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People-김사경, 아름다운 덤터기
‘남에게 넘겨씌우거나 넘겨 맡는 큰 걱정거리나 허물 따위’
우리말 ‘덤터기’에 대한 국어사전 풀이가 그렇다.
언뜻 어감이 안 좋다.
사람들은 그런 덤터기 쓰기를 싫어한다.
감당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안 그런다.
쓴다.
그렇다고 해서 매양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주저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당장 코앞에 닥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긴 해야 하는데, 딱히 나설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덤터기를 써줘야 하는 법이다.
해법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럴 경우에 내가 나서곤 했다.
그래야 인간관계가 순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에서도 그랬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랬다.
먼저 공적인 영역의 한 예다.
뇌물을 받은 혐의로 어느 부서 공무원을 수사하던 중에 그 공무원이 감시 소홀한 틈을 타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정작 그 공무원을 수사하던 담당 수사관은 나 몰라라 하고, 옆방에서 다른 공무원을 수사하던 중에 문득 관심이 일어 그 방을 들렀다가 담당 수사관이 없는 빈 방에서 혼자 자살을 시도하는 그 공무원을 우연히 발견해서 응급조치로 살아날 수 있게끔 한 내가, 마치 그 사건의 담당자였던 것처럼 덤터기 써준 것이 그랬다.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내 대검찰청중앙수사부 수사관 시절의 일로, 지금껏 그 기억이 생생하다.
사적인 영역의 한 예로는, 주로 밥값 덤터기 써준 것이 그랬다.
집안이 모여도, 친구들과 어울려도, 검찰수사관으로서 동료나 후배들과 밥자리를 같이 해도, 웬만하면 내가 나서서 그 비용을 선뜻 감당하고는 했었다.
밥값 계산해야 하는 막판에 화장실을 가거나, 신발 끈을 오래 묶거나 해서, 그 순간을 기피하는 비겁한 처신을 하지 않았다.
늘 앞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어, 어쩌다 밥값 계산을 서로 하겠다고 나설 때도, 가급적이면 상대에게 밀리지 않으려했다.
그렇다고 끝까지 안 밀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은근슬쩍 밀려줘서 그로 하여금 밥값 계산을 하게도 했었다.
아름다운 덤터기의 명분을 만들어주는 의미에서 그랬다.
내 그렇게 주위의 자자한 칭송을 받고는 했었다.
인생사 세상사에 있어서 내 그런 처신은, 사랑하는 내 두 아들에게도 그대로 전수시켰다.
“핀셋으로 집듯 사람을 골라서 어울리면 안 된다. 밥 한 그릇을 사도 주위 친구 두루 모아서 사는 것이 좋고, 이왕 사는 김에 상대가 배부르다 할 정도로 사는 것이 빛나는 법이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내 그렇게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강조했었다.
그러면서 한 달 용돈으로 그때로는 좀 큰돈이다 싶은 5만원을 줬었고, 그것으로 부족하다 하면, 필요한 만큼 더 보태주고는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이가 내게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의문이었다.
“아버지, 제가 아무리 밥을 사도 그냥 얻어먹기만 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 친구에게도 계속 밥을 사줘야 해요?”
내 그때 맏이에게 딱 한 마디로 답을 정리했었다.
내 그 답에 맏이는 고개를 끄덕거려 수긍했었다.
곧 이 답이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냥 얻어먹는 거야. 그 이유를 따져 묻지 마! 그냥 쭉 사! 그걸 아름다운 덤터기라고 하는 거야.”
바로 엊그제인 2021년 4월 5일 월요일의 일이다.
아내가 지난날 목동에서 살 때의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했다고 해서, 나도 모처럼 그 아내의 친구들을 볼 요량으로 오후 7시쯤에 강서구 등촌동의 낙지 전문인 ‘통 큰 낙지’집으로 갔다.
“오늘은 내가 쏩니다. 이 동네 싫다하고 멀리 떠난 우리 마누라를 그동안 버리지 않고 챙겨주신 친구들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날 밥값을 내가 덤터기 쓰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을 했다.
돈 자랑하는 덤터기가 아니라, 아내를 챙겨주는 친구들의 그 마음씀씀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의 덤터기임을 밝힌 것이었다.
그런 명분이어야 그 친구들로부터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덤의 소득이었다.
아내의 친구들도 내 그 제안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걸로 주세요. 우리 아버지 살아생전 말씀이, 잘 모르면 돈을 많이 주라고 하셨거든요.”
내 그렇게 그 집 주인에게 메뉴 주문을 했다.
그리고 얼마 뒤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저녁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 앞자리에 있던 여인이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국장님! 저 모르시겠어요? 사경이.”
처음에는 누군가 했는데, 가까이 다가와 그 얼굴이 또렷해지면서, 그 여인이 누군지 확연히 알게 된 터였다.
16년 전으로 거슬러, 내가 검찰수사관으로 아직 검찰에 몸담고 있을 때 같은 청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던 김사경씨였다.
놀라운 만남이었다.
퇴직한 이후로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으니, 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경씨는 내게만 인사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일행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나와의 인연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했다.
이랬다.
“우리 국장님은 참 인간적이셨어요. 윗분들도 잘 모시고 동료 후배들에게는 참 편하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인생의 귀감이 되는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어요. 밥은 또 얼마나 많이 사셨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국장님과 함께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어요.”
참으로 고마운 칭찬의 말이었다.
더군다나 아내와 아내 친구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그 말을 들었으니, 내 어깨가 으쓱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경씨는 그 끝에 한 마디 더 보탰다.
그 한마디는 나를 놀라게 했고, 아내와 아내 친구들까지 놀라게 했다.
그리고 또 올림픽대로를 따라 서초동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잠시 두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야 했다.
아름다운 덤터기를 자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곧 이 한마디였다.
“오는 이 자리 밥값은 제가 전부 감당하겠습니다. 우리 국장님이 지난날 제게 베풀어주신 마음씀씀이에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