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사도행전 5:1-11
제목 : 행전강해(10)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날 복된 날 저희들에게 또 허락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주님과 동행함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기뻐 받으시니 감사합니다.
찬양 가운데 거하신 주님이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듣사오니, 사람의 말이 아닌 목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거짓의 영에 의해 마비된 사회
여러분들이 피노키오를 잘 아시지요.
피노키오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작가 까를로 콜로디가 쓴 동화의 주인공으로 잣나무로 만든 인형입니다.
재미있게도 키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나무로 만든 코가 점점 길어지는 내용이지요.
이 피노키오를 미국의 유명한 디즈니가 만화영화를 만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됐습니다.
볼까요? 피노키오 -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의 장면입니다.
이 피노키오는 제페토라고 하는 목수가 만들었는데,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다 만들어 앉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노키오야, 너는 내가 만들었단다. 너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라게 돼 있어.
네 코가 자라지 않게 하려면, 너는 양심에 따라야 해"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서 아주 유명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바로 저 말입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듣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란다. 네가 양심의 소리를 잘 들어야 되는데
그 소리는 아주 조용하고 작은 소리야. 그러니까 잘 들어야 돼"라고 이야기한 것이지요.
저는 제페토의 이 말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ㅇㅇ 성도야, 너는 내가 만들었다. 네가 바르게 살려면 신앙의 양심대로 살아야 해.
그 양심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란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양심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양심은 없고, 온갖 종류의 거짓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사람들이 거짓말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신의 거짓된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면 죄인 것을 겨우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우깁니다. 아니, 요새는 들켜도 얼마나 뻔뻔한지 몰라요.
심지어는 법정에서 모든 증거에 의해서 거짓과 위선된 행동이 다 드러나서 유죄가 선고됐는데도 오히려 더 큰소리칩니다.
피노키오처럼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져서 표시가 나면, 글쎄 그렇지 않을까요?
2024년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선과 악이 뒤바뀌어 버린 사회가 되고 말았어요.
이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아라. 양심적으로 살아라. 정직하게 성실하게 공부해라'라고 가르칠 수 없게 됐어요.
바르게 살면 성공하지 못하고, 성실하게 정직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조작된 성적과 거짓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과 악이 전도되어 버린 사회에서
오늘 한국 교회와 거룩한 삶을 살도록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며 힘차게 일어서고 있는 초대 교회에도 거짓의 영이 침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유명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성령님이 불같이 임하셨을 때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들과 능력들이 일어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도 했지요.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성도들 사이에 아름다운 교제가 일어나고,
심지어 자기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진 것을 모두가 다 함께 나누는 유무상통의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핍절한 사람이 있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채워주는,
서로의 필요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함께 나누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아름다운 천국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마디로 성령의 공동체였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령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마귀가, 사탄이 그대로 보고 있을 리가 없었지요.
마귀는 이 아름다운 성령 공동체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집어삼킬 자를 두루 다니며 찾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탄이 펼쳐놓은 덫에 초대교회의 한 부부가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 -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삽비라' -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말하자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그들은 재산도 있었고, 신앙도 깊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헌신된 부부였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아니,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보통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단 체면이나 형식이라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헌금한 정도면 믿음이 보통 이상은 넘는 사람들이지요.
우리 가운데 교회를 위해서, 혹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자기 전 재산을 선뜻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30년 전에 본관 건물을 신축할 때에, 그 당시 총장님이셨던 서정훈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당시 건축헌금이 200억이었으니 얼마나 큰 액수였는지... 그래서 모두가 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총장님께서 당신의 집을 건축헌금으로 학교에 그냥 통째로 헌납을 하셨어요.
그리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교직원들도 앞다투어 건축헌금을 하게 되었고,
전국 교회를 향해 건축헌금을 호소하게 돼서 마침내 200억이 넘는 행정 본관 건물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신의 집을 온전히 내어놓은 분은 총장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자기 집을 내어놓는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헌신이 아니지요..
제가 듣기로는, 우리 부평성전 이 놀라운 성전 지을 때, 집을 한 채 두 채 내놓은 분들도 여럿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참 귀한 분들이지요.. 귀한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인해서 지금 이 귀한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행동은 겉치레라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여기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러나"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한글 성경에는 그 단어가 번역이 안 됐지만, 성경 원문에는 4장 37절에서 5장으로 넘어갈 때,
5장 1절 사이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한글 성경은 번역을 안 했어요.
"그러나"라는 말인데, '그러나'라는 접속사예요.
