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사도행전 6:1-7
제목 : 행전강해(12)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날 복된 날 삼위일체주일을 맞이해서
주의 전에 나와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Ad Fontes
'아드 폰테스'라는 말 많이 들으셨지요?
제가 지난 번에도 이 구호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구호는 16세기에 종교 개혁가들이 타락했던 중세 로마 천주교회를 바라보면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의미로 외쳤던 매우 중요한 구호였습니다.
원래 'Ad Fontes'는 "샘의 근원으로 돌아가자"
'아드'는 'ㅇㅇ을 향하여' '폰테스'는 'Fonten' 원천을 이야기하지요. 즉, "본질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는 종교 개혁가들이 추구했던 모든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구호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와 또 초대교회 성도들의 감동적인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그 어떤 문제도 없이 완벽했다 하는 말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도 우리가 똑같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우리가 두 주 전에 본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그런 초대교회 성도들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게 될 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갈등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실들에 대해서 절대로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어떻게 대면하고 해결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도 사도행전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었던 초대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과 성도들의 감동적인 삶을 비롯해서
그들의 부족함조차도 신앙의 교훈 삼아 우리 주안교회와 성도님들이
21세기의 사도행전을 계속해서 써 내려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서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2. 본문의 배경 : 제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예루살렘 교회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여기서 "그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앞에 5장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가 예루살렘교회를 핍박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이것은 나중에 다가올 본격적인 핍박에 대한 전조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전했고,
이에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협박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지요.
(행 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담대하게 외칩니다.
이 일로 사도들은 공회에 잡혀 들어가 채찍질까지 당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음을 기뻐하면서 42절을 보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구세주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부터 시작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의하면 "제자(믿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니까 한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성령강림주일에 하룻밤 사이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지요.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을 때, 5천명의 장정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랬어요.
3천 명, 5천 명, 8천 명 금방 폭발적으로 성장했지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 이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 보면, '헬라파 유대인' 그리고 '히브리파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유대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혹은 전쟁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가리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하지요. '디아스포라' - '흩어지다' 그런 단어입니다.
'디아스포라'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그 당시 국제 통용어(오늘날 영어에 해당하는)인 헬라어를 사용했고,
비록 조국을 떠나 이방 지역에서 살고 있었지만, 유월절이나 오순절과 같은 큰 명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헬라말을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지요.
반면에, 이스라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의 '히브리파 유대인들'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앞서 말한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에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각 나라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을 듣고,
복음을 전해 듣고 주님을 믿게 되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눌러 앉아 살게 되고, 예루살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함께 신앙생활 하게 된 겁니다.
물론, 예루살렘이니까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더 많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1절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 내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가 매일 행하는 구제사역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제외되고,
반면에 구제가 주로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집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원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보면, 주어가 열두 사도입니다.
그러니까 구제의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열두 사도였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의도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던 이 사도들이
본의 아니게 헬라파 과부들의 형편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들을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헬라파 유대인들은 원망은 했지만, 사도들에게 대놓고 원망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원망한다' - '공기모스'라는 헬라말이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원망'한 것이 아니라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다' 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이런 차별적인 처사에 대해서 조용히 항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실수를) 인식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본질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을 따로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가 집사라고 부르는 '디아코너스' - 이 말에서 '디콘'이라는 '집사'라는 말이 왔습니다.
3. 신앙생활의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
이처럼, 교회의 위기와 갈등의 문제에 대처해 나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에 한 가지, 보다 더 핵심적인 무게중심이 있는 메시지를 제가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복해야 될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도들은 교회가 위기와 갈등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자신들이 진정 해야 할 일, 그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마, '아이구, 또 기도와 말씀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또 기도와 말씀이야'가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에요.
[말씀과 기도] - 이것이 바로 교회로 하여금 이 땅에 존재하게 하는 샘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샘의 근원인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는 것, '아드 폰테스'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 개인을 살리고, 교회 공동체를 살리며, 우리 모두가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의하면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봉사)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4절)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그랬어요.
4.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그렇습니다.
[말씀과 기도] - 이 두 가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이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것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신앙생활의 본질은 말씀과 기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말씀과 기도는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세상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는 없습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전에도 이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다 동물처럼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개는 개같이, 호랑이는 호랑이같이, 소는 소처럼, 양은 양처럼, 여우는 여우처럼 지음을 받았어요.
그런데, '사람은 사람처럼'이 아니에요.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처럼 지어진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고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다른 피조물(동물)들처럼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 육체를 위한 육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필요는 바로 생명의 양식,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고 생동력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즉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귀에게 시험 당할 때에,
마태복음 4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유명한 말씀이지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의 기갈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요즘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서 핸드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곳곳에서 말씀의 홍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걸 봐요.
