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서, 시인으로서 명성 못지않게 명상수행가로서도 높은 경지를 인정받고 있는 김정빈 선생님의 ‘명상이야기’를 새로이 연재합니다. 유려한 필체, 내공과 깊이가 있는 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부쩍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옥고를 보내주신 김정빈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제현의 관심과 기대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1.향기와 벌나비 이론
지난 며칠간 천안에 있는 위빠싸나(vipassana) 명상 센터 호두마을에서 지냈습니다. 처음 2박 3일은 주말을 이용하여 명상을 배우려는 분들과 함께 보냈고, 두 번째 2박 3일은 제 혼자 명상도 하고 책도 읽고 휴식도 하며 보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미쳐서 〈미디어 붓다〉에 코너를 마련하여 글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명상에 대한 저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과연 명상에 대해 말할 만한 사람일까요?
그럴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나누는 일이야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지 못할 게 없겠지요. 다만 ‘생각’이 문제인데, 그 또한 제 생각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데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하는 마음가짐으로 피력하는 생각이라면 그 또한 큰 문제가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명상을 시작한 것은 1989년 겨울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명상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셈입니다. 그렇긴해도 사실 저의 명상 수준은 아직도 미미합니다. 햇수로는 20년이 되었다고 해도 문제는 질이 아니겠습니까? 그 20년 중 많은 세월 제가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 수행은 충실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다시 명상과의 새로운 인연이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저는 저의 도반인 차명수 선생과 함께 불교 방송국 지하 강당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명상 지도를 하였습니다.
저희의 지도 방식은 좀 유별났습니다. 참가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를 비롯한 일체의 신상 정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참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는 준비된 이름표를 목에 걸고 그 이름표로서 그 날의 이름을 삼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임을 꾸리게 된 데에는 제 나름 생각한 바가 있어서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조직이라는 것이, 그것이 어떤 조직이든 일단 결성이 되면 왜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곤란한 것은 그 문제가 종교 조직에서도 생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가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세속 이상의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속을 초월한(초세속적, 초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적인 온갖 불순함을 떨쳐버린, 우리 동양 사람들이 도(道, Tao)라고 부르는 것이 곧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종교의 실제 모습은 어떤가요?
실제 현장에서의 종교 조직이 반드시 초세속적이지는 않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종교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 현상은 초세속적이기는커녕 세속보다 더 추악한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조금 양보하여 “있습니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제가 목격한 바를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돈을 부정하면서 돈을 챙기는 종교인, 권력을 부정하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인, 여자(남자)를 부정하면서 성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종교인, 자유를 말하면서 부자유를 강제하는 종교인…. 그런 종교인, 그런 종교 지도자, 그런 종교 조직은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런 종교 조직이 더 잘 세상에서 살아 남는다는 점입니다. 아니, 그런 조직이 아니라 그런 조직일수록 더 잘 살아 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런 조직일수록 더 잘 살아 남는 정도가 아니라 더 번창합니다.
그렇지만 살아 남았든 번창했든은 둘째치고 저는 그런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런 조직도 종교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도)는 아닙니다. 그런 조직은 초월의 가면을 쓴 세속 조직일 뿐입니다. 하늘을, 신을, 부처를, 진리를, 평화를, 사랑을, 자비를 상품으로 파는 조직. 그런 조직은 능숙한 경영 기법에 의해 운영되는, 궁극적으로는 사적(私的)인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입니다. 그런 종교 조직은 악(惡), 그중에서도 사악(邪惡)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적 조직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그렇지만 기업(기업가)은 남을 향해 자기들이 사회적 기여를 하기 위해 일을 벌였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남들(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그 문제 때문에 혼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종교 조직은 “우리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당신들이 행복해지는 그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거짓 때문에 제가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양두구육(羊頭狗肉)이지요.
저는 지금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수행되고 있는 어떤 명상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지금 시대는 명상조차도 기업가가 기업을 운영하듯이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경우 다른 것은 고사하고 그 솔직함만은 긍정해 줄만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앞에서 비판한 종교 조직(지도자) 또한 이 명상법 개발자처럼 정직하게 자기가 종교라는 이름의, 마음의 평화라는 이름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거룩한 목표라는 이름의 상품을 파는 기업(기업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것을 알고 그 종교 조직을 찾을 것이고, 이 문제 때문에 ‘후유증’을 앓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한 휴유증은 거짓을 기반으로 출발한 종교 조직이 피할 수 없는 갖가지 잡음을 가리킵니다. 바꿔 말해서 그런 종교 조직은 필연적으로 부패합니다. 겉으로 평화를 말하면서 안에서 서로 다툽니다. 누가 교권을 잡느냐, 누가 돈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느냐, 누가 더 영적으로 높으냐 등등을 놓고 수많은 논쟁과 질투와 시기와 반목과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는 어떻게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종교 조직을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종교 조직을 만들기 위해 생각해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악(불선)은 왜 생기는가, 그 악은 어떻게 선으로 바뀌게 되는가, 선의 극치로서의 구원(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등 종교(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사색과 한 덩어리가 되어 부차적으로 이 문제가 저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도록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제가 얻은 대답이 바로 ‘향기와 벌나비 이론’이었습니다. <계속>
cafe.daum.net/jeongbinhouse
1953년생.
1980년 <현대문학> 수필 추천으로 문단 데뷔.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82년 첫책, 《기쁨으로 빛나는 나무》 출간.
1983년 <계몽사 어린이 문학상> 동시 부분 수상.
