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숭실대 이용주 교수님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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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 출렁이는 삶을 건너
손호현, 『악의 이유들: 기독교 신정론』(동연, 2023)
흔히들 악을 가리켜 ‘무신론의 토대’라고 한다. 일상을 단번에 뒤흔드는 악의 현실을 맞닥뜨릴 때, 전능하고 선한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믿음은 그 힘을 상실하고 만다.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의심의 문장들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정치적 누명으로 투옥되었던 철학자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Boethius)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악의 현실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늘 부조화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악이라는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두 현실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이 작업에 대해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는 처음으로 ‘신정론’(theodicy)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악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이유를 해명함으로써 신의 정의로움을 드러내려는 이성적 작업이 곧 신정론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악의 현실을 목도한 이후 신정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신정론은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신을 정당화하려다 신을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무심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고, 오히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짐을 지워버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신정론의 역사에서 그리고 교회 현장에서 이런 일은 자주 발생했다. 그만큼 신과 악을 동시에 사유하는 일은 힘겹고, 또 그만큼 취약하다. 신과 악을 동시에 조화롭게 연결하여 해명하는 이론을 발견해내는 일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손호현 교수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탐구해왔다. 홀로 떠난 긴 여정을 정리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여러 대답을 모아 보따리를 풀어내었는데, 『악의 이유들: 기독교 신정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논의되어 온 17개(제2장-제18장) 유형의 신정론 이론을 무려 700여 쪽에 걸쳐 총망라해서 다루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 신정론(제7장)과 존 힉의 영혼 만들기 신정론이 포함된 교육적 신정론(제8장)처럼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것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무신론(제3장)과 다신론(제4장), 분열인격론(제6장)과 기술적 신정론(제18장) 등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예술과 과학기술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신정론 이론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이 책을 펼치고 평소 생각과 관련 있어 보이는 챕터를 읽으면 된다. 그러면 독자들은 홀로 걸어온 줄 알았던 길이 사실은 이미 여러 사람의 앞선 발걸음에 의해 다져진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모호했던 자기만의 생각이 정확히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방대함으로 인해 스스로 취약해져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려 17종류나 되는 이론들이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질문에 17개의 답이라니?! 그것들 모두가 도대체 어떻게 답일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중 몇 개는 오답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말한다. ‘이론’이란 우리가 그것을 타고 “삶의 바다를 건너보려는 뗏목”이라고.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심연 위를 항해하면서 살아간다. 시커먼 악에 의해 요동치는 삶의 바다 위를 위태롭게 건너고 있는 이들에게 저자는 앞서 건너갔던 이들이 사용했던 뗏목의 노를 건네준다. 다시 상기하자면 이 책은 ‘악의 이유들’을 그 제목으로 한다. 본래 ‘이유’를 뜻하는 라틴어 ‘ratio’(라티오)는 합리적으로 파악된 이유 혹은 설명 체계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악의 ‘이유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본래 악에 대한 하나의 매끈하고 완결된 이론적 해명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이론들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ratio’는 ‘방법’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다양한 뗏목을 제시함으로써 악에 의해 출렁이는 삶의 바다를 신에 잇대어 건너는 여러 방법과 길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항해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답을 갖고 싶어 한다. 저자 본인의 입장이 무엇인지부터 알고 싶어 안달이 난 독자에게는 “미학적 신정론 혹은 예술의 신정론”(제17장)을 먼저 펼쳐 보기를 권한다. 이 챕터는 가히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헤겔, 화이트헤드, 반 고흐, 윤동주 등의 시선을 통해 악에 의해 얼룩진 이 세상의 추함이 최종적인 현실이 아니며, 오히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를 사용하여 그 전체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있는 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과 언어로는 오롯이 파악되지 않을 그 아름다움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질 악의 극복을 희망한다. “아름다움이 악을 극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의 대조를 통해 빛을 그리는 이들, 추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은 동시에 사제이기도 하다. 예술은 마침내 아름다움으로 악을 극복할 신의 깊이를 묘사하는 “유비의 거울”이다. 이를 발화함으로써 저자는 자신이 떠났던 여정의 가장 먼 곳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언어’이다.
애당초 저자는 신과 악의 공존에 대한 하나의 완결된 이론 체계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 이 사실이 드러난다. 신은 본래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무한자와 유한자,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 혹은 그것들로 구성된 체계 ‘너머’에 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신정론에 관한 모든 언어는 결국 이 경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고, 언어로 포괄할 수 없는 그분이 계신 ‘침묵의 땅’을 단지 조용히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면 열일곱 개나 되는 뗏목은 결국에는 목적지에 닿지 못한 채 돌아와야만 하는 것 아닐까?
이 모든 긴 여정을 통과한 후 저자는 우리를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히려 한층 더 깊어진 질문을 가지고 다시 그곳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긴 이야기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왜 신과 악이 공존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정론은 우리의 인간성과 초월적 신비를 지키는” 작업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여 신을 우리 손으로 만든 우상에 가두어버리는 데 익숙하다. 반면 도무지 조화되지 않을 것 같은 신과 악의 공존 가능성을 더듬어가는 일은 “우상 속으로 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킨다.” 이성과 체계, 언어의 경계 너머에 있는 신의 초월성 앞에 침묵할 때 비로소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 이미 그의 초월적 신비의 깊이 속에 안겨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제 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 언어와 침묵의 변증법을 통해 저자는 우리의 시선을 타인에게로 돌릴 것을 제안한다. 악의 이유는 여전히 명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묻고 말하고 침묵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이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악의 이유가 무엇인지 물음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고통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침묵하려는 실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창조가 악을 패배”시킬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극복하고 마침내 선을 이루실 것이다. “어두운 과정과 아름다운 결말을 집필해 나가고 있는” 하나님의 행동을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로써 저자는 오래전 보에티우스가 했던 또 다른 말을 자기의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겠는가?”
이용주|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학박사(Dr.Theol.) 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및 기독교학대학원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