예술 과학에 투자한 메디치 가문과 십자군 8찬전쟁의 내용 간략하게
제1차 십자군 : 1096~1099
목표 : 예루살렘 수복 경과 및 결과 : 예루살렘 수복 후 팔레스티나 지방을 5개의 라틴왕국(예루살렘왕국)으로 분할 지배.
제2차 십자군 : 1147~1148
목표 : 다마스쿠스 공략 경과 및 결과 :예루살렘에는 기독교권인 라틴왕국이 있었으나 주변의 이슬람권이 통일되자 위협을 느낀 기독교권의 공격 그러나 많은 병력에도 불구 이슬람권의 거센저항에 실패함.제3차 십자군 : 1189~1192
목표 : 예루살렘 수복 경과 및 결과 : 이슬람권을 최초로 통일한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라틴왕국을 무너뜨리자, 이에 십자군원정이 시작됨. 결국 프랑스와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이 주축이 되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결국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혼자 싸우게 됨. 사자왕 리처드는 강력한 살라딘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현실적인 이유로 예루살렘수복을 포기함.
3차 원정은 개인적으론 가장 유명한 십자군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킹덤오브헤븐' 은 바로 2차와 3차 십자군원정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약간의 픽션을 곁들여 만들어낸 것이죠. 3차십자군 원정은 중세유럽의 기사도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기사들의 모험담.. 같은 이야기가 바로 이 시기에 많이 나타났지요. 로빈훗도 바로 이때의 이야기랍니다..
제4차 십자군 : 1202~1204
목표 : 강력한 이슬람국가인 이집트공략경과 및 결과 :강력한 이슬람권인 이집트를 공략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나 그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베네치아가 헝가리를 침공, 콘스탄티노플까지 점령. 새로운 라틴왕국을 건설함. 결국 목표로 했던 이집트 원정은 시작도 못함
제5차 십자군 : 1218~1221 목표 : 예루살렘 수복 경과 및 결과 : 교황의 주체가 아닌 아크레왕국(옛 예루살렘왕국의 후신)쟝 드 브리엔느가 주축이 되었으나 실패.
제6차 십자군 : 1228~1229
목표 : 예루살렘 수복
경과 및 결과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2세에게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지시했으나 그가 시간을 끌자 교황이 프리드리히2세를 파문. 그 후 프리드리히2세는 이슬람권의 술탄과 협상을 맺어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받아냈으나 파문당한 자가 예루살렘을 통치할 수 없다 하여 교황이 십자군을 일으킴. 결국 프리드리히2세의 제국군에 십자군이 패함으로서 끝남.
제7차 십자군 : 1248~1249
목표 : 예루살렘 수복 경과 및 결과 :신성로마제국이 명목상 통치하던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권의 공격으로 함락하고 이슬람군이 그리스도인을 학살하자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의 주도로 십자군이 조직, 그러나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쟁에 패해 루이9세가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남.
제8차 십자군 : 1270
목표 : 이집트침공과 예루살렘수복 경과 및 결과 : 7차십자군을 일으킨 루이9세가 다시금 십자군을 일으킴. 이번엔 시칠리아 왕인 샤를과 함께 했으나 루이9새는 튀니지에서 병사하고 샤를은 아크레로 가서 이슬람군을 공격.. 그러나 반대로 이슬람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결국 라틴왕국의 최후의 보루인 아크레가 함락, 팔레스티나지역에서 십자군은 모두 없어지고 십자군원정도 끝나게 됨.
십자군 전쟁은 바로 유럽의 르네상스문명으로 모든 분야에서 인류가 선진화 발달을초래한여 엄청난 물질문명 과학 예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르네상스 문명하면 피렌체를 먼저 떠올리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가문을 먼저 떠올린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없었다면, 새로운 예술과 정신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르네상스 문명을 주도한 1천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천재 가 3명이 배출했으니 그 천재 예술가들 과학자 의학자들이 3천년에 1명씩 태어날 천재가 3명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배출
최고의 과학자 의학자 예술가 레오날드 다빈치 공중응 날으는 비행연습도 하신분
천지 창조 미켈란 젤로 작
유명한 예술인 1.레오날드 다빈치 2.미켈란젤로 3.라파엘로 또 전에 단테 등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350여 년으로 끝난다. 15세기 초에 발흥하여 18세기 중엽에 가문의 문을 닫으니, 메디치 가문과 연관하여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르네상스라는 유럽의 위대한 시대정신뿐이다.1) 가문의 근본 출발은 한미하기 그지없었으나 가문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피렌체의 군주 가문,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한 종교 명문가, 프랑스 왕비를 두 명이나 배출한 정치 명문가, 그리고 유럽의 모든 왕실과 사돈의 인연을 맺는 가문으로 등극한다.여러 권의 책으로도 다 풀 수 없을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논쟁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논쟁 그 자체의 주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와 직접 연관이 있는 초기 가문의 수장 두 명만을 설명하기로 한다. 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나라의 아버지(Pater Patriae)’로 불렸던 코시모 데 메디치와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다.
비아 메디치는 비아 플라토니(Via Platoni)로 연결된다. 메디치 가문은 옛 전통의 수호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의 창달자였다. 이를 위해서 신플라톤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사조를 유럽에 소개함으로써 그야말로 문명의 충돌을 야기한다
메디치 장군 동상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