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장군의 빛나는 전투 (용문산 전투 파로호 전투)
중공군 1951년 춘계 대공세는 양평군 용문산에서 춘천 파로호 전투서 빛나는 56.25역사상 최고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유엔 한국군 지휘관 :9군단장 윌리엄 모리스 호지 6사단장 장도영
중공군 지휘관 팽덕회 부숭벽
국군 유엔군 중공군 병력 피해
국군 사상자 : 698명
중공군 63군 몰살 사상자 : 8만5천명
중공군의 춘계전투 4~5월 대공세로 사창리 전투 현리 전투 이어 용문산 전투는
첫째 사창리 전투는 1951.4.21일 국군 6사단이 패배하여 유엔군으로 부터 질타 놀림감 받던 국군6사단은밀려드는 중공군에 패하였으나 장병들은 사단을 재편성하고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전장병이 삭발하고 투혼을 불살라 중공군을 격퇴하며 재진격함으로써 위용을 떨쳤다고 한다.
사실 6.25 개전시 춘천지구 전투서 김종오 장군이 나홀로 빛나는 방어전을 펼친 6사단입니다 강원도 인제 현리 전투는 국군 3군단이 3만명이 괴멸된 우리역사상 3대패전사로 알려진 전투입니다 그러나 훗날 돌아온 국군은 70%가 생존해 돌아왔으며 독자로 군에 입영한 우리외삼촌은 지금것 돌아오지 못하고 시체도 못찾았으나 그저께 영동군 충혼탑에 들려 인사하고 왔습니다 저는 외갓집이없어 친구들 방학이면 이모네 외갓 집에 놀러 간다고 할 때 너무도 부러워 해서 방학이면 혼자 놀았습니다 ... 그리고 어릴 때 그 恨을 어찌 다 잊으리오
먼저 국군 6사단이 중공군에 사창리서 패합니다
1951년 4월 22일 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무너져 4월 25일 가평 남서쪽에 6313명만이 집결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채 한달이 되지 못한 5월 18일부터 말일까지 6사단은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받아치며 한국전 최대의 승리인 용문산대첩과 화천 추격전을 펼치게 된다. 중공군은 51년 5월 공세에서 주공은 인제 현리 방향을 조공은 가평 방향을 노리고 있었다. 원래는 6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선동 연설(?) 부분만 쓰려 했으나 용문산 전투의 이해를 돕고자 관련 글에서 간략한 전투의 개황을 추가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한국군의 손실된 주요품목은 2363정의 소화기, 168정의 기관총과 브로우닝 자동소총, 66문의 로켓발사기, 2문의 대전차포, 42문의 박격포, 13문의 야포, 그리고 87대의 차량 등이었다.
미군도 그들의 후퇴로를 전복된 한국군 차량과 다른 방치된 장비가 방해하여 15문의 105밀리 곡사포, 13문의 4.2인치 박격포, 73량의 차량을 잃어버렸고 기타 수백에 이르는 다른 물건-무전기만 242대-들은 그 목록을 길게 할 따름이었다.
호그 장군은 사단의 행동에 대해 장도영 장군을 힐책하는데 완곡한 말을 쓰지 않고 “어떠한 면에서도 불명예스럽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호그는 장 장군을 한국군 지휘관 중에서 우수한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고 - 6사단을 한국군 전 사단의 대표적인 사단으로 생각 - 장도영 장군의 교체를 원치 않았다. 사창리 패전 직후 신임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6사단을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 “하필이면 왜 이런 때 8군사령관이 오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시간에 맞추어 가평 개천에 닦아놓은 비행장으로 나가 밴플리트 장군 일행을 맞이하였다. 사령관의 시간이 촉박하니 사단 상황보고를 비행장에서 할 준비를 하라는 사전연락이 있어서 상황도판으로 사창리 공격개시로부터 오늘의 가평 북방 방어진지까지를 그 자리에서 설명하였다. 그 후 군단을 통하여 오는 연락에 의하면 6사단은 계속 현 전구에서 전투를 감행할 것이며 8군과 육본은 사단이 필요한 모든 인원 장비를 최우선적으로 충당해 줄 것을 밴플리트 장군이 직접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밴플리트는 그가 본 나의 전의에 찬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만하면 잘 싸울 수 있다 생각하였다는 것을 후일 여러 모임에서 자주 이야기했다.
