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 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 보물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해인총림은 일약 선승들의 참선도량으로 솟아올랐다. 전국에서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가야산이 있었고, 가야산 바위를 닮은 성철이 있었다. 사람들은 성철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성철이 있는 곳에는 ‘적당히’가 없었다. 수좌들은 서릿발처럼 매서운 경책을 무서워하면서도 또 곁에 가고 싶어 했다. 모두 큰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60년대 불교 정화 운동은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다. 겉으로는 비구 사찰이 늘어 가시적인 성과를 냈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있었다. 종단의 분쟁은 무엇보다 자비 문중의 청정 수행 풍토를 앗아갔다. 승려들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납자들은 방황했다. 그러자 구도에 목마른 자들은 정신적 스승을 찾았고, 자연 해인총림 방장인 성철을 흠모했다.
1967년 겨울의 해인사는 특별했다. 선방 스님들의 정진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거기에 또 하나 한국 불교사에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성철의 백 일 동안의 법문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백일법문’이라 불렀다. 어쩌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던 법회였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일대 법석이 펼쳐졌다. 12월 4일부터 성철의 사자후가 산중에 메아리쳤다. 대중은 그 시간을 기다렸다. 해인사 대적광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선방 수좌, 강원의 학인, 절 살림을 하는 스님들도 모두 모였다. 인근의 다른 사찰에서도 찾아오고, 암자에서 정진하던 선객들까지 모여들었다.
성철은 먼저 자신의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님을 알고 들어야 한다’라고 했다.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문의 골수는 무엇인가. 선은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의 세계이다. 문자와 말은 깨달음의 방해물이었다. 그런데 조사선의 정맥을 이어받았다는 성철이 정작 지름길이 아닌 우회로를 선택했다. 교학과 언어의 길을 선택했다. 상근기를 지닌 자들을 경책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함에도 중생과 함께 느리게 가고자 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론과 언설을 동원하였는가. 바로 한국불교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부처님 법을 잃어버린 한국불교는 깨달음보다 부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미 부처님 법대로 살아봤으니, 그것이 왜 부처님의 혜명을 잇는 것인지 설명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성철의 법문은 대중보다는 승려들을 겨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불교사에 거의 유례가 없는 백 일 동안의 법문은 초기불교, 중관, 유식, 열반, 천태, 화엄, 선종 사상을 망라하고 있다. 백일에 걸친 장광설은 불교사 전반을 섭렵하여 불교사상의 핵심을 뽑아내고 있다. 어쩌면 당시 한국불교를 무지에서 깨우기 위해서는 말이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성철 스님은 ‘무식’을 자랑하던 시대에 백일법문으로 법을 밝히셨다. 무식을 타파했다. 대단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스님들 간에 논리 경쟁도 촉발시키고, 선에 대한 참된 의식도 고취시켰다.” (적명 스님)
이론과 사상의 실체를 정확히 분석하고 이를 다시 통합해서 대중에게 설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지식 묶음이나 나열이 아니었다. 성철의 법문에는 수행의 체험과 깨달음의 경지가 녹아 있다. 이론과 함께 실참을 설파했다. 그래서 건조하지 않다. 또 축축하지도 않다.
불교는 경전이 무수히 많았다. 그렇기에 팔만대장경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 회교는 코란이면 되는데 불교는 경전이 복잡하고 어려워 접근하기 불편해했다. 성철은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승가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불교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리기로 했다.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또 부처란 인도말로 붇다(Buddha)이고 이는 ‘깨친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불교는 근본이 깨달음에 있었다. 따라서 부처의 가르침[불교]이란 깨치는 길,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성철은 절집 식구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고 왜 우리가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고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 덕성이 있건만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부처님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말씀은 인류 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 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같이 명백하게 누구든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에 머물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성철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우리 마음에 먼지가 잔뜩 끼어있어 마음의 먼지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참선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일렀다.
“언어 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수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전 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라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 것입니까.”
성철은 언어 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했다. 화두를 붙들고 의심에 의심하여 마침내 활연히 깨치라고 일렀다.
성철은 문자와 말로 법문을 하면서도 곧바로 말과 문자를 멀리하라 일렀다. 정작 마음을 놔두고 문자를 더듬거리지 말라 했다. 양명학파인 왕양명의 말을 빌어 ‘자기 집 보화를 버리고 밥그릇 들고 거지 노릇’을 하지 말라 했다.
“누구든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 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 보물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그렇다면 해인총림을 무겁게 지키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왜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곁에 수많은 경전은 왜 있는가. 성철이 이렇게 비유했다.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좋은 금강산이 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 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부처님은 언어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했다. 그래서 누구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을 따라 허공에 떠있는 달을 봐야 한다. 그런데 범부들은 손가락 끝만을 쳐다보며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팔만대장경은 곧 손가락질이니 그 손가락을 물고 빨아봐야 달은 볼 수 없음이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 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언어 문자를 기억하는 능력이 출중하여 좋은 법문을 달달 외운다 해도 그것은 안내문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어 문자란 처방전이다. 거기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는 것이지 처방전만 열심히 외어보았자 병은 낫지 않는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필 발라 굴[七葉窟]에서 부처님의 생전 법문을 수집할 때였다. 그 자리엔 아난이 당연히 끼어있었다. 아난은 총명하여 법문 수집에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난은 부처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난은 마음을 닦지 못했다.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가섭존자가 이를 알아보고 아난을 굴 밖으로 내쳤다.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 같이 마른 지혜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아난이 울면서 용서를 빌고 대중이 반대했어도 가섭은 아난을 쫓아냈다. 그 후 쫓겨난 아난이 법회를 여니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난은 다시 속세의 재미와 아만에 빠져 세월만 까먹었다. 그때 부처님 제자 발기(跋耆)비구가 타일렀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 마음은 열반에 들어 / 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 / 말 많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난이 술 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심히 선정을 닦아 마음을 깨쳤고 마침내 가섭의 인가를 받아 다시 필발라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경전들을 지었다. 성철은 가섭과 아난의 사실(史實)을 예로 들며 불교의 생명이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0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