그러나 27절에서 5장 1절로 넘어갈 때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말로 번역을 안 했어요.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로 앞에 기록된 사건과 대조되는 사건이라는 의미가 그 단어 속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요한 단어를 번역을 안 한 거예요. [그러나]
바로 앞의 사건은 뭡니까? 바나바의 헌신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어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나바'는 자기의 소중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행 4: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성경에는 그런 기록은 없지만, 바나바의 이런 행동은 분명히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에게서 칭찬과 또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이 하나같이 다 자기 재산을 팔아서 바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성경을 우리가 쭉 읽어보면,
그들은 필요가 생길 때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자신의 것을 교회에 바친 것이었지,
온 성도들이 모두가 다 자신들이 재산을 팔아서 공동생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의 이런 헌신된 행동은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격려가 되고 또 많은 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것입니다.
그의 귀한 헌신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고, 다른 성도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이런 헌신은 오늘 본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도 분명히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지요. 그 부부도 분명 바나바처럼 자신들의 가진 것을 팔아서 교회에 내어놓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나바의 헌신과 똑같았어요.
그들도 바나바처럼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기 때문이지요.
▣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죄) ("감추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바나바의 헌신과는 내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대해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라고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노스피조' - '감추었다'라는 이 말은, 그냥 숨겼다란 뜻이 아니에요. '남의 것을 착복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자기의 것으로 훔쳤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 '노스피조'라는 똑같은 단어가 디도서 2장 10절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훔치다'라고 정확하게 번역이 돼 있어요. '숨겼다'가 아니에요. 훔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단어 때문에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미 땅을 바치기 전에 교회 앞에서 판 돈을
전부 바치기로 공표를 했든지, 혹은 적어도 약속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크게 칭찬과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서약을 하거나 공표를 했기에, 이들이 재산을 판 돈의 전부를 가져오지 않고 일부를 가져왔을 때에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바쳐진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죄를 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훔치다'라는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런 행동을 성경은 '감추매', 즉 '훔쳤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그들은 판 것의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그랬어요.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갖다 바쳤어요.
그런데 계속되는 3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그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훔친 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짓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보다 심각한 지적은 뭐냐 하면, 그들이 판 것의 일부를 훔친 것도 문제였지만,
그 판 것의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속이려고 했던 부정직의 죄, 거짓의 죄 이게 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으로 성령을 속이려고 했지요.
(3절)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절)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파는지의 여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아요.
안 팔면 어떻습니까? 또 팔면 어떻습니까? 땅을 팔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화를 내시나요?
아니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온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땅이 필요한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판 땅의 값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소유의 일부분을 드리든지, 아니면 절반을 드리든지, 그 이상을 드리든지 그걸 문제를 삼지 않으세요.
(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누가 너에게 땅을 팔라고 강요했느냐?" - 아니라는 거예요.
네 땅이니까, 네가 안 팔면 그대로 너의 것이고, 또 판 후에도 그 값은 너의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판 후에도 '하나님, 제가 이 돈 다 쓰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려도 하나님은 야단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자기 것을 자기가 쓰겠다는데 왜 문제를 삼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린 체하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그 거짓된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것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에 대해선 누구도 말하지 않아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그런 거짓된 마음을 품었느냐?'
▣ 모든 거짓의 근원은 사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행동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거짓된 행동이나 마음이 어디서 오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왜 거짓을 그렇게 싫어하는 줄 아십니까? 거짓은 사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만들었던 수단이 바로 이 거짓말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그랬어요.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탄은 여인에게, 창세기 3장 4절 보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거짓말을 했어요.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지요.
모든 거짓은 사탄적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짓된 행동과 말을 가장 싫어하세요.
예수님은 사탄을 가리켜서 심지어 '거짓의 아비다' 그랬어요. '거짓의 아버지다', '거짓의 뿌리다' 그 말이잖아요.
(요한복음 8:44)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거짓의 뿌리다, 거짓의 근원이다.]
사탄은 이렇게 끊임없이 거짓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사탄의 거짓이 그 마음에 가득 차 넘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절에서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거짓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췄느냐"라고 탄식하며 책망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제 막 성장하는 교회, 이 땅에서 천국 공동체를 이루면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주무기인 거짓의 씨앗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의 밭에 뿌려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사탄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거짓의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럼, 이 모든 책임은 사탄에게 있나?
아니요.. 사탄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사탄은 그 마음의 밭을 보고 씨앗을 뿌린다는 거예요. 사탄은 아무에게나 거짓의 씨앗을 뿌리지 않아요.
도무지 씨알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거짓의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적인 마음
그렇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의 밭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어떤 마음의 밭이었기에...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겉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내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요.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인데, 그들은 그것을 간과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봐줄까'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어요.
진실보다 체면이 더 중요했던 거였지요.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인간적인 체면을 중시하는 형식적인 신앙이다 보니까,
그것은 결국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 위선적인 신앙... 바로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였지요.
