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23/4/29), 집안 아우 정금식 고성고 교장의 딸래미 결혼식이 진주 동방호텔에서 있었다. 20세기 농경시대에는 못해도 설 추석 때는 만날 수 있었던 일가친척들이었지만 4차 산업혁명, 디지털 노마드의 이 세기에 들어서서는 혈족 개념도 약해지고 이런 집안 행사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형 아우들, 종수씨, 누나 여동생들, 이때 아니면 언제 볼까, 거기다 벚꽃 피는 봄날을 앞으로 몇 번 볼 수 있을지를 손으로 꼽아보는 나이이니 이런 행사는 더없는 호기일 터.
만장한 하객들, 신랑은 씩씩하고 신부는 눈부셨다. 달이 그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중국 4대 미인 초선 못지않았다. 혼주 정교장이 단상위에서 하객들을 향해 허리 굽히는 감사의 인사는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공손 정중하였다. 장모 될 분의 분홍치마 주름주름이 머금은 훈향과 아우라는 결혼식장의 광채를 더했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여, 천지신명, 일월성신의 은혜와 가피가 그대들이 꾸려갈 한세상 끝 날까지 너희들의 어깨위에 봄날 햇살처럼 다사롭기를!
혼사 끝나고 뒤풀이 자리, 윤원이 형님이 정좌하고 계셨다. 건강하셨고 여전한 화제와 유머로 좌중을 이끌고 있었다. 영관, 우식, 희식, 홍식, 금식, 응식 동생도 반가웠다. 서울 사는 박정욱 형제 부부도 어려운 걸음을 하였다. 다만, 새내 아지매와 정윤준 면장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못내 섭섭하였다.
새내 아재 큰딸 양희 동생도 만났다. 내 기억 속 처음 양희를 보았던 때는 사진 한 컷처럼 선명하다. 1960년대 내가 마산서 중학교를 다닐 때, 모처럼 고향 치명을 다니러 갔다. 의당, 집안 아재 아지매 분들께 인사드리러 동네를 집집이 돌았다. 새내 아재 댁에 들어섰다. 들에 일하러 나가셨는지 인기척이 없어 돌아서려는데 그 순간 정지문이 삐거덕 열리면서 피색이 유난히 뽀오얀 얼굴하나가 뽀시시 내다보는 게 아닌가. (옛날 정지간 안을 생각해보라. 나무를 땔 때 나는 그을음으로 벽채, 천장까지 온통 새까맣던 풍경을. 그러니 극적인 흑백 대비로 ‘유난히 뽀오’얄 수밖에.) 나를 보고 생긋이 웃으며,
“아이고, 오빠 왔서예? 우짜꼬예, 아부지 옴마는 들에 나가싰는데예.”
사실인 즉, 그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나있었기에 고향 마을에 그런 여동생이 자라고 있었는지, 심지어 걔 이름이 양희인지도 몰랐다. 처음 보는 아해가 나를 오빠라 부르는 환대, 맑은 얼굴, 반기는 웃음, 고운 목소리에 감읍하고 황당하여 어버버 거리며 물러나왔었지 아마. 그때 삽작까지 나를 배웅하는 걔 뒤로 보이는 새내 아재 집 초가지붕 위에는 보름달같이 희고 둥실한 박덩이가 서너 덩이 뒹굴고 있었지.
이후 나의 사춘기, 턱수염이 자라고 어설프게 수컷으로 커가며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단편 소설 ‘소나기’를 읽으며, 소설 속의 소년이 나고 소녀가 양희라는, 생뚱맞고 꿈도 야무진 상상도 했거늘, 양희야, 미안해!
집에 와서 족보를 들추니 좋을 良, 성 姬, 1956년 음력 6월 24일 생이다. 일신 강녕하고 가내 평안하기를 축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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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장의 답신]
형님!
처음 치루는 일이라 경황이 없어 환대에 소홀함은 없었는지 걱정됩니다
옛날같으면 신랑은 사모관대하고 신부는 족두리에 연지곤지 찍고 너른 탁자위에 화촉을 밝힌가운데 실한 장닭, 암탁을 다리에 새끼묽어 올리고
집사가 굵은 목소리 울려 신랑 추우~울, 신부 추우~~울 하면 아이들은 호기심에 들떠 마냥 즐거웠지요....
그때 아이중 하나였던 제가 장가들고 아이낳아 그 아이 시집보내고 나니
지금은 좀 마음이 헛헛하던중 형님 글을 읽고는 위안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보잘것없는 행사에 형님께서 장문의 글을 올려셔서 혼주로서 화답의 글을 몆자 적어보았습니다
바쁘실텐데 귀한 걸음해주신 형님과 재회 종재 및 여러 종형제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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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재답신]
인륜지대사를 개혼(開婚)으로 치르느라 피곤할 정 교장을 췌사로 번다하게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화답 문자에 적은, 여실박진한 옛날 혼인날 풍정을 읽으니 또 다시 옛날 기억 한 자락이 떠오르네. 1960년대 초반, 그때 당시 시골 지미 동네 결혼식에도 양풍(洋風)이 들어, 병풍 앞에 마주 선 신랑 신부에게 꽃을 바치는 화동(花童)이 등장했다네. 내가 그 화동 노릇을 두 번 했던 기억이 나네. 한번은 교장 아재 집 마당에서 두순(斗順)이 고모 결혼할 때, 한 번은 나의 화촌 큰아버지 댁 마당에서 덕순이 누나 결혼할 때. (내가 어릴 적에는 한 인물 했던가봐)
덕순이 누님 혼인 때 생각나는 몇 가지 기억.
