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사범님! 이번에 내가 협회장에 출마하려는데 좀 도와줘야겠어요.”
한밤중에 걸려온 뜬금없는 전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더구나 협회장에 출마하겠다니 기가 막혔다. 체육인이랍시고 설치고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영 좋지 않게 보였는데 그예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협회 발전을 위해 일해보고 싶어요. 한 표 찍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슨 일로 오늘은 깍듯하게 존대어까지 쓴다. 오 사범,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적다. 그리고 태권도에 입문한 것도 십여년 늦다. 내가 태권도 협회 사무국장 할 때 유단자가 되어 체육인으로 등록된 자다. 어렵게 승단 심사를 받게 해주고 체육인으로 키워 놓았더니 이제 회장 출마까지 선언한다. 한마디로 말해 가관이다. 오 사범보다 선배들이 많은데 그들을 제치고 회장에 출마하겠다는 것은 선배를 무시하는 것이며 우리 체육인들을 우습게 보는 수작에 가까웠다. 또 있다. 그가 나를 무시하는 처사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언제나 나를 선배님 또는 사부님으로 불렀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시청 중견간부로 재직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예하 사업소의 말단 직원이었다. 그런 관계로 그는 우리 사업소에 알게 모르게 관여할 수 있었고, 그의 입김이 작용하면 변두리 지역이나 한직으로 밀려날 수도 있었다.
“어쩌지요. 나는 이미 박 관장을 밀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난감하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약속을 하지 말걸 그랬네요.”
나는 체육인의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워 내 가슴 속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말해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하니 후회가 되었다. 어차피 찍어주지 않을 거 말이라도 그러마 하고 대답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 직설적인 성격은 고쳐질 줄을 모르니 나도 큰일이다. 오 사범 말고 이번 회장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박 관장은 나와 절친한 사이로 거의 같은 시기에 입문했다. 나이도 비슷해 그와 같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했던 기억이 많다. 그가 회장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장부 일언 중천금이라 했는데 어찌 한 입으로 두말하랴. 우리 체육인에게는 알게 모르게 내려오는 전통과 규칙이 있다. 이번 회장 선거만 해도 그렇다. 회장 선거에 나오려면 그에 따르는 인품과 경력이 있어야 하고, 회장 후보 물망에 올라야 한다. 박 관장은 연륜으로 보나, 공로로 보나 회장감으로 무난했다.
지난번 윤 관장은 회원들이 그렇게 등을 떠밀며 한 번만 회장을 해달라고 사정했어도 한사코 사양했던 인물이다. 본인은 조력자로 남겠다고 해서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한 일도 있다. 이번에 출마한 오 사범은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10여년 선배가 회장 물망에 올라 출마했는데 거기에 도전장을 냈으니 그 패기가 가상한 것인지 아니면 건방진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공부는 지지리 못하면서도 체육에는 소질이 있었다. 소질이라기보다 싸움을 잘했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중학교 때에는 전국소년체육대회에 태권도 선수로 내리 3년을 참가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뛰어난 운동 실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때에 전국 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동메달 딴 게 최고 성적이었다.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시청 산하 사업소에 적을 두고 도 대표선수를 몇 년간 이어갔지만 더 이상 좋은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퇴근 후에는 인근 체육관에서 일을 거들며 후배들의 체력 단련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관장이 특별히 지도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그가 오 후보, 아니 당시에는 오 팀장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국가 공인 5단으로 태권도 3급 심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암기 과목을 공부하는 중이었지만 관장님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내가 심판자격증을 획득할 무렵 오 팀장도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다. 그렇게 내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만 갔다. 관장님은 무슨 일인지 관원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오 팀장에게는 관대했다.
그는 체육관 안에서는 나에게 사범 대접을 했고, 경어를 썼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나 직장에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어지간하면 나에게 아랫사람 취급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또 자신이 체육계에 입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내 이름 석 자는 생략하고 “김 사범의 지도를 받았다”라고만 말했다. 어디 김 씨 성 가진 사범이 한둘이겠는가.
나는 자연스럽게 협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시간이 나면 협회 일도 거들었다. 나중에는 사무국장까지 했고 더 이상은 내가 사양했다. 협회 일이라는 게 잘해야 본전이다. 선수들의 성적 부진도 임원들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오 팀장은 매번 쉽게 승단되었고 나중에는 급기야 사범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후배 양성에 나서는 모양새까지 취했다. 물론 후배 양성에 힘쓴다고는 했지만, 스펙 쌓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극적이었고 그것을 교두보로 퇴직 후 지방의회 진출이 꿈인듯했다.
선거에 앞서 후보자가 수락 연설을 하게 되어있었다. 먼저 오 후보가 단상에 올라 협회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하고 내려가자 박 후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저는 오늘 후보직을 사퇴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온 우리 태권도 협회를 회장 선거 때문에 회원들이 양분 되는 것은 원치 않고, 또 오 후보님이 저보다 더 적임자라는 생각에서 사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학교에 선후배가 있듯이 체육계에도 엄연한 선배가 존재 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오 후보가 사퇴했어야 도리였다는 수군거림이 들려오기도 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박 관장이 오 후보에게 다가가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자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 체육계도 썩었다고 탄식을 거듭하는 몇몇 회원들과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어 쳐다보니 오늘 당선된 오 회장이었다. 멀뚱히 바라보는 내게 다가와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덕분에 회장이 되었다며 고개를 숙인다. 이제 사람이 되었나 싶었다,
지금 모 사업소에 팀장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 곳 소장이 퇴직 선배이며, 자신도 퇴직 후에는 그 곳 소장으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다는 거였다. 원하면 대학교 졸업하고 1년째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 녀석을 취업시켜 주겠단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저는 그런 방법으로 취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체육인의 아들답게 정정당당하게 제 힘으로 취업하겠습니다.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특한 녀석! 그래, 고맙다. 아비는 바르게 살지 못했지만 너는 올바르게 살아가거라. 갑자기 술기운이 확 달아나고 있었다. |
첫댓글 박순철 선생님, 타고난 성격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고지식하고 융통성업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오 사범처럼 자신감 있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죠. 콩트지만 주위에도 이런일이 가끔 일어나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ㅎㅎㅎㅎ
그래요. 세상에는 염불보다는 젯밥에 더 신경쓰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위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어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부산을 떨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될 지 보는 사람이 참 난감하다니까요.
색시같은 박선생님을 볼 때마다 겸손이란 게 뭔지 알게 되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욕심을 버려야만 행복해진다고 하는 데 어디 그게 쉬운일이겠어요.
사람은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선생님, 오늘날의 세태를 잘 그려 주셨네요. 이런일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저는 그 젊은이가 마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정당당하게 도전하는 젊은이에게 정정당당하게 심사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좋은 작품 앞에서 머물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김윤희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릇된 사람보다는 그래도 선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메르스가 전국을 흔드네요.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