체면 위주의 형식적 신앙은 반드시 위선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분을 전체인 양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미 내 몫을 떼어 놓았어요. 하나님께 바친다고 공표해 놓고 내 몫을 먼저 챙겼어요.
일단 체면상 다 바치겠다고 큰소리 쳤어요. 그런데 막상 다 바치려고 보니까 아깝습니다.
'이게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모은 재산인데', 이런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결국 내 몫을 챙겨 놓고는 다 바친 것처럼 위선을 부렸습니다. 문제는 이런 위선적인 마음의 밭이었지요.
그들의 물질을 내어놓으려는 동기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적인 자아를 만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마귀가 놓칠 리가 없었지요.
그래서 사탄은 그들의 마음 속에 거짓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지요.
▣ 우리들의 신앙과 헌신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사건에 비추어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런 위선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래서 결국은 사탄이 뿌려놓은 거짓의 씨앗이 싹트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하지 못한 동기로 헌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 자신들의 헌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외형적인 거짓된 위선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선과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면서 위선적인 신앙의 형태를 보인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혹은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에서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지 몰라요.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더 의식하면서 행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들이다.' 다른 말로 '위선자들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에서 봉헌을 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봉헌을 했느냐 하는 것보다도
우리 봉헌하는 마음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나를 보신다는 말씀이에요.
지난 주일 2부 예배 후에 제가 성도님들하고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권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짧은 메모를 전해 주셨어요.
메모를 보니까, '광고 시간에 꼭 읽어 주세요'라고 위에 크게 적으셨어요.
보여주세요. 저 메모입니다.
"목사님, 답답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성도들이 헌금함 지나갈 때에 한 줄에 6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헌금을 무시하고, 세 사람은 빈 주먹만 넣습니다.
한 성도만 헌금을 했습니다. 없고 아까우면 하지 않으면 될 텐데, 어찌 하나님을 감히 속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를 다 보고 계시는데, 어찌 빈 주먹이 헌금함에 들어갑니까..
저는 ㅇㅇ교구 ㅇㅇ권사입니다."
이 권사님이 잘못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의 지적이 사실이라면, 여러분 봉헌하지 마세요. 봉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재물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봉헌을 요구하고 계시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봉헌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더 이상 율법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그것이 100원이든지 1000원이든지 봉헌의 액수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자원하여 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가 중요하지요.
많든지 적든지 각자의 형편을 따라 정성을 다해서 기쁨으로 드리면 됩니다.
형편이 안되면 드리지 않아도 되는 거죠. 드릴 수 없는데 어떻게 드려요..
봉헌은 절대로 목사나 옆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드린 두 랩돈, 그 당시에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이 두 랩돈을 드린 과부가
그날 헌금한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이 했다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었다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한 거예요.
그러니까 랩 돈을 따지면, 우리나라 돈 화폐 단위로 말하면 1원에 해당하는 거예요.
랩 돈이라는 단위는, 요즘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한 랩 돈은 한 600원 정도 됩니다.
우리 제직들에게 제가 간곡히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마십시오.
봉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를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었는지를 보십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시간과 물질을 내어서 봉사하고 겉으로는 천사 같은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의 동기가 결국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 헌신과 섬김과 봉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원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의 (봉사와 섬김의) 동기가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지배를 받을 때,
바로 그때부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식(위선)하는 자가 될 수 있다."
▣ 나가는 말 :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자
우리의 섬김과 헌신의 동기가 나에게 있다면, 그 섬김은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리고, 그런 우리의 마음 속에 사탄이 스며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예배와 섬김과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설 때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더 의식하고 있는지,
내가 진정 이 일을 하고자 하는 내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늘 돌아보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지 의무감과 책임 때문에 드리는 것이라면, 이 예배보다 더 괴롭고 지루한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그냥 습관이라면, 이것보다 더 무의미한 행동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응답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면, 그 찬양은 소음에 불과합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종류의 섬김과 봉사가 내가 직분을 맡은 자이기에 그저 체면치레용으로 하고 있다면,
주님은 그런 섬김을 슬퍼하시고 받지 않으세요.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모든 헌신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이요,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사탄을 웃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각자의 예배와 기도와 섬김과 헌신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숨어있는 모든 형식적 신앙과 위선적인 섬김과 거짓된 헌신을 보여주신다면,
그 헌신, 그 위선과 거짓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진정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시편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아멘!
이 다윗의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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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늘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거짓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면, 그것들을 성령의 불로 다 태워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형식적인 신앙과 위선적인 행동이 있다면,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이 나라와 민족을 공격하고 있는 저 붉은 용의 세력이 심어놓은 거짓의 씨앗과 분열의 씨앗을
성령의 불로 소멸해 주시고, 이 민족에게도 정직한 영을 [새롭게],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