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고수면에는 단풍이 아름답고 고적하기로 소문난 문수사가 있는데, 고창하면 생각나는 곳이 선운산일 것이다.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떠올리라면 대다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테지만 나는 상사화를 떠올린다. 9월 경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 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꽃이 상사화다. 잎이 지고 난 다음에 피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꽃은 영원히 잎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상사화라고 부른다.
선운사 동백숲 © 유철상고창 하면 생각나는 곳이 선운산일 것이다.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떠올리라면 대다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린다.
또 하나 들라 하면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 복분자는 딸기의 일종으로 ‘고무때왈’이라고도 불리는 검은 딸기인데 그 술을 마시면 요강 단지가 뒤집어질 정도로 오줌발이 세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은 딸기가 뒤집어진 요강 단지와 흡사해 복분자라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운산 입구에서 하룻밤을 머물 때 복분자술과 함께 지새우기가 일쑤다. 풍천장어 역시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먹지 않고 가면 서운한 필수 음식이 되었다.
또한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선운산곡(禪雲山曲)」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진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에 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선운산곡」이다. 오늘날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 있다.
선운사 대웅전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운사 대웅전은 배롱나무와 동백숲이 둘러싸고 있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의 창건 설화는 이렇다.
죽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내려 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흘러가곤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나갔더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안에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 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게 하리라’라고 쓰인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백 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 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다.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報恩鹽)이라는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광복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 있는 9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광해군 6년(1614) 원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의 네 개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열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