1984년 《단(丹)》(1985년 베스트셀러 1위).
이후 《숭어》, 《성자들의 마을》, 《마음을 다스리는 법》, 《봄똥 이야기》,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9가지 원리》, 《피천득,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만화 논어》(김덕호 공저: 중국, 대만, 태국어로 번역, 출판), 《감꽃 마을》,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 《즐거운 수행》 등 재출간한 책을 포함하여 모두 90권의 책을 내었다.
또한 1989년부터 불교의 근본수행법인 위빠싸나 명상(vipassana meditation)을 수행해온 이 작가는, ‘맑은 마음 수행 모임’을 창립, 명상을 지도하는 한편(불교방송, 불교진흥원), 자기 계발을 주제로 하는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 관한 41분짜리 영상 작품을 시나리오, 편집, 연출, 제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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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간적인 면을 살펴보면, 먼저 그의 인류의 스승들을 향한 사랑은 매우 지극하다. 그는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등 인류의 4대 성자에 대하여 각각 몰입과 도취의 시기를 보낸 바 있다.
이같은 그의 성정은 필연적으로 그의 작품에 내면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특성을 띠게 한다. 그러나 1985년 불교에 귀의하여 1002년까지 17년 간의 ‘종교기’를 보낸 다음 그는 세속 정신의 위대함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동안 추구해 오던 영적인 관심을 그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2003년 이후 기존의 영적인 추구를 바탕으로, 그의 표현을 빌리면 ‘거룩한 세속 정신’을, 즉 끈질기고 강력한 의지의 위대한 세속적 성취자(위인들 : 군인, 정치가, 사업가, 예술가, 학자, 탐험가, 세속적인 의미의 스타 등)에 대한 찬탄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요컨대 그는 그때 이후 ‘성(聖, 거룩)’과 ‘속(俗, 세속)’의 조화, 또는 그 둘 간의 통합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성과 속이라는 두 가치에 대해 때로는 어느 한편에서, 때로는 두 길의 조화에 유의하면서 발언한다. 그의 발언은 어떤 경우 직접(비문학) 언어를 통해 ‘진술’되고, 다른 어떤 경우 간접(문학)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책이 나온 이래 현재까지의 6년여 동안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책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이나 최근에 낸 책 《즐거운 수행》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는 문학적인 표현 형식을 이용하여 때로는 시로(《감꽃 마을》), 때로는 소설로 (《아내와의 사랑》), 때로는 수필로 (《청산에 살리라》), 때로는 동화로 (《초록꽃 나무》)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형상화한다.
그는 최근에 한 인터넷 문학지를 통해 1800장에 이르는 방대한 수필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수필은 왜 문학인가?”라는, 한국의 현대 수필 100년사에 걸쳐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수필 시학의 구축’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그는 끈질긴 논리로써 추구하고, 그 결과 참신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미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수필가이자 동화 작가인 그는 이제 평론가, 또는 문학 연구가로서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가, 글로 쓰여지는 모든 형식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글을 쓰는 일이 나의 직업은 아니다. 나의 직업은 삶을 삶답게 사는 것, 적어도 그를 목표삼아 전력을 투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여 나의 직업은 인생이다.”
이같은 생각을 가진 그가 가족, 친지, 벗,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대할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는 금아 피천득의 “여러 사람을 좋아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나의 사랑하는 생활〉)는 글귀를 자주 인용한다. 고전 문장이나 명언명구, 또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기를 즐기는 이 작가가 이 글귀를 자주 인용한다는 것은 그가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에게 비록 다양한 면모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사람,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거나, 적어도 그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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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빈은 《현대문학》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이후 베스트셀러 소설 《단(丹)》을 발표하는 등 모두 53권의 책을 내었다.
그러나 그는 문학가라기보다 구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위대한 정신과 영원한 진리를 탐구한다. 그는 직접적인 언어로써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등 인류의 대스승으로부터 ‘예지의 샘물’을 끌어내기도 하고, 간접적인 문학 언어를 통해 보통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초절(超絶)한 정신’의 본질과 아름다움을 묘파한다.
자칫 고답적인 경향을 띠기 쉬운 그의 이같은 추구는 ‘바로 지금 이 자리’, 그가 ‘2층’이라 부르는 세속 공간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처지를 강력히 대변한다.
그가 제시하는 “가치의 층”에 의하면 ‘1층’은 ‘악의 층’으로서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두 번째 층은 ‘건강한 세속의 층’인데, 이 길에서 우리는 도덕적 · 사회적인 규범을 따르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두 번째 층의 성취만으로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이 층에서 우리가 설령 극상의 성취를 이룬다고 해도 우리의 가슴은 문득 허전해진다. 그 허전함과 허무함은 소유의 증대나 사랑의 쟁취만으로 달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고독은 마지막까지 남는 영원한 질병이다.
그리하여 ‘별’이다. 우리의 두 발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된 ‘사막이라는 이름의 세속’을 걷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눈을 들어 ‘별’을 바라본다. 우리는 순수하고 오롯한 ‘3층으로서의 어떤 경지’를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넘어진다. 우리는 지금 목마르다. 그러나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오아시스는 반드시 있다고, 별에서 결코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부대끼고 쫓기는 일상 속에서도 삶의 진실, 삶의 순수, 삶의 아름다움을 찾는 길이 있다고, 그는 조용조용한 언어로 속삭인다.
첫댓글 올바른 명상은 어떤 수행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지요. 나무 관세음보살
명상이야기 책자 꼭구입해 볼까 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