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철(性徹) 스님 (退翁堂) 1912∼1993 (상편)
1912년 4월 10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다
1936년 해인사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수계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취임
해인사 백련암 주석
저서 : <禪門正路> <큰 빛 큰 지혜> 등 종정스님의 법어
쉬어가고 또 쉬어가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 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져 떨어지고 대지가
묻혀 버리네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앉으니
머리엔 재 쓰고 얼굴엔 진흙 발랐네.
시끄러운 거리에서 못을 끊고 쇠를 끊으니
날라리 리랄라여
들 늙은이 취해 방초 속에서 춤 추네
방편으로 대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도리어 보배로 단장하면 다시 누구라 할꼬.
여기서 금강정안을 잃어버리면
팔만장경은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
<한동안 침묵한 후>
갑. 을. 병. 정. 무로다.
억!
홀로 높고 높아 비교할 수 없는 사자왕이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깊은 함정에
들어가네.
한번 소리치니 천기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우가 서로 침을 밷고 웃는구나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의 자리 버리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나는 여기에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根機)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 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근기에는 상근기가 있고 중근기가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나는 본분사로써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삼승십이분교 식으로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써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 같은 다른 종교들은 근본이 되는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전체를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습니까?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붇다(Buddha)라고 하는데,
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으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 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이 깨치는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 깨친다는 내용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것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 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말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 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문자에 의지해서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 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써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었다는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 신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 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 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祖師)스님들이 자기 자성,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 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 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다음은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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