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대해 심오하다거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는 못 느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심오하고 훌륭한 걸작이라고 하시니 감히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내 감상은 그러하다.
사실 상당히 순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살인자에게 아이가 죽임을 당한 어머니가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찾아갔더니 신이 이미 용서한다고 했다더라.
신의 용서라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왜소하게 하는지, 신의 의지라는 것이 인간의 선택을 배제시키고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박탈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것 이상 무엇이 있는가? 몇 줄이면 끝난다.
형상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징도 빈약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경하게 뼈대 그대로 앙상하게
노출한 영화이다.
베르히만감독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제7의 봉인이나 처녀의 샘을 보면
안으로 깊이 숨은 상징과 주제를 볼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영화는 인간의 영혼을 무겁게 누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베르히만의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죄와 용서, 영혼의 심연이 해저처럼 관객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심각하게 주제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아니 관객들은 이런 무거운 주제를
영혼의 오감을 통하여 생각 이전에 느끼게 된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묵묵히 걷다가 인간은 하늘을 우러러 소리친다. 왜 나에게 죄를 짓도록 놔두는가고....
왜 당신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절망한다. 저 높은 하늘과 죄로 향하는 인간의 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자리한다.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괴로와한다.
그러자 마침내 기적이 내려온다. 아버지의 발밑에서 갑자기 맑은 샘이 솟기 시작한다.
하늘과 인간의 길 사이에 있는 넘을 수 없는 깊고 넓은 간격을 건너
신이 그의 영혼 속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절망에 빠졌던 아버지는 그곳에 교회를 짓는다.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의 마지막 장면이다.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게 하는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유명한 장면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게 해 주는 장면이다.
힘있는 걸작들을 보고 밀양을 보자. 자신이 제안한 주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앙상하게 골격만 노출한 영화가
밀양이 아닐까 한다.
영화는 주제들을 느끼게 하고 경험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입으로 이야기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고 파장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밀양을 보고, 신의 의지에 의하여 압살당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는가 묻는다면
전혀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도연이 요란스럽게 오버를 하고 다니는 것 -
전도연이 느끼고 있는 그 절대자의 잔혹함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이입이 되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파장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전도연이 연기 참 잘 하네라든가
여주인공이 짜증난다 같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전도연이 느끼는 절박감을 관객들도 함께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 말이다. 신의 의지 앞에서 자신의 의지가 좌절당하고
죄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것이 정말 절망스럽게 느껴지도록 관객들을 유도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는다.
전도연이야 연기를 눈부시게 했으니 원작소설가와 감독의 책임일 것 같다. 이 영화에 일말의 감정이입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힘이라기보다 온전히 전도연의 힘일 것 같다.
원작소설에서는 절대자인 신에게 반항하기 위하여 그의 질서를 파괴하기 위해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자살을 택하는 어머니를 결말로 하고 있다.
이것은 빈약하나마 아귀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대답이다.
(사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카뮈의 자살에 대한 책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도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기도회에 돌을 던지고 함으로써 신에게 도전하고 신의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신에게 도전하는 방법치고는 좀 그렇다. 그리고 전도연이 괜히 하늘을 노려보는 장면도 좀 웃긴다.
신이 물질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에 있단 말인가?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천진난만하다고나 할까?
사실 이 장면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극장 안에서도 그 장면에서 웃음소리가 간간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르히만감독의 제7의 봉인이나 처녀의 샘을 보면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어떻게 감독이 형상화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보일 수도 없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지 알 수 있다.
SF영화 솔라리스도 결정론과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타로콥스키의 버젼은 심오하고 시적이며, 소더버그감독의 버젼은 명석하고 분명하다.
한 우주비행사가 솔라리스라고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구현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비한 별에 가서
죽은 아내를 만난다. 그런데 정말 죽은 아내는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아내의 추억이 구현된 것이었다.
죽은 아내는 자신이 온전히 우주비행사의 기억의 산물임을 알고 괴로와한다.
"나는 이렇게 생겼고 그것은 당신이 나를 그렇게 기억하기 때문이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당신 아내는 자살을 했기 때문에 당신 기억의 산물인 나는
자살을 하려고 하겠죠. 모든 것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면 나라는 것은 뭐죠? 나는 이런 식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밀양에서 투박하게 나오는 주제가 이렇게 멋들어지고 세련되게 표현된다.
남자는 죽은 아내를 설득하려 한다.
"내가 잘못하여 당신을 죽이게 됐고 나는 그것때문에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왔어요. 이것은 내가 앞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요. 우리에겐 좋든 싫든 이것밖에 없어요."
절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죽은 아내와 그것을 이루려는 남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남편은 둘을 초월한 제3의 길이 가능할 것이라 믿고 그것을 찾으려 한다.
밀양은 모든 면에서 투박하고 순진한 영화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우왕~ 너무 심도있는 대화네용..........두분의 리플을 보고 밀양을 다시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드네요 부럽습니다.
디스테파노님께서 자가당착에 빠지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만은 하겠습니다. 아무리 영화가 주관적인 면에서 다른 감성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석되어져야 하는 상징이 있고 코드가 있죠. 일단 어떤 영화에서 상징이 특정목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 다음 주관적인 해석 그리고 감성이 들어가는 거겠죠. 어떤 영화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위해서 상징을 사용할 때 그것이 상징인지조차 모른다면 그것은 영화를 올바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겠죠.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