장도영 회고록 <망향> p217
사창리 패전 후 미군 병사들은 우리 사단 마크만 보면 욕을 하고 심지어는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우리 때문에 자기네들까지 패했다며....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
단상에 오른 사단장은 서언도 없이 “너희들은 지금부터 나가 죽어라”한다. 그리고 “사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말라! 나도 너희와 같이 죽겠다!”
훈시는 간단했다.그는 또한 13일부터 19일까지 1주일 동안을 “민족의식 고양기간”으로 설정하여 장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였으며 2연대가 용문에서 출동시에는 직접 훈시하기를 “본 전투의 성패여하(成敗如何)는 각 장병들의 보국일념(保國一念)에만 달려있다.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고 돌입하는 적을 박멸하여 부조(父祖조상)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손만대(兒孫萬代자손만대)의 행복을 찾아 청성(靑星)의 전통을 세우도록 하라”하니 모든 장병들의 미간(眉間)에는 필사무패의 결의가 가득하였다.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1951.4.22~4.28)시 사창리(史倉里) 참패의 불명예를 안은 장도영(張都暎)장군의 블루스타 청성부대는 와신상담하면서 명예회복과 전선 북상을 위한 칼을 갈고 있었다.
용문산(1157고지) 주봉을 동서로 잇는 높이 800미터 연봉을 주저항선으로 하고 당시 장장군이 새로 개발하였다는 사주방어개념을 최대로 활용하여 전초진지를 주진지인양 유인하여 이를 섬멸하고 여세를 몰아 한 맺힌 북한강을 넘어 퇴각하는 대적군을 추격! 또 추격! 일거에 중공군 1개 군(군단) 3개 사단을 거의 궤멸시키고 멀리 화천 파로호(破虜湖)에서 전승의 칼을 씻은 한국전사상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인 대첩이었다.
며칠 후 용문산 기슭의 넓은 연병장에서 사단 장병들에 대한 장도영 사단장의 감명 깊은 독전 훈시가 있었다. 4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다음 요지의 당일 훈시 구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고래(古來)로부터 왜 문약(文弱)하고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고만 있었는가. 2000년을 두고 모두 900여회의 크고 작은 피침굴욕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단 한번 능동적으로 적국 적진 유린은 고사하고 우리를 노략질해가는 기지인 바로 눈앞의 대마도 한번 쳐들어간 역사조차 없다! 주변의 오랑캐들은 우리 민족의 이러한 유약(柔弱)하고 문약한 허점을 알고 우리의 생활 터전을 짓밟아왔다.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이제 며칠 후 우리는 조국과 민족 천년의 원수 오랑캐와 조국의 사활을 건 일대 혈전을 벌일 것이다.이번 싸움에서만은 여러분이나 나 사단장이나 ‘필승의 싸움’ ‘조국을 지키자는 기필코 이기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이번 싸움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고 크게 이겨야 우리기 살고 조국을 구해낼 수 있다.총 한발이라도 적병의 가슴을 향해 정확하게 쏘아야 하며 단 한방이라도 더 많이 퍼부어야 한다. 일만 병사가 단 일발의 소총 사격을 제대로 쏘고 못 쏘고, 잘 쏘고 못 쏘고에 따라 전선이 수백리 북상하기도 하고 역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나는 지난번 사창리 패전 이후 고심 끝에 필승의 새 전술을 개발하였다. 나는 이번에 우리가 크게 이기고 위대한 승리의 선물을 조국에 안기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앞에 도열한 제군들의 불타는 결의와 적개심의 표출로 보아 이번 싸움의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굳게 믿는다. 자! 나아가 싸우자! 그리고 승리의 기쁨을 후방 가족과 이 조국에 바치자!“
참으로 불을 토하는 애국애족의 호소와 열변에 나는 깊은 감명과 함께 새 각오로 연대 지휘부 일원으로 주저항선 연봉을 넘어 용문산 전방 약 10 키로 미터 떨어진 가평군 설악면 통방산(650고지) 밑으로 이동하였다. 멀리 남쪽으로는 용문산 연봉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청평 호수의 일부 수면이 아롱거리는 고지에 연대 OP를 설치하였다.
