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월(月)자, 주(柱)자 어른.
함자에 ‘달 月’이 들어간 까닭은 정월 대보름날 태어나셔서이고, ‘기둥 柱’는 집안 돌림자였다. 마을에서 불리는 호명은 어머니 출신 동네 이름을 따라 ‘곡안 아재’.
1929년 1월 15일(음) 경남 고성군 삼덕리 치명 出生.
2019년 1월 14일(음)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에서 향년 91세로 歸天.
세상 떠나신지 4년 여, 살아계실 제 나의 불효가 막급하였다. 감히 당신을 추억한다는 일 자체가 외람되고 송구스러워, 어쩌면 위선 떠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 자락을 돌이켜 본다.
∎향학열이 대단하셨다. 1900년대 초반 가난한 소작농 집안, 그것도 위로 두 형님을 둔 셋째 아들이었기에 제도권 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다. 중고등교육 시절은 해방 전후에다 집안 형편도 어려워서 중도 포기와 복학, 그리고 검정고시를 통해 겨우 졸업장만 손에 쥐신다. 돈을 벌어가며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취업도 해보려고 당신의 20대 초반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그러나 곧 일본 관헌의 단속에 걸려 수용소 생활을 거쳐 도로 송환되신다. 어렵게 동아대학교로 진학을 하셨다. 부산 달동네, 겨울이면 외풍이 심한 판자촌에서 자취를 하셨다. 자고 나면 머리맡의 잉크병이 얼어 터졌다 한다.
한국 전쟁 후 베이비부머 시대와 맞물려 교사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임시교사로 임용되시고 얼마지 않아 정식이 된다. 여타 대부분의 교사는 사범대학 출신이어서, 아버지같은 비사범 출신은 이른바 ‘사범계 마피아’의 따돌림을 많이 당하셨다 한다. 이를테면 코도 닦아 주고 손톱도 깎아 주어야 하는, 이른 바 ‘손이 많이 가는’ 저학년 담임을 주로 배정받았고, 너른 실습지 관리를 책임져 거친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실과 주임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근무 평점도 짜기 이를 데 없었더란다. 그런 가운데 감(監)자, 장(長)자 한 번 달아 보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평점에 가점을 주는 벽지 학교 근무(거제 섬, 고성 회화 분교, 등등 다섯 군데)를 자원하여 주말 부부로 외지를 나돌았으나 결국은 1994년, 평교사로 은퇴를 맞으신다.
∎집안 어르신들을 각별히 대하셨다. 고향 마을을 방문할 때면, 나를 앞세우고 집집이 다니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작은 선물도 잊지 않으셨다.
1997년 어머니 돌아가시고 1998년 내가 거창대학에 임용이 되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마산을 뜨지 못하시겠다며 그곳에서 홀로 아파트 생활을 하셨다. 거창으로 합가하기까지 고민을 오래 하셨다. 그러던 중 거창 오셔서 여생을 농사일로 꾸려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면 가까이 빈 땅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읍 외곽으로 우리 집을 옮겨야 한다. 조망이 좋고 동네 인심도 좋을 곳을 고르다가 여기 대야 문화마을을 찾는다. 드디어 거창으로 몸을 옮기셨다. 2003년, 지금의 대야리에 집이 완공되었다. 그러자 집 주위의 공터를 무려 네 군데(국도 아래, 이장 집터, 전 군수 집터, 교감 집터)를 잡아 농사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마다 배정되는 마을 청소일도 맡아 하셨다. 그 시절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청소를 하시면서 집에 사람이 눈에 띄면 들어가 이런저런 한담도 하시고 죽이 맞으면 술도 한 잔씩 나누셨고 특히 유머 감각이 좋으셨다 한다.
2017년 즈음부터 파킨스병과 황반변성이 심하게 와서 거동할 때 가족의 도움을 받으셨다. 마침 내가 은퇴를 하여 자리보전을 하실 때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무료하실까 하여 종종 아버지 앞에서 장구도 치고 하모니카도 불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불러드렸다. 레퍼토리는 평생 초등 근무를 하신 덕에 잘 아시는 동요와 흘러간 대중가요였다. 아버지도 따라 하셨다. 어느 날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범아, 니 내한테 와 이리 잘해 주노?”
자식에게도 염량과 염치를 차리셨다.
“어허, 아부지, 이렇게 해야 다음에 제 아들도 저한테 잘 해줄 꺼 아입니꺼?”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지금 내 아들이 내게 무척 싹싹하게 군다.
이제 봄날도 가고 인걸도 간 데 없다.
-----------------------------------------------
[가문과 관련된 아버지 소장 서적 목록]
서명 | 구성 | 페이지 | 발행 연도 | 비고 |
『진주정씨족보1』 | 상권 | 47 | 1950년대 후반(추정) | 끈으로 제책 |
하권 | 98 |
『진주정씨족보2』 | 상 | 458 | 1980 | 하드 카버 |
중 | 1160 |
하 | 1138 |
『진주정씨족보3』 | 권1 | 685 | 1998 | 하드 카버 |
권2 | 1297 |
권3 | 1288 |
권4 | 1290 |
『정씨종사보감』 | 상.유적보감 | 470 | 2007 | 하드 카버 |
중.종사보감 | 1160 |
하.종사보감 | 1138 |
『국역 정씨삼충유사』 | 단권 | 413 | 1994 | 하드 카버 |
각주: 1) 35세손(世孫)까지 기록됨. 나의 대는 32세손. 2) 39세손(世孫)까지 기록됨. 3) 鄭氏宗史寶鑑. 신라시대에서 출발한 정나라 정씨의 시조부터, 진주 정씨를 포함한 29지파를 총괄하는 족보. 4) 國譯 鄭氏三忠遺事.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으로 공을 세워 나라로부터 시호까지 받은, 우리 윗대의 정 확, 정 규, 정 섬의 세 형제를 기리는 자료. 치명 마을 입구에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5) 진주정씨/경주정씨/동래정씨만 따로 소개함.
[아버지와 관련하여 다음 카페 ‘차연’과 유튜브에 올린 글 몇 개]
https://cafe.daum.net/cafe.differance/Jtbc/829?svc=cafeapi
https://cafe.daum.net/cafe.differance/Jtbc/822?svc=cafeapi
https://youtu.be/0NjHg0mGo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