그런데 정작 우리가 들어야 될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홍수가 나면 사방이 온통 물인데, 정작 마실 물은 없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또, 많은 성도님들이 편식을 하고 있어요. 편식이라 함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듣는 거예요.
교인들이 '범사가 잘되고 형통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은 좋아하지만,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거룩한 삶 구별된 삶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는 주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하는 기갈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정말 큰 위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우리 영은 굶어 죽습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생동력 있게 움직이려면, 우리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언제나 충분히 공급돼야 되지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면 죽었던 우리의 영은 다시 살아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역사하시면 심지어 우리의 병든 육체도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임하면 무에서 유가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흑암으로 뒤덮여 있던 우주에 빛이 비추어졌어요.
주님의 말씀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왔어요.
예수님이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달리다 쿰!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죽었던 소녀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에 가라" 말씀하시니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한 순간에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게 말씀의 능력이예요. 할렐루야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과 생명과 삶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저는 지난 17일 금요일 성령 기도회에서, 또 한 번 그런 경험을 했어요.
요즘 제가 팔이 아프다 보니까 밤에 자다가 자주 깹니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몸에 피곤을 느끼고, 몸이 피곤하다 보니까 제 영도 함께 다운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런데, 지난 금요성령집회 때, 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제 영이 살아나고, 힘을 공급 받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말씀이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있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위기나 두려움은 사실 큰 문제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우리의 심령 속에 살아 역사하시면,
우리의 우울증도 공황장애도 우리의 어떤 두려움도 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의 말씀이 그렇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계속 말씀을 듣고, 읽고, 필사하고, 묵상하고, 암송하세요. 그리고 모든 공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그동안 아마도 코로나 이후에 말씀 읽기 듣기 묵상 등을 게을리하는 분들이 다시 있는 것 같습니다.
필사도 하다가 포기하신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하면, 살았고 운동력 있어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다시 한번 도전과 변화와 생명력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5. 영혼의 호흡인 기도
또 한 가지,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기본, 본질은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를 다시 회복해야 됩니다.
제가 일전에 소개했던 『엄마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그 책을 소개했습니다.
『엄마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오순심 권사님이 38년 동안 쓴 일기이자 기도문이지요.
그 권사님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의 삶을 시작할 때,
세상에 그 누구를 만나기 전에 그 무엇을 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 대화하면서 영적인 호흡을 하셔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세상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세상 만물과 상관하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대화했습니다."
오순심 권사님은 그렇게 고백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루의 삶을 기도로 주님과 대화로 시작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날마다 새벽마다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동안 기도해야 되는 줄 아십니까?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려면 반드시 숨을 쉬어야 되지요.
사람이 숨을 정상적으로 쉬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 생존할 수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대개 1분에서 1분 30분 정도는 숨을 멈출 수 있습니다.
좀 더 훈련되면, 해녀들처럼 3분에서 4분까지도 숨을 멈출 수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분 이상 숨을 멈추기 어렵고, 그 이상 숨을 못 쉬면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아도 영적 침체에 빠지거나 죽게 되지만,
기도하지 않아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영이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은 죽습니다.
왜요? -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8세기의 청교도였던 '존 길'이 이런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했어요.
"기도는 거듭난 영혼의 호흡이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운다. 영혼은 거듭나자마자 기도한다."
(18세기 청교도 '존 길')
여러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은 그 아이가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만일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으면, 그 아이는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의사들은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으면, 엉덩이라도 때려서라도 울게 만드는 거예요. 막힌 호흡이 터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우는 게 아니고 호흡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울지 않으면 정말 심각한 것이지요.
기도가~ 바로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예수님 믿고 중생하면, 즉 거듭나고 다시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영혼의 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호흡은 산소를 흡입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우리 육체를 살리는 작용이지요.
기도 역시, 우리의 육신을 살리는 호흡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산소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그분의 생명을 들이마시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이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숨을 들이쉬지 않는 영적 자살 행위와도 같습니다.
또, 우리가 호흡을 하면서 산소를 들이마실 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듯이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악을, 회개를 통해 내뱉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토설하는 과정입니다.
매일같이 새벽마다, 혹은 정한 시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고백을 할 때
우리의 영혼은 맑아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을 채워서 우리는 능력 있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죄악된 것들을 이산화탄소를 내뿜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 가운데 고민하고 있던 다윗처럼 되는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범하고 1년 동안 죄를 고백하지 않았어요.
다윗이 시편 32편 3절 4절 보면,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여름 가뭄에 바싹 마른 열매처럼 되고 말았다'
내 안에 있는 그 더러운 것들, 이산화탄소들, 죄악 된 것들을 뱉어내야 되는데, 그게 안되니까, 고백하지 않으니까,
회개하지 않으니까, 토설치 않으니까, 내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빼야 되는데 빼지 않으니까, 영이 병 드는 것이지요.