연대 OP에서 다시 북방 5~6 키로 미터 거리인 화야산(755고지)과 동쪽으로 나산(628고지)을 잇는 3개 무명고지에 예하 3개 대대를 배치하여 사주방어개념에 의거 진지를 편성하고 적의 침공을 기다렸다. 그리고 주저항선인양 적으로 하여금 오판시키기 위한 온갖 징후와 양동작전으로 날을 보내고 밤을 새우기 약 2~3주간, 때로는 불을 피우고, 연기를 올리고, 차량이동을 시키는 등 부산을 떨며 중공군에게 유인작전을 계속했다.51년 5월 중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명의 날, 결전의 날이 왔다. 전방 3개 대대로부터 일제 포격과 함께 "중공군 대부대가 개미떼처럼 공격해 온다"라는 첫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사단장이 역설했던 예견된 사태가 다가온 것이다. "새까맣게 기어올라옵니다"라는 당황하고 비장한 떨리는 당시의 육성 보고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이 때가 봄철 이른아침 05~06시 경으로 기억된다.(51년 5월 18일)
전방 대대는 연대 지시와 사단 훈령대로 최대한의 시간 벌기 지연작전을 펴며 부득이 진지를 포기하고 주저항선이 무너지는 듯 한 기만작전으로 적을 유인하면서 만 하루를 버티다가 다음 날 새벽을 기하여 각본대로 용문산 앞의 연대 방어진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나는 연대 지휘부 및 어느 대대장 일행과 같이 용문산 앞을 향하여 철수 중 어느 부락에 이르러 주먹밥을 입에 넣는 순간 우리를 추격해 온 중공군 선봉부대의 기습사격을 받고 한때 연대 지휘부 요원들이 분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용문산 북방 5킬로 미터)
바로 이 때였다. 은인자중하면서 2~3주간 이 때를 기다리던 사단 주력인 7연대와 19연대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포격과 동시에 주저항선을 뒤로 박차고 나와 노도와 같은 진격을 개시했다. 6.25 개전 이후 우리 장병 일동은 당시의 하늘을 찢는 듯 한 맹렬한 포격과 포성은 처음 보고 듣는 것이었다.
마치 우박 같고 소낙비 같은 포격과 총격은 우리 주저항선으로 오인하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을 박살내고 있었다. 공격개시 하루 반 적은 이미 지쳐 있었고 주저항선을 뚫었다는 자만심에서인지 공세가 둔화되더니 드디어 우리의 열화와 같은 반격에 부딪쳐 퇴각하기 시작했다.이미 승리를 자신한 2개 공격제대(7연대, 19연대)에다 재편성된 2연대까지 합친 전 사단은 공중지원까지 받아가며 파죽지세로 쫓기는 중공군을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적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뒹굴어 있었고 미쳐 후송되지 못한 부상병들은 살려달라고 손을 들고 애원하는 아비규환의 장면이 목격되었다.드디어 다음날 아침 미명을 기한 아군의 북한강 도하작전 성공으로 사기가 충천한 3개 연대는 앞다투어 북배산(867고지) 줄기와 춘천 화천간 국도를 따라 퇴각하는 중공군 대부대를 포착하여 空地 협동작전으로 수천수만의 적병을 사살하고 엄청난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며 적에게 재편성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맹추격을 계속하였다
용문산 전투 - 장도영 6사단장의 독전 훈시
파로호 전투 중공군 시체 항복한 중공군
첫댓글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을 8만명이상을 괴멸 시켰다는것은, 믿기지 않을만큼 대단 합니다.
우리 아군의 희생은 얼마 안되고 ᆢ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전공 입니다.
장도영 장군, 그당시 젊은 나이에 사단장도 되고, 전투도 잘하고 역시 대단한 군인 이었군요.
6,25전쟁 당시의 상황을 너무도 상세히 기술해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