* 자네도 알랑가? 옛말에 ‘문디이 잔치’란 게 있었지. 먹을 것이 귀했고 떠돌이 부랑자, 걸인, 상이용사, 장애자, 한센병 환자가 흔했던 시절, 혼인/회갑/장례 등의 행사에는 반드시 그분들도 산지사방에서 무리지어 모여들었지. 그러면 집안까지 들이지는 못하고 집 바깥 공터에 멍석 깔고 상을 차려 술과 음식을 대접하던 그 자리를 ‘문디이 잔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님 잔칫날도 대문 바깥, 벼를 베어내고 그루터기만 남은 논바닥에 덕석을 깔아 그분들을 접대하였더라.
* 밤이 이슥해지면서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익었지. 마당 가운데 모닥불을 피워 올리고 펄렁이고 일렁이는 불빛 속에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내 아버지, 교장 아재, 이성 아재, 새내 아재의 흥겹고 들뜬 얼굴이 비치고 춤사위가 나풀나풀 흔들리고 마당가를 둘러싼 할매, 아지매들의 추임새, 객담 소리도 질펀하고, 나는 밤잠도 잊고 그 무리 속에 끼어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용을 쓰고 바라보고, 작은 아버지(정 永 자, 柱 자)는 양팔을 벌려 어깨 뒤로 지게 작대기에 묶어 십자가에 못 박힌 청년 예수 모양으로, 그 어려운 자세로 모닥불 둘레를 휘돌면서 공중을 차오르는 제비돌기를 하더라고. 그때 그분들의 나이가 한창 팔팔한 40대였으니 가능한 일.
* 그 귀한 용어가 생각이 안 난다. (가방佳房?) 왜, 잔치가 있으면 그 잔칫집 아래채쯤에 잔치에 쓰이는 모든 음식을 쟁여놓는 고방이 있고 방마다, 자리마다 음식 요청이 들어오면 음식을 분배해주는 그 고방지기가 있었지. (그 고방지기도 따로 부르는 용어가 있었다) 그 고방지기하시는 분의 재량에 따라 요청이 거절당하기도 하고 그분 마음 내키면 덤까지 챙겨 갈 수가 있었다. 내 어린 마음에 그분의 권력이 엄청 막강해 보였다.
* 자, 첫날밤이다. 대문 옆 아래채에 신방을 차렸는데 신방 불빛이 꺼지기 전 동네 사람들이 문종이를 바른 신방 출입문, 창문 앞에 모여들어 침을 손가락에 발라 문종이에 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삼강오륜이 지엄했던 때라 그 장난질에는 남정네가 끼어들 수가 없었고 남녀 간의 곡절을 알 만큼 아는 나이든 여인네들이 주로 했던 놀이였다.
* 총각이 장가들어 처음 처갓집에 신행을 가면 치르는 통과의례를 유식자들은 동상례(東床禮)라고 하지? 신부 동네의 동년배 남자들이 모여 신랑의 발을 무명 띠로 묶어 들보에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마른 명태로 패면서 장모님이 차려내는 주안상을 더욱 걸판지게 만드는 풍습? 또는 신랑이란 작자가 우리 집안 귀하고 곱게 자란 처녀를 훔쳐간 도둑놈이니 각시를 제대로 건사를 못하면 무시로 아작을 내겠다는 경계와 위협의 뜻도 있었겠지. 동상례를 치르는 그날 밤, 덕순이 누나 집 작은 방에 마을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앉아 놀고 있었다. (물론 나도 한자리) 술도 음식도 이바구도 노래도 웃음도 넉넉하고 넌출졌다. 그런데 노는 중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날의 주인공, 덕순이 누나의 신랑, 마암면 허씨 집안 허종수 자형이 기대앉은 흙벽 틈새, 자형 바로 옆구리 지점에다 시퍼런 식칼이 방 바깥으로부터 푸욱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기겁을 할 밖에! 사태는 장난을 저지른 남정네들이 낄낄대며 방으로 들어오면서 정리가 되었다. 그때 그런 위태한 장난을 기획한 집안 형님들의 못 말리는 장난기, 벽 바깥에서 자형이 앉은 옆구리 지점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칼을 디민 형님들의 치밀함이 지금 생각해도 신통방통하다.
자, 세실이 너무 길었다. 다시 한 번 혼사를 축하한다. 자네 집사람에게도 내 인사를 전해다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