목회자로서 제가 성도님들을 볼 때, 기도생활을 하지 않거나 등한시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은 숨을 안 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 답답하고 숨이 차서 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게 되고,
그 영이 병들고 점점 쇠퇴하다가 결국은 영적인 사망에 이르고야 맙니다.
제가 성도님들을 바라볼 때, 영적으로 병든 분들을 간혹 가다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도 겉으로 보아서는 1주일에 한 번만 주일에만 보아서는 다른 성도들과 구분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들도 주일 예배는 잘 참석하니까, 또 교회 직분도 맡아서 봉사도 하니까
교회에서 다른 성도님들과 교제도 나누니까 티가 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이상하게도 예수를 믿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 않고, 오히려 냄새가 나요.
그들의 입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나오거든요. 보면 알 수 있어요.
교회를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목회자를 위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목회자들과 주변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어요.
늘 부정적인 말을 해요.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만, 후유증을 남깁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허영심이 봉사의 동기일 때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깁니다.
왜 그럴까? - 신앙생활의 본질인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기도한다고 해도 정욕과 욕심을 따라 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속에 있는 모든 영적인 쓰레기들(원한, 분노, 용서 못함, 갈등, 미움, 근심, 걱정,
낮은 자존감, 열등감, 죄책감, 죄의식, 우울감 등)의 이산화탄소와 같은 것들을 다 영적인 호흡인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다 내뱉어야 되는데, 기도하지 않으니까 내 속에 그런 영적인 쓰레기가 여전히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러기에 입만 열면 냄새가 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만 했다 하면 교만한 말, 비판적인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런 심령에는 성령의 생기가 들어올 수가 없어요. 영적 쓰레기가 가득하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호흡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온갖 종류의 영적 쓰레기들을 매일같이 통회 자복하고 다 내뱉고
우리의 깨끗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가득가득 들이마셔야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날마다 내 안에(우리 속에)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말씀과 함께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기 위한 생명의 길입니다.
#자마 선교회 김춘근 교수 이야기
미국에 회개와 영적 대각성을 위한 선교회가 있는데, '자마 선교회'라고 하는 선교회입니다.
'자마'는 영어명칭에서 첫글자만 딴 것인데, (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라는 이름입니다.
이 '자마' 선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춘근 교수님이 그의 간증을 『Why me?』라는 책에 소개합니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그가 일하던 대학에서 최우수 교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나가던 교수였는데,
37살 젊은 나이에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악성 간경화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의 진단을 받습니다.
7개월 동안 열심히 치료하고, 또 식이요법도 하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어요.
결국, 그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길 밖에 없구나] 하고는 [응답받기 전에는 산을 내려오지 않으리라] 하는 결심으로
LA 근교에 있는 빅베어(큰 곰)이라는 이름의 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산에 올라가서 처절하게 부르짖고 기도하는데,
"하나님, 왜 하필 나입니까?" - "Why me?"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반항하는 마음도 있고, 그래서 울부짖으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복수가 차서 꽉 찬 풍선 같은 배 때문에 숨 쉬기도 어려운 상황, 물 한 모금 마시기도 힘겨운 상태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문득 그의 머리 속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 네가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가는 것은 모르느냐?"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지난 날들의 그 모든 죄악된 모습들이 이산화탄소와 같은 죄악된 모습들이 보이는데,
그 앞에서 처절하게 처절하게 울면서 회개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다섯 시간, 여섯 시간을 그렇게 울면서 회개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의 말씀을 그에게 주십니다.
(시편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이다" 아멘!
이 말씀은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던 그에게, 자신의 이산화탄소 같은 모든 그 속에 있던
영적인 죄악들을 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았을 때에, 그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시고,
자신을 다시 사용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평안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일이 있은지 2개월 후에 그는 실제로 의학적으로 완전치유가 되었다는 판정을 받습니다.
처절한 회개의 기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다시 회복시켰고
그는 이후로 [자마선교회]를 만들어서 미국의 회개와 영적 대각성을 위해서 지금 온전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교회와 성도의 신앙생활이 건강한가 하는 것은 그 교회의 사역과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얼마나 살아 역사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하게 되고,
오늘 본문 7절에서 결론처럼 증거하듯이,
교회의 적대 세력들이었던 그 당시의 제사장들조차도 십자가의 도에 십자가의 복음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긴 것과 같은"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의 각자의 삶에도 김춘근 교수가 경험했던 것 같은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그분의 생기를 들이마시므로 능력과 치유와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에게
매일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본, 본질을 회복하시고
항상 우리 생명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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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우리 교회와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의 삶 속에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과 기도가 다시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더 깊은 생명력 있는 관계로 나아가
그가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주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일어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예수의 이름으로" 찬송하겠습